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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마왕은 갱생이 어렵다-62화 (62/197)

#제62화

날이 밝았다. 마침내 프로메스 상단과 이별할 때가 찾아왔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는 수순.

그러나 시큰둥한 칼의 반응에 비해 슈미트와 디아나는 얼굴에는 아쉬운 기색이 남아 있었다.

베게누와 악수를 한 슈미트는 마지막까지 툴툴거렸다.

“잘 가라. 영감탱이.”

“그래, 잘 가마. 언젠가 네가 주저앉을 만큼 커다란 내 저택에 초대할 테니까, 그리 알고.”

베게누는 쓴웃음을 짓다가 이내 디아나를 쳐다봤다.

디아나는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프로메스 상단 때문에 편하게 왔어요. 감사해요.”

예를 차리며 말을 내뱉는 디아나에게 베게누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힘이 들 때면, 꼭 말을 하게나. 저 목석같은 남자는 힘들다고 말을 안 하면 도저히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

“다 들립니다.”

칼이 신경질을 내자, 디아나는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그, 그보다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머잖아 은퇴를 하지 않을까 싶네.”

“사, 상단주님.”

그의 부하들도 듣지 못한 소식인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베게누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 나이를 먹고 처음으로 솔직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네. 갈 곳을 잃은 아이들을 위한 터전을 마련할 걸세.”

“멋진 꿈이에요.”

디아나의 반짝이는 눈에는 베게누에 대한 존경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눈길에 베게누는 씁쓸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동안 쌓았던 업보를 갚을 길은 이것밖에 없으니.”

“그래도 잘 해내실 거라고 생각해요.”

디아나가 웃으면서 응원하자, 베게누는 피식 웃으며 칼에게 손을 내밀었다.

“부디 에밀리의 마음을 이어주게.”

“그렇게 착하진 않아서요. 어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칼은 미간을 좁히다 베게누의 손을 마주 잡았다.

*  *  *

베게누와 헤어진 칼 일행의 앞에는 프로메스 상단이 준비한 거대한 마차가 있었다.

가야 할 길이 먼 만큼 화려함보다는 기능성과 내구성을 신경 쓴 마차였다.

“훌륭하군.”

마차의 상태를 살핀 슈미트는 보기 드물게 칭찬을 남기다가, 갑자기 뚱한 표정을 지었다.

“왜?”

갸릉!

바그로바에게 손가락을 내밀며 장난을 치던 칼은 고개를 들어 슈미트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슈미트는 자신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디아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이야기해봐.”

디아나는 평소와 달리 이 말은 꼭 해야 할 것 같아서, 어렵게 입을 뗐다.

“그, 그게 말이죠. 칼리언트님, 저 마차를 끌 말은 어디에…….”

“당연히 준비돼 있지.”

“어디?”

슈미트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바로 그 순간.

화르르륵.

거뭇한 연기가 갑자기 주변으로 흘러나오더니 쿠라빌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랑하던 뿔은 칼에 의해 절단되어 사라졌지만.

기세는 죽지 않았는지 투레질을 하며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으허허헉!”

자신의 바로 앞에 나타난 쿠라빌을 보며 슈미트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해머, 해머. 내 해머!”

쿠라빌의 강함을 보아 익히 알고 있던 그는 등에 메고 있는 망치를 들었다.

당황한 것은 디아나도 마찬가지였다.

위기를 감지한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공격 마법부터 준비했다.

푸르르르.

쿠라빌은 이 둘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주인인 칼에게 다가왔다.

칼은 마차의 연결 끈을 쿠라빌에게 걸었다. 쿠라빌은 얌전히 칼의 손에 몸을 맡겼다.

“너, 너 설마 이 녀석을 길들인 거냐? 이 사나운 녀석을!”

슈미트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지 입을 쩍 벌렸다.

“딱히 어렵지도 않은 걸로 호들갑은. 타기나 해.”

칼은 직접 마부석에 올라타 고삐를 잡았다.

꿀꺽!

그 모습을 지켜본 슈미트는 불안한 마음이 들어 물었다.

“……너 말 몰아본 적 있냐?”

“타려고만 하면 말이 겁먹고 날뛰더라. 그래서 처음이지만 왠지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다른 건 다 잘해도 승마만큼은 쉽지 않았다. 말과의 교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예민한 동물인 말에게 칼이 내뿜는 기운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로 인해 아카데미 수업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해서일까.

칼은 어울리지 않게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불길한 마음이 든 슈미트는 즉각 말했다.

“그냥 내, 내가 말을 모는 게…….”

콰앙!

그에 쿠라빌이 발굽으로 흙을 걷어차 슈미트를 맞췄다.

“쿨럭, 쿨럭. 이 녀석 주인 닮아서 한 성질 하네. 알았다, 알았어.”

슈미트는 별수 없이 마차에 올라탄 뒤, 디아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마차에 올라탄 디아나는 멀뚱히 슈미트를 바라보았다.

탁탁탁.

뭐가 그리 불안한 건지, 슈미트는 팔다리를 떨고 있었다.

“왜 그렇게 불안해하는 거예요?”

“너 진짜 저 녀석의 속도를 몰라서 하는 말이냐?”

“…….”

슈미트의 말에 디아나의 얼굴을 굳히며 뒤늦게 칼에게 물었다.

“카, 칼리언트님. 괘, 괜찮은 거 맞죠?”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디아나가 걱정하는 부분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싸울 때보다 힘이 약해져서 일반 명마보다 약간 뛰어난 정도야. 걱정하지 마.”

대답을 마친 칼은 박차를 가했고, 쿠라빌은 달리기 시작했다.

히이잉!

두그닥! 두그닥!

“꺄아아아아악!”

“내 이럴 줄 알았어!”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마차가 들썩였다. 안색이 창백해진 디아나는 비명을 내질렀고 슈미트는 절망했다.

*  *  *

방학이 채 한 달이 남지 않았다.

쿠라빌을 잡았으니, 사실상 월반은 확정됐다.

방학이 끝날 때까지 놀 법도 했지만, 칼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브루헤리아에서 벗어나 사흘간 이동한 끝에 한 영지에 다다랐다.

탁, 탁, 탁.

쿠라빌이 끄는 마차는 해바라기가 잔뜩 피어오른 밭을 지나고 있었다.

“엄청 예뻐요. 칼리언트님.”

디아나는 눈을 반짝이며 찬란한 금빛으로 가득한 해바라기밭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넌 성격이 흑마법사랑은 전혀 안 어울리는 거 같다?”

슈미트가 옆에서 툴툴거리자, 디아나는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이래 보여도 갈까마귀 부리의 수장이거든요? 하급 기사까지 상대할 수 있는 4서클 흑마법사라고요.”

“그런 것 치고는 활약한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으윽!”

진심으로 고민하는 슈미트를 보며 디아나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부정하고 싶어도 그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하급 기사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 거냐?”

디아나는 검지를 세우며 슈미트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일반적으로 마나의 숙련도에 따라 나누어져요. 마나를 오러를 쓰기 적합한 마력으로 정제시킨 사람은 보통 ‘성(成)’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마나를 정제시켜 마법을 쓰기 적합한 마력으로 정제한 사람들은 써클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요. 마나를 축적시키는 기관은 단전과 심장이라는 것도 다른 점이고요. 하급 기사는 대략 3성에서 4성급으로 알고 있어요.”

“오호! 이 녀석도 얼마 전에 3성을 이뤘으니, 하급 기사 수준은 된다는 거네.”

“음.”

슈미트의 말에 디아나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좀 어려운 이야기인데, 칼리언트님은 상식에 걸맞지 않은 강함을 가지고 있어서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상급은 아직 무리야.”

그때 들려온 칼의 말에 슈미트는 얼떨떨해했다.

“……너 나이에 비해 말도 안 되게 강한 거 아니냐?”

“부족해.”

마왕 시절의 자신과 비교하기는커녕, 루드거와 같은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는 것도 지금으로서는 답이 보이지 않았다.

“크흠, 어쨌든 너도 꽤나 대단한 녀석이었구나.”

슈미트는 디아나를 다시 봤다.

그 시선을 만끽하며 미소를 짓던 디아나는 이내 칼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칼리언트님. 이곳은 어디인가요?”

“그린데피아. 이실리아의 영토야.”

“이실리아는 섬나라 아닌가요?”

이실리아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에 살았던 디아나는 아직까지 지리가 익숙지 않은지 고개를 갸웃했다.

칼은 길게 이어지는 침묵이 불편했는지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전쟁 때문에 국가 채무를 감당하지 못한 샤텐이 이실리아에게 판 땅이야.”

그린데피아는 한때 샤텐의 땅이었다.

문제는 당시 그린데피아는 기후는 좋지만, 오랜 전쟁으로 인해 흙이 메마르고 땅도 갈라진 황무지였다.

그렇다 보니 이 땅을 누가 사겠냐는 말까지 나왔으나…….

이실리아에서 땅을 구매했다.

샤텐은 자신들이 이득을 보는 장사라 생각하여 승리의 미소를 지었었다.

그러나 이실리아는 불과 12년 만에 척박한 황무지를 천혜의 땅으로 개간하는 데 성공했다.

칼의 설명을 들은 디아나는 믿기지 않는지 놀란 표정으로 다시 해바라기밭을 쳐다보았다.

“고작 12년 만에 황무지가 이런 아름다운 땅으로 변했다는 건가요?”

“영주가 유능하다고 들었어.”

‘에리의 사촌이라고 했었나…… 그러고 보니 애들도 방학 동안 이곳에 있을 거라 했지.’

칼은 미간을 좁히며 악몽의 협곡에서 본 장면을 떠올렸다.

기억 속 새빨간 선혈의 검을 든 남자가 있던 곳이 바로 여기였다.

‘괜찮아.’

한 나라의 공주가 있는 만큼 철저하게 호위를 하고 있을 테니까.

칼이 고민하는 사이 낮잠을 자는 바그로바의 얼굴에 호랑나비가 달라붙었다.

그르르릉.

나비가 거슬렸는지 바그로바는 양발로 얼굴을 비볐다.

“팔자 좋군.”

칼은 그런 바그로바를 보며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그나저나 너 남은 방학 동안 이곳에서 놀 거냐?”

여기에 온 목적이 궁금했는지 슈미트는 칼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니.”

희망 따위 일절도 없는 말에 디아나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모처럼 근사한 땅에 왔는데 놀지도 못하다니…….

“딱히 뭘 시킬 생각은 없으니까, 놀아도 상관없어.”

그동안 고생시킨 게 내심 찔렸던 칼은 드물게 두 사람을 배려해 주었다.

“아, 아니에요.”

생각을 들킨 게 부끄러웠는지, 디아나는 얼굴을 화끈 붉히며 고개를 홱홱 저었다.

“잘됐네. 나도 지금부터 빡세게 작업해야 하니 대장간을 찾아 줄 수 있을까?”

“알아볼게.”

심지를 굳힌 슈미트를 본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린데피아에 도착한 칼은 숙소를 잡는 대신 아예 대장간을 통째로 빌렸다.

조건에 맞는 대장간을 찾을 수 있을까 내심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정보 길드의 소개로 대장간 시설을 갖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넓군.”

오랜만에 대장간에 들어서서 마음이 설렜는지, 이리저리 둘러보던 슈미트는 모루에 쌓인 먼지를 검지로 훑었다.

집의 주인인 만삭의 여인, 헬렌은 민망해하며 입을 열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사용한 적이 없거든요.”

“상관없어.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으니까.”

헬렌은 그런 슈미트를 보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철을 두들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네요.”

“시끄러운 소리가 뭐가 좋다고. 디아나 도와다오. 너의 도움이 절실하다.”

“네? 자, 잠시만요.”

당황한 디아나는 얼떨결에 슈미트의 작업에 손을 거들었다.

의욕이 솟구친 슈미트는 소매를 걷어붙였다. 방해했다가는 으름장을 놓을 것 같아 칼은 자리에 벗어났다.

집주인인 헬렌을 따라가던 그는 슬쩍 그녀를 보며 물었다.

“대장간이 생업이 아니라면, 뭘 하고 사는 거지?”

“포도 농사를 하고 있어요. 한 번 구경 가시지 않겠어요? 지금 남편이랑 귀빈분께서 수확 중이거든요.”

반가운 화제가 나오자 헬렌은 반색했다.

“……한 번 가보지.”

그 시선이 부담됐던 칼은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비옥한 토지에 포도나무가 가지런히 심겨 있었다.

헬렌은 배를 조심히 감싸며 포도밭 사이를 걸었다.

“어? 어?”

그러던 중 그녀가 넝쿨에 옷자락이 걸려 넘어지려고 하자, 칼은 깜짝 놀라며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조심해.”

“고마워요. 호호호, 저도 참 정신이 없네요.”

그녀는 정성스럽게 배를 쓰다듬으며 칼에게 말했다.

“아, 이거 한 번 드셔보시겠어요? 약간 시큼하지만 와인으로 숙성시키면 근사한 맛이 날 거예요.”

그녀는 청포도 한 알을 칼에게 건네주었다.

살짝 한 입을 베어 무니, 시큼하면서 약간의 단맛이 혀에 감돌았다.

‘맛있군.’

뜻밖에 자신의 입맛에 맞았던 칼은 자신을 쫓아온 바그로바에게 청포도를 건네주었다.

“먹어볼래?”

칼의 말에 별 의심 없이 혀로 포도를 핥은 바그로바는……

기에에에엑!

그 시큼한 맛에 깜짝 놀라 방방 뛰며 순식간에 칼을 앞질러 나갔다.

“꺄아아아아악!”

그러다 누군가와 부딪쳤는지 먼발치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칼은 황급히 발을 박차 이동했다.

그곳에는 한 여인이 바그로바와 부딪쳐 넘어져 있었고, 그 옆으로는 광주리 하나가 쏟아져 있었다.

“괜찮나?”

칼은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칼의 손을 잡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괘, 괜찮아요. 그보다 바바가 왜 여기 있지?”

“바바?”

낯익은 호칭에 칼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든 여인, 릴리아나는 휘둥그레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칼 네가 왜 여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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