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
지옥의 입구라 할 수 있는 악몽의 협곡.
그곳을 다스리는 주인이자 망령의 왕인 비드낙.
그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절망에 빠진 베게누를 보며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한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한낮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자를 상대로 비드낙은 망령의 왕이라는 이명에 걸맞지 않게 몸을 떨고 있었다.
‘……이 자는 뭐지?’
오만한 폭군, 그 자체의 모습을 한 인간.
그는 협곡의 입구에 들어서기 전부터 자신의 기척을 눈치채고 눈짓으로 압박을 준 남자였다.
주륵.
상황을 종잡을 수 없는 것은 칼의 아군인 베게누도 마찬가지였다.
‘훌륭한 그릇이라고는 일전에 페트로에게 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그릇이 넓다는 말로는 표현이 부족했다.
지금 칼의 모습은 그야말로…….
“광…….”
“지겹게 들으니까 그만해주지 않겠습니까?”
베게누가 광견이라는 말을 입에 담으려는 걸 사전에 인지한 칼은 베게누를 쏘아봤다.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돌아가. 저 녀석은 인간이 아니야. 몬스터도 아니야! 실체가 없는 망령이야.”
[그 말대로다!!]
베게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밀리의 모습을 허물처럼 벗어던진 비드낙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크기는 대략 7미터.
중년의 모습을 한 그는 등에서는 반투명한 박쥐의 날개를 펼치며, 들개의 것과 같은 어금니를 드러내었다.
비드낙은 이제 두려울 것이 없다는 듯 칼에게 호통을 쳤다.
[다시 한번 소개하지. 내 이름은 비드낙. 이곳 저승의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이자, 망령들을 통솔하는 왕! 그게 나다!]
싸아.
하지만 그 소개에 칼은 겁을 먹지 않고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조무래기 따위가 누구든 관심 없어. 그보다 누가 입을 열라고 했지?”
울컥!
[누가 조무래기라는 거냐!!]
끝까지 자신을 얕잡아 보는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비드낙은 순식간에 검을 뽑아 칼을 베려고 했다.
망령의 왕, 비드낙.
그는 망령이면서도 인간에게 저주를 걸거나 물리적인 피해를 주는 게 가능했기 때문에 망령의 왕이라 불렸다.
반면, 인간은 어떻단 말인가?
인간은 오러나 마법이 아니면 망령에게 타격을 줄 수 없을뿐더러, 비드낙은 오러 유저를 이길 정도로 막강한 망령이었다.
카앙!
하지만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순간 붉은 궤적이 비드낙의 검을 스쳐 지나가더니 비드낙의 검이 증발된 것처럼 사라졌다.
[……이게 무슨?!]
비드낙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선 칼이 오른손으로는 검을 쥐고, 왼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로 걸어오고 있었다.
검신에서는 붉은색 오러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그건?! 쿠라빌을 상대할 때는 분명 그런 힘은…….]
“없었지.”
[?!]
그 한마디에 담긴 뜻은 실로 엄청났다.
그 말인즉슨, 쿠라빌을 상대한 이후로 실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렇게 단시간에 강해지는 것이 가능한 건가?’
비드낙이 눈앞에 있는 소년을 두려워하는 진짜 이유는 상대가 자신의 원초적인 감각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음산한 사기를 내뿜었음에도 굴복하는 대신 오히려 강력한 힘으로 상대를 짓누르는 힘.
서슬 퍼런 심홍색의 눈.
“지니고 있는 힘은 쿠라빌보다 약간 위인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 적의 본질을 꿰뚫어버리는 냉정한 통찰력까지.
[무, 무슨 소리야? 그런 녀석쯤은…].
어느새 비드낙은 뒤로 조금씩 물러나고 있었다.
“닥치라고 했을 텐데. 망령.”
[…….]
경고가 거듭되자, 불길한 징조를 읽은 비드낙은 입을 다물었다.
슬쩍.
칼은 베게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에밀리는 어디 있지?”
“어, 어떻게?! 그, 그걸…….”
혹여나 비드낙과 엮일까 줄곧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아챘을까?
깜짝 놀란 베게누는 어느새 칼이 자신에게 말을 놓았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비드낙의 등 뒤 너머.
화르르륵!
[……아빠.]
불 속에서 에밀리는 초췌한 얼굴로 고통스럽게 베게누를 부르고 있었다.
“크흑! 에밀리!”
“따라와라.”
“……부탁하네.”
칼의 말에 베게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뒤를 쫓았다.
[…….]
비드낙은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칼과 베게누를 멍하니 지켜보았다.
당혹으로 인해 그의 눈동자는 극심하게 뒤흔들리고 있었다.
무시당하고 있다.
망령들의 왕이라고 불리는 자신이 마치 벌레처럼 무시당했다.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콰아아아아앙!
격분한 비드낙이 음산한 사기를 내뿜으며 칼에게 소리쳤다.
[누구 마음대로 발을 내디뎌도 된다 했느냐! 하찮은 인간 주제에!!!]
스윽, 스윽, 스윽, 스윽, 스윽, 스윽, 스윽, 스윽.
그와 동시에 비드낙의 주변으로 데스마스크의 혼령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더니 스켈레톤과 같은 모습으로 변하였다.
그 숫자가 무려 일만에 달했다.
쿠구구구구구.
그 엄청난 숫자에 베게누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앞에는 모든 것을 불태울 것만 같은 불구덩이, 뒤에는 일만에 달하는 수의 망령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하아. 끝까지 말을 못 알아 듣는 것 같군. 아니면 내 경고가 물로 보였나, 버러지?”
한숨을 쉰 칼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비드낙을 보았다.
오싹!
엄청난 압박에 비드낙은 주춤거리다 곧 손가락으로 칼을 지목했다.
[저자를 죽여라! 감히 나 비드낙을 무시하고 살아남을 성싶었느냐!]
[켈켈켈켈, 움직여! 진군이다.]
[비드낙 님의 명령이다.]
망령의 군단은 칼과 베게누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
질겁한 베게누는 헛숨을 들이 삼키다 곧 초연한 표정으로 칼에게 물었다.
“이렇게까지 나를 도와주는 이유가 뭔가?”
“글쎄.”
칼은 여행하는 동안 마력을 축적해둔 트리거의 촉매 열 개를 모두 착용했다.
우우웅.
순식간에 팔찌가 불은색으로 빛나며 한계에 다다라 당장이라도 끊어지려 할 때였다.
피식.
그때 칼은 베게누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것은 마왕의 은총이다. 달게 받아도 좋다 베게누 프로메스여.”
콰칭! 콰칭! 콰칭!
팔찌들이 연달아 끊어지면서 붉은 기운이 중첩되었다. 그러더니 이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콰아아아아앙!
[크아아아악!!]
붉은 기운에 노출된 망령들은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누구 하나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화르르르륵!
그 압도적인 힘에 강렬했던 불길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상처받은 어린 소녀만이 홀로 남아있었다.
왈칵!
“에밀리!!!”
베게누는 그런 딸을 향하여 힘껏 발을 박찼다.
* * *
[……뭐야? 이건.]
비드낙은 눈을 통해 하나의 괴이한 현상을 보았다.
자신을 기만한 녀석을 중심으로 붉은색의 마력이 모이더니 고리 모양을 이루었다. 그러고 순식간에 열 개로 늘어나더니 겹쳐졌다.
기하학적인 모양을 이룬 그것들은 사방으로 퍼지더니, 망령 군단을 순식간에 소멸시켜버렸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지옥의 입구에서 빌려온 불길까지 꺼뜨렸다.
그 여파로 인해 주변에는 짙은 흙먼지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쇄액!
비드낙이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연기를 뚫고 나온 검이 그의 가슴을 베어버렸다.
[크아아아아악!]
영체에 깊은 타격을 입은 비드낙은 고통에 찬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뚜벅뚜벅. 뚝. 뚝.
비드낙이 연신 뒤로 물러나자, 칼은 온몸에 피를 흘리면서도 한 손에는 검을 들고 그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오싹!
결국 비드낙은 칼에 대한 공포로 실성하고 말았다.
[너, 넌 뭐야?! 어떻게 그런 힘을 쓸 수 있는 거지!!!]
쇄액!
칼은 대답을 하는 대신 다시 한번 비드낙의 오른팔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콰앙!
서걱!
붉은빛 오러는 영체인 비드낙의 팔을 날릴 뿐만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암벽까지 깊숙이 베어버렸다.
[크아아아아악!]
“나와 대화를 하려면 그에 맞는 격을 쌓아야 할 거다, 망령. 아, 근데 그건 무리려나.”
스윽.
칼은 살짝 허리를 굽히며 거만한 자세로 비드낙을 내려다보았다.
“어린 영혼이나 괴롭히는 너 따위 저속한 놈은 결코 나만한 격을 쌓을 수 없거든.”
서걱! 서걱!
말을 마침과 동시에 칼은 검을 휘둘러 비드낙의 오른쪽 귀와 왼쪽 눈을 베어버렸다.
[크아아아악!! 네놈!!]
비드낙은 피눈물을 흘리며 격분했다.
[다 죽어가는 주제에 감히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직 전의를 완전히 잃지 않은 비드낙은 사기를 최대로 발산하기 시작했다.
범인이라면 사기에 닿는 순간 생기를 모두 갈취당해 죽겠지만, 칼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어째서, 어째서! 넌 뭐야?! 이 괴물 자식!!]
비드낙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망령의 왕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이 어째서 이토록 두려워해야 한단 말인가.
칼은 심홍색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을 했다.
“참고로 말해두는데, 이건 내 힘의 일부를 개방해서 입은 상처지. 너 따위한테 입은 상처가 아니야.”
우드득.
피를 너무 흘려 살짝 어지러워진 칼은 찡그린 얼굴로 목의 관절을 풀며 말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쥐새끼처럼 도망만 다닐 거지?”
[……오, 오지 마.]
“술래잡기라면 환영하마. 그래봤자 마왕의 손바닥 안이지만. 하하하하.”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던 칼은…… 이내 살기와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비드낙에게 검을 휘둘렀다.
스윽!
[크아아아아아악!!!]
* * *
[……포근해.]
오랜 시간 동안 숨이 막히거나 살갗이 타거나, 혹은 날붙이에 찔리는 등 고통스러운 나날만을 겪던 에밀리는 간만에 편안함을 느꼈다.
슬쩍 눈을 뜬 에밀리의 눈으로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베게누의 모습이 보였다.
[……아빠.]
오랜만에 본 아버지의 얼굴은 늙수그레했다.
이 험한 고지에 있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미안하다. 원망스러웠지?”
왈칵!
[……미웠어.]
미웠다. 자신을 이렇게까지 몰고 간 프로메스 가의 업보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파르르르.
그리고 지금 이 고통이 영원히 계속될까 봐 무서웠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잊을 수 없는 감정이 하나 있었다. 바로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에밀리는 떨리는 손으로 베게누의 옷자락을 꽉 쥐며 입을 열었다.
[……와줘서, 와줘서 고마워요.]
왈칵!
흐느끼며 말하는 딸을 보고 있자니 베게누는 가슴에 메였다.
“미안하다. 에밀리, 미안. 크흑!”
베게누의 얼굴은 어느새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됐다.
스스스.
에밀리의 몸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야 에밀리는 저주의 굴레에서 벗어나 비로소 저승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거다.
스윽.
아빠와 이별을 해야 한다는 걸 눈치챈 에밀리는 마지막으로 베게누의 목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울지 마. 아빠…… 나 다음 생에도 아빠의 딸로 다시 태어날게. 그러니까 꼭 다시 만나자.]
마지막 말을 내뱉은 에밀리는 마지막까지 미소를 지으며 사라졌다.
“흐아아아악! 에밀리!!!”
가슴 속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에밀리의 마지막 말에 베게누는 한참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