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남자는 오늘도 꿈을 꾼다.
너무나 행복했기에 이제는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었다.
“이번 계약만 성사된다면, 프로메스 가문은 번창하게 될 걸세.”
탁자 위에는 세계의 무역 상권이 빼곡히 적혀 있는 지도가 놓여 있었다.
거래 상대의 제안에 베게누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번 교역품은 향신료와 엄청난 양의 비단, 그리고 동양의 신비로운 물건들이었다.
만약 이번 거래에 성공한다면 적어도 이 대, 아니 삼 대까지 먹고 살 만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베게누는 은근슬쩍 문 쪽을 살폈다.
그곳에는 그의 어린 딸 에밀리 프로메스가 곰 인형을 들고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당돌한 녀석.’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그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거래 상대에게 말했다.
“한 번 해보겠습니다. 믿고 맡겨주십시오.”
“정말입니까? 하하하하.”
거래를 성사시킨 베게누는 상대와 악수를 하며 생각했다.
‘미안하다. 에밀리.’
이번 여정이 2년 정도 걸리는 장거리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한적한 시간을 갖게 된 베게누는 거실로 내려왔다.
“하하하하, 그만해. 릴.”
어린 고양이와 뛰어다니며 놀던 에밀리는 찻잔과 찻주전자가 담긴 쟁반을 들고 지나가던 시녀와 부딪쳤다.
“어? 어? 아가씨 위험해요!”
균형을 잃은 시녀는 에밀리가 다칠까 봐 쟁반을 든 팔을 뒤틀었고.
쨍그랑!
찻잔이 깨지며 거실 바닥에 조각들이 떨어졌다.
깜짝 놀란 에밀리는 고양이를 끌어안은 채, 토끼처럼 눈을 크게 떴다.
“에밀리!!!”
다급히 내려온 베게누는 먼저 에밀리의 얼굴과 손 등을 살핀 뒤 시녀를 노려보았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에밀리가 다쳤으면 어떡할 뻔했어!!!”
“죄, 죄송합니다.”
시녀는 조각에 찔려 피가 흐르는 손을 감추며 황급히 사과했다.
아픈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베게누의 분노에 찬 시선이 그녀의 두려움을 자극했다.
베게누 프로메스.
그는 이실리아와의 중계무역을 통해 어마어마한 부를 취득한 신흥 부자이자, 거대 상단의 주인이었다. 또한 손익을 철저히 따져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냉정한 자였다.
그런 그에게 쓸모없는 것으로 낙인이 찍히면, 즉각 이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에밀리 괜찮니?”
미미하게 몸을 떨던 에밀리는 시녀의 치맛자락을 붙들며 말했다.
“흐윽, 흐윽, 미안해, 에바. 내가 조심했으면 이럴 일도 없었는데.”
“아, 아가씨. 괜찮아요. 피 묻으니까 잠깐 떨어져 주세요.”
“그치만. 흐아아아앙.”
에밀리는 그대로 울음을 터뜨렸다.
결국 에밀리는 베게누가 치료사를 불러 시녀를 치료해 줄 때까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하아, 요 깍쟁이 녀석.”
베게누는 잠든 에밀리를 끌어안으며 한숨을 쉬었다.
……한없이 착한 아이.
자신보다 남을 위해 울어줄 줄 아는 아이.
어째서 이런 아이가 자신 같이 탐욕스런 남자에게서 태어난 줄 모르겠다.
이 당돌한 아이는 자신이 울면 뭐든지 해준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늘 곤경에 처하면 울어버린다.
다른 아이들은 어여쁜 인형이나 옷을 가지고 싶다며 떼를 쓰지만, 에밀리는 언제나 베게누가 화를 내거나 사람들에게 신경질을 낼 때만 떼를 썼다.
때문에 곤혹스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베게누는 딸에게서 ‘사랑’을 배워갔다.
처음 에밀리가 태어났을 때 베게누는 크게 실망했었다.
아들을 낳아 가문을 잇게 하여 상단을 크게 키우겠다는 위대한 야망이 있었건만, 아들이 아닌 딸이 태어나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꼬옥!
태어난 지 1개월이 됐을 때, 자신의 손가락을 붙잡으며 미소 짓는 에밀리를 보고는 그 야망은 사라졌다.
정확히는 ‘어찌 되든 상관없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뒤, 그는 주술사인 한 노파에게서 불안한 예언을 듣게 된다.
-베게누 프로메스여, 자네와 프로메스가가 행한 일의 업보는 그대의 자식에게 향할 것이다.
* * *
“흐업!!”
불길한 한마디가 머릿속을 헤집는 것과 동시에 베게누는 눈을 부릅떴다.
“하아, 하아.”
주변을 살피니 잠을 자고 있는 디아나와 슈미트가 보였다.
슈미트는 디아나의 이불을 뺏어 자신의 몸에 둘둘 말고 있었고, 디아나는 으스스 떨며 추위에 시달리고 있었다.
“심보 고약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베게누는 슈미트의 이마를 주먹으로 쿵 치며 응징을 가했다.
“끄응!”
잠은 깨지 않았지만, 슈미트는 이마를 어루만지며 신음소리를 냈다.
베게누는 자신의 이불을 디아나에게 덮어주었다.
“헤헤헤.”
몸이 따뜻해지자, 디아나는 얼굴을 발그레 붉히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
그런 그녀를 보며 베게누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살아있다면, 이 아이랑 비슷한 나이가 됐겠지.”
중얼거리던 도중 갑자기 두통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낫지 못한 고질병에 그는 서둘러 봇짐에서 약을 꺼내 입안에 삼켰다.
“푸하!”
두통이 나아지자 그는 가까스로 숨을 내뱉었다.
“많이 아픈 것 같습니다만, 괜찮습니까?”
동굴 입구를 지키고 있던 칼은 무릎 위에서 잠을 자고 있는 바그로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견딜만하네.”
베게누는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칼에게 말했다.
“근데, 그 질문은 오히려 내가 자네에게 해야 할 말 아닌가?”
칼이 협곡에서 쿠라빌을 쓰러뜨린 후 엿새가 지났다.
칼은 그날의 전투에서 피를 많이 흘렸지만, 다행히 상처가 크지 않아서 머리와 팔에 붕대를 감은 게 전부였다.
하지만 내상까지 고려하면 칼의 몸은 빈말로도 괜찮은 상황이 아니었다.
“딱히 나쁘지 않습니다.”
“자네도 어지간히 고집이 세구먼.”
애써 강해 보이려는 걸까?
베게누는 그 모습을 보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고집이 센 건 누굴까요?”
칼은 슬그머니 눈매를 좁히며 베게누를 쳐다봤다.
“슬슬 이곳에 온 목적 정도는 말씀해 주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당연 돈 때문이지. 왜 탐이 나나?”
“…….”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그의 고집스러운 대답에 칼은 눈살을 찌푸렸다.
베게누는 진지한 표정으로 칼에게 말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걸세. 자네들은 계약대로 날 데려다 주기만 하면 끝날 일이야.”
“……계약대로 하죠.”
그의 고집에 졌다는 듯 칼은 피식 웃었고.
“이제 그만 자. 내가 불침번을 설 차례야.”
“괜찮으니까 주무시죠.”
“너 아무리 체력이 팔팔하다고 해도…….”
“밤 풍경이 근사해서 양보하고 싶지 않거든요.”
피식 웃으며 내뱉는 칼의 미소에 베게누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일 조느라고 일 똑바로 못하면 혼난다. 그게 다 돈이 새어 나가는 거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칼은 줄곧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싱거운 녀석.”
베게누는 툴툴거리며 다시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한편.
그르릉.
칼의 손길을 느끼며 푸근한 잠에 빠져있던 바그로바는 슬쩍 한쪽 눈을 뜨며 정면을 응시했다.
[켈켈켈켈켈.]
먼발치에서 데스마스크 혼령이 음산한 기운을 발산했다. 그 가운데에는 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서 있었다.
크르르르르.
위화감을 느낀 바그로바는 잇몸을 드러내며 사납게 으르렁거리기 시작했고.
그런 바그로바의 머리를 쓰다듬던 칼은…….
“꺼져라.”
라고 읊조리며 그 어떤 때보다 날카로운 눈동자로 소녀를 직시했다.
히죽.
칼과 시선을 마주친 소녀는 해맑게 웃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 * *
다시 하루가 지났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
히히히히.
지옥의 입구와 가까워질수록, 데스마스크 혼령들은 더욱 많아졌다.
이제 곧 목표에 다다른 베게누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곳에 당도하니, 페트로의 인자함이 느껴지네.”
“어떤 점이 말입니까?”
“……브루헤리아는 처음에 아무도 발을 딛지 못하는 땅이었지. 전쟁으로 인해 기근과 질병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 생긴 난민들이 모여 만든 나라가 브루헤리아지. 왕국에서는 가급적 이 사실을 감추려 하지만 나라의 근본을 세운 페트로 앞에서는 진실을 감출 수는 없지.”
슈미트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손가락을 연신 굽혔다 폈다.
“잠깐! 그렇다면, 그 페트로인가 뭔가 하는 영감은 나보다 나이가 더 많단 말이야?!”
베게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그 녀석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몰라. 나이가 너무 많다 보니 환갑만 넘기면 그냥 말을 트더라고. 나도 그런 이유로 친구가 된 거지.”
“허허허허허.”
슈미트는 기가 막혔는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마법사가 일반 사람들보다 오랫동안 산다고는 하지만, 페트로 같은 경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디아나는 전설 속 내용이 실화라는 것에 경악했다.
“대, 대단하네요. 역시 백색의 마도사님이네요.”
‘능구렁이 영감탱이인 건 이유가 있었군.’
페트로의 얼굴을 상기한 칼은 기분 나쁘다는 듯 쯧 혀를 찼다.
잠깐 엉뚱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를 듣던 베게누가 본래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어쨌든 망자와 생자가 만나서 좋을 일은 없지. 페트로의 결계는 이를 차단하는 데 요긴하게 쓰이고 있지.”
‘죽음’이라는 원초의 공포를 차단하고, 땅에 사람이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왔다.
베게누는 역사에서 감춰진 페트로의 또 하나의 업적에 찬사를 보냈다.
베게누가 한참 동안 어울리지 않게 떠드는 동안.
‘쿠라빌.’
칼은 사념 보내어 자신의 주변에 맴돌고 있는 쿠라빌을 불러들였다.
쿠라빌은 영체화 상태로 칼의 옆에서 슬며시 존재감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베게누의 악몽은 취했나?]
[네. 매번 같은 꿈을 꾸고 있어서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가 꾼 악몽을 공유해라.]
[알겠습니다.]
명이 떨어지자 쿠라빌은 입을 벌려 음산한 기운을 토해냈다.
기운을 접한 칼의 의식은 베게누의 악몽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베게누가 동방의 대륙에서 돌아온 지 어언 2년이 됐다.
자택으로 귀환한 그는 사랑스런 딸과 식사 자리를 가졌다.
무척이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2년 동안 겪었던 힘들었던 기억들이 말끔히 가실 정도로 말이다.
쿵쾅!
그러던 중 비극은 갑자기 찾아왔다.
창문 너머로는 천둥 번개가 몰아쳤다.
“죽어라!! 프로메스, 너희를 저주한다. 내 목숨을 바쳐 너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가겠다.”
방심한 틈을 타 식사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저주가 담긴 자기를 깨뜨렸다.
자기 안에 갇혀있던 것은 망령의 왕 비드낙의 영혼.
봉인에서 해방된 비드낙은 남자의 육체를 뒤집어썼다.
“끄아아아아악!”
소원을 들어주는 대가로 생기를 갈취당한 남자는 미라처럼 삐쩍 마르더니, 그대로 숨통이 끊어졌다.
스멀스멀.
이어서 남자의 코와 입, 귀 등에서 빠져나온 시커먼 연기가 에밀리를 덮쳤다.
“꺄아아아악!”
“에밀리!!!”
비드낙의 기운을 뒤집어쓴 에밀리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스멀스멀.
형체를 드러낸 비드낙은 탁한 음성으로 말을 내뱉었다.
[참으로 고결하고 순수한 영혼이야. 이 영혼이 더럽혀질 때까지 유린해주마. 다음 생은 꿈도 꿀 수 없을 거다. 영원히 이 비드낙의 손아귀 안에서…… 크하하하!]
“내 딸에게서 떨어져! 제발! 제발! 으아아아아악!”
베게누가 고열이 나는 딸을 안으며 오열하는 사이, 비드낙은 천천히 자취를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