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콰앙!
[키에에에엑! 오지 마!]
[대체 뭐야? 저 인간!]
[쿠라빌이! 화났어! 저 쿠라빌이!!]
악몽의 협곡을 울리는 굉음에 데스마스크 혼령들이 일제히 겁을 집어먹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 아래에서는 쿠라빌이 질풍 같은 속도로 숲을 돌파하더니 느닷없이 칼의 위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쿠직!
콰앙!
그러곤 양쪽 발굽으로 눌러 찍으려고 했다.
칼은 종이 한 장 차이로 공격 범위에서 벗어난 다음 쿠라빌의 몸을 베었다.
쇄액! 콰앙!
하지만 일격은 닿지 않았다.
쿠라빌이 다시 모습을 감췄기 때문이다.
히이이잉!
이어서 쿠라빌은 전략을 바꿔 칼을 기습했다.
카카카카카카캉!
호흡을 갈무리하기조차 어려운 숨 막힌 공방.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칼의 주변에 불똥이 튀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쿠라빌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무리한 속도를 내느라 한계에 다다른 몸의 힘줄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속도를 줄일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속도를 줄였다가는 쿠라빌의 뿔에 치인다.
인간 대 환수종의 몬스터.
타고난 골격부터 쿠라빌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폭포 위에서 칼과 쿠라빌의 격전을 지켜보고 있던 베게누는 식은땀을 주륵 흘리며 슈미트에게 물었다.
“저자의 경지는 대체 어느 정도지? 언뜻 봐도 오러 유저의 수준을 뛰어넘었는데.”
“몰라. 아직 오러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 정도만 알고 있어.”
슈미트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칼이 들고 있는 바스타드 소드를 살폈다. 신수의 뿔을 상대로 잘 버티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뿔을 받아칠 때, 검이 부러지지 않도록 미세하게 멈칫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저걸로는 부족해.’
슈미트는 그 사실이 무척이나 분했다.
마찬가지로 격전을 살펴보고 있던 디아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에 주먹을 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결계 제어를 포기하고 가담하고 싶었지만, 애초에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칼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었다.
콰앙!
다시금 칼과 쿠라빌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키기기기깃!
서로의 무기가 마찰을 일으키며 고막을 찢는 끔찍한 소리를 내었고, 나아가 허공에 불똥을 튀겨댔다.
그러나 칼과 쿠라빌 사이의 힘의 균형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쿠직!
쿠라빌이 딛고 있는 땅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일어났다.
“흐압!”
칼은 한층 기세를 끌어 올리더니…….
콰앙!
그대로 쿠라빌을 밀어내 내동댕이쳤다.
순간 등골을 타고 흐르는 전율에 베게누는 시간이 멈춘 느낌을 받았다.
그는 다시 한번 칼리언트 슈타크의 인상을 확인했다.
아직 십 대 중반의 어린 나이.
타오를 듯한 심홍색의 눈은 타인의 심신을 압박했다.
설령, 상대가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오만함. 그 오만함에는 근거 따위는 필요 없다.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저 그릇은 에클라 세트랑 비교할 게 아니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손아귀에는 땀이 한가득 흐르고 있었다.
베게누는 주머니에 있는 목걸이를 손에 쥐며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너에게 갈 수 있단다. 조금만 기다려다오. 에밀리.”
자그마한 그 목소리에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에밀리?”
* * *
“하아, 하아.”
폐부에는 호흡이 가득 들어찼고, 전신의 근육은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상대의 공격을 받아치는 와중에 상처는 늘어갔고, 그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히이이잉!
거칠게 흥분한 쿠라빌은 지금도 칼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가해 왔다.
하지만 왜일까?
‘몸은 갈수록 가벼워지는군.’
콰앙!
쿠라빌의 턱을 걷어찬 칼은 이어서 턱에다가 검을 꽂아 넣으려고 했지만.
콰앙!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쿠라빌은 앞발로 칼의 가슴 부근을 강타했다.
‘그 녀석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슈미트가 만든 견고한 경갑을 입고 있었기 망정이지.
맨몸이었다면 갈비뼈가 박살 나고 내장이 찢겨 졌을 것이다.
“쿨럭!”
하지만 충격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어서 칼은 결국 피를 토해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촤르르륵.
쿠라빌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뒷발에 묶인 쇠사슬을 역이용해 칼의 몸통을 묶은 뒤 정면에 있는 바위를 향해 질주했다.
‘무슨 속셈이지?’
칼 역시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바스타드 소드를 지면에 꽂아 제동을 걸었다.
그러나 쿠라빌의 기세를 꺾는 것은 불가능했다.
잠시 후.
스스스스.
바위까지 충돌하기 일보 직전.
쿠라빌의 몸이 유령처럼 투명해지더니 그대로 암반을 투과했다.
“젠장!”
녀석의 목적을 깨달은 칼은 동공을 휘둥그레 떴다.
이윽고.
콰아아아아앙!
칼은 암반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 * *
히이이잉!
두그닥, 두그닥.
희뿌연 입김을 토해낸 쿠라빌은 승리를 만끽하며 힘껏 울부짖었다.
소중한 뿔을 잘라낸 인간을 죽이는 데 성공했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서걱!
남은 뿔마저 부러지지 않았다면 말이다.
오싹!
평소라면 분노했겠지만, 쿠라빌은 시뻘건 동공을 파르르 떨며 뒤를 살폈다.
그곳에는 칼이 온몸에서 피를 한가득 흘리면서도 바스타드 소드를 어깨에 걸친 채 서 있었다.
뒤늦게 암반을 살피니, 그 주변에는 조각난 쇠사슬만 남아 있었다.
주륵.
칼은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손으로 대충 닦아내며 말했다.
“……영체화. 팬텀 스티드와 혼혈이란 점을 이런 식으로 활용할 수 있구나.”
푸르르.
쿠라빌은 투레질을 하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자신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 분명한데…… 어째서 겁을 집어먹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칼은 피식 웃으며 쿠라빌에게 말했다.
“대충 감은 왔다. 다시 와봐라, 잡종.”
허세 따위가 아니었다. 그 증거로 칼의 전신에서는 투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막혔던 기의 순환도 조금 전 깨달음을 얻고 나서부터는 원활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아마 3성에 도달한 거겠지.’
통상적인 3성의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왜냐하면 칼이 익힌 것은 과거 명성을 떨쳤던 그랜드 마스터의 마나 연공식이었기 때문이다.
‘강해진다는 건 재밌는 일이야.’
한껏 자신의 힘에 취한 칼은 천천히 쿠라빌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겁을 집어먹은 쿠라빌은 혼신의 힘을 다해 다시 질풍처럼 주변을 휩쓸기 시작했다.
히이잉!
거센 공기의 벽을 단숨에 돌파해 발굽으로 칼을 찍어 누르려는 찰나.
콰앙!
칼은 쿠라빌에게 전혀 시선을 주지 않고 칼등으로 발굽을 받아쳐 낸 후,
휘리릭.
그대로 검을 역수로 쥐어 검자루로 쿠빌라의 턱에 타격을 가했다.
게걸스럽게 침과 피를 흘리면서도 쿠라빌은 역동적인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쇄액!
다시금 검은 질풍이 도래했다.
반경 100미터 지대에 있는 암반과 초목 등은 그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파괴되고 부스러졌다. 콰앙! 콰앙! 콰앙! 콰앙! 콰앙!
쿠라빌은 칼이라는 거대한 장벽을 돌파하지 못하고, 연이어 타격을 당해 고꾸라졌다.
아까까지는 막상막하인 대결이었지만.
지금은 쿠라빌이 칼의 주먹에 얼굴을 들이대는 것 같았다.
히이이잉!
쿠라빌의 포효에는 어느 순간 공포로 인한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뭐야? 이 인간?
아까랑은 완전히 격이 다르잖아.
움직임은 물론이고 공격 패턴까지 완전히 간파당했다.
두그닥, 두그닥!
그 사실을 깨달은 쿠라빌은 급격히 방향을 선회해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다.
파앗!
그러나 그 선택도 일찌감치 예측했는지, 칼은 전신에서 붉은 마력을 발산하며 단숨에 쿠라빌의 등에 올라탔다.
……어떻게?
아무리 움직임을 간파당했다고는 하지만.
인간이 내 등에 올라탈 수 있다고?
[……탈 수 있지.]
오싹!
혼란스런 와중, 쿠라빌은 귓가에 들려온 음성에 진심으로 소름이 끼쳤다.
놀랍게도 그에게 말을 건 것은 입가에 조소를 그리고 있는 붉은 머리의 소년이었다.
[너, 너 어떻게 우리의 언어를……]
[사념을 통해 말을 건 거니, 언어랑은 아무 상관도 없어.]
[떨어져라! 너 따위한테 내 등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쩔 거지?]
스스스스.
쿠라빌은 대답 대신 다시 한번 암벽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영체화를 하기 시작한 몸은 천천히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피할 수 있을까?
지금의 속도라면 분명 칼은 바위와 정면충돌하게 돼 있다.
발악하는 그 모습에 칼은 진심으로 딱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 몸이 잔꾀에 두 번이나 속아줄 리는 없잖느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콰칭!
칼의 팔찌가 끊어지며 트리거가 발동됐다.
확산하는 붉은색 파동이 쿠라빌의 영체화를 단숨에 무마시켰고.
콰아아앙!
대처 방법이 없던 쿠라빌은 그대로 암반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히이이잉.
온몸에 피가 흥건히 흘러내린 녀석은 힘겹게 숨을 내쉬며, 칼을 쳐다봤다.
꽈아아아악!
어느새 칼은 쿠라빌의 목덜미를 손으로 붙들고 있었는데…….
여기서 좀 더 힘을 가하면, 자신의 숨통까지 틀어막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쿠라빌은 기세를 꺾으며 파르르 몸을 떨었다.
“저항이냐? 굴복이냐? 그 정도 선택은 스스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이름을…….]
“내 이름은 칼리언트 슈타크다.”
칼의 압박에 쿠라빌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강렬한 몸부림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이상 해봤자, 칼에 의해 숨통이 끊어진다는 결과 외에는 없었다.
[저의 주인, 칼리언트 슈타크에게 충성을 바칩니다.]
스스로의 맹약과 함께 쿠라빌의 가슴 부근에는 맹약의 인이 새겨졌다.
이내.
스스스스.
몸이 다시 한번 투명해지며 마치 증발된 것처럼 사라졌다.
* * *
쿠라빌과 전투를 마친 칼은 몸에 입은 부상 때문에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하아. 제법 지치는군.”
지금은 마나 연공식을 시전하며 고갈된 체력과 재생력을 높이고는 있는 중이었다.
전투 중 사라진 쿠라빌은 영체화 상태로 칼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쿠라빌 역시 상처를 회복해야 했기에 온전한 모습이 될 때까지 실체화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반경 100미터 이내에 엉망진창 들쑤시고 다닌 터라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칼의 상태가 걱정됐던 디아나와 슈미트, 그리고 베게누는 칼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걱정을 끼치는 건 달갑지 않지만, 썩 나쁘지 않군.’
아리송한 기분을 곱씹던 칼은 곧 베게누의 뒤편에 어슬렁거리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치이이익.
그것의 정체는 사람을 죽음으로 이끄는 데스마스크의 혼령.
하지만 어째서인지, 녀석의 형체가 어린 소녀의 형상과 겹쳐 보였다.
베게누를 바라보던 소녀는 씨익 웃으며 그에게 손을 뻗으려다…… 칼이 위압스러운 기세를 분출하자, 곧 겁을 집어먹고 사라졌다.
‘아무래도 골치 아픈 사연에 엮인 것 같군.’
칼은 다가오는 그들을 보다 사념을 통해 쿠라빌에게 말을 건넸다.
[쿠라빌. 이곳은 정확히 어디지?]
[이승과 저승의 경계. 여기서 조금만 가면, 지옥으로 갈 수 있는 입구가 있습니다.]
“호오.”
정황상, 베게누가 그 사실을 모르고 이곳에 발을 내밀지는 않았을 것 같다.
[협곡의 주인은 누구지?]
[그, 그건.]
말하기 곤혹스러운 듯 쿠라빌이 주저했지만, 칼이 무언의 압박을 가하자 곧 어렵게 입을 뗐다.
[망령의 왕, 비드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