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육지에 상륙한 후.
일행은 약 열흘의 여정을 거쳐 악몽의 협곡 입구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협곡은 브루헤리아 왕국이라는 소국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브루헤리아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에 그런 미지의 장소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
세간의 소문을 통해서 ‘악몽의 협곡’이라는 장소가 있다는 것은 들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나라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는 것이다.
협곡의 입구에 도달한 칼은 그럴만하다고 감탄하는 중이었다.
‘결계를 구축하는 분야에 있어서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군.’
스스스스.
협곡 인근에서 미미한 마력의 파장이 흘러나왔다.
물론 베게누나 다른 상단의 일원들은 물론, 디아나조차 결계의 흔적을 간파하지 못했다.
스스스스.
자연과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있는 페트로의 결계.
그것은 평범한 사람이나 야욕을 가진 이들이 악몽의 협곡에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둔 것이었다.
“사, 상단주님 정말 괜찮겠습니까?”
베게누 주변에 있는 상단의 일원들은 우려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는 상단의 일에서 잠시 손을 떼고, 칼의 일행에 합류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한 달 뒤에 다시 빡세게 굴릴 테니까, 그만 가봐.”
베게누는 상단의 직원들을 물린 뒤 칼과 디아나, 그리고 슈미트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너는 지금 당장 여기 서명해!”
그는 깃펜과 양피지를 꺼내더니 칼에게 건넸다.
「1. 이 계약은 베게누 프로메스가 악몽의 협곡에 안전하게 다다를 때까지 유지된다. 그때까지 칼리언트 슈타크는 베게누 프로메스의 안전을 책임진다.
2. 협곡에 다다르면 계약은 완료. 칼리언트 슈타크는 베게누를 현장에 두고 즉각 복귀하여 프로메스 상단에서 보상을 받는다.」
실로 간단명료한 계약 내용.
사각, 사각.
칼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베게누에게 건네줬다.
“……좋아.”
베게누는 안심한 표정을 짓고는 칼에게 질문을 건넸다.
“출발은 언제 할 예정이지?”
“세 시간 후에 출발할 겁니다. 그 시간에 결계를 해제하는 게 좋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나는 마차에 잠잠히 쉬고 있지.”
할 말을 마치고 터벅터벅 걸어가던 베게누의 주머니에서 오석으로 만든 목걸이가 떨어졌다.
“자, 잠시만요.”
그것을 주워든 디아나는 잽싸게 베게누에게 다가가 목걸이를 건네주었다.
“이거 떨어뜨리셨어요.”
“아아, 고맙다.”
목걸이를 받아든 베게누는 잠시 멀뚱히 디아나를 쳐다봤다.
“…….”
‘뭐, 뭐지?’
그 시간이 길어지자 디아나는 적잖게 당황했다.
그녀는 무어라 말하려고 했으나, 베게누의 눈빛이 슬퍼 보여서 그대로 경직되었다.
스윽.
그는 곧 디아나의 시선을 피해 칼을 쳐다보며 말했다.
“……계약서 내용은 꼭 지키라고.”
“약속은 지킵니다.”
베게누는 씨익 웃으며 그대로 마차로 향했다.
그 등을 넌지시 지켜보던 부상단주 리젤이 칼에게 다가갔다.
“칼리언트님. 부탁이 있습니다.”
“뭡니까?”
조금 뜬금없이 말을 거는 리젤의 표정은 무척이나 다급해 보였다.
“부디 베게누님과 무사히 귀환해주십시오. 저희는 저분이 필요합니다.”
“……무슨 사정인지는 설명해줘야…….”
곁에서 지켜보던 슈미트가 무어라고 말하려는 찰나.
칼은 손을 들어 그의 발언을 제지했다.
“아마 저 영감은 죽게 되더라도 이곳에서 이루고 싶은 게 있는 거겠지.”
“…….”
리젤은 울상을 지으면서도 칼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칼은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계약대로만 이행할 겁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리젤은 허리를 숙였고 칼은 그대로 등을 돌렸다.
* * *
이른 저녁.
짙은 어둠이 산맥에 드리워져서 산행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결계를 해제하기에는 지금이 적기였다.
칼의 목에 걸려있는 마석 목걸이가 달빛에 노출되며 은은히 빛을 발하더니…….
스스스스.
결계가 눈 녹듯이 사라지며, 아까와는 전혀 다른 협곡의 풍경이 펼쳐졌다.
보랏빛의 기괴한 암반은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히히히히히.]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는 수많은 데스마스크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까드득, 까드득.
그때 먼발치에서 뼛조각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식겁한 디아나와 베게누는 저도 모르게 슈미트의 등 뒤로 숨었다.
“…….”
기가 막혔는지 슈미트는 말문을 잃었고, 칼은 혀를 쯧쯧 차며 한마디를 남겼다.
“의미 없을 것 같은데. 어차피 저거 짜리몽땅해서 다 보이잖아.”
스슥.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칼의 뒤로 숨어들었다.
“그래. 나 키 작다! 불만 있냐!! 이 겁쟁이 자식들!!”
슈미트는 의도한 행동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크흠! 겁은 누가 집어먹었다고 그래.”
베게누는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이, 이런 것 정도는 무섭지 않아요. 이, 이래 보여도 마녀인걸요.”
디아나는 아직 공포가 채 가시지도 않았는지, 창백한 안색으로 허세를 선보였다.
“으이구, 내 이것들을 그냥!”
‘이럴 때일수록, 나라도 바싹 정신 차려야지.’
슈미트는 전투용 해머를 꼭 손에 쥐며 앞장섰다.
그르르르.
그러자 바그로바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그리고 그의 옆을 지나쳤다.
“바바, 먼저 가면 안 돼!”
디아나는 그런 바그로바를 쫓기 위해 자리를 박찼다.
“그럼 이만 가보지. 내가 없는 동안 상단의 주인은 너라는 것을 명심하도록. 리젤.”
“정말 괜찮겠습니까?”
마지막까지 리젤이 걱정스런 표정을 짓자, 베게누는 쌍심지에 불을 켰다.
“내가 돌아올 때 상단 재산을 두 배로 불리지 못하면, 각오하라고!”
“그, 그건 무리입니다.”
“시끄러워. 될 때까지 하면 되지! 말이 많아.”
베게누는 성큼성큼 앞으로 발을 내디뎠고, 잠시 후 마석의 빛이 사라지며 결계가 복구되었다.
* * *
악몽의 협곡에 들어선 칼은 무턱대고 쿠라빌을 찾는 대신에 거점을 잡기 위해 유유히 암반을 오르고 있었다.
“끄응!”
몬스터 퇴치가 주된 일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해머를 들고 온 슈미트의 장딴지에는 힘줄이 잔뜩 튀어나오고 있었다.
얼굴에는 땀이 비처럼 흐르고 있지만.
그래도 드워프 특유의 뚝심 때문에 지쳤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주변을 라이트로 밝히고 있는 디아나는 조금 지친 듯 보였다.
그래도 각종 보조 마법으로 부족한 체력을 받치고 있어, 거점을 잡을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서 가장 체력적으로 문제가 되는 이는 당연 베게누였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내뱉는 그는 언제 호흡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았으나, 끈기를 발휘해 칼 일행과 걸음을 맞추고 있었다.
그르르르.
상대적으로 가장 약한 이가 베게누라는 것을 알아챘는지, 바그로바는 그의 뒤를 바짝 붙고 있었다.
양손으로 암반을 딛고 올라오는 그에게 슈미트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거머리 같은 뚝심이네. 영감, 뭐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슈미트의 손을 잡고서 가까스로 올라온 베게누는 숨을 헐떡거리며 대답했다.
“다, 다, 당연할 걸 뭘 물어. 하아, 하아, 당연히 돈이지.”
“썩을 영감탱이구먼.”
“자꾸, 영감, 영감 하는데, 당신이 제일 늙었소.”
“뭐 이 자식이! 드워프 중에서는 한창 청춘을 즐기는 나이구먼. 건어물같이 생겨가지고는…….”
거듭된 막말에 결국 베게누는 존대를 포기하고 막말로 부딪치기로 했다.
“웃기고 있네. 자기는 무슨 바스락거리는 낙엽같이 생겨가지고는.”
“뭐? 낙엽? 죽을래?”
“시끄러워. 떠들 힘도 없으니까. 조용히 해. 하아, 하아, 하아.”
“…….”
서로 독설을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며 디아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언제 저렇게 친해졌을까요?”
“친해진 것처럼 보여?”
“……네. 거의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소꿉친구를 보는 느낌인데요.”
자신이 말해놓고도 표현이 웃겼다고 생각했는지, 디아나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산의 중턱까지 올라온 칼은 평평한 땅과 동굴을 찾아냈다.
푸드드드득!
키에에에엑!
안을 밝히자 잠에서 깬 박쥐들이 동굴 밖으로 쏜살같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아씨, 깜짝이야.”
동굴에 들어가려고 했던 슈미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칼은 동굴 안쪽에서 더 이상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주변의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여기를 중간 거점으로 잡고 휴식한다.”
“네.”
갸릉.
칼의 지시에 디아나와 바그로바는 반색하며 짐을 뒤져 거점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아. 나도 잠깐 쉬고 나서 손을 거들지.”
“아니에요. 그럴 것까지는…….”
지금 당장 숨이 끊어질 것만 같은 베게누에게 뭔가 요구하는 게 미안했던 디아나는 손을 내저었다.
물론 베게누는 듣지 않고 동굴 벽에 몸을 기대고는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나이에 맞지 않는 여정.
체력이 고갈돼 다리가 후들후들 떠는 지경이었으나, 이번 여정에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
그는 목에 걸고 있는 펜던트를 손으로 꽉 쥐고서 애잔한 표정을 지었다.
‘죽음을 넘어선 신념이란 건가.’
마족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 모습에 칼은 내심 감탄했다.
그의 목적이 뭔지 자세히는 알지 못했으나, 적어도 돈같이 하찮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궁금했다.
저 남자가 진심으로 이 협곡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차피 물어봐도 선뜻 가르쳐줄 것 같지 않은 분위기였기에, 칼은 마지막까지 그를 지켜보기로 마음을 먹은 참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제 지시에 무조건 따라야 합니다. 지금은 두 가지 정도 있겠군요.”
“그게 뭔가?”
칼은 두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우선 여기는 유령이 많은 곳입니다. 그리고 유령들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모습을 바꾸어 유혹해 올 겁니다. 절대 환각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베게누는 긴장으로 인해 이마에서부터 땀이 서서히 흘러내려 턱 끝에 맺혔다.
“……두 번째는 뭔가?”
“만에 하나, 유혹에 넘어갈 거 같으면 무조건 바그로바를 끌고 가십시오.”
“그 쪼그만 고양이 말인가?”
“네.”
갸아아아아앙!
바로 곁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바그로바는 털을 꼿꼿이 세우며 분노를 표출했다.
“가급적 용맹한 사자라고 표현해 달라는 것 같은 느낌이네요. 진정해, 바바.”
디아나는 흥분한 바그로바의 등을 어루만지며 화를 달랬다.
“저 녀석이 그렇게 강한가?”
“아마 저 두 사람보다는 훨씬 강할 겁니다.”
“…….”
믿기지 않는지, 베게누가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 순간.
크르르르르.
바그로바는 날카로운 눈동자로 수풀 사이를 노려보며 적의를 표출했다.
“?!”
“?!”
갑작스러운 바그로바의 행동에 당황한 디아나와 슈미트는 재빨리 무장을 갖췄다.
크르르르르.
수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육중한 덩치의 샤벨 타이거로, 다이어 울프보다 훨씬 위험해 폭군이라 불리는 몬스터였다.
“망했네…….”
중얼거리며 등을 꼿꼿이 세우던 슈미트는 이내 샤벨 타이거의 몸이 피투성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부상을 입었다고?”
그토록 강하고 위험한 몬스터인 샤벨 타이거가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이 슈미트는 믿기지 않았다.
‘대체 누가?’
두그각, 두그닥.
슈미트가 당황하고 있을 때, 갑자기 지반이 요란스럽게 흔들리며 한 줄기의 흑광이 샤벨 타이거를 휩쓸며 지나갔다.
콰아아앙!
히이이이잉!
이윽고 엄청난 굉음과 함께 거대한 포효 소리가 저만치에서 터져 나왔다.
“대, 대체 무슨 일이야!”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칼 일행이 포효의 진원지를 향해 달려갔다.
잠시 후.
“세, 세상에.”
“말도 안 돼.”
“누가 이런 끔찍한 짓을…….”
디아나와 슈미트, 그리고 베게누는 눈앞의 끔찍한 광경에 경악했다.
암반에 박혀있는 것은 상처를 입은 샤벨 타이거였다.
위용을 자랑했던 두 개의 송곳니는 부러진 지 오래됐고, 눈 주변이 아예 납작하게 눌려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배에는 날카로운 송곳으로 찌른 것 같은 구멍 두 개가 있었다.
일순간 엄습해온 공포에 모두가 몸을 떨었지만.
씨익.
칼은 유일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일찍 사냥감이 모습을 드러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