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목적지가 악몽의 협곡이라는 사실에 슈미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허허허 네 심장은 강철로 만든 거냐? 무슨 휴양지 가는 것처럼 가볍게 말하니 원.”
반면, 디아나는 우려와 의아함이 섞인 어조로 질문을 건넸다.
“……칼리언트님. 그곳은 모든 마법사들이 갈망하는 곳이지만, 그곳에 간 사람은 모두 길을 잃어버린다고 들었어요. 게다가 소문만 무성하고 소재지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 장소를 알고 계시는 건가요?”
악몽의 협곡.
그곳은 미스틱 마운틴처럼 기이한 현상을 일으키는 장소 중 하나로 저승과 이승을 가로지르는 경계라고도 불린다.
산 자는 죽은 자를 볼 수 있고, 죽은 자는 산 자와 만날 수 있다.
소문의 실체가 진실인지 확인된 바는 없으나, 마법사들은 이곳을 갈망하고 있었다.
범인에게 죽은 자를 만나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지만, 마법사들에게는 무척이나 낭만적인 일이었다.
칼은 지금 가려는 목적지에 악몽의 협곡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직접 가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명망 높은 파르테스의 학장 페트로가 단언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쿠라빌을 봉인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웠네. 발이 워낙 빠르니 말이야. 따라서 평야가 아닌 악몽의 협곡으로 녀석을 유인한 뒤 가둬버렸지. 이것을 가져가게나.
칼은 페트로가 건네준, 결계를 제어할 수 있는 마석의 목걸이를 손으로 들어 올렸다.
“능구렁이 영감이 알려줬어. 그 장소가 있다고.”
“?”
‘능구렁이 영감이 누구지?’
디아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만약 칼이 말하는 이가 백색의 마도사인 것을 알면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칼은 그 사실을 굳이 말하진 않았다.
다만, 페트로의 꿍꿍이가 내심 궁금하기는 했다.
언뜻 들어봐도 일반 학생은 물론 오러 유저나 수준 높은 마법사도 해내기 어려운 일을 자신에게 맡겼는지 의도가 무척 의심스러웠다.
“호호호호,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아.”
그때, 칼의 바로 뒤에서 낯익은 여성이 말을 건넸다.
반짝거리는 금발과 모두의 시선을 끄는 아우라.
아름다운 그 모습에 디아나마저 넋을 놓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용건이 뭐야?”
물론 칼은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쳐다봤다.
“조금은 반겨주라고. 이런 우아한 누나를 알고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영광인지 몰라?”
“일없으면 가던지.”
칼이 다시 고개를 돌리자 루시아는 당황해서 황급히 말을 꺼냈다.
“자, 장난이야! 진심으로 정색하지 말라고!”
“정색한 적 없어.”
귀찮게 하지 말라는 거지.
마지막 말까지 하고 싶었지만, 맥캘리에게 이런 의사 표현에 대해 여러 번 지적을 받은지라 가까스로 삼켜 넘겼다.
안도의 한숨을 쉰 루시아는 이내 칼의 가슴팍에서 졸고 있는 바그로바의 코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갸르릉.
바그로바는 건들지 말라는 듯 발로 얼굴을 훔쳤다.
“엄청 귀엽네. 이 아이 나한테 주면 안 돼? 아니면 나한테 팔거나. 응?”
루시아는 부럽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칼을 쳐다봤다.
“안 돼.”
물론 칼은 단박에 거부했다.
“……차가워.”
루시아는 그렇게 한마디 내뱉더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모처럼 방학인데, 월반 시험을 치르게 해서 미안해.”
“미안해할 건 없어. 오히려 좋은 거래를 했으니까.”
“이건, 학장님께서 전달해 달라고 한 편지야.”
칼은 루시아가 건네준 봉투를 받았고, 루시아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칼에게 물었다.
“근데, 시험 주제가 뭐야?”
‘진짜 모르는 건가?’
눈치 빠른 그녀라면 알 것도 같았지만,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야. 역시 됐어.”
칼이 대답을 하려는 찰나, 루시아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
대체 뭐 하자는 건지.
칼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너한테는 여러모로 미안하네.”
“어째서?”
“솔직히 말하자면 난 데제스를 하루라도 빨리 이 학교에서 퇴출시키고 싶거든. 그러던 도중에 너까지 엮어버리고 말았거든.”
‘그래도 다른 둔탱이 녀석들보다 눈치는 빠르군.’
칼은 그녀의 말에 화가 나기보다는 공감이 됐다.
데제스푸아르.
심계가 깊고 야망 또한 커다란 괴물.
마법과 무위가 상당히 출중한 터라 아마 몇 년 후면 이 대륙에 명성을 떨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문제는 그의 행보였다.
시산혈해.
그가 가는 길에는 시체가 산처럼 겹겹이 쌓일 것이고 피는 바다를 이룰 것이다.
데제스에게 잠재된 야망을 눈치챈 루시아는 공포를 느꼈다. 그래서 파르테스에서 그를 쫓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평소 여유로운 모습만 보이던 루시아는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난 그가 무서워.”
“녀석의 본성을 파악했으면, 넌…….”
칼은 얼굴을 루시아에게 가까이 가져다 대며 귓가에 넌지시 한마디를 내뱉었다.
“지금부터 힘껏 발악해야 할 거야.”
“……그렇겠지.”
루시아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고, 칼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래도 뭐 잘하고 있다고 칭찬해 주지.”
“?!”
실로 오만한 평가에 루시아는 휘둥그레 눈을 떴다가 곧 입을 열었다.
“루시아 아나티카.”
“…….”
갑작스럽게 본명을 말하는 모습에 칼은 발을 멈추며 그녀를 흘깃 바라보았다.
루시아는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너한테는 적국의 영애가 되겠네. 칼리언트 슈타크.”
샤텐과 함께 죽음의 땅이라고 불리는 알테어에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국가 중 하나.
아벤트로트에서 알테어와 인접한 귀족 가문의 이름이 바로 아나티카 후작가였다.
“나중에 내가 후작가를 통치하는 순간이 오면, 난 반드시 너한테 동맹을 제안할 거야.”
그녀의 선언에 칼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그에 맞는 격을 갖춘 다음에 이야기하지.”
아직은 그녀도 칼 자신도 힘이 한참 부족했다.
못다한 이야기는 훗날로 미룬 뒤, 칼은 다시금 발길을 옮겼다.
* * *
뿌우우웅.
항해를 알리는 호각 소리에 맞춰 순풍을 탄 범선이 바다를 가로질렀다.
난간 앞에 서서 멀어져가는 파르테스를 보고 있던 칼은 이상한 감정이 가슴 속에서 꿈틀거렸다.
‘복잡하군. 떠나기 싫은 건지, 아니면 기대감에 부푼 건지.’
“뭔가 고민이 있나요? 칼리언트님.”
“아무것도 아니야. 슈미트는?”
“멀미가 난다고 침대에 누워 있어요.”
“약은?”
“잘 안 듣는 것 같아서 수면 마법을 써서 재웠어요.”
“잘했어.”
“아, 아니에요.”
퉁명스러운 칭찬이었지만, 그것만으로 기뻤는지 디아나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르르릉.
칼의 곁에 맴돌고 있던 바그로바는 흔들거리는 갑판이 신기했는지, 균형을 잡다가…….
갑판 위를 데구르르 구르는 감자를 쫓기 위해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했다.
칼은 그대로 바그로바의 등가죽을 집어서 디아나에게 내밀었다.
“이 녀석도 재워.”
갸르르릉.
싫다는 듯 바그로바가 앞발을 허우적거렸지만, 당연히 칼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바그로바를 받아든 디아나는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잠시 후.
끼룩, 끼룩.
이실리아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서는 갈매기가 배 근처를 기웃거리며 먹이를 찾아다녔다.
‘이게 평화롭다는 건가.’
전생부터 지금까지 바쁜 나날을 보냈던 칼에게는 오랜만에 주어지는 휴식 시간이었다.
평소라면 한층 더 강해지기 위해 단련을 했겠지만, 이런 시간을 가지는 것도 나름 나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편지를 받았었지.’
한가한 김에 칼은 루시아에게 받은 페트로의 편지 봉투를 뜯어 편지에 적힌 글귀를 읽었다.
「어째서 자네에게 이런 거래를 제안했는지 의문이 들 걸세. 일단 첫 번째로 나는 자네가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천재라는 확신이 들었네. 그리고 천재는 위기를 만나야 더욱더 높은 경지로 도약하게 되는 법. 자네의 성장을 돕고 싶었기 때문이네.」
첫 글귀부터 그는 칼의 속마음을 들춰 본 것처럼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두 번째로 반드시 악몽의 협곡으로 가야 하는 친구의 부탁이 있어서네.」
“뭔 소리야?”
슬슬 불안한 기분이 든 칼은 아주 천천히 글귀를 읽어 내려갔다.
「그 친구의 이름은 베게누 프로메스. 심성이 아주 고약한 데다 돈만 밝히는 친구지. 어째서 그런 녀석이랑 친구냐고 질타할 수도 있겠지만. 가만히 보면 알게 될 걸세. 이런 부탁을 하게 되어서 미안하네만, 부디 그 친구를 악몽의 협곡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길 바라네. 이 부분은 내가 따로 보상을 하겠네.」
‘이미 안전하게 데려다주는 것부터 전제가 깔려 있잖아. 이 영감탱이야!!’
괜스레 속은 것 같아서 칼은 약이 바싹 올랐다.
「이쯤에서 자네가 극도로 화를 내고 있지 않을까 싶네. 그래도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자네가 악몽의 협곡까지 가는 데 필요한 절차와 경비는 그 친구가 모두 부담할 걸세.」
“흐음.”
그래도 칼은 이어지는 편지의 내용을 보고는 마음이 조금 풀렸다.
페트로 스타니슬라프.
적어도 사람을 부리는 일에 관해서 그는 데제스와 같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극명한 차이가 존재했다.
데제스는 상대가 지닌 재능을 자신을 위해 쓰는 반면.
페트로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그 사람의 재능을 활용하는 편이었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게나. 벌써부터 자네가 없는 이곳이 심심할 지경이라네.」
꾸깃!
칼은 그대로 편지를 구기며 구시렁거렸다.
“능구렁이 영감 같으니라고.”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지만, 칼은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돈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돈은 많을수록 좋았다.
“거기,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칼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선원에게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십니까?”
칼의 신분을 어렴풋이 알아챈 선원은 급히 허리를 조아렸다. 그에게 칼은 조금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심성이 아주 고약하고 돈만 밝히는 영감을 알고 있나?”
“아, 베게누님이라면 저기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설명만으로 선원은 칼이 찾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그가 가리킨 장소에서는 멋들어진 콧수염을 기른 중년의 남자가 선원들을 호되게 질타하고 있었다.
“뭣들 하고 있어! 빨리, 빨리 움직여야지! 급여는 그냥 나오는 줄 알아! 내 돈을 위해서 힘껏 구르란 말이야!!!”
우당탕탕!
그의 명에 선원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
골치 아픈 남자를 만났다는 느낌에 칼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자, 선원은 피식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지?’
의아함에 칼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팔에 붕대를 찬 선원이 힘겹게 방에서 나와 일을 하려고 했다.
“거기 너!!”
“네, 네!”
베게누가 윽박지르자, 선원은 등을 꼿꼿이 세웠다.
“누가 멋대로 기어 나오라고 했나? 가서 처박혀서 누워있어!”
“하, 하지만. 일을 하지 않으면…….”
“시끄러워! 누가 말대답하래! 다 낫거든 배로 시켜 먹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 더 다쳤다가는 내 돈만 축나니까!”
팔을 다친 선원은 죽상이 됐고, 선원들은 푸훗 웃음을 터뜨렸다.
빠직!
베게누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그들에게 소리쳤다.
“입 열지 마! 손이나 움직여!!”
“…….”
뭐지?
생전 처음 보는 부류에 칼은 당황했다.
“하하하, 저는 그만 일하러 가보겠습니다.”
칼과 같이 있던 선원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작업에 동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