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파르테스에서 시간을 보낸 지 어언 반년.
시간이 흘렀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바깥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갸르릉!
기숙사 바깥 정원에서는 바그로바가 쌓인 눈 사이를 활발하게 누비고 있었다.
“저건 강아지가 하는 행동 아닌가?”
아무래도 신수라서 그런지, 추위에도 크게 아랑곳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때 칼의 뒤에서 레인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공자님. 짐은 다 준비됐는데, 어디로 가실 건가요?”
“악몽의 협곡.”
“뭐죠? 그 이름부터 불길한 곳은?”
“미스틱 마운틴처럼 불가사의한 곳이라던데.”
“방학에는 휴식을 취하거나 다른 친구분들이랑 놀러 가는 거라고 들었는데, 제가 들었던 거랑은 이야기가 좀 다르네요.”
나이에 맞지 않는 칼의 행보에 레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살소동을 일으켰던 나약한 공자님이 불과 반년 만에 이토록 강해질 줄이야.
“지금 놀러 가고 있잖아?”
“…….”
정정해야겠다. 아무래도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 같았다.
씨익.
하지만 이전보다 훨씬 보기 좋은 모습이라서 레인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방학 동안은 너도 휴가다. 레인.”
“네?!”
갑작스러운 휴가 통보에 레인은 휘둥그레 눈을 떴다.
‘좀 더 기뻐할 줄 알았는데?’
그 표정이 마치 듣지 말아야 할 걸 들은 사람 같아서, 칼은 조금 당황해하며 레인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놀라?”
레인은 허리를 굽히며 입을 열었다.
“요, 용서해 주세요. 이, 이대로 해고당해 귀향하면 가족을 볼 면목이…….”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레인은 칼이 해고한다는 걸 휴가라는 말로 돌려서 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털썩.
그때 마침 정원으로 들어온 에리와 릴리가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들도 상당히 놀란 모습이었다. 릴리는 들고 있던 책을 떨어트리기까지 했다.
릴리와 에리가 각각 한마디씩 했다.
“……실망이야.”
“칼. 그렇게 안 봤는데.”
두 사람의 표정은 무척이나 진지하고 심각했다.
빠직!
칼은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러니까 오해라고!”
잠시 후.
“꺄르르르르.”
테이블 앞에 앉은 에리는 칼의 해명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칼은 지그시 두 여인을 쳐다보았다.
“미, 미안.”
시선이 따끔했던 릴리는 사과를 한 뒤, 레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레인은 그 말을 왜 해고 통보라고 착각한 거야?”
레인은 면목이 없는지 고개를 수그리며 말했다.
“전에 가문에서 비슷한 사례가 있었어요.”
그 말을 한 레인은 칼의 눈치를 살폈다.
파르테스에 재학하는 동안은 신분을 철저히 감춰야 했다. 게다가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면 칼이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이 녀석들한테는 말해도 상관없어.”
칼의 승인이 떨어지자, 그제야 레인은 가까스로 입을 뗐다.
“프란츠 공자님께서 시녀 한 명이 꽃병을 들고서 앞을 스쳐 지나가자 느닷없이 휴가를 주었던 적이 있어요.”
“뜬금없이?”
에리는 이해가 가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레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전까지는 프란츠 공자님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던 시녀였어요. 그 시녀가 휴가를 갔다 왔을 때는 저택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고요.”
“이해가 가지 않는데.”
“나도.”
앞뒤를 싹 다 잘라먹은 이야기에 둘은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나한테 와인을 뒤집어씌운 놈이군.’
일기장에서 수록된 내용을 참고하면, 프란츠 슈타크는 상당히 악랄한 심보를 지닌 놈이었다.
칼은 무뚝뚝한 눈빛으로 레인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해고 사유는 뭐였지?”
레인은 울분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하찮은 종자가 자신의 그림자에 얼씬거렸다는 이유였어요.”
타앙!
기가 막혔는지, 릴리는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치며 소리쳤다.
“그게 말이 돼?! 신분이 다르면 그림자도 닿으면 안 되는 거야? 자기들 손으로는 청소도 요리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진정해. 릴리.”
에리는 격분한 릴리의 화를 달래주었다.
후룩.
반면 칼은 차를 홀짝 들이켜더니 입을 열었다.
“이유는 아무거나 갖다 붙이면 그만인 거야. 그저 화풀이할 데가 없어서 약자를 괴롭히는 거겠지.”
칼은 직접 프란츠를 본 적이 없어서 그 성향이 어떤지 확실히 단언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일기장의 내용과 프란츠의 가문 내 입지를 생각하면 얼추 추측은 가능했다.
넷째 공자인 프루아 슈타크에 비해 한참이나 능력이 모자란 남자.
가문 내에서 쏟아지는 비아냥거림과 저평가는 겪어보지 않는 사람이라면 모를 것이다. 강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슈타크 가문에서 약자가 느끼는 초조하고 긴박한 감정을…….
그 때문에 프란츠는 열등감을 이기지 못하고 약자에게 횡포를 가했을 것이다.
“……너는 그동안 뭐 했는데?”
릴리는 뚱한 표정으로 칼을 바라봤다.
자신이 알고 있는 칼은 절대 그런 사태를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왕이 약골 공자의 육체에 빙의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자신이 아니었을 때의 이야기라고 말을 할 수도 없는 상황.
칼은 어쩔 수 없이 소매를 걷어 자신의 손목을 드러냈다.
“?!”
“뭐, 뭐야?! 그 흉터는!!”
마구잡이로 그은 흉터를 본 에리와 릴리는 일제히 경악했다.
레인의 표정은 다른 이들보다 더 어두워졌다. 상처의 사연을 그녀보다 잘 아는 이도 없었기 때문이다.
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한테도 말 못 할 사정이 있다고 이해하면 편할 거야.”
칼은 다시 소매를 내린 뒤, 턱을 손에 괴며 레인을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나를 프란츠 녀석이랑 동급으로 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죄, 죄송합니다, 공자님. 사, 상황이 비슷해서. 그, 그렇다고 절대 공자님을 그렇게 본 건 아닌데요.”
짤그랑.
그런 그녀의 앞에 칼은 미리 준비했던 은화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고, 공자님. 이건.”
깜짝 놀란 레인이 눈을 휘둥그레 떴고, 칼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휴가 비용이야.”
“하, 하지만 너무 많은데요.”
“오랜 시간 동안 나를 보필한 것에 대한 작은 보상일 뿐이야. 난 싸우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니까, 네가 필요하다. 휴가를 마치고 무사히 복귀하도록. 이건 명령이다.”
“…….”
칼의 말을 들은 레인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머릿속에서는 어렸을 적 칼과 지내던 나날이 떠올랐다.
유약하고 철부지였던 공자님.
그런 공자는 강박증에 시달려 집안의 물건을 부수고 난동을 부릴 때도 있었다.
사람을 믿지 않아 어느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런 그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자니 그녀의 마음도 점차 무너질 것만 같았던 그때.
그랬던 공자가 지금은 확고한 눈으로 자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울컥!
그 사실에 레인은 눈가가 시큰해졌다.
어깨를 들썩이며 혹시 우는 소리가 새어 나올까 억지로 입을 틀어막았다.
“감사합니다.”
가까스로 조그맣게 답한 그녀는 이내 양손으로 눈을 가렸고.
두 사람을 지켜보던 에리와 릴리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 * *
파르테스의 방학이 시작됐다.
항구에는 각국으로 떠나는 범선들이 몰려 있었다.
칼은 모피 옷을 걸친 채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주변 풍경과 잘 어우러져 시크한 느낌이 들었다.
“진짜 잘생겼다.”
“말만 안 하면, 진짜 내 이상형인데.”
“그만 쳐다봐.”
귀국길에 오르는 여학생들은 그런 칼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스윽.
슬며시 칼이 고개를 돌리자…….
“꺄아아아”
소리를 내며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상한 녀석들이군.”
저들이 왜 저러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칼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갸르르릉!
갑자기 바그로바가 풀쩍 뛰어오더니 자신의 얼굴을 칼의 다리에 비볐다.
“저리 가.”
칼은 거슬렸는지 발로 밀어냈지만,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자인지, 고양이인지.”
칼은 별수 없다는 듯 바그로바를 들어 올려 가슴팍 안쪽으로 넣었다.
바그로바는 칼의 체온으로 데워진 옷자락 안으로 들어가자…….
새근새근.
금세 곯아떨어졌다.
“귀찮은 녀석.”
그렇게 한창 투덜거리고 있을 때, 릴리가 찾아왔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출발 안 해?”
“같이 가야 할 사람이 있어서. 너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건가?”
칼의 질문에 릴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집안이랑 연을 끊은 지 꽤 돼서. 면목 없지만 에리네 별장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지.”
“눈치 보지 마. 내가 같이 놀려고 너를 억지로 끌고 가는 거니까.”
에리가 릴리에게 팔짱을 끼며 얄궂게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칼도 놀러 와도 돼. 파르테스의 방학은 기니까.”
“딱히.”
차가운 거부에 에리는 볼을 뾰로통 부풀렸다.
“진짜. 옷 안에 있는 바바 빼고는 귀여운 점이 하나도 없네.”
“……그건 나랑 상관없는 건데.”
칼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들을 쫓아서 배웅하러 나온 레인은 평상시와 달리 외출복 차림이었다.
“고, 공자님. 건강하시고 즐거운 방학 되세요.”
“그러지.”
주춤주춤하는 레인의 인사를 받은 칼은 에리와 릴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레인을 부탁할게.”
칼은 레인의 안전을 위해 에리와 릴리에게 동행을 부탁했다.
“걱정하지 마. 자, 가자. 레인.”
“네, 네.”
에리는 레인의 손목을 잡아 끌며 항구 쪽으로 향했다.
당황한 레인은 칼에게 다시 한번 꾸벅 허리를 숙이고선 그녀를 쫓아갔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칼과 릴리만 남았다.
잠깐의 침묵.
그것이 어색했는지, 릴리는 칼을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답답한 분위기가 싫었던 칼은 그녀를 보며 말했다.
“……할 말 있으면 해.”
“다, 다음에 힘든 일 있으면 꼭 나한테 말해줘. 어떻게든 도움이 되어 줄게.”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칼의 손목 쪽이었다.
아무래도 전에 봤던 그 흉터가 그녀에게 있어서 충격으로 다가온 것 같았다.
‘누군가한테 걱정 받는 건 또 처음이군.’
왠지 억울하면서도 낯선 기분이 들어 무어라고 대답하기가 망설여졌다.
칼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가까스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럴 일 없어.”
“정말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그 말에 릴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활짝 웃으며 ‘감기 조심해.’라는 말을 남기고는 발길을 돌렸다.
“역시 여자 친구 맞지?”
바로 뒤에서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슈미트가 말을 건넸고, 칼은 인상을 홱 찌푸렸다.
“짜리몽땅해지게 눌러줄까?”
“이미 짜리몽땅한 드워프님이다.”
“그만 해요. 슈미트님.”
바로 곁에 있던 디아나가 슈미트의 볼을 꽉 꼬집으며 제지했다.
“아아아악! 이 녀석! 불공평하게 왜 나한테만 그래!”
“슈미트님이라면 이런 행동을 칼리언트님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디아나의 말은 어떻게 하늘 같은 칼리언트한테 이런 장난을 치겠냐는 의도였으나.
“그런 미친 짓은 할 수 없지.”
슈미트는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릴 수는 없다는 뜻으로 답했다.
“……시끄러워. 준비 다 됐으면, 출발하자고.”
칼은 항구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뒤따르던 슈미트는 자신들이 향할 곳을 물었다.
“근데, 어딜 갈 참이냐?”
“악몽의 협곡.”
가볍게 내뱉은 한마디에…….
쩌적.
슈미트와 디아나는 석상처럼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