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파르테스에서는 신분의 차별이 없이 교육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학비가 비싼 만큼, 여러 가지 교양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어찌 보면 교양 수업은 인간 세상에 차츰 녹아들고 있는 칼에게 가장 필요한 수업이기도 했다.
‘갱생이랑 상관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칼은 무뚝뚝한 시선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히잉!
광활한 승마장이었다. 눈앞에서는 릴리가 성질을 부리는 말 때문에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떨어질까 싶어 고삐를 꽉 쥔 그 모습이 안타까워 보이기도 했다.
“릴리, 침착해. 고삐를 끌어당긴 다음에 채찍으로 둔부를 때려.”
“그, 그치만.”
릴리는 긴장한 나머지 옆에서 조언해주는 에리의 말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서민인 그녀로서는 말을 타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히이잉!
결국 릴리가 타고 있던 말은 제멋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릴리!”
“릴리아나 양!”
당황한 에리와 교수는 다급히 움직였다.
스윽.
바로 그때, 칼이 말의 정면을 가로막으며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멈춰.”
콰드드드득.
그 한마디에 말은 동공이 크게 확장되더니, 발굽을 지면에 끌며 제동을 걸었다.
지면 위로 발굽이 끌리면서 흙먼지가 일어났다.
히이이잉.
말은 칼의 앞에서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고, 고마워. 칼.”
릴리는 머리가 흐트러진 상태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운동 신경은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승마는 무리인 것 같아.”
“출세하려면 탈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으윽!”
칼의 말에 릴리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을 뿐, 그 말을 부정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오늘은 몸과 마음이 지친 마당이라 일단 내려오기로 했다.
“나 잠깐 내려갈게.”
릴리는 다리를 덜덜 떨며 천천히 말에서 내려왔고, 칼은 그런 그녀를 무뚝뚝하게 쳐다봤다.
“적어도 떨어지지 않게 손은 잡아줘야지. 칼.”
뒤늦게 온 에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칼에게 타박을 주었다.
“잘 내려왔는데, 굳이?”
“…….”
이렇게 말하니 에리는 할 말이 없었다.
뒤늦게 달려온 승마 교관은 당황한 표정으로 릴리와 칼을 쳐다보았다.
“승마를 잘하기 위해서는 물론 숙련된 기술도 있어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말과의 교감입니다. 여러분.”
“알고 있지만, 여기 안 되는 사람들이 있네요.”
에리는 씁쓸한 표정으로 칼과 릴리를 쳐다보았다. 이 두 명을 본 말의 반응은 판이하게 갈라졌다.
릴리의 경우는 말들이 무시하는 게 문제인 반면 칼의 경우는……
히이이잉.
말들이 힘없이 고개를 내리깔며 일제히 칼을 피해 다녔다.
“…….”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교관조차 어떤 설명도 하지 못했다.
에리 역시 상당히 난감한 기색으로 칼을 쳐다보며 말했다.
“말한테 돈 뜯은 건 아니지? 아, 돈이 아니라 홍당무?”
빠직!
반쯤 진심이 섞인 농담에 칼은 이마에 핏줄을 세우며 반박했다.
“아무것도 안 했어!”
이것이 억울하다는 심정이구나.
칼은 알게 모르게 인간의 감정을 또 한 가지 배우게 되었다.
승마 수업이 끝나고 릴리와 칼은 오닉스 스퀘어로 향했다.
릴리는 수업 중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는 넌지시 그 화제를 꺼냈다.
“생각해보니, 칼은 동물들이 피해 다녔던 것 같아.”
“또 그 얘기야?”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이야기는 들어보겠다는 듯 귀를 기울였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귀엽게 느껴져 릴리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왜? 일전에 까마귀들이 몰려들 때, 칼이 기웃거린 것만으로 이리저리 날아다녔잖아.”
“그런 일도 있긴 했었지.”
“또 교양 수업 때, 아기자기한 앵무새들이 데제스한테 몰려온 것과는 반대로 칼한테는 아무도 날아들지 않았고.”
“앵무새한테 뇌물 공세라도 펼쳤겠지.”
“호호호호.”
참다못한 릴리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앵무새에게 모이를 주는 데제스의 모습을 떠올리니 우습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툴툴거리는 칼의 모습이 귀여웠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걸 언급했다가는 분명 화낼 테니까. 조용히 넘어가야지.’
“그럼 개와 고양이는 어때?”
칼은 일전에 마미안트 후작 부인의 도베르만들이 자신에게 굴복한 것을 떠올리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개도 똑같아. 그래도 고양이는…… 의외로 괜찮을지도.”
“진짜?”
의외의 답변에 릴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 * *
오닉스 스퀘어의 오두막.
주방에서 레인이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바그로바는 쿠션에 누운 채로 잠에 빠져 있었다.
잘 듯 말 듯 눈꺼풀을 반쯤 감은 그 모습이 귀여워 맥캘리가 슬그머니 손을 뻗자.
크르르르르.
바그로바는 잇몸을 드러내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맥캘리는 뚱한 표정으로 바그로바를 툭 쏘아봤다.
“성격 보소. 지 주인이랑 완전 똑 닮았네.”
털은 복슬복슬해서 만지면 따뜻한 느낌이 들 것 같았지만, 마음을 허락해주지 않으니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덜컹.
오두막 문이 열리며 칼과 릴리가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나른해 하던 바그로바가 눈을 활짝 뜨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기 시작했다.
“나 왔어.”
무뚝뚝한 칼의 한마디에 바그로바는 후다닥 칼에게 달려가 재롱을 피우기 시작했다.
갸르르릉.
앞발을 들어 칼의 다리를 부둥켜안은 모습은 마치 놀아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불공평해. 저런 딱딱한 놈이 뭐가 좋다고.”
맥캘리는 분한 나머지 파르르 몸을 떨었다.
“이, 이건 뭐야?”
바그로바를 본 릴리는 저도 모르게 표정이 풀렸다.
눈이 반짝거리는 걸 보아 아무래도 바그로바의 귀여운 매력에 푹 빠진 듯 보였다.
칼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바그로바. 낯선 품종의 고양이야.”
갸앙!
어처구니없는 소개에 바그로바는 앞발로 칼의 다리를 퍽 때렸다.
‘신수 체면이 있지. 한낱 고양이라고 불릴 쏘랴.’라고 항의하는 듯했지만, 모두의 시선에는 애교를 부리는 것만 같았다.
“바바. 밥이야.”
그러다 레인의 부름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리고 밥그릇에 먹이가 쏟아지자, 사방팔방 뛰어다니더니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레인은 흐뭇한 표정으로 먹이에 정신이 빠진 바그로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릴리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칼에게 물었다.
“……칼. 근데 저건 아무리 봐도 고양이가 아닌 것 같은데.”
“고양잇과긴 하지.”
맥캘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바그로바에 대해 설명했다.
“저건 노빌레 레오네의 새끼야. 고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고, 환경에 따라 갈기와 털의 색이 바뀐다고 해. 몬스터도 때려잡을 정도로 강하기 때문에 신수 중에서도 최고 등급으로 취급받지.”
“…….”
릴리는 그제야 바그로바가 칼을 따르는 이유를 깨달았다.
* * *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칼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앉아 있었고, 바그로바는 그런 칼의 무릎 위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거슬리니 치워버릴까 싶다가도 애정이 가는지, 칼은 어느새 저도 모르게 바그로바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릴리와 레인 둘 다 먼저 돌아갔기에 오두막에는 맥캘리와 칼만 남아있었다.
맥캘리는 안경을 고쳐 쓰며,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이론은 어느 정도 정립이 되었는데, 어째서 3성에 진입하지 못하는 거지? 한계에 도달한 건가.”
그리 말하는 맥캘리를 쏘아보며 칼은 반박했다.
“불만 있으면 나가줄까?”
“후후후후후.”
나가든 말든 신경 안 쓰겠다는 듯 맥캘리는 음산한 미소를 짓더니……
“제발 그것만은…….”
조그마한 목소리로 사정했다.
“……표정이랑 말이 매치가 안 되잖아.”
어이가 없는지 미간을 좁히던 칼은 나름 진지하게 고심을 했다.
파르테스의 여덟 학파는 각자의 마나 연공식을 연구하고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하지만 파르테스에 입학한 학생들이 여덟 학파의 마나 연공식을 익히는 건 아니었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가문의 마나 연공식을 이미 익힌 상태였고, 여덟 학파는 그걸 서포트해 주는 역할이다.
문제는 각 가문의 비전에 관한 건 예민한 문제이기 때문에 교육에는 명백히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칼은 예외에 속했다.
슈타크 가문은 철저히 강자를 위주로 돌아갔다. 따라서 검에 재능이 없던 칼은 버려지는 말로 키워졌다.
제대로 성장하지는 못함은 물론 가문의 마나 연공식 역시 익히지 못한 몸.
하지만 그런 상황이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릇이 비어있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덕분에 칼은 그랜드 마스터의 마나 연공식을 배울 수 있었다.
정확히는 배웠다기보다는 맥캘리와 함께 연구하며 스스로 습득한 거지만.
‘아직은 라마스와 푸르마를 이기지 못한다.’
물론 마왕의 마력을 사용한다면 이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럴 경우 마력을 감당하지 못한 육신이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그것은 칼에게 있어서 패배한 것과 별다를 게 없었다.
‘그런 풋내기들 따위를 경쟁 상대로 삼는 게 어처구니가 없군.’
이건 이것대로 자존심 상하네.
칼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서도 그랜드 마스터가 남겨둔 비급의 글귀를 이미지로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미 사라진 비전을 다시 복원하는 건 칼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녀석이라면 가능하다.’
칼은 진중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맥캘리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른 기사에게 배우지 않고, 마법사인 맥캘리에게 검술을 배우는 것은 그녀의 고정 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분석력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떤 현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과정이 다른 이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문제가 있다면, 그녀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녀는 지금까지 감추고 있던 씁쓸한 표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망나니 제자야. 다른 사람한테 배워보지 않을래? 추천서를 써줄 테니까.”
딱콩!
“으아아악!”
칼은 바그로바를 바닥에 내려놓은 뒤, 맥캘리에게 다가가 검지로 이마를 때렸다.
“이노무 자쉭이! 모처럼 진지하게 말하고 있건만!!”
맥캘리가 빨개진 이마를 어루만지며 씩씩거렸고, 칼은 비아냥거리는 표정으로 답했다.
“난 눈이 높아서 내가 보는 것밖에 안 믿어.”
“…….”
우물쭈물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고, 칼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성미에 안 차면, 학파의 수장도 걷어찰 수 있는 게 나야. 그런 나를 가르칠 수 있는 건, 꼬맹이 스승밖에 없어.”
“존경은커녕, 맨날 장난만 치는 주제에.”
맥캘리가 투덜거렸으나 칼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조급해하지 마. 이 정도 벽은 얼마든지 넘을 수 있으니까. 넘지 못하면 내가 무능한 것뿐이야.”
칼은 자신만만하게 미소를 지으며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당신이 나의 그랜드 마스터다. 그 사실에 자부심을 가져도 돼.”
너무나 확신에 찬 발언이었다.
정신을 차린 맥캘리는…… 그 말에 감격해 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검지로 눈물을 훑으며 말했다.
“정말 성가시게 만든다니까.”
“피차일반이지.”
“푸훗!”
두 사제는 처음으로 서로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 * *
학기 종료 직전, 학회에 모인 교수들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놀라운 재목들이야.”
그들이 살피고 있는 회의자료에는 이번에 논란의 대상이 된 명단이 놓여 있었다.
「1위. 데제스푸아르」
「1위. 칼리언트」
「1위. 릴리아나」
페드로 학장은 진심으로 놀랐는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허허허, 릴리아나도 그 진가를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구먼.”
“부정행위의 가능성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페드로의 단언에 모두의 고민은 깊어졌다.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시험에서 이 세 명은 완벽한 답을 적어 만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들이 이리도 심각한 이유는 세 사람의 수준이 학년에 맞지 않게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릴리아나는 둘째 치더라도 이 두 놈은 손을 써야겠구먼.”
모두가 긴히 고뇌하던 바로 그 순간.
스윽.
회의에 참여해 있던 여학생이 손을 들어 올렸다.
“할 말이 있나? 루시아.”
페트로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입을 열었다.
“적절한 해결책이 하나 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