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아아, 신이시여! 당신의 위대함을 몰라보는 것들이 지상에 가득 몰려있나이다.
주제도 모르고 신에게 반역하는 어리석은 것들.
단 하나의 싹도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신의 기준에 어긋난 것은 응당 처치해야 마땅합니다.
성전에 참가하는 이들에게는 죽음조차 숭고한 희생입니다.
저희는 하늘에서 큰 보상을 받으리라 굳게 믿나이다.
그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은 없고, 죄의 깊이만큼 징벌이 저희를 가호하리라.”
그것은 이교도를 심판하는 이단 심문관, 베젤의 입에서 튀어나온 기도문이었다.
정확히는 기도문임과 동시에 그를 수호하는 신성 마법이었다.
‘저게 그 유명한 세크루스 주문인 건가?’
먼발치에서 꼽추의 사내가 신성력으로 뒤덮인 베젤을 보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신성 마법 세크루스.
그것은 사제 혹은 성기사 본인의 영향력에 따라 상대에게 금제를 가할 수 있는 성역 지정 마법으로…….
각 사제가 생각하는 ‘죄목’에 따라 그 특징과 효과는 천차만별이었다.
가령, 베젤의 세크루스 같은 경우에는 ‘얼마나 많은 인간을 죽였는가?’라는 주제로 힘을 발휘한다.
여기서 인간을 죽인 업보를 카르마라고 칭하며…… 그 카르마가 크기가 큰 죄인일수록, 베젤의 신성 마법은 강하게 온몸의 사지를 제압한다.
“커헉!”
그 증거로 세크루스의 범위에 있던 꼽추의 사내, 티미드는 전신이 빳빳하게 경직됐다.
‘숨도 쉬기 어렵군.’
기도를 마친 눈을 뜬 베젤은 티니드를 쳐다보고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 추악한 몰골을 드러내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리 말하면 베젤은 세크루스를 해제했고, 세크루스의 압박에서 겨우 해방된 티미드는 가까스로 숨을 토해냈다.
“허억, 허억, 허억! 소, 송구합니다.”
티니드는 재빨리 몸을 조아리며 사과했다.
“그 마녀는 찾았는가?”
“죄, 죄송합니다. 파르테스의 마도사, 페트로의 결계 마법으로 인해 야고가 모조리 봉인 당하는 바람에 추적에 실패했습니다.”
싸아.
티니드의 변명에 베젤은 싸늘한 어투로 말했다.
“내가 뭐 때문에 천박하고 배은망덕하며 추잡한 이교도인 너를 살려두는지 잊지 않았겠지.”
“무, 물론입니다. 세상에 있는 마녀를 몰살시킬 때까지, 저는 당신에게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하찮은 이교도의 충성은 필요 없다.”
베젤은 내심 티니드를 죽일까 했지만. 아직 이용 가치가 있으므로 넘어가기로 했다.
바로 그때, 사제복을 정갈하게 갖춰 입은 성기사가 베젤을 찾아왔다.
“주교님.”
“무슨 일이지?”
베젤이 차가운 시선으로 성기사를 쳐다보자, 그는 예를 갖춘 뒤 입을 열었다.
“이실리아의 공주가 찾아왔습니다.”
“안내하도록.”
베젤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쏴아아아아!
베젤이 자신을 찾아온 이실리아의 공주를 만난 곳은 거대한 범선이었다.
얼마 전에 바흐훈트 추기경이 이곳에 들렸을 때 두고 간 것으로, 현재 실질적으로 이 배를 통솔하는 이는 베젤이었다.
테이블에 앉아있는 면사로 얼굴을 가린 이실리아의 공주를 쳐다본 베젤은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역시 소문대로 얼굴을 보이지 않을 생각인가 보군.’
“호호호, 만나서 반가워요. 주교님.”
베젤은 생각보다 넉살이 좋은 에리를 보며 대화가 쉽지 않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하하하, 이렇게 찾아와주시니, 실로 영광입니다.”
그는 사람 좋은 표정을 하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이곳을 찾아온 이유가 뭡니까?”
“아, 용건을 말하기에 전에. 무작정 찾아오는 게 마음에 걸려서 선물을 준비해봤어요.”
그녀가 말을 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200필의 비단과 값진 보석이 담긴 거대한 상자를 내놓았다.
상자의 크기는 딱 봐도 거대했다.
일순간 성기사들의 눈이 탐욕으로 물들었다.
“제 신앙에는 치명적인 독이 될 것 같군요.”
염려가 된 베젤이 거절하려는 순간이었다.
“좋은 일에 써줬으면 좋겠어요.”
사리사욕에 쓰지 않으면 괜찮지 않냐는 말에…….
“그렇다면야.”
베젤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수긍했다.
“오늘은 안타깝지만 정박 기간을 초과해서 부득이하게 부탁을 하려고 오게 됐어요.”
‘권유로 들리지만, 속뜻은 추방이랑 다름없군.’
베젤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아직 이교도의 무리가 이곳에 어슬렁거리고 있습니다. 이실리아의 치안을 생각해서라도 그것들은 반드시…….”
“이곳에는 권위 높은 마도사, 페트로 스타니슬라프 학장님이 있으니, 너무 염려해주실 필요는 없어요.”
“이교도를 잡는 일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순간, 그 말과 함께 베젤의 눈매가 싸늘하게 변했다.
그가 지금 당장이라도 배덕한 무리로 판단해 검을 빼 들까 생각할 때였다.
“간곡하게 부탁드리는 거예요. 저희는 지금 검은 나비를 뿌린 흑마법사를 어떻게든 잡기 위해 혈안이 돼 있거든요. 그런 중대한 일을 타국에 맡기는 것은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감의 차이라고 할까?
말에 묘하게 가시가 돋친 느낌.
면사 너머로 보이는 시선 또한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것을 본 베젤은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미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아냈나 보군.’
‘야고’를 뿌린 마법사는 티니드였지만, 그것을 뿌리게 만든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아마 눈앞에 있는 공주도 그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챘을 거다.
하지만 여기서 그것을 문제 삼고 베젤을 포박했다가는 산크투아리움의 보복이 이어질 게 분명했다.
즉 상대가 하려는 말은 ‘모른 척 넘어가 줄 테니, 꺼져라.’였다.
‘여왕이 될 그릇은 역시 다르군.’
상대가 진실을 알고도 이렇게 나온다면, 성국의 주교로서 고집을 부리기도 어려웠다.
베젤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제안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교도의 싹을 남겨두는 것은 탐탁지 않지만, 어쩔 수 없군.’
“하하하하, 이거 의도치 않게 이실리아에 분란을 일으킨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성국은 우호국인 이실리아에게 해악이 되는 일은 절대 벌이지 않습니다.”
“호호호, 저도 성국이 그럴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그녀는 웃음을 지어 보였고, 베젤 역시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밤에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어머, 그렇게까지 서두를 필요는 없는데요.”
“아닙니다. 이 한 몸 불살라서라도 사명을 행해야 하는 저에게 휴식은 필요 없습니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잠시 후.
이동 중인 마차 안에서 점차 멀어져가는 산크투아리움의 배를 바라보고 있던 에리는 그제야 면사를 벗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후우. 광신도를 상대하는 건 정말 어려워.”
“고, 공주님. 누구 귀에 들리면 어쩌려고 하십니까?”
그녀의 호위를 담당하는 기사, 에드윈은 검지를 입술에 붙이며 주의를 주었다.
“그게 뭐 어때서요?”
쓴웃음을 지은 에리는 이내 저들이 벌인 악행에 치를 떨었다.
성국은 고작 어린 마녀 하나를 찾기 위해 타국에 저주를 퍼트렸다.
게다가 어젯밤에는 상선을 덮쳐 선원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또한 그 와중에 갇혀 있던 노예들 역시 죽였다.
엄격하고 합리적인 법을 통치의 근간으로 둔 이실리아에서 이러한 행동은 결코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지다.
하지만 상대가 압도적인 무력을 갖춘 초강대국이기에 이런 외교적 결례도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평소의 발랄한 모습과 다르게 지금 에리의 눈빛은 무척이나 차가웠다.
“저들은 신의 이름을 뒤집어쓴 무뢰배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에요.”
“…….”
에리의 평에 에드윈은 더 이상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 역시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무모했습니다.”
그것만큼은 자신 역시 공감한다는 듯 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했으면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 깨울 뻔했죠.”
“그렇다면 어째서…….”
“꼭 그렇게 해달라는 요청이 있어서요.”
머릿속으로 칼을 떠올린 에리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네?”
“겸사겸사 제 뜻도 있었고요.”
그녀는 한마디를 덧붙이며 대화를 흐지부지 끝냈다.
‘날 움직이게 만들었으니, 반드시 그만한 성과를 내야 할 거야. 칼.’
마음속으로 칼에게 한마디 한 에리는 피식 웃으며 에드윈에게 말했다.
“얼른 릴리한테 가고 싶네요.”
“즉각 파르테스로 향하겠습니다.”
그녀가 다시 발랄한 표정을 짓자, 안심한 에드윈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 * *
깊은 밤.
우우우우.
호각 소리에 맞춰 산크투아리움의 성기사단이 탑승한 배가 유유히 이실리아를 떠났다.
항구를 떠난 바다 위의 배에는 누구도 침입할 수 없었다.
보초를 서는 성기사 외에는 모두가 안심하고 자고 있는 시간. 탐욕에 눈이 깬 몇몇이 모두의 시선을 피해 거대한 상자로 향했다.
작은 불에 의지하고 있던 성기사 두 명은 조용히 수군덕거렸다.
“이, 이래도 괜찮을까? 주교님한테 들키면, 끝장날 텐데.”
“크크크크, 괜찮아. 전쟁이 벌어지면 아녀자를 덮치고 보물을 탈취하는 것도 신을 숭배하는 행위 중 일환이잖아. 너도 나도 충분히 전장에서 즐길 대로 잘 즐겼잖아.”
“그것도 그렇지.”
설득이 됐는지 두려움이 사라진 그들은 그대로 궤짝을 열어젖혔다.
안에는 진주부터 시작해 각종 금화와 보석이 가득했다.
“크크크, 한두 개 정도는 슬쩍해도 알 도리가 없지.”
그들은 기어코 보석에 손을 대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푸욱!
느닷없이 보물 더미 속에서 단검이 튀어나오더니, 남자의 목에 꽂혔다.
“쿨럭!”
기습을 허용한 성기사는 목울대를 꿈틀거리다 곧 입에 피를 머금으며 죽음을 맞이했다.
“비, 비상…….”
소스라치게 놀란 옆의 동료는 즉각 긴급 상황인 것을 알리려고 했으나.
콰아아앙!
이윽고 보물을 헤집으며 튀어나온 칼이 그의 뒤통수를 붙들고는 배의 기둥에 얼굴을 찍어버렸다.
“끄아아아.”
엄청난 고통에 그는 그대로 비명을 토해냈으나…….
쏴아아아아.
칼은 커다란 보석 하나를 그 입에 집어넣어 목을 틀어막았다.
“커, 커헉!”
“성기사? 성스러운 척하는 건달들이겠지.”
콰앙!
조소를 남기며 칼은 발로 그의 얼굴을 짓밟아 숨통을 끊었다.
“뭐야! 무슨 소리야!!”
제압하는 소리가 컸기 때문에 주변의 기사들이 몰려와 쾅쾅 문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왜 잠겨있어!”
하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혹여 자신들의 행위가 발각될까 싶어 죽은 두 사람이 걸쇠를 걸어 놓았기 때문이다.
궤짝의 문을 슬그머니 닫은 칼은 피식 입꼬리를 올리더니…….
콰앙!
있는 힘껏 문을 걷어차 그대로 날려버렸다.
“크아아아악!”
문 앞에 있던 이들은 문과 함께 날아가 갑판 위에 나뒹굴었다.
스릉! 스릉! 스릉!
“어떤 놈이냐!!”
분노한 성기사들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칼에게 일제히 검을 겨누었다.
스릉!
칼 역시 바스타드 소드를 빼 들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네놈들이 경멸하는 이교도.”
“…….”
짤막하게 자신을 소개하는 칼을 본 성기사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칼이 발산하는 붉은 기운에 닿자,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극심한 공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칼은 나른한 표정으로 바스타드 소드를 어깨에 갖다 대며 말했다.
“뭐해? 너희가 바라던 성전이 열렸잖아.”
꿀꺽!
하지만 성기사들은 경계만 할 뿐,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칼은 눈에 살기를 품으며 그들에게 한마디를 더했다.
“움직여. 버러지들아.”
“으아아아아아악!!!”
더 이상 모욕을 참을 수 없었던 성기사들은 일제히 칼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