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죽고 싶지 않아. 죽기 싫어.
깊은 절망감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게 되는 걸까.
‘……도와줘.’
그 한마디를 중얼거리며…….
스륵.
디아나는 눈을 떴다.
‘어떻게 된 거지? 난 조금 전까지 노예상들에게 붙잡혀 있었는데.’
머릿속에서 타오르는 것만 같은 심홍색의 머리칼과 눈동자를 지닌 남자가 아른거렸다.
“그, 그 남자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타닥.
난로에서부터 나온 온기가 방안을 데우고 있어서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바로 그때, 작은 그림자가 문 앞에 드리워졌다.
“아아, 이제 일어났냐? 인간 꼬맹이.”
문을 통해 들어온 이는 수염이 푸석푸석한 드워프였다.
“다, 당신은 누구죠?”
디아나는 이불로 자신의 몸을 감싸며 극도로 상대를 경계했다.
“안 잡아먹으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내 이름은 슈미트다. 위대한 달빛의 행진에 소속된 장인 중 한 명이야.”
슈미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디아나에게 따뜻한 스튜를 내놓았다.
꿀꺽!
그 감미로운 향에 디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주륵 흘리다가, 곧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먹어. 먹으라고 내놓은 걸 왜 안 먹어?”
“가, 감사합니다.”
경계심이 조금 풀렸는지, 디아나는 스튜를 후룩 들이키며 슈미트에게 말했다.
“그 붉은 남자는 어디 있나요?”
“아아, 그 녀석.”
언급하기도 짜증 났는지, 슈미트는 인상을 왈칵 찌푸리며 대뜸 신세 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그 자식. 한밤중에 졸려 죽겠는데, 물에 젖은 생쥐마냥 들어와서는 두 번째 월척이다. 하며 너를 건네주고 갔지.”
“워, 월척이요?”
“물속에서 건졌다는 말이야. 어쨌든, 그렇게 와놓고서는 대뜸 이가 완전히 나간 예비용 검을 던지면서 ‘내구도가 약해. 단단하게 고쳐놔.’라고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잖아!!! 아우 열불 나!”
“죄, 죄송해요.”
뭔가 그 모든 게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디아나는 죄책감이 들었다.
“험담을 할 거면 내가 없는 데서 하지. 그래.”
바로 그때, 칼이 레르노만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왔다.
“간밤에 무리해서 그런지 몹시 피곤하군요.”
레르노만은 극심한 피로를 느끼며 콧잔등을 매만졌다.
움찔!
칼과 눈이 마주친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등을 꼿꼿이 세웠다.
처음에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인 것 같아서 편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성기사들을 단신으로 박살 내는 모습을 보고 칼이 압도적인 강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예의를 갖추게 되었다.
디아나의 모습을 본 슈미트는 쯧 혀를 차며 칼에게 핀잔을 날렸다.
“얼마나 험악하게 굴렸으면, 애가 저렇게 긴장을 해?”
“딱히. 한 번만 더 기어오르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을 뿐이야.”
슈미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찼다.
“봐봐. 뭐라고 했네. 너 여자랑 애는 안 건드린다며?”
“한마디밖에 안 했어.”
칼은 슈미트를 향해 찌릿 눈총을 줬다.
투덕거리는 두 사람을 본 디아나는 황급히 양손을 들며 만류했다.
“아,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디아나는 칼을 잠잠히 쳐다보다가 살포시 얼굴을 붉혔다.
전날 밤에 자신을 버리고 성기사단에게 협조를 했다면, 칼과 레르노만은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지키겠다고 칼이 각오를 밝혔을 때는 솔직히 안도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과격하지만 따뜻하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고 내심 경외심이 들기도 했다.
그 때문일까?
칼에 한해서 완전히 마음을 연 디아나는 고개를 꾸벅이며 예를 갖췄다.
“갈까마귀의 부리의 전 수장 나슬렛 베네피카의 딸, 디아나 모르프 베네피카가 은인에게 인사 올립니다. 전날 밤의 은혜는 무슨 일이 있든 반드시 갚겠습니다. 살려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인사를 받은 칼은 팔짱을 끼며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유가 있어서 살려준 것뿐이야. 약속 잊지 않았지?”
“기억하고 있어요.”
뭐든지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디아나.
그런 그녀를 보며 레르노만이 질문을 건넸다.
“내막을 알고 싶군요. 당신과 산크투아리움 사이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움찔!
산크투아리움이라는 말에 디아나는 속이 울렁거렸는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극심한 공포에 오한이 일었다.
“그, 그건…….”
그녀가 고개를 수그리고서 몸을 들썩거릴 때.
덥석!
칼은 디아나의 턱을 잡아 올리며, 매서운 눈길로 쳐다봤다.
오싹!
심해와 같이 깊고 차가운 눈이었으나, 그 속에서는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 눈과 마주한 디아나의 가슴에는 산크투아리움에 대한 공포 대신, 칼에 대한 공포가 다시 자리 잡았다.
“두려워할 대상이 누군지 깨달았나 보군. 말해.”
칼이 명령을 내리자, 신기하게도 디아나는 입을 열 수 있었다.
* * *
갈까마귀의 부리.
그들은 여러 갈래로 뿌리가 갈라진 흑마법 지파 중 하나였다. 그들은 현재 명성을 떨치고 있는 스첼레투스 학파와는 전혀 다른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 이유는 흑마법을 대중에는 전파하지 않겠다는 집단의 목적에 더해, 본인들의 흑마법이 세상에 해가 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주로 연구하는 분야는 독약 연구와 저주의 해주 방법, 역사의 연구 등이었다.
갈까마귀의 부리가 하는 연구의 목적과 방향성은 파르테스와 비슷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안 가 범죄자 집단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그것은 집단에 반역을 일으킨 두 마법사 때문이었다.
한 명의 이름은 칸투버그.
그는 불로불사에 집착하여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일으켰다.
갈까마귀 부리는 응징하기 위해 마법사를 보냈으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해진 그를 잡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동료들을 학살한 뒤 연구 자료를 훔쳐 달아났다.
다른 한 명의 이름은 티미드.
그는 등이 굽은 꼽추이며 겁이 많고 연구에는 항상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는 마법사였다. 딱히 추구하는 목표조차 없었다.
어느 날 티미드는 거리에서 한 여인을 겁탈한 후 도망가던 중 성기사단들에게 구속됐다.
붙잡힌 그는 오로지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동료들의 소재지를 밝혔고, 성기사단들은 마녀사냥이란 명목 아래 갈까마귀의 부리를 사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번의 수난을 겪은 갈까마귀의 부리는 결국 해체할 수밖에 없었고.
딸인 디아나를 지키다가 큰 상처를 입은 나슬렛은 사경을 헤매면서 중얼거렸다.
-어떻게든 책임져야 해. 갈까마귀 부리의 수치, 그것들만은 반드시 정리해야만 해.
하지만 그것은 이룰 수 없는 비원.
나슬렛은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그 현실에 절망한 디아나는 그대로 무너질 뻔했지만.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두 명의 배신자를 처단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성급했다.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죽일 수 있는 극도의 암살 마법만 익힌 채, 배에 올라탄 것이다.
단순히 복수심은 아니었다. 지체했다가는 무고한 이들이 희생될 수도 있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취지는 분명 좋았다.
첫 번째 목표는 이실리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칸투버그였다.
여기서 그녀가 간과한 사실은 보복을 당할까 봐 두려웠던 티미드가 성기사단을 움직여 습격을 가할 거라는 사실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녀가 타고 있던 배는 대파 당하고 디아나는 표류하게 되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표류하던 중 노예상들에게 붙잡혀 구속돼 있었어요.”
“야고는?”
칼의 질문에 디아나는 수심에 찬 얼굴로 답했다.
“야고를 흩뿌려서 절 찾는 건 분명 티미드가 한 짓일 거예요. 성기사단들은 마녀를 죽이겠다는 강한 집작 때문에 그걸 용인하고 있는 거고요.”
“이제야 내막이 파악됐네요.”
레르노만은 한결 가벼워진 표정을 지었다.
“흐끅! 흐흐흐흐흑!”
반면, 노예였을 때의 자신과 비슷한 디아나의 사정에 슈미트는 눈물, 콧물을 짜며 말했다.
“많이 힘들었지?”
“……네.”
눈치를 보다 힘겹게 답을 하는 디아나의 눈에는 구슬 같은 눈물이 또르륵 흐르고 있었다.
……힘들었다.
짊어져야 할 사명이 너무 커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압도적으로 실패하여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목숨만 겨우 건진 상황.
‘분해.’
그녀는 결국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떠는 그 모습이 실로 안타까워, 레르노만조차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하지만 계약상 그가 할 일은 모두 끝났기에 여지없이 등을 돌렸다.
칼도 구태여 그를 붙잡지 않았다.
‘기분이 참 더럽군.’
내막을 파악해서 주동자를 잡아 패려고 했었다.
하지만 성국의 이단심문관은 지금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였기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그 녀석이 아픈 건, 미친놈들의 난동 때문이라는 거였군.’
머릿속으로 릴리를 떠올린 칼은 미친 듯이 분노가 솟구쳤다.
“디아나.”
“……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디아나는 어떻게든 눈물을 그치며 답했다.
“내가 너의 복수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네?”
디아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잠깐. 너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슈미트는 급하게 칼을 만류했다.
“내가 뭘?”
“난 분명 네가 대단한 놈이란 걸 알고 있어. 그 마미안트 후작 부인을 농락했다는 게 난 아직도 믿기지 않아. 하지만 네가 지금 상대하려는 건, 이 대륙 최강국 중 하나야!!”
“그래서 어쩌라고?”
“…….”
칼의 반박에 슈미트는 말문이 막혔다.
* * *
따사로운 햇살이 창문을 투과해 스며들었다.
밤새 시름시름 앓았던 릴리는 볼을 부풀렸다.
“참고서 조금만 보면 안 돼?”
“안 돼.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았잖아.”
그녀를 간호하던 에리는 단호하게 의지를 표명했다.
“출세하기 위해서는 쉬면 안 된다고.”
“흐음, 정말 출세를 위해서야?”
에리는 기묘한 눈웃음을 지으며 릴리를 쳐다봤다.
속마음을 들켰다고 생각한 릴리는 얼굴을 화끈 붉히다 뚱한 표정으로 에리를 쏘아봤다.
“에리. 자꾸 놀리면 나 정말 화낼 거야.”
“릴리를 놀리지 않으면 난 어떻게 살라고. 좀 봐줘.”
아양을 떠는 말투에 릴리는 피식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못 말리겠네.”
“그나저나 몸은 괜찮아?”
“응.”
“왠지 기분이 좋나 보네.”
“꿈을 꿨어. 칼이 왠지 날 간호해주는 꿈을…….”
칼이 자신의 이마에 손을 얹은 모습을 떠올린 릴리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꾸, 꿈 맞겠지?’
“호호. 정말 칼이 그랬으면, 내일은 해가 서쪽에 뜨겠네.”
“그, 그렇겠지?”
에리의 말에 릴리는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바로 그때.
푸드득.
조그마한 전서구가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흐음.”
비둘기 다리에 묶인 쪽지를 발견한 에리는 편지를 풀어 스윽 읽기 시작했다.
“으음.”
그러고는 무척이나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는데? 누구한테 온 건데?”
“아, 아무것도 아니야.”
에리는 황급히 편지를 감추고는 분노가 들어찬 웃음소리를 내었다.
“후후후, 다 끝나고 보자. 오면 죽었어.”
“에, 에리. 괜찮아?”
평소와 다른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릴리는 고개를 갸우뚱했고.
“난 해야 할 일이 떠올라서 먼저 가볼게. 몸조리 잘해.”
에리는 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 * *
저벅저벅.
궁전으로 향하는 에리의 발걸음은 발랄하였으나, 알 수 없는 한기가 흘러나왔다. 또한 생글생글 웃던 눈은 평소와 다르게 예리한 빛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전 받은 쪽지를 슬그머니 펼쳐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산크투아리움의 성기사단을 추방시켜줘. 명목은 과잉진압 정도면 될 것 같아.」
짤막하면서도 간단한 문구에 분노하던 에리는 곧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되긴 뭐가 돼. 이 웬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