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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마왕은 갱생이 어렵다-44화 (44/197)

#제44화

쏴아아아.

바람에 흔들거리는 선내.

그곳에는 너덜너덜한 양쪽 손이 구속된 남자 하나가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가던 칼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배 안을 살폈다.

배 안에는 팔다리가 묶인 이들이 노예처럼 갇혀 있었다. 그들은 생기가 없는 눈으로 칼과 레르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2세가 군림한 이후로 이런 대담한 짓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간도 크군요. 주요 고객이 누구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

레르노만의 물음에도 피투성이가 된 선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 여기입니다.”

그는 대신 가장 구석에 있는 나무 감옥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양쪽 머리를 질끈 묶은 소녀가 양팔이 구속된 채로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그녀가 마녀의 후예인가요?”

레르노만의 질문에 선원은 그녀의 신상 정보를 털어놓았다.

“이름은 디아나 모르프 베네피카. 나이는 열넷으로 난파된 배에서 간신히 건져낸 최상급의 상품입니다. 난파됐던 배에 ‘갈까마귀의 부리’의 깃발이 걸려 있어서 저희는 편하게 ‘마녀의 후예’라는 호칭을 썼습니다.”

찌릿!

선원의 말에 디아나는 살벌한 눈으로 선원을 쏘아봤지만.

선원은 오히려 응큼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앙칼진 시선이 아주 매력적인 데다, 누구도 손을 대지 않는 최상품으로…….”

“수고했어.”

“네?”

칼이 갑작스럽게 말을 끊자, 그는 심히 당황하며 되물었다.

콰앙!

“크아아아악!”

칼은 인정사정없이 그의 복부를 걷어차 나무 감옥을 통째로 무너뜨렸다.

“쿨럭, 쿨럭.”

피를 토한 그는 연신 헛기침을 하다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

디아나 역시 과격한 칼의 행동에 심히 당황했다.

언뜻 봐도 노예를 사기 위해 온 고객은 아니었기에 디아나의 경계심은 극도로 높아졌다.

“나, 날 죽이기 위해서 온 거야?”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지.”

나른한 말투로 입을 연 칼은 검은 나비를 보여주었다.

“……이거 네가 한 짓이냐?”

“그, 그건?!”

그것이 저주의 한 종류인 야고라는 걸 간파한 디아나는 푹 고개를 수그렸다.

“……내가 아니야.”

“이 저주를 퍼트린 녀석은 갈까마귀의 부리랑 관련이 있나?”

그녀는 살기 어린 눈으로 답했다.

“……아예 없지는 않아.”

“내막을 알고 싶은데,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

칼의 제안에 그녀는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아마 그쪽에서 무섭다고 발을 빼게 될걸. 자신 있으면, 날 여기서 꺼내줘.”

콰아아앙!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칼은 바스타드 소드를 꺼내 들어 부착된 쇠사슬을 절단해 버렸다.

우악스런 힘에 벽도 같이 허물어지며 그 파편이 튀자…….

“꺄아아아아악!”

겁을 집어먹은 디아나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양팔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 무슨 생각인 거지?

과격하게 일을 벌인 칼을 보며 디아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칼이 심홍색의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입을 뗐다.

“디아나라고 했나?”

“네? 네.”

위압감에 겁을 집어먹은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말을 높였다.

“다시 한번 날 떠볼 생각이라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시키면 바로 대답하고 요구 따위는 하지 마.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오싹!

또다시 기만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의 눈빛.

“아, 알겠어요.”

“일어설 수 있나?”

“네? 네!”

오랫동안 앉아 있다 보니 다리가 저리기는 했지만, 디아나는 가까스로 다리를 떨며 몸을 일으켰다.

“가지. 레르노만, 부축해줘.”

“알겠습니다.”

명령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지만, 칼의 기세에 밀린 레르노만은 디아나를 부축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디아나는 갑작스럽게 해방되어 얼떨떨한 기분이었지만,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기에 입을 열었다.

“하, 한 가지 해야 할 말이 있어요.”

“뭐지?”

“수, 술법 야고는 저주라고 대부분은 알고 있지만, 사실 그 술법은 사람의 피 냄새를 나비에게 기억하게 한 다음 대상을 찾아내는 추적 마법이에요.”

“……너를 찾고 있다는 이야기군.”

“아,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조금씩 실마리가 풀어져 가는 와중에 레르노만은 문득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서, 설마 당신을 쫓고 있는 건…….”

“산크투아리움의 이단심문관 베젤. 절 쫓고 있는 건, 바로 그들이에요.”

“맙소사!!”

절망적인 소식에 레르노만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카앙! 카앙! 카앙!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염이 번지는 소리와 함께 칼부림이 벌어졌다.

“크아아아악!”

“찾아라! 마녀와 결탁한 무리다! 단 한 명도 남기지 마라!!”

연이어 들려오는 비명 소리.

파르르르.

안 좋은 일을 떠올렸는지, 디아나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씨익.

반면 칼은 기가 막혀서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보기 좋게 걸려든 건가.”

“지, 지금 웃을 상황이 아닙니다. 왜 그러십니까?”

“그냥. 어떤 기분 나쁜 녀석의 손에 놀아났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기분 나쁜 녀석, 그것은 물론 데제스를 일컫는 말이었다.

이번 사건은 데제스도 예상치 못한 일이 분명했다.

그러나 데제스는 이 상황을 이용해 칼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자신은 가만히 앉아 성기사단과 칼 사이에 마찰을 일으켜 그를 죽이려 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기가 막힌 타이밍에 성기사단이 범선을 습격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붙잡힌다면 칼은 마녀와 결탁한 이단으로 취급될 게 분명했다.

산크투아리움 교국의 교황은 그 권위가 나라 바깥에도 미칠 정도로 강했다.

특히, 이단에 관해서는 어떤 상의도 없이 즉결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초강대국.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산크투아리움과 마찰을 일으키기 싫은 국가들은 이를 어쩔 수 없이 용인했다.

따라서 산크투아리움이 이단 심판이라는 명목으로 누군가를 해하려고 해도, 그저 눈을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억지마저 통했다.

제아무리 루콘 최강의 무가인 슈타크 가문이라 해도 산크투아리움의 성기사단은 절대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세력 중 하나였다.

“레르노만. 얼굴을 가릴 가면은 있나?”

“준비는 해놓고 있었습니다.”

칼은 레르노만이 건네준 가면을 착용했다.

뒤이어, 레르노만과 디아나도 가면을 착용했다.

“차라리 이 여자는 버리고 가는 것이 성기사단들의 손에서 빠져나가기 용이하지 않겠습니까?”

“그, 그만둬. 뭐든지 할 테니까 제발 그것만은?!”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디아나는 다급하게 간청했지만, 레르노만은 그녀의 말은 철저히 무시하며 오직 칼의 등을 쳐다보고 있었다.

스릉.

그러나 대답 대신 칼은 바스타드 소드로 레르노만의 목젖을 살짝 찔렀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레르노만은 조금 움츠러든 목소리로 말하며 칼을 쳐다봤다.

칼은 심홍색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날 약속도 지키지 않는 버러지로 만들지 마라. 만약, 여기서 네놈이랑 저 여자를 지키지 못한다면, 내 사지 중 하나를 내 손으로 잘라내겠다.”

꿀꺽!

‘어떻게 돼먹은 긍지야. 왜 편한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건데?!’

레르노만이 칼에게 압도당해 마른침을 삼킬 때.

화르르륵!

불길 너머에서 성기사용 갑주를 갖춰 입은 이들이 칼을 발견했다.

“찾았습니다! 저기 수상한 놈들이 있습니다!”

“필시 마녀! 마녀의 동료들입니다!”

“이 간악한 이교도 무리들이!!”

광기에 취한 성기사들은 대뜸 거대한 철퇴와 검을 들고서 덮쳐들었다.

“위험해!!”

그걸 본 디아나는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쇄액!

서걱!

칼은 질풍 같은 속도로 그 공격들을 피해낸 뒤, 바스타드 소드를 휘둘렀다.

“크아아아악!”

칼의 공격은 거대한 철퇴를 두 동강 낸 다음 검을 든 기사의 흉갑까지 베어버렸고, 기사의 몸에서는 선혈이 튀었다.

“이놈!!”

순식간에 동료가 당하자, 철퇴를 든 장정의 기사가 칼에게 노호를 토해냈다.

콰아앙!

칼은 상대가 대처하기 전에 주먹으로 투구를 강타했다.

“서, 성기사마저…… 저렇게 어린 나이에…….”

레르노만은 두 눈으로 보았음에도 믿기지 않았는지, 눈을 끔벅끔벅했다.

“잔말 말고 따라와.”

칼은 레르노만과 디아나를 쳐다본 뒤, 그대로 발길을 옮겼다.

“일단 믿어보는 수밖에 없지.”

레르노만은 디아나를 부축하며 급하게 칼의 등을 쫓았다.

*  *  *

화르르르륵!

노예를 태운 상선은 세차게 타오르고 있었다.

기름이 흩뿌려져 있는 갑판 위로 올라서자, 백금빛을 내뿜는 성기사들이 창을 들고서 칼을 견제했다.

‘꽤나 많이 신경 썼군.’

성기사들의 숫자를 파악한 칼은 무뚝뚝한 시선으로 그들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남자를 쳐다봤다.

곱슬거리는 금발에 청록색의 눈동자를 지닌 남자.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그의 눈에는 광기와 희열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가 이 무리를 통솔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놈이 베젤이란 녀석이군.”

“오호, 이교도의 눈에도 내 신앙심이 유독 크다는 게 보이나 보군.”

“가장 재수 없게 생겨서 물어본 건데, 진짜인가 보네.”

빠직!

“지금 당장 죽여!!! 배은망덕한 마녀의 족속들!!”

모욕감에 얼굴이 달아오른 베젤은 부하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고.

척척!

그 명령에 성기사들이 일제히 돌진하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칼은 즉각 검을 휘둘러 창들을 모조리 베어버린 뒤, 적들 사이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크아아아악!”

칼의 검격에 닿은 이들은 치명상을 입고서 차례로 쓰러져 나갔다.

“꽤나 강하지만…… 무리를 하고 있지 않은가. 뒤에 있는 이들이 그렇게 신경 쓰이나?”

베젤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디아나를 쳐다보더니 곧 인상을 험악하게 찌푸렸다.

“저년이 마녀다. 빨리 내 앞으로 데려와!”

“하, 하지만 저 이교도 때문에 돌파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뭐?!”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카앙! 카앙! 카앙!

칼이 검을 휘둘러 커다란 궤적을 그리자, 그 위력을 간파한 성기사들은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붉은 마력을 발산하는 칼의 모습에 지레 겁을 먹은 것도 한몫했다.

빠득! 빠득!

그 모습을 지켜본 베젤은 흥분에 가득 찬 어조로 소리쳤다.

“상대는 고작 이교도 한 명이다! 신앙심이 고작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이냐! 한심한 것들! 상처는 내가 치료하겠다. 썩 해치워!”

두둑.

이교도에게 겁을 먹는 건, 신을 모독하는 행위였다.

무뎌진 정신력을 신앙심으로 가다듬은 성기사들은 날카로운 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스멀스멀.

베젤이 신성 마법을 시전하자 성기사들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씨익.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칼은 저도 모르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병신.”

콰아아앙!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칼의 팔찌가 끊어지며 터져 나온 붉은 파동이 선체 전체로 확산됐다.

카카카카캉!

그들이 굳게 믿었던 신성 마법이 어이없이 깨지더니 파편이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믿기지 않았는지 베젤은 눈을 부릅떴고, 그 틈을 타…….

푸욱!

칼의 바스타드 소드가 그의 복부를 찔렀다.

주륵.

가까스로 양손으로 검을 붙잡아 내장 깊숙이 찔리는 것은 막아낸 베젤이 증오 어린 목소리로 칼에게 소리쳤다.

“네놈!!! 반드시 죽여주마! 감히 신성한 신의 마법에 무슨…….”

후두두둑.

흥분한 탓에 출혈이 더 심해졌는지, 갑판에 피가 우수수 쏟아졌다.

“울컥!”

식도를 통해 죽은 피가 꿀렁거리며 베젤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피가 머리로 쏠리면, 더 흘릴 거다.”

검을 회수한 칼은 넌지시 충고를 남기고는 바다가 훤히 보이는 난간 앞에 섰다.

“무, 무슨 짓이야!”

베젤이 깜짝 놀라 소리칠 때, 디아나를 끌어안은 레르노만이 바다에 뛰어내렸다.

반면 칼은 아직 용무가 남았는지 베젤과 성기사단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 나라에 저주 ‘야고’를 뿌린 게 네놈이라며?”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를!”

혹시 누가 들을까 싶어 베젤은 황급히 소리를 쳐서 칼의 말을 끊었다.

피식.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칼은 입꼬리를 올리며…….

“나중에 보자고.”

그대로 바다를 향해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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