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오닉스 스퀘어 학파.
그 중 맥캘리가 머무는 오두막에서는…….
“하아, 하아”
릴리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가까스로 살았어.”
그녀의 상태를 살피던 맥캘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사실상 일은 내가 거의 다 한 거 아닌가?”
바로 옆에 있던 사제복을 입은 중년의 여인, 미라이 그라펜이 지그시 미간을 좁혔다.
그녀는 사제임과 동시에 8대 학파 중 하나, 룩스 루나에의 수장이었다.
그런 미라이가 이렇게 경쟁학파에 오게 된 것은 릴리가 저주에 걸렸기 때문이다.
저주를 해주하기 위해서는 이실리아에 있는 사제 중 최고라 불리는 미라이의 도움이 필요했다.
미라이의 핀잔에 양심이 찔렸던 맥캘리는 툴툴거리며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여, 열심히 응원했잖아.”
“말이나 못하면…….”
미라이는 한숨을 쉬더니 난로 근처에 앉아 있는 칼과 맥캘리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릴리는 타고난 수재야. 무척 성실하고 학업의 성취도 뛰어나지. 이 아이가 이곳에 오는 것도 그 뜻을 존중해서 가만히 보고 있던 건데. 이런 식이면 곤란해.”
“잠깐! 릴리가 저주에 걸린 게, 왜 우리 때문이라는 것처럼 들리지?”
“정확히는 칼리언트. 너 때문이겠지.”
미라이는 칼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쳐다봤다.
“이유가 뭔지 설명해 주시죠.”
칼은 장작을 난로에 던지며 잠잠히 경청의 자세를 취했다.
“릴리에게 걸린 저주는 ‘야고’다. 뱀프릭 계열의 저주로 생명력을 갈취하는 마법이지. 이 저주는 파밀리아 마법으로 훈련시킨 나비를 통해 전염시킬 수 있어. 이미 저주가 파르테스에 일부 퍼지기 시작했다.”
“진짜?!”
맥캘리는 경악하며 몸을 일으켰다.
만약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라이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재개했다.
“다행히 결계 구축 마법 분야에서 가장 뛰어나신 페트로 학장님 덕분에 저주의 근원인 나비는 모조리 결계에 가두는 건 성공했어.”
“근데, 그게 왜 저 망나니 제자랑 상관있는 거야?”
맥캘리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아서 재차 물었고, 미라이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이런 방식은 ‘새벽의 이슬’의 우두머리인 칸투버그가 즐겨 쓰던 방법 중 하나야. 물론 흑마법은 스첼레투스 학파에서도 주로 다루는 분야지만, 미친 게 아닌 이상 그들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만약에 새벽의 이슬의 잔당 중에 살아남은 이가 있다면, 필시…….”
“나에 대한 원한으로 내 주변 사람을 건드린다는 얘기가 되겠군요.”
“내 추측으로는 그거밖에 없어.”
칼이 ‘새벽의 이슬’을 뒤집은 것은 당연히 비밀이지만, 음지의 인간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진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근거가 부족합니다. 그들이 ‘새벽의 이슬’의 잔당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죠.”
두둑.
미라이는 이마에 핏줄을 세우며 입을 뗐다.
“자네, 여전히 무례하기 짝이 없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맥캘리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자아냈다.
“너 예의 있게 싸가지가 없구나.”
찌릿!
마음에 와 닿을 정도로 무척이나 적절한 말이었다.
그러나 미라이는 마음에 안 드는지, 맥캘리에게 눈총을 줬다.
휙!
눈치 빠른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칼은 슬그머니 릴리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릴리는 괜찮습니까?”
“참 빨리도 묻는다.”
미라이는 힐난의 시선을 던졌지만, 곧 걱정이 담긴 칼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주는 완전히 해주했다. 후유증이 좀 남긴 했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며칠 요양하면 제 컨디션을 찾을 거다.”
“그런가요?”
안도한 칼은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려고?”
맥캘리의 질문에 칼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산책가려고.”
“웃기지 마! 딱 봐도 저주건 놈 찾아서 두들겨 패려는 거구만.”
맥캘리의 반박에 칼은 어깨를 으쓱거렸고, 미라이는 눈매를 좁히며 말했다.
“칼리언트. 이미 소수의 교수들은 자네가 칸투버그를 때려잡은 것을 알고 있네. 그리고 자네가 데제스와 동등한 실력을 갖춘 무시무시한 인재라는 것도 당연히 인정하고 있고. 하지만 성급하게 행동했다가는 저주가 더 확산될 수 있으니, 지금은 우리를 믿고…….”
“지체하는 사이에 저주가 더 퍼지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나요?”
“…….”
핵심을 찌르는 칼의 대꾸에 미라이는 말문을 잃었다.
칼은 지그시 미간을 좁히며 한 가지 더 마음에 안 드는 점을 꼽았다.
“그리고 자꾸 저를 데제스랑 비교하는데, 기분이 별로 좋지 않군요.”
“미, 미안하네.”
학생끼리 서로 비교하는 것은 교육자로서 올바른 행동이 아니다.
그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한 것이지만, 이어지는 칼의 말은 그녀의 예상을 한참 웃돌았다.
“데제스 따위는 제 적수가 못 되거든요.”
“?!”
깜짝 놀란 미라이는 눈을 부릅떴다.
바로 그때.
끼익!
“카, 칼. 릴리는 괜찮아?!”
로웰이 다급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저벅저벅.
칼은 그런 로웰의 몸을 문밖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따라와. 로웰.”
“어, 어딜?!”
당황한 로웰이 침대에 누워있는 릴리와 칼을 번갈아 쳐다봤다.
“잠깐 봐야 할 놈이 있어.”
칼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칼이 걸음을 멈추지 않자, 로웰은 무언가를 살필 겨를도 없이 뒤를 쫓아갔다.
* * *
“여, 여긴.”
로웰은 눈을 부릅뜨며 당황했다.
칼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크고 화려한 별장이었기 때문이다.
파르테스는 귀족 출신의 학생들이 많은 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숙사 역시 규모가 컸고 시설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만족하지 못한 누군가가 개인적으로 돈을 들여 3층짜리의 거대한 별장을 세웠다.
공사 초기에는 편애가 아니냐는 비난과 원성도 많았지만.
이 기숙사의 주인이 데제스라는 것을 알자, 비난은 차츰 수그러졌다.
정확히는 데제스가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문 앞에 서성이고 있으니, 곧 기다란 장발을 포니테일로 가지런히 묶은 모리스가 인상을 구기며 다가와 말했다.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온 거지?”
모리스의 뒤로는 열댓 명이 더 몰려 왔다.
때는 해 질 녘.
데제스를 따르는 이들 역시 이곳에 막 모인 것 같았다.
꿀꺽!
숨 막히는 긴장감에 로웰은 고인 침을 삼켰다.
로웰을 제외한 모두가 반감을 가지고 자신을 쳐다보자, 칼은 코웃음 치며 말했다.
“프랭크가 안 보이는 걸 보니, 그새 갖다 버렸나 보네.”
울컥!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린 모리스와 다른 학생들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평소의 위세를 생각한다면 짓밟아서라도 입을 다물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그 프랭크를 맨손으로 처참하게 박살 낸 칼이었기에,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모리스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시시껄렁한 농담을 지껄이러 온 거라면, 꺼져줬으면 좋겠어.”
“왜 집주인 행세야? 난 데제스랑 할 얘기가 있으니까 너희가 꺼져.”
스릉.
모리스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검집에서 슬쩍 뽑았다.
“두 번 말 하지 않겠다. 꺼져라, 난 프랭크처럼 호락호락하게 당해주지 않아.”
모리스가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보자, 로웰도 검을 뽑아 들었다.
“다짜고짜 칼부림하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흥, 너 따위의 실력으로…….”
모리스가 한껏 비웃었다. 로웰은 울컥하여 기세를 더 끌어올렸다.
“비켜줘, 모리스. 모처럼 찾아온 손님을 문전박대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러나 두 사람의 살벌한 분위기는 뒤에서 넌지시 들려온 말로 인해 허무하게 끝이 났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데제스였다.
단지 모습을 드러낸 것뿐인데. 주변에 있는 이들은 자세를 낮추며 그에게 길을 비켜줬다.
모리스 역시 검을 거두었다.
“피라미들의 호위를 받는 게 좋은가? 얼굴 한 번 보는 게 이렇게 어려워서야 원.”
칼의 핀잔에 데제스는 싱긋 웃어 보였다.
“원래 왕을 알현하는 자리를 가지는 건 어려워야 하는 법이지.”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 이상이라고 생각해.”
“호오. 어쩌냐? 허리를 굽혀 줄 생각은 없는데.”
“…….”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로웰은 황당한 표정으로 ‘진짜 미친놈들이구나.’라는 생각을 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데제스는 오직 칼만을 보며 입을 뗐다.
“그래서 여길 찾아온 이유는?”
“알잖아.”
의미심장한 한마디.
그리고 그 말을 기점으로…….
쿠구구구구.
칼이 살기를 뿜어내었다.
오싹!
마치 날카로운 가시가 전신을 찌르는 것 같은 느낌에, 데제스의 부하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 들어 칼을 향해 겨누었다.
하지만 의아하게도 위협을 가하는 자들이 오히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질겁하고 있었다.
심지어 지금까지 냉소적인 표정을 짓고 있던 모리스마저 잔뜩 칼을 경계하고 있었다.
중후한 것을 넘어서 압도적인 살기.
단지 노출된 것만으로 어느새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기서 멀쩡한 이는 오직 데제스 한 명밖에 없었다.
데제스는 팔짱을 끼며 순순히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어떤 용무로 왔는지 짐작은 가는군. 나도 때마침 너한테 궁금한 게 있으니, 서로 이야기를 하자고.”
“데제스!”
당황한 모리스가 고개를 홱 젖혔지만.
씨익!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는 데제스를 보고는 말문을 잃었다.
* * *
장소를 옮겨 칼은 데제스의 별장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대화는 데제스와 칼, 둘이서만 나눌 수 있게 자리가 마련됐다.
테이블에는 따뜻한 홍차가 놓여 있었지만,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는 데제스와 달리 칼은 팔짱을 낀 채로 인상을 쓰고 있었다.
“내가 왜 여기서 너와 차를 마셔야 하는 거지.”
“서로 티타임을 가질 정도로 친분이 있는 건 아니긴 하지. 그래도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데제스는 칼에게 시선을 던졌고, 칼은 말을 꺼냈다.
“이번 저주 사건도 너랑 관련이 있는 거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네가 칸투버그를 뒤에서 조종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 그리고 이번 사건도 칸투버그와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내가 알고 있는 내막을 말하자면, 이번 사건은 칸투버그와 같은 흑마술 계통을 익힌 자의 소행은 맞아. 연령, 성별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칸투버그를 처리하려고 온 흑마법 조직이야. 이름은 ‘갈까마귀의 부리’.”
“칸투버그는 죽었다만. 목적은 이미 완수했을 텐데, 왜 수작을 펼치는 거지?”
“그들의 존재를 눈치챈 세력이 있기 때문이지.”
데제스의 말에 이실리아의 현 상황과 최근에 이곳에 들어온 세력을 떠올린 칼은 어렵지 않게 그 정체를 짐작해 냈다.
“산크투아리움의 성기사단인가.”
예리한 추리에 데제스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다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칸투버그는 어떤 우.연.한 계기로 이실리아로 들어왔는데. 그가 그전까지 갇혀 있던 곳이 바로 산크투아리움이었어.”
마를 경멸시하는 성기사단.
그런 그들이 범죄자를 놓쳤으니, 당연히 책임감을 느꼈을 것이다.
데제스는 천천히 잔을 내려두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갈까마귀 부리 입장에서는 결단코 성기사단을 이길 수 없으니, 저주를 걸어 인질을 만들어낸 거야. 자신들을 풀어주지 않으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죽이겠다면서 말이야.”
“그 장소가 우연히 이실리아가 된 건가.”
데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칼리언트, 괜찮다면 나랑 손을 잡지 않겠어? 나도 그들 때문에 곤란한 참이거든.”
데제스는 자연스럽게 칼에게 손을 내밀었다.
의외의 협력 제안.
분명 데제스와 협업을 한다면, 순탄하게 일이 풀릴 것 같았다.
스윽.
하지만 칼은 양손을 주머니에 꼈다.
“너무 튕기는걸. 그렇게 내가 마음에 안 들어?”
능글맞은 데제스의 물음에 칼은 그의 귓가에 넌지시 한마디를 던졌다.
“뒈지기 싫으면 꼬리치지 마. 이 거짓말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