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삽화)
험준한 벼랑 위.
휘잉!
등이 떠밀릴 정도의 강렬한 바람이 불어 닥치자, 슈미트는 파르르 떨었다.
‘진짜 겁이 없는 건가? 저 인간은.’
칼은 고민이 많은 표정으로 무덤을 만들고 있었다.
무덤의 주인은 노빌레 레오네라 불리는 신수로……. 칼이 지하 검투장에서부터 이곳까지 힘겹게 끌고 와 묻어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빨리 와. 떨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냥. 누군가를 묻어주는 건 처음인 것 같아서.”
전생에서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이게 과연 올바른 행동인지 칼은 알지 못했다.
굳이 행동의 이유를 묻는다면, 그냥 이렇게 하고 싶어서였다.
생각을 마친 칼은 슈미트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 아직 안 갔냐?”
“네가 데리고 왔잖아! 단물만 쭉쭉 빨아먹고 나서 버릴 참이냐!!”
슈미트는 기가 막혀서 소리를 쳤다. 사실상 노빌레 레오네의 무덤을 만든 것도 그였기 때문이다.
칼은 흙을 한 번 퍼서 뿌린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가도 돼. 이제 자유잖아.”
칼의 말에 슈미트는 잠깐 눈가가 시큰해졌다. 이렇게 홀가분한 기분을 느낀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는 애써 기쁜 감정을 감추며 홱 인상을 찌푸렸다.
“사나이로 태어났으면, 약속은 지킨다. 말했잖아. 스승님의 검을 뛰어넘는 걸 너에게 만들어주겠다고.”
“그때까지 빌붙겠다는 얘기로군.”
이놈을 어찌해야 할까?
‘에리한테 도움을 받아야 되겠군.’
“그리고 이 녀석은 또 어떻게 해야 하나?”
끼잉! 끼잉!
칼은 무덤 근처를 배회하며 구슬픈 소리를 내는 노빌레 레오네의 새끼를 등가죽을 집어 들어 올렸다.
크르르르르르.
녀석은 칼과 눈이 마주치자, 이를 드러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귀찮지만 약속했으니 일단 키우기로 하지.”
칼은 한 손으로 새끼의 등가죽을 집고서 파르테스로 향했다.
크아앙!
자세가 불편했는지 새끼 노빌레 레오네는 다리를 허우적거렸지만, 칼은 무심하게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저기. 좀 더 부드럽게 안아주면 안 될까?”
보다 못한 슈미트가 말하자 칼은 그제야 양손으로 노빌레 레오네를 양손으로 안았다.
그르릉.
낯선 이에 대한 경계 때문에 끊임없이 으르렁거리던 녀석은 칼의 따뜻한 체온에 졸음이 찾아왔는지, 이내 눈을 감고서 잠에 빠졌다.
“이제야 조용하군.”
칼은 무의식적으로 노빌레 레오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보던 슈미트는 핀잔을 주듯 말했다.
“책임지고 키우기로 했으면, 이름을 지어주는 건 어때?”
“실러캔스?”
“그건 내 이름……이 아니고! 넌 아는 단어가 그딴 것밖에 없냐! 이름은 평생 불리는 중요한 거라고!”
“레오로 하지.”
“요즘 시대를 생각하면 너무 구질구질하고 대충인 거 아니냐?”
“…….”
“너 방금 ‘이 시끄러운 자식 갖다 버릴까?’라고 생각했지.”
“알면 쫑알쫑알거리지 마.”
“…….”
거침없는 칼의 응수에 슈미트는 상당히 삐졌는지, 쳇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름이라…….’
나름 슈미트의 충고를 진지하게 듣는 터라, 칼은 다시 한번 노빌레 레오네를 쳐다봤다.
아비와는 다르게 거뭇한 털을 지니고 있지만, 눈빛은 햇살같이 강렬한 황동색이었다.
여기에 나중에 주인의 영향을 받아 속성과 색깔이 변하기에, 노빌레 레오네는 최고 등급의 환수종으로 취급된다.
‘색깔이라…….’
딱히 어떤 색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지고 있는 붉은 노을을 바라보다 무심코 한마디를 내뱉었다.
“……바그로바.”
그 한마디에 녀석은 눈을 끔뻑끔뻑하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다시 잠을 취했다.
“드디어 제 이름을 찾았네.”
슈미트도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는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 * *
칼이 기숙사로 돌아온 직후.
하늘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지더니…….
쏴아아아아.
이내 소나기가 세차게 쏟아졌다.
“레인은 장을 보러 간 건가?”
방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칼은 멍하니 창문을 통해 비가 내리는 도시의 정경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혼자군.”
칼은 무언가를 곱씹었다.
슈미트는 현재 에리의 소개를 통해 칼이 재학하는 동안, 공방에서 일을 하게 됐다.
릴리는 검술 축제가 끝난 직후, 본격적으로 학업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방문이 줄어들었다.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게 그녀답기는 했다.
‘그럼 나도 본격적으로 마나 연공에 매진할 수 있겠군.’
칼은 아직 자신의 경지가 2성 밖에 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는 곧장 가부좌를 취하고선 마나 연공식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투기가 넘치는 마력을 정제하고 정제된 마력을 몸에 적응시킨다.
칼의 경지는 완만하지만, 확실하게 높아져 가고 있었다.
스멀스멀.
칼이 전신에서 붉은 마력을 발산하려고 할 때였다.
박박박박박.
문득 들려오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에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바그로바가 장식장을 발톱으로 벅벅 긁고 있었다.
“산만해.”
평소라면 으름장을 놓았을 거다.
그러나 칼은 어린 개체가 자신의 기운을 자주 접하게 되면 심신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걸 알기에 자제했다.
“살다, 살다 개까지 키우게 될 줄이야.”
크르르르.
크아앙!
정정을 요구하는 듯 바그로바가 칼을 향해 털을 꼿꼿이 세웠다.
콰르르르.
쾅쾅!
그러다 창문 너머에서 밝은 빛과 함께 천둥 번개가 치자…….
끼잉!
곧 앓는 소리를 내며 앞발로 자신의 눈을 가렸고, 칼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눈 가린다고 네 모습이 가려지는 건 아니잖아.”
이 녀석, 정말 그 용맹한 녀석의 아들이 맞을까?
꼬르륵.
끼이이잉!
이제는 배고프다고 처량한 신음소리를 내기까지 한다.
한숨을 쉰 칼은 인내심을 좀 더 발휘해 보기로 했다.
“앞으로 이 녀석의 밥 담당은 철저히 레인한테 맡겨야겠어.”
칼은 테이블 위에 놓인 식은 우유를 접시에 부은 뒤, 바그로바 앞에 내놓았다.
킁킁!
바그로바는 냄새를 킁킁 맡더니, 혀로 우유를 핥았다.
다행히 입맛에 맞았는지 녀석은 빠르게 혀를 움직여 우유를 섭취하기 시작했다.
덜컹.
바로 그때.
“아! 공자님 오셨어요.”
장을 마치고 돌아온 레인이 칼을 보며 반색했다.
그러다 눈앞에서 우유를 핥아먹던 바그로바를 보고는 표정이 경직됐다.
“고, 공자님. 그, 그건…….”
“바그로바. 길거리에 주운 고양이야.”
빠직!
아까는 개라더니.
칼의 말을 알아들은 건지, 바그로바는 칼을 으르릉거리며 쳐다봤다.
그 모습에 레인은 파르르 떨며 말했다.
“고, 공자님.”
“왜?”
“하, 한 번 안아 봐도 될까요?”
“그러든가.”
칼이 고개를 끄덕이자 레인은 이성을 잃고서 후다닥 달려와 바그로바를 끌어안았다.
“꺄아아아악! 너무 귀여워요! 대체 어떻게 된 생물이에요?”
바그로바을 본 순간 레인은 잠시 자신의 입장을 잊어버렸다.
“…….”
그 기세에 칼마저 조금 놀랐다.
그르르릉!
당황한 바그로바가 다리를 허우적거리다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으나.
싸아.
순간 날카로워지는 칼의 눈을 보고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만나서 반가워, 바바!”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레인은 눈치채지 못하고 바그로바를 보며 활짝 웃었다.
“바바는 뭐야? 격식 떨어지게.”
칼은 애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그로바니까 바바 맞잖아요. 바바로 하면 안 될까요?”
그러나 평소에 눈치를 보기 급급했던 레인이 애교까지 부리며 허락을 구하자, 칼은 곤혹스런 표정으로 답했다.
“마음대로 해.”
그렇게 바그로바의 애칭은 바바가 됐다.
“아, 공자님. 많이 배고프시지 않으세요? 혹시 모를까 싶어 맥캘리 교수님이랑 공자님의 샌드위치도 챙겨놨는데요.”
“아아, 이거.”
칼은 정성껏 만든 샌드위치를 그제야 발견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확히는 아까 보기는 했지만. 설마 자신의 것까지 만들어놓았을 줄은 몰랐다.
시무룩.
대번에 그 사실을 눈치챈 레인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다음에는 꼭 편지와 함께 남겨둘게요.”
“됐어.”
칼은 짧게 대답하며, 샌드위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달지도 짜지도 않으며 담백한 맛이 나서 칼은 조금 놀라워하며 중얼거렸다.
“……맛있군.”
“정말요?!”
원하던 반응에 레인은 감격한 듯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괜스레 부끄러웠던 칼은 그녀를 다그쳤다.
“요란 떨 거 없어.”
“죄, 죄송해요.”
레인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들떴다는 걸 알고는 평정을 되찾았다.
민망했는지, 그녀의 귀 끝은 묘하게 빨갰고, 칼은 괜스레 마음이 불편했다.
“이건 맥캘리한테 내가 갖다 주지.”
“제, 제가 갖다 드리고 올게요.”
“넌 이 녀석이랑 놀고 있어.”
칼의 말에 레인은 환하게 미소를 내비치며 말했다.
“네!”
그르르릉.
그녀의 품에 안겨있던 바그로바는 불편한 표정을 지었지만.
“얌전히 있어.”
칼이 머리를 꾹 누르며 쓰다듬자, 기분이 좋아져서 칼의 손을 혀로 핥고선 얼굴을 부비부비 비볐다.
“어머, 공자님한테만 애교를 피네요.”
레인은 부럽다는 표정으로 칼을 쳐다봤다.
“시답지 않은 짓일 뿐이야.”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은근히 기분이 좋았는지, 칼은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 있었다.
여기서 그 사실을 지적하면 화를 낼 게 불 보듯 뻔히 보였기에, 레인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샌드위치가 포장된 바구니를 든 칼은 무언가 생각났는지 레인을 보며 물었다.
“혹시 1인분 더 있나?”
“네, 네 미리 만들어둔 게 더 있기는 해요.”
‘누구한테 주려는 거지?’
레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황급히 바그로바를 끌어안고 식당 쪽으로 향했다.
* * *
파르테스의 도서관.
어느새 폐문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릴리는 엄청난 양의 도서를 쌓아두고 공부를 하는 중이었다. 시험이 이제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오닉스 스퀘어 학파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 한 번도 공부를 소홀히 한 적은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맥캘리의 곁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연구에 참여했다. 이번에는 제법 자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발목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으니…….
콜록콜록.
릴리는 요 며칠간 계속해서 오한에 시달렸다.
‘몸 상태가 이상해.’
며칠 전부터 병원에 가보기도 했지만.
수준 높은 실력을 지닌 이실리아의 의료진들도 이유를 알아내지 못해 쩔쩔맸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스스로 몸을 챙겼으나, 이제는 한계였다.
“하아, 하아.”
지칠 대로 지친 그녀는 결국 폐관 시간에 맞춰 바깥으로 나왔다.
쏴아아아아.
바깥에는 굵은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비에 젖은 흙냄새에 그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우산 안 가지고 왔는데. 어떡하지?”
잠시 고민하다가 우산을 빌리기 위해 서둘러 발걸음으로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어질어질.
두통을 참지 못한 릴리의 몸이 순간 계단 쪽으로 기울어졌다.
“위, 위험해!!!”
그 모습을 본 한 학생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쳤다.
덥석.
하지만 릴리의 몸이 계단을 구르기 직전.
우산과 샌드위치가 담긴 바구니를 던진 칼이 가까스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쏴아아아아.
칼은 시름시름 앓고 있는 릴리의 머리칼을 쓸어 넘긴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흐음, 저주인가?”
그러고는 릴리의 뒤에서 배회하던 검은 나비를 손에 움켜쥐어 으스러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