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여신 프리데아를 기리는 검술 대회가 명예를 얻는 자리라면, 지하 검투장은 막대한 부를 쌓는 자리였다.
관중도 검투 대회 참가자도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 경기장에는 열띤 응원과 함성이 울려 퍼졌다.
원형의 경기장.
검투사는 몸을 풀고 있는 칼을 보며 말했다.
“꼬맹아. 여긴 어린애들이 노는 곳이 아니야. 자칫하면 이 형님 칼에 네 목이 싹둑 떨어질 수도 있어.”
“…….”
칼은 상대하기 귀찮아서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언제 시작할 거냐는 듯이 심판을 바라보았다.
울컥!
그 모습에 검투사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아직 이 몸, 헤라우스에 대해 모르는 것 같은데, 난 이곳 이실리아에 오기 전에는 성별 나이 관계없이 무수히 많은 살인을 저질렀던 범죄자라고!”
스윽.
칼은 그제야 호기심이 생겼는지 헤라우스를 쳐다봤다.
무미건조한 눈빛에는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그게 상당히 분했는지, 헤라우스는 칼을 겁주기 위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래 보여도 기사가 되어 추앙받을 수 있었는데, 유명한 귀족가의 여식을 건드린 걸로 모자라 죽여 버리기까지 했거든.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 크크크크, 난 기사가 될 뻔했던 몸이라고.”
기사.
이 세계에서 그 칭호가 갖는 의미는 한 가지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검의 달인이라거나 오러 유저 혹은 소드 마스터 등.
검을 든 자들의 목표이자 경외감을 들게 하는 수식어였다.
블러핑인지 아닌지 알 방법이 없기에, 헤라우스는 이런 식으로 상대를 몰아붙여 승리를 거두고는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다소 어려 보이는 상대이니 이런 식으로 압박을 주면 당연히 대경실색하리라 생각했다.
“유언은 그게 끝인가? 버러지.”
“건방진?!”
그러나 칼이 딱하다는 말투로 응수하자, 헤라우스는 머리가 피가 솟구쳤다.
“시작!”
심판의 호령과 함께 헤라우스는 전신의 기력을 쥐어짜 검을 휘둘렀다.
파팟!
앞서 말한 게 허세는 아니었던 건지 검격이 곡선을 그리며 사각을 노리고 들어왔다.
카앙!
칼은 어렵지 않게 글라디우스로 그 궤적을 파고들어 공격을 막아냈다.
카카카카캉!
이윽고 검과 검이 부딪치며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당장이라도 둘 중 한 명의 팔다리가 날아갈 만한 아슬아슬한 전투였다.
하지만 정작 칼의 눈에 헤라우스의 검은 마치 나풀나풀 흩날리는 민들레 씨앗마냥 느렸다.
스윽.
칼은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한 검격 속으로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파고들었다.
팅! 팅!
그러곤 손목만을 움직여 최소한의 절제된 움직임으로 상대의 검을 흘려냈다.
‘이렇게 하는 거였어.’
맥캘리에게 가르침을 받아 몸에 익혀두었던 그랜드 마스터의 검술이 점차 자연스레 펼쳐졌다.
딱히 압박을 가하지는 않고 그저 수세를 취한 것뿐이지만.
“뭐, 뭐야?!”
거리가 점차 좁혀지자, 당황한 헤라우스는 칼의 머리를 쪼갤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콰직!
하지만 칼의 머리가 쪼개지는 대신 헤라우스의 손목이 통째로 절단되었다.
쏴아아아아아!
헤라우스는 절단된 부위에서 분사되는 자신의 피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크아아아아악!”
왼손으로 절단된 부위를 붙들며 눈물을 흘렸다.
“하, 항.”
그리고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곧장 기권을 선언하려고 했지만.
우지끈!
콰앙!
칼은 항복할 수 없게 발끝으로 그의 턱을 박살 냈다.
“쿨럭, 크아아아아, 이, 이게…….”
헤라우스는 턱이 부서져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칼을 바라봤다.
칼은 피 웅덩이 위에 떨어진 검을 쥔 헤라우스의 손을 줍더니…….
타앙!
손은 쓰레기처럼 내동댕이친 다음 검은 헤라우스의 앞으로 던졌다.
‘이건 무슨 일이지?’
지하 검투장에서는 별의별 상황이 흔하게 벌어진다.
그럼에도 칼리언트의 행동은 관중의 호기심을 자극했는지, 어느새 관중들은 멍하니 경기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칼은 아랑곳하지 않고 헤라우스에게 말했다.
“다시 와봐. 아직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있어.”
오싹!
그 말을 들은 헤라우스는 그제야 주제 파악을 할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소년은 자신의 검술을 시험하기 위해 자신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를 챈.
“우어어어.”
헤라우스는는 다급하게 기권을 선언하려고 했지만.
“네가 여기서 살아나갈 방법은 날 이기는 것밖에 없어.”
칼의 싸늘한 반응에 부질없는 희망을 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크아아아아악!!”
헤라우스는 결국 남은 왼손으로 검을 쥐고서 칼에게 달려들 수밖에 없었다.
카카카카캉!
이윽고 다시 한번 공방이 펼쳐졌다.
콰직!
하지만 칼의 검을 따라잡을 수 없었던 헤라우스는 결국 또다시 일격을 허용해 왼손마저 잘려버렸다.
“크아아아아악!!!”
순식간에 양손을 잃은 헤라우스는 무릎을 꿇으며 울부짖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심할 때.
푸욱!
그의 앞에 다시금 검이 날아와 꽂혔다.
“…….”
싸아.
절규하던 헤라우스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동공을 파르르 떨며 정면을 쳐다보니, 칼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양손이 없다고 해서 진 건 아니잖아. 입으로라도 물어. 그리고 덤벼.”
“…….”
헤라우스는 그제야 자신이 상대를 잘못 건드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바로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슈미트는 저도 모르게 한마디를 남겼다.
“턱을 부숴버렸는데, 어떻게 물라는 거야?”
* * *
검투가 끝난 후.
대기실로 들어선 칼은 얼굴에 묻은 혈흔을 수건으로 닦아냈다. 그리고 옆에서는 슈미트가 엉망진창이 된 칼의 글라디우스를 손질해주며 말했다.
“처음이란다.”
“뭐가?”
“이 검투장에서 검투사가 상대에게 공포를 느끼고 자결을 선택한 건.”
슈미트는 방금 전 헤라우스와 칼의 결투로 인해 아직까지도 오금이 저렸다.
적을 죽이지 않고 전투를 강제로 속행시키는 칼의 모습은 무자비한 악마로 보일 정도였다.
그러다가 불현듯 슈미트는 모순적인 생각에 사로잡혔다.
일말의 긍지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타락한 이 검투장에서 칼만이 자신의 긍지를 지키고 있다고 말이다.
‘가만 보면 또라인데, 분간이 안 되는군.’
슈미트는 의심스러운 눈매로 칼을 보며 말했다.
“헤라우스는 타국에서 귀족가의 여식을 겁탈하고 도망친 범죄자다. 그 악명은 이 검투장에서는 오히려 득이 됐고, 녀석은 자신의 죄를 오히려 떠벌리며 자랑하고 다녔지.”
“그래서?”
“너는 너의 방식대로 그 녀석을 심판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슈미트의 말에 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냥 훈련 겸 재미 삼아 죽인 것뿐이야.”
칼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다시 가면을 착용했다.
“아아, 그러냐? 다 됐다.”
슈미트는 다시금 광채를 되찾은 글라디우스를 칼에게 건네줬다.
“솜씨 좋네.”
깔끔하게 벼려진 검날을 본 칼은 슈미트를 흘깃 바라보았다.
“그럼 드워프 인생을 허투루 산 줄 알았냐? 자, 그럼 2차전까지 2시간 정도 남았으니, 열쇠를 찾아볼…….”
모처럼의 칭찬에 슈미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열쇠를 찾자고 제안하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크르르르.
소름이 끼치는 울림소리를 들은 칼과 슈미트는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이, 이건 무슨 소리야?”
보통 소리가 아님을 깨달은 슈미트가 벌벌 떨 때.
“부르고 있군.”
칼은 발을 떼어 소리의 진원지로 향했다.
“자, 잠깐. 어, 어디 가려는 거야?”
“무서우면 따라올 필요 없어.”
“누, 누가 무섭다고 그래?”
오기가 생긴 슈미트는 칼의 옷자락을 붙들며 걷기 시작했다.
“…….”
칼은 황당한 표정으로 슈미트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소리의 진원지로 향했다.
* * *
[나……어……싶……어.]
귓가로 드문드문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다. 짐승, 그것도 마수나 환수가 내는 목소리가 마왕 특유의 감각을 통해 귀에 울려 퍼졌다.
소리의 진원지는 검투장이 있는 지하보다 더 깊숙한 곳이었다.
[크르르르르.]
칼의 눈앞에는 몸길이가 3미터에 육박하는 엄청난 크기의 사자가 있었다.
휘날리는 털은 금색이고, 갈기의 색은 짙은 갈색인 그것은 백수의 왕이라 불릴 만한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처음에 그 모습에 질겁했던 슈미트는 잠시 후에야 이 사자의 정체를 알아봤다.
“노빌레 레오네. 세상에 이 녀석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그게 뭐지?”
칼이 설명을 요구하자, 슈미트는 턱을 매만지며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환수종 중에서도 최고 등급으로 분류되는 신수야. 환경과 주인의 성향에 따라서 갈기의 색과 몸집의 크기 등이 달라지는데, 역사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어. 그만큼 인적이 드문 곳에서 살아가는 녀석들이야. 그래서 권력자들은 자신의 색으로 이 신수를 물들이고 싶어서 늘 혈안이 되어 애완동물로 삼으려 하지. 그리고 지능은 사람과 비슷하다더라.”
“하찮은 욕망에 놀아났다는 거군.”
칼은 쯧 혀를 차며 노빌레 레오네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이곳에 날 불렀지?]
[밉다. 죽이고 싶다. 그 여자를…… 반드시!!]
[그 여자?]
[마미안트! 그 미친년의 숨통을 끊어놓고 말겠어!!!]
칼은 냉혹한 시선으로 노빌레 레오네를 쳐다봤다.
오랫동안 굶주림으로 인해 폭주하려는 야성을 가까스로 붙들고 있었지만.
사실상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가 알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용건 없으면 간다.]
칼이 분노를 통제하지 못한 노빌레 레오네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자…….
녀석은 다시금 고귀한 품성을 되찾았는지 잠잠해진 눈빛으로 칼에게 말을 건넸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칼은 ‘그렇게 하지.’라고 말하며 등을 돌렸다.
“뭐, 뭐야? 안 풀어주는 거야?”
영문을 모르던 슈미트가 갈팡질팡하며 노빌레 레오네와 칼을 번갈아 쳐다보자, 칼은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죽기 직전에 꼭 해야 될 일이 있다고 하더군. 막을 생각은 없어.”
“?”
‘이, 이 녀석 진짜 신수랑 대화한 거야?’
이 순간 슈미트는 노빌레 레오네보다 칼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커졌다.
* * *
파놉티콘의 최상석.
“……오늘 수익은 이 정도입니다.”
파놉티콘의 관리를 도맡은 시종이 집계한 파놉티콘의 수익을 말하자, 마마안트 후작 부인은 입꼬리를 올렸다.
“생각보다 거액을 벌어들였네요.”
그래봤자 그녀의 재산에 비하면 정말로 푼돈에 불과했다.
애초에 그녀가 타국에서 어마어마한 리스크를 감수하고 파놉티콘을 운영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 자신이 유흥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오늘 그 어느 때보다 들떠 있었다.
‘나이에 맞지 않는 박력, 그리고 심홍색의 눈. 아아, 갖고 싶은데 구슬려서 어떻게 해볼 상대는 아닌 것 같단 말이지.’
아까 전 칼의 시합을 떠올린 그녀는 홍조를 피우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자, 잠깐?! 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썩 물러가!”
“조금 시끄러운데.”
문밖에서 들려 오는 소리에 마미안트가 인상을 찡그렸다.
콰아아앙!
방의 문이 통째로 박살 나며 칼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르르.
마미안트 주변에 있던 도베르만들이 칼을 에워싸며 적의를 표출했다.
하지만 칼이 진심으로 살기를 발산하자…….
끼잉!
도베르만들은 기가 꺾여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
마미안트 후작 부인은 당황해 안경이 콧대까지 내려왔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당황하는 것도 잠시.
역시 뒷세계를 다스리는 이 중 한 명답게 그녀는 금세 여유를 되찾으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광견 앞에서는 내 애견들도 꼬리를 말게 되네요. 용건이 뭐죠? 슈타크 가의 막내 도련님.”
칼은 가면을 집어 던진 뒤, 자연스럽게 그녀의 앞에 앉더니 답했다.
“내기를 하고 싶어서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