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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마왕은 갱생이 어렵다-34화 (34/197)

#제34화

새벽의 이슬이 정리된 후.

이실리아의 음지에서는 한동안 세력다툼이 펼쳐졌다.

그래봤자 새벽의 이슬을 대체하기에는 자금력도 조직력도 형편없는 시정잡배들에 불과했지만.

그나마 제일 잘 나간다는 조직에 속해 있던 남자는 뼈저리게 후회하는 중이었다.

오늘도 평소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어 돈을 갈취할 마음으로 소년에게 시비를 걸었던 참이었다.

하지만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일까?

퍼억! 퍼억!

퍼퍼퍼퍼퍽!

그가 자랑스럽게 여겨왔던 조직원들은 백발 노인에게 죽기 직전까지 처맞아 반 시체가 되어버렸다.

‘내가 지금 대체 누굴 건드린 거지……?’

남자는 파르르 떨다 얼굴에 혈흔이 튄 노인을 보고는…….

“히끅!”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하며 재빨리 쓰러져 기절한 척을 했다.

“주제를 알게 된 것 같으니 이 정도 선에서 넘어가도록 하죠.”

우직!

빠악!

물론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와튼은 기절한 척하고 있는 건달의 팔꿈치를 짓밟아 부러뜨렸다.

“크아아아아악!”

남자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다가 결국 기절했다.

7명의 건장한 남자를 제압하는 데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막내 도련님. 이런 몰골로 인사드리니 송구스럽군요.”

와튼은 손수건으로 얼굴에 튄 피를 닦아내고선 정중히 칼에게 인사했다.

‘역시 와튼이었군.’

-하얗게 센 백발, 외눈 안경에 단정한 복장…….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한결같이 자상하게 대해준 것은 와튼과 어머니밖에 없었다. 그러나 와튼 역시 아버지를 모시는 입장이라 내 곁에 있어 주지는 못했다.

일기장이 쓰여 있던 문장을 떠올린 칼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님이 오신 건가?”

“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될 만큼 기백이 달라졌어.’

와튼은 차갑게 벼려진 칼의 눈동자를 보고는 적잖게 당황했다.

마지막에 봤을 때만 해도 순수했던 모습이 이제는 메말라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슈타크 가문의 집사답게 그는 묵묵히 고개를 수그리며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가주님께서 식사 자리를 마련해놓았으니,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칼은 고개를 끄덕였고 곁에 있던 레인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갈팡질팡하다가……

“따라와. 레인.”

“네, 네.”

칼의 무덤덤한 말에 반색하며 뒤를 따랐다.

*  *  *

식사가 마련된 자리는 이실리아의 수도 중심부에 있는 거대한 별장이었다.

은촛대 위에 놓인 초에 붙은 불은 은은하게 테이블을 밝혔고, 테이블에는 에리의 생일 파티에서 본 것과 같은 수준의 호화로운 진미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칼의 맞은편에는 반년 전에 만났던 루드거 슈타크가 앉아 있었다.

그는 점잖은 분위기를 유지하며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칼은 나이프로 고기를 썰며 그의 말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시합은 잘 봤다.”

꿀꺽!

칼의 뒤에서 정중히 서 있던 레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과정이 어찌 됐든 결과는 1회전, 실격패.

이 성적 때문에 루드거의 기분이 나빠졌다면 칼은 다시 알테어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습니까?”

칼은 나이프로 썬 고기를 입에 넣고서 우물우물 씹었다.

어떤 말을 해도 개의치 않는 무뚝뚝한 반응에 점잖았던 루드거마저 조금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째서 도중에 검을 던지는 행위를 한 거지?”

“문제가 있습니까?”

“기사가 검을 버리는 행위는 기사도에 반하는 짓이다. 너의 행동은 외교적 결례로 비칠 수도 있는 거지.”

‘딱히 다그치려는 의도는 아니군.’

루드거의 말에 담긴 뜻을 살피던 칼은 어렵지 않게 그의 의도를 간파할 수 있었다.

지금의 심문은 어디까지나 시험이다.

만약 칼이 여기서 루드거의 마음에 들지 않는 발언을 한다면, 분명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

‘까짓거 뭐.’

하지만 지금의 칼이 두려워할 건 아니었다.

시련 따위야 극복하면 그만이다.

겨우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이전에 파르테스의 검술 교관이 저에게 검이란 어떤 거냐고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뭐라고 답했지?”

“그때 당시에는 귀찮고 짜증 나게 해서 답하지 않았습니다.”

“…….”

예상치 못한 황당한 답변에 루드거는 조금 당황했다.

최대한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여기서 칼이 좀 더 황당무계한 발언을 한다면,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게 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다행히 칼은 그 선을 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 질문을 다시 듣는다면, 검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대답할 거 같네요.”

“거울?”

“네, 거울입니다. 지키려고 하면 지키는 검이 되고, 죽이려고 하면 죽이는 검이 되니까요.”

“그게 대결 도중 검을 버리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거지?”

“프랭크를 상대로는 딱히 어떤 의미를 담고 싶지 않았거든요. 의욕이 떨어진다고 할까? 검을 쥐고 싶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

루드거는 잠시 침묵을 지키며 생각했다.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해도 비실거리던 녀석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

지금은 힘도 기백도 눈빛도 모든 게 달라졌다.

오러를 쓸 줄 아는 동급생을 검을 들 가치도 없는 존재로 생각했다는 건가.’

칼의 본심을 어느 정도 꿰뚫어 본 루드거는 그대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몸을 들썩이며 웃는 그 모습에 루드거의 뒤에 서 있던 와튼마저 긴장했다.

지금까지 어떤 자식 앞에서도 그가 이렇게 웃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웃음이 어느 정도 가셨는지, 루드거는 칼을 보며 말했다.

“나의 아들, 칼리언트. 결과 자체는 처참하지만, 너는 과정으로 모두의 이목을 이끌었다. 그 점에서 충분히 합격이다.”

‘파르테스에 조금 더 머물 수 있겠군.’

칼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며 루드거를 쳐다봤다.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깍지 끼고서 대화를 이어갔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너에게 선물을 하나 주고 싶구나.”

“선물 말씀입니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와튼이 함을 들고 와 칼의 앞에 놓았다.

“열어봐도 되겠습니까?”

“선물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루드거의 허가가 떨어지자, 칼은 함의 뚜껑을 개봉했다.

함 안을 살펴보니 그곳에는 낡은 양피지와 호박으로 만든 목걸이가 있었다. 양피지를 펼쳐 보니, 그곳에는 알테어와 그 주변의 지형이 그려져 있었다.

잘 살펴보니 정 가운데 화살표가 새겨져 있었다.

‘이게 뭐지?’

칼이 호기심 어린 눈빛을 띨 때.

루드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칼리언트. 어째서 내가 변경백의 지위와 알테어를 고집하는지 알고 있느냐?”

이유야 많았다.

알테어는 전략적 요충지.

강탈당하면 바로 조국인 루콘으로 엄청난 수의 적이 몰려들게 뻔했다.

이 때문에 루콘의 왕실마저 슈타크 가문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상황.

왜 이런 곳에 어린 칼리언트가 파견됐냐 하면…….

루드거 슈타크마저 알테어 주변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년에 한 번은 지휘관이 죽는 상황.

혼란으로 가득 찬 민심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슈타크가의 혈족을 보내는 게, 사기라도 높일 수 있었다.

농노나 서민들 입장에야 귀족 가문의 사정 따위는 알 길이 없었다.

그저 험난한 이곳에 와준 것만으로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루드거가 원하는 답이 이런 배경과 관련이 없음을 직감한 칼은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한때 슈타크 가문은 대공의 가문이라 불렸지. 그 힘은 제국을 위협할 정도였다. 오늘날 그 영광이 거의 사라졌지만. 아직 나는 그 불씨가 꺼졌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여기에 표시된 곳이랑 관련이 있는 겁니까?”

칼이 지도에 표시된 곳을 가리키자, 루드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은 전성기 슈타크 가문의 비전과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고대 유적이다.”

“흐음.”

루드거와 대화 도중 칼은 처음으로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걸 저한테 주신 이유가 뭡니까?”

“마음 같아서는 내가 직접 유적을 탐사하고 싶지만. 경계하는 적들이 많아서 사실상 무리지.”

“형님과 누님들도 있잖습니까?”

“누군지 딱히 꼬집지는 않겠지만, 기회를 준 녀석들은 전부 그 장소에 다다르지도 못했다. 오히려 전부 죽을 뻔했지.”

“?!”

그것은 정말 예상외였는지, 칼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기회가 주어진 이들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슈타크가의 자제들은 칼을 제외하고는 전부 최소 오러 유저 이상의 실력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강인한 자들이 접근조차 하지 못하다니.

씨익.

그 사실에 칼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재밌겠는데요.”

“…….”

싸늘하게 웃으며 내뱉은 한마디.

잠깐이지만 주변에는 정적이 흘렀고, 레인과 와튼은 식은땀을 흘렸다.

반면 루드거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다른 자식들은 이 이야기를 하면 이쯤에서 포기를 하거나, 두려움을 무릅쓰고 도전을 하거나, 그도 아니면 허세를 부렸다.

하지만 칼은 달랐다.

어느새 심홍색 눈동자에는 굳은 심지가 드러나고 있었다.

“기왕 주신 상이니, 알테어로 돌아가는 날, 이곳을 정복해 보이겠습니다.”

“그 대답이 듣고 싶었다.”

그 대답에 만족했는지 루드거의 입꼬리가 살짝 흔들렸다.

*  *  *

해가 중천에 떴다.

루드거는 귀환을 서둘렀다.

가문의 가주가 볼일을 마치고 떠나는 만큼, 칼도 단정한 복장으로 그를 배웅하고 있었다.

“그럼 이만 가 보마.”

짤막한 인사에 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복귀할 때, 찾아뵙겠습니다.”

칼의 인사를 받으려던 루드거는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을 눈치채고는 칼에게 물었다.

“가기 전에 묻고 싶었는데, 저 아이들은 누구지?”

“이제 그만 나오지 그래?”

칼 역시 시선을 눈치챘는지, 흘깃 뒤를 노려봤다.

움찔!

그 시선에 두 소녀가 몸을 떨며 모습을 드러냈다.

소녀들의 정체는 바로 릴리와 에리였다.

릴리는 다소 불편한 표정으로 루드거에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릴리아나입니다. 죄송합니다, 호기심에 그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에리라고 합니다.”

반면 에리는 금세 활기찬 목소리로 루드거에게 인사를 건넸다.

“흐음.”

그녀들을 본 루드거는 무언가 복잡한 표정을 짓다 칼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느 쪽이 내 며느리가 될 사람이지?”

화악!

뜬금없이 내뱉는 한마디에 릴리와 에리는 얼굴이 붉게 상기되며 안절부절못했다.

칼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치, 친구입니다.”

천하의 칼조차 이런 화제는 익숙지 않은 듯 시선을 회피했다.

“시답지 않기는.”

루드거는 끌끌 혀를 찬 뒤, 릴리와 에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만나서 반갑네. 이 녀석 때문에 고생이 많다고 들었네만.”

“아, 아니에요. 도움은 제가 받고 있는걸요. 그리고 이건 이실리아의 특산품인데, 항해 중에 드시기 좋을 거예요.”

“호호호, 저도 준비했어요.”

릴리는 말린 육포를, 그리고 에리는 명주를 내밀었다.

와튼이 그것을 받아 들려고 하자 루드거는 손을 들어 제지한 뒤, 자신의 손으로 선물을 받았다.

“사려 깊은 선물 고맙네.”

“아, 아닙니다.”

“이 정도 가지고 그런 말을 들으니 부끄럽네요.”

쑥스러워하는 그녀들의 대답에 진지하기만 했던 루드거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좀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더이상 지체할 수 없어서 이만 가보겠네. 앞으로도 칼리언트를 잘 부탁하지.”

“걱정하지 마세요.”

“네!”

릴리와 에리의 답을 들은 루드거는 그대로 등을 돌려 배에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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