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프랭크는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이 상태에서 공격을 당하면, 답이 없어.’
그가 가까스로 의식을 다잡고 정면을 쳐다보니…….
“끝이야?”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칼이 있었다.
“까불지 마!”
‘조금 전의 일격은 그저 우연에 불과해. 이제는 인정사정 보지 말고 죽인다!’
스멀스멀.
프랭크는 검에 오러를 두른 채 칼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칼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하지만 칼은 몸을 비틀어 종이 한 장 차이로 프랭크의 검을 피한 뒤,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며 프랭크의 무릎을 가격했다.
우드드득!
뼈에 금이 가는 소리와 함께 프랭크는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무, 무슨?!”
“말하지 마라. 혀 깨문다.”
콰아아앙!
칼은 당황한 프랭크의 턱을 그대로 손바닥으로 올려쳤다.
충고를 듣지 않은 탓에 혀를 깨문 프랭크의 입으로 선혈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그는 기세를 잃지 않고 거리를 좁혀 오는 칼의 목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콰앙!
칼은 주먹에 마력을 싣고서 그대로 검의 옆면을 내리치는 걸로 어렵지 않게 대처했다.
역으로 당한 것은 오히려 프랭크였다.
검 끝에 전해지는 엄청난 진동에 검을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퍼억! 퍼억! 퍼억!
칼의 주먹이 프랭크의 안면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이 자식 뭐야?’
퍼억! 퍼억!
코뼈가 으스러지고 얼굴이 함몰되었다.
‘왜, 왜 내가 이 녀석한테 당하고 있는 거야. 이해가 되지 않아. 검도 쥐지 않은 녀석한테 내가 왜?’
우드득.
어느새 두개골 어딘가에서 균열이 일어나는 소리가 났다.
파앙!
고막이 터져 귀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삐이 하는 이명이 들렸다.
파르르르르.
더이상 격통을 감당하기 어려웠는지…….
쿵!
양쪽 무릎을 꿇은 프랭크는 어느새 동공이 뒤집혀 흰자위만 보이고 있었다.
쇄액!
칼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주먹을 그의 얼굴에 때려 박으려고 했으나…….
“그, 그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심판이 재빨리 칼을 제지했다.
“뭐, 여기까진가.”
격하게 움직인 탓인지, 칼은 땀을 흘리며 호흡을 골랐다.
“…….”
관중들은 이 압도적인 결과에 모두 넋을 잃었다.
작년의 성적을 생각하면 프랭크의 역량은 결코 1차전에서 떨어질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프랭크는 진검을 든 데다가 오러까지 사용했다.
그런데 정작 그를 상대한 칼은 오직 주먹만으로 프랭크를 압도적으로 몰아붙였으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당황한 것은 다름 아닌 심판이었다.
‘이걸 누가 이겼다고 해야지?’
이것은 어디까지나 검술 시합이었다. 그러니 검술 대회의 규칙상 그가 내릴 수 있는 판정은 단 하나였다.
‘어쩔 수 없어.’
그는 눈을 질끈 감고서 칼을 손으로 가리키며 선언했다.
“칼리언트. 시, 실격!”
“우우우우우!!!”
그러자 관중석에서는 야유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칼이 실격했다는 말은 프랭크가 승리했다는 말인데, 그것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납득할 수 없는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아이러니한 점은…….
“아아, 오랜만에 신나게 팼네.”
정작 본인은 기지개를 피며 무척이나 뿌듯한 표정으로 무대를 내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칼은 승패의 미련을 가지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오직 프랭크를 두들겨 패는 것 하나였다.
그 의도를 간파한 릴리는 못 말리겠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뭐 저 모습이 칼답기는 하지만.”
릴리가 슬쩍 옆을 보니, 데제스는 만족스러운 듯 싱긋 웃고 있었다.
“프랭크가 다쳤는데 괜찮아?”
“죽지 않았으니까 된 거지. 결과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어.”
데제스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오싹!
그 모습이 묘하게 불길해 보여 릴리는 겁을 집어먹으며 데제스를 경계했다.
데제스는 그 모습에 풋 웃음을 터뜨렸다.
“웃기지 않아? 처음에는 나만 보던 네가 지금은 저 남자밖에 보지 않는다는 게. 이것 참 섭섭해지려고 해.”
울컥!
묘하게 기분 나쁜 말투에 릴리는 살벌하게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애초에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면서 왜 지금 와서 그래? 너야말로 칼에게 관심 있는 거 아니야?”
데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수긍했다.
“아아, 저 남자는 나를 빛내 줄 걸림돌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거든.”
“됐어. 너랑 이야기 안 해.”
나르시시스트 같은 데제스의 모습에 거부감이 든 릴리는 대화를 포기했다.
“이야기 끝났으면, 내 자리에서 나와.”
뒤늦게 자신의 자리로 온 맥캘리는 멀뚱히 데제스를 쳐다봤다.
“이런, 교수님. 실례했습니다. 제자의 불찰을 용서해 주십시오.”
데제스는 몸을 일으키며, 맥캘리의 손등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뭐 그렇게 말한다면야.”
그의 부드러운 분위기에 취했는지 맥캘리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다.
데제스는 싱긋 웃고는 예의를 갖추며 물러났다.
“…….”
멀뚱히 데제스를 쳐다보던 맥캘리는 릴리에게 속닥거렸다.
“릴리. 저 잘생기고 예의 바르고 점잖은 학생은 누구니?”
“데제스, 데제스푸아르요.”
“흐음, 과연 소문대로 위험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군.”
“아마 교수님이 생각하는 위험하다는 것과는 조금 뉘앙스가 다른 거 같은데요.”
릴리는 의심스럽다는 듯 맥캘리를 쳐다봤고.
“크흠! 무슨 소리를!”
맥캘리는 뒤늦게 헛기침을 하며 시치미를 뗐다.
그러다 곧 무대에서 내려오는 칼을 쏘아보며 말했다.
“이럴 거면 뭐 하러 검술을 배운 거야? 저 녀석은…….”
“그러게요.”
이미 머릿속에서 데제스는 지워졌는지 릴리는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앞으로 어떻게 수습할 거야? 칼.”
* * *
검술 대회를 운영하는 위원회는 한 참가자를 두고 밤늦게까지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위원회의 회의에 참여한 스첼레투스 학파, 첸 리들러는 대로하여 회의 테이블을 거세게 내려쳤다.
“칼리언트! 오늘 그가 한 짓은 검술 대회의 취지를 짓밟고 더럽히는 행윕니다. 다들 자각이나 하고 있는 겁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녀석을 파르테스에서 쫓아내야 한단 말입니다!”
이실리아는 선진적인 문화를 갖추고 있지만.
파르테스 아카데미의 교육관은 아직까지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편이었다.
더군다나 파르테스 최고 실세라고 하는 첸 리들러가 이렇게 강하게 주장을 펼치니, 모두가 그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검술 대회의 운영진 중 한 명인 에드윈 하딩턴은 그 의견에 적극적으로 반박했다.
“검술 대회에서 검을 놓치면 주먹과 발을 쓰는 것은 흔하게 있는 일입니다. 그걸 가지고 이렇게까지 트집을 잡는 것은 억지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같은 운영진인 있던 리자크가 눈살을 찌푸리며 딴죽을 걸었다.
“중요한 것은 검을 집어던졌다는 것입니다. 정의의 여신 프리데아님을 기리기 위해서 시작된 축제인데, 검을 집어던졌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기만이며 모욕입니다.”
“그렇지! 바로 내 말이 그거요!!”
리들러는 아주 강하게 리자크의 의견에 공감을 표했다.
이렇게 두 사람이 강하게 압박을 가하자, 에드윈은 섣불리 반박하지 못했다.
‘쩝……. 그 녀석이 또라이짓을 한 건 사실이라 할 말이 없네.’
바로 그때.
“크흠, 한마디 해도 되겠나?”
파르테스 학장, 페트로 스타니슬라프가 운을 뗐다.
그가 입을 열자 자리에 앉아 있는 모든 이들이 그에게 이목을 집중했다.
“확실히 칼리언트 학생의 행위는 도가 지나쳤다는 생각은 들지만, 이곳 파르테스는 뛰어난 인재를 올바르게 육성해야 된다는 취지로 설립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되네. 그리고 프랭크 학생의 행위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그건 왜 아무도 이야기를 하지 않나?”
“…….”
페트로의 말에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확실히 검술 대회라고 하나, 오러까지 사용을 했다.
자칫 잘못했다가 죽을 뻔했던 건 다름 아닌 칼이었다.
“칼리언트 학생이 프랭크 학생보다 무위가 압도적으로 뛰어났을 뿐이지. 상황이 반대였다면 이렇게 밤늦게까지 회의를 열 필요가 있었겠나? 하하하하하!”
페트로가 너털웃음을 터뜨리자, 모두 할 말이 없다는 듯 침묵을 지켰다.
빠드득!
‘이 독사 같은 늙은이가!!’
칼을 파르테스에서 퇴학시키는 쪽으로 여론을 몰고 가려고 했던 리들러는 이를 갈았다.
제아무리 스첼레투스 학파의 수장이라고 해도 전 세계에서 그 권위를 인정받는 페트로의 명성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페트로가 칼과 프랭크, 어느 한 명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끼어들기 어려웠다.
“그런 의미에서 퇴학은 너무 지나친 처사가 아닐까 싶으니……. 칼리언트 학생은 아쉽지만 검술 대회에서 실격 처리하고, 프랭크 학생은 인성 면에서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근신 처분하는 걸로 하세. 이의 있나?”
파르테스에서 ‘근신’은 특별수업을 모두 들을 때까지 다른 수업 참여가 제한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페트로는 날카로운 눈매로 모두를 직시했고.
“이의 있냐고 물었네만.”
“어, 없습니다.”
회의에 참석했던 이들은 물에 젖은 생쥐마냥 그의 시선을 피하며 그의 결정에 동의했다.
* * *
검술 대회는 일주일 동안 이어질 예정이었다.
1차전에서 실격패를 당한 칼은 시간도 많이 남은 터라 바깥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있었다.
거리에는 여자아이들이 여신 프리데아의 그것과 비슷한 망토를 펄럭이며 뛰어다녔고.
목검을 들고 검술 대회를 흉내 내는 남자아이들의 활기찬 모습들도 종종 보였다.
섬을 찾아온 관광객들은 이실리아에 펼쳐진 자유로운 문화에 한껏 취해 있었다.
“도련님. 친구분들이랑 같이 돌아다니시는 게 더 즐겁지 않겠어요?”
바게트가 든 종이봉투를 들고 있던, 시녀 레인은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됐어. 지금 갔다가는 오히려 잔소리만 들을 텐데.”
맥캘리가 분노하며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칼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주먹을 쥐었다 피며 생각했다.
‘조금 더 격이 맞는 상대였으면 제대로 검을 휘둘러 볼 수 있었을 텐데.’
단순히 강하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칼은 적어도 자신의 검에 자부심이 가득한 사람과 겨뤄보고 싶었다.
‘갱생한다고 안 하던 짓을 하니, 자꾸 엉뚱한 생각이 드는군.’
스스로도 기가 찼는지 칼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한창 길을 걸어가던 중이었다.
퍼억!
“꺄악!”
길거리를 누비던 한 남자와 어깨를 부딪친 레인이 넘어질 뻔했다.
칼은 재빨리 레인의 등을 잡아주며 눈살을 찌푸렸다.
“눈을 어디에다 두고 다니는 거지?”
“아아, 젠장! 히끅! 짜증 나 죽겠는데. 쪼그만 게 까불고 있어.”
술병을 손에 들고 있던 남자는 잔뜩 취한 상태였는데, 그의 뒤에는 그를 따르는 무리가 제법 있었다.
코가 새빨간 남자는 칼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관심 없는데. 꺼져줄래?”
칼은 미간을 좁혔고 레인은 겁에 질려 오들오들 몸을 떨었다.
“아아, 짜증나. 프랭크 녀석이 깨지는 바람에 돈을 무지막지하게 잃어서 짜증나 죽겠는데. 웬 토끼같이 눈깔 빨간 게…… 응?”
말을 하던 도중 남자는 칼의 이목구비를 살피더니 손으로 가리켰다.
“아아! 네 놈이지? 프랭크를 아주 탈탈 털어서 내 지갑까지 털어간 놈이.”
‘보아하니, 판돈을 걸고 내기를 했나 보네.’
상황을 짐작한 칼은 팔짱을 끼며 반문했다.
“그렇다면 어쩔 건데?”
“어쩌기는 뭘 어째? 내가 털린 만큼 너도 털려봐야지.”
“좋아, 좋아. 나도!”
칼에게 분노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는지. 남자의 일행들이 우르르 칼을 에워쌌다.
“고, 공자님.”
레인은 어쩔 줄 몰라 칼의 옷자락을 붙들었고, 칼이 눈을 치켜뜨며 무어라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하하하하하, 이실리아는 치안이 좋다고 들었는데, 완벽한 건 아닌 것 같군요.”
집사복을 갖춰 입고 외눈 안경을 쓴 새하얀 백발의 노인이 뒤에서 넌지시 말을 던졌다.
“괜히 끼어들지 말고 꺼져, 거지 같은 늙은이야.”
“푸하하하하!”
흥미를 잃은 그들은 곧장 칼에게로 등을 돌리려고 했으나, 노인은 외눈 안경을 고쳐 쓰며 다시 한번 경고했다.
“아아, 거기까지만 하면 그냥 보내드리겠습니다. 고귀한 분을 건드리려고 하다니, 겁도 없으시군요.”
“이 노인네가 보자 보자 하니까. 썩 꺼지지 못해!”
분노한 건달이 노인에게 주먹을 내지른 순간.
푸욱!
어느새 단검을 손에 쥔 노인은 건달의 빗장뼈를 검 끝으로 살짝 눌러 상처를 내 쓰러뜨렸다.
“무, 무슨.”
“역시 좋게좋게 말하니,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요.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우드드득.
빠각!
노인은 거기서 끝내지 않고 발로 건달의 무릎을 짓밟아 관절을 완전히 으스러뜨렸다.
“크아아아아악!”
갑작스런 일격에 다리를 잃은 건달은 눈물, 콧물을 흘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웅성웅성.
취기가 가셨는지, 건달들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양손을 주머니에 낀 칼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그들에게 한마디를 남겼다.
“조심해라. 루콘 최강 무가의 집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