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해가 중천에 뜬 시각.
레인은 칼의 몸을 따뜻한 수건으로 닦은 뒤 헐거워진 붕대를 다시 감아주고 있었다.
웬만하면 자신의 일은 스스로 처리하는 칼이지만.
피로로 지친 데다 몸에 밴 땀과 피의 냄새가 역했기 때문에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칼의 불편한 마음과 달리 레인은 기쁜 마음으로 칼을 돕고 있었다.
“다 됐어요.”
“수고했어. 꼬맹이는?”
칼은 옷을 갖춰 입으며 피르의 상황에 대해 물었다.
“피르는 맥캘리 교수님의 도움으로 안전한 집을 구해서 어머니와 함께 요양 중이에요. 로웰님과 릴리님께서도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시고 있고요.”
“오지랖 넓기는.”
칼이 툭 내뱉은 한마디에 레인은 적잖이 당황했다.
정작 두 모녀의 생활이 불편하지 않도록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칼이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인형은?”
“그거라면 저기 꿰매 놓았어요.”
의자에 놓여 있는 인형은 꿰매고 빨아서 말끔한 상태였다.
“호오.”
칼은 보기 드물게 감탄하며 인형을 집어 이곳저곳을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솜씨가 좋군.”
“……과찬이세요.”
괜스레 부끄러워진 레인은 얼굴을 붉혔다.
“근데, 인형으로 뭐 하시게요? 공자님.”
무심코 무뚝뚝한 칼이 인형을 가지고 노는 상상을 한 레인은…….
“푸훗!”
재빨리 입을 가리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칼은 잠깐 레인을 노려봤다가 곧 평정심을 되찾고 문 쪽으로 향했다.
“어, 어디 가시게요? 잠도 주무시지 않고 무리를 하시면…….”
“나도 이것만 건네주고 잘 거야.”
칼은 정말 졸린 표정으로 레인에게 그만 말하라고 엄포를 놓은 뒤…….
콰앙!
거칠게 문을 닫았다.
“누구한테 드리려는 거지?”
레인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칼이 오기를 기다렸다.
* * *
칼이 문을 박차며 나가기 무섭게…….
“다시 들어가.”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건넸다.
옆을 살펴보니, 에리가 싱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칼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여기까지는 웬일이야?”
“고집이 센 칼리언트가 몸이 낫기도 전에 사고를 칠까 염려돼서 왔답니당. 호호.”
에리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칼은 험악하게 인상을 굳혔다.
“하지 마. 그거.”
“…….”
진심으로 소름 끼친다는 반응에 에리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진짜 릴리한테 밖에 안 해 주는 거라고.”
“안 해 줘도 돼.”
“호호호, 그래서 어디 가려고 했어?”
에리의 질문에…….
스윽.
칼은 손에 들고 있던 인형을 그녀에게 건네줬다.
“이건?”
에리는 이해가 되지 않은 듯 인형과 칼을 번갈아 쳐다봤다.
칼은 조금 쑥스러웠는지, 시선을 피하며 나지막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생일 선물.”
“…….”
의외의 상황에 에리는 잠시 말문을 잃었고, 칼은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누더기로 꿰맨 거지만, 이 나라 꼬맹이한테는 보물이었나 봐. 근거는 없지만 너는 장차 이 나라를 통치할 여왕이 될 테니까. 소중하게 여길 거라고 생각이 들었어.”
칼의 말에 에리는 드물게 홍조를 피우며 인형을 받아 가슴에 끌어안았다.
“고, 고마워.”
“에휴, 난 이제 잔다.”
할 일도 끝났겠다.
마음이 후련해진 칼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다시 문을 닫으려고 했다.
바로 그때.
타악.
에리가 발을 문틈 사이에 끼워 넣었다.
“또 왜?”
칼이 신경질을 내자, 에리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년에도 잘 부탁해. 칼.”
“칼이라고 부르지…….”
칼이 울컥하며 다그치려는 순간 에리는 잽싸게 발을 뺐고.
콰앙!
그대로 문이 닫혔다.
“…….”
이번에도 당했다는 느낌이 없잖아 있었지만, 이내 칼은 별 상관없겠다고 생각하며 등을 돌렸다.
“뭐 두고 가셨나요?”
레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다 끝나서 자려고 온 거야.”
칼은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전생, 마왕이던 시절에는 이런 식으로 감히 칼을 골리거나 그와 티격태격하는 이들이 존재하지 않았었다.
쯧쯧.
혀를 차며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짓다가도, 이내 어떤 감정에 사로잡혔는지 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뭐, 나쁘지 않으려나.”
“공자님.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레인은 중얼거리는 칼의 소리를 듣고 자신을 부르는 건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칼은 단잠에 빠져 있었다.
* * *
이실리아를 어지럽혔던 조직, 새벽의 이슬이 정말로 새벽의 이슬이 되어 사라져버렸다.
이로 인해 이실리아 곳곳에는 여러 소문이 무성한 상태였다.
적색의 남자가 환락가를 초토화했다.
악명 높은 흑마법사, 칸투버그가 잔학한 학살을 해 오던 끝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새벽의 이슬의 배후에 윈스턴 자작이 있었고, 그는 현재 구금되었으며 재산은 모조리 몰수당했다.
물론 이 소식은 파르테스 안까지 퍼졌다.
웅성웅성.
학생들의 시선은 온통 칼에게 쏠려 있었다.
붉은 남자가 누구인지 직접적으로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그런 미친 짓을 벌일 수 있는 붉은 남자는 칼밖에 없다는 인식이 모두에게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시선이 불편한데.”
“알면 좀 적당히 하지 그랬어.”
그러나 정작 그렇게 말하는 릴리조차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진짜 하루 만에 정리해 버렸어.’
속내는 그야말로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칼이 대단한 남자라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친하게 지내다 보니, 점점 그 사실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최근 들어서는 거의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 남자는 엄청난 사고를 태연하게 저질렀다.
가까이 있는 지인도 이 정도로 놀라고 있는데, 하물며 칼을 적대시하고 있는 스첼레투스 학파 학생들은 어떻겠는가.
움찔!
현재 그들은 칼과 눈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겁을 집어먹고 피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한창 교실로 향하던 중.
“여기 있었구나, 칼리언트.”
로웰이 자연스럽게 합류하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
“어저께 자기 허락 없이 멋대로 빠졌다고, 리자크 교관이 징계를 각오하라고 하던데?”
“아, 그거라면 됐어.”
“됐다니? 뭐가?”
“그 녀석한테 배울 건 없으니까. 이제부터 수업에 참여 안 할 거야.”
“……칼, 그건 땡땡이야. 나중에 최저 학점을 받을 텐데, 괜찮겠어?”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
배울 것만 제대로 배울 수 있다면 그만이었다.
걱정하는 릴리와 달리 로웰은 부럽다는 눈으로 칼을 쳐다봤다.
“자기 결정에 어떻게 조금도 의심을 안 할 수 있는 거야?”
이에 대한 칼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난 나를 믿으니까.”
“그래야 너답지.”
미소를 짓던 릴리는 곧 화제를 전환했다.
“그러고 보니, 조만간 검술 대회에 참가한다고 했잖아. 칼은 역시 가문의 검술을 사용하겠지?”
궁금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칼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답했다.
“그거 그냥 휘두르면 되는 거 아니야?”
“…….”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릴리는 다시금 골치가 아프기 시작했다.
“호, 혹시 어렸을 때 검술을 배우거나 한 적이 없는 거야?”
그녀의 질문에 칼은 일기장에 적혀 있던 문구를 떠올렸다.
-나는 검에 재능이 없어.
-아버지께 검에 대한 미련을 버리라는 말을 들었다.
-오늘은 넷째 형님인 브린만과 대련을 했는데, 철저하게 농락당하다 끝났다.
-나한테 검이란 휘둘러봤자 별 의미 없는 금속 막대기에 불과하다. 왜 나는 이런 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지.
칼리언트 슈타크.
아쉽게도 그는 검술에 대한 재능이 없어 가문의 검술을 배우지 못했다.
그 때문에 칼은 확실하게 릴리한테 답할 수 있었다.
“검술 배운 적 없는데.”
긁적긁적.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릴리는 관자놀이를 긁으며 난처한 표정을 짓다 가까스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요 며칠 동안 교본이라도 좀 볼까?”
* * *
검술 대회에 나가는 주제에 검술을 모른다?
“이건 말이야? 방구야?”
사정을 듣던 맥캘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칼을 쏘아봤다.
“그냥 휘두르면 된다고? 그렇다면 라흐만 대륙은 왜 마법과 검술이 지배하고 있겠냐?”
“뭐, 조금은 필요한 것 같군.”
빠직!
“왜 네가 어쩔 수 없이 인정해 준다는 식으로 말하는 거야?!”
옆에서 두 사제의 대화를 듣고 있던 로웰은 칼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랑 같이 검술 수련이라도 하지 않을래?”
그의 제안에 칼은 나른한 표정으로 답했다.
“딱히.”
의욕이 없는 그 표정에 로웰은 적잖이 당황했다.
옆에서 차를 따르고 있던 릴리는 턱을 괴며 칼에게 말했다.
“그래서 칼은 어떻게 하고 싶은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검술 대회에 나가는 것은 칼이다 보니, 자연스레 릴리는 칼의 의중이 궁금해졌다.
“검술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겠어. 그렇다면 검술을 배워야겠지.”
“잠깐!”
맥캘리는 잠시 대화를 끊더니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너 공통 과목으로 검술을 선택해 놓고 그동안 수업에서 뭐 했던 거야?”
질문에 대한 답은 칼이 아닌 로웰에게서 나왔다.
“검술 교관인 리자크는 지극히 자기 주관으로 사람을 나눠 가르치고 있거든요. 그래서 칼리언트는 아직까지 무리한 체력 훈련만 했을 뿐 검은 제대로 쥐어보지도 못했습니다.”
빠직!
그 말에 맥캘리의 이마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이 우라질 놈의 자식이! 감히 내 제자를 지 방의 쓰레기처럼 방치해?”
“……비유가 적절하지 않을 것 같은데?”
칼은 이맛살을 구기며 한마디를 던졌지만.
맥캘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장 교관을 바꿔 놓든가 해야지.”
소매까지 걷어붙이며 일어났던 맥캘리였지만.
“그럴 힘도 없으면서.”
곧 현실을 깨닫게 해주는 칼의 한마디에 씩씩거리다 고스란히 의자에 착석했다.
“…….”
“…….”
어처구니가 없어 로웰과 릴리는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후룩.
칼은 태연하게 차를 들이켠 뒤, 천천히 입을 뗐다.
“그리고 검술 스승은 정했어.”
“응? 벌써?”
‘대체 언제? 아까부터 줄곧 여기에 있었는데?’
릴리는 고민에 빠졌다.
‘로웰은 아닌 거 같은데…… 내가 뭘 놓친 거지.’
짐작이 가는 인물이 없던 릴리는 혹시나 싶어서 물었다.
“리자크 교관한테 요청할 건 아니지?”
“누누이 말했지만, 그놈에게 배울 게 없어.”
파르테스에서 인정한 검술 교관을 무시하는 게 칼답기는 했다.
“그럼 누군데?”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던 릴리는 결국 물어볼 수밖에 없었고.
스윽.
칼의 손은 자연스럽게 맥캘리를 가리켰다.
“…….”
순식간에 공기가 무거워졌다.
맥캘리를 포함해 세 사람은 눈 밑이 어두워졌다.
스윽.
맥캘리가 슬그머니 몸을 옆으로 기울이자, 칼의 손도 어김없이 그녀를 쫓아갔다.
홱홱!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휘저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콰앙!
결국 맥캘리는 탁자를 내리치며 호통을 칠 수밖에 없었다.
“내 전문 분야는 마법인데, 어떻게 검술을 가르쳐?! 이 정신 나간 제자야!!! 내가 아무리 똑똑하고 우아하며, 아름답고 재능이 출중한 미인 교수라고 해도 불가능한 건, 불가능하다고!!!”
“공감 못 할 수식어가 많은데?”
빠직!
“이놈이 오늘도 기어코 도발을 걸어오는구나. 오냐! 당장 한판 붙자.”
분노한 맥킬리가 칼에게 주먹을 내뻗자,
덥석.
칼은 부드럽게 그녀의 주먹을 감싸 쥐며 말했다.
“있잖아. 그랜드 마스터가 창안한 검술 교본서.”
“?!”
칼이 눈매를 좁히며 싱긋 웃자, 깜짝 놀란 맥캘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