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잔잔한 새벽.
커튼에 가려진 어두운 방에는 얼굴에 피멍과 혹이 가득한 남자 하나가 의자에 앉아있었다.
비록 의자에 팔다리가 묶여있지만, 딱히 고문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칸투버그의 위치를 발설하지 않기 위해 혀를 깨물어 자결하려고 했고, 칼은 그걸 막은 뒤 남자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두들겨 팼을 뿐이다.
“고문은 아니지.”
어찌 보면 한 사람의 죽음을 막은 것이니, 이것은 고문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갱생’의 일환일 뿐.
그렇게 칼은 자기 합리화를 했지만.
스윽.
“히익!! 커허허헉!”
다시 한번 칼의 심홍색 눈과 마주한 남자는 발작 증세를 보이며 입에 게거품을 물었다.
우드득.
그리고 칼이 다시 한번 주먹의 관절을 풀자, 그는 즉각 정신을 차렸다.
“카, 칸투버그는 윈스턴 자작이 마련한 비밀 별장에서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털어놓는 바람에 조금 당황했지만.
칼은 곧 냉정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어떤 실험을 하고 있지?”
“죽지 않는 병사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구울 같은 거려나.”
“비슷하지만 추구하는 목표는 불로불사입니다.”
칼은 이야기의 파편을 조합해 지금의 상황을 추측할 수 있었다.
“돈이 많이 드는 실험이었겠지. 그래서 이실리아에서 사업을 차려서 돈을 모은 거고. 윈스턴 자작에게는 아마 불로불사를 선사하겠다며 현혹을 했을 테지? 지금쯤이면 이 사달이 난 걸 깨닫고 도주를 준비하고 있겠네.”
“그, 그걸 어떻게?”
저벅저벅.
칼은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문 쪽으로 향했다.
‘사, 살려는 주는 건가? 그렇다면 어떻게든 빠져나가서…….’
남자가 조심히 탈주를 시도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스윽.
우연의 일치였는지 칼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얌전히 보안대에게 체포되는 걸 추천하지. 그럼 최소한 내 손에 죽지는 않을 테니까.”
“히끅!”
칼의 말에 지레 겁을 먹었는지, 도적은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죄, 죗값은 달게 받아야죠.”
그는 어떻게든 살기 위해 억지로 웃었다.
“아쉽게 됐네.”
우드득.
칼은 주먹을 연신 쥐었다 폈다 하며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 * *
윈스턴 자작의 비밀 별장.
차명으로 구매한 이 별장에는 많은 양의 시체가 준비되어 있었다.
거대한 유리관에는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실험체들이 들어가 있었다.
또한 바닥 곳곳에는 마법진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그곳에서 한 남자가 정신없이 움직였다.
흑색 로브를 갖춰 입은 40대의 외견을 지닌 흑마법사.
그는 바로 실험실의 주인이자, ‘새벽의 이슬의 우두머리인 흑마법사 칸투버그였다.
우당탕!
콰앙!
놀랍게도 그는 지금까지 연구해 온 서적과 연구 논문 등을 바리바리 싸들며 도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초조해하는 그 모습은 마치, 겁을 집어먹은 토끼 같았다.
“젠장! 그 자식 대체 뭐야?!”
그는 패밀리어 마법으로 수많은 나방을 종속시켜 다루고 있었다.
불시에 일어나는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방금 전까지 칸투버그는 나방의 눈을 통해 환락가를 불시에 습격한 남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웬 애송이라고 여겼지만.
화륵!
새벽의 이슬 단원이 그가 지급한 아티팩트를 이용해 파이어볼까지 사용하자, 칸투버그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기습을 가한 남자 쪽이었다.
콰직!
남자가 일으킨 붉은 파동은 파이어볼을 격파했을뿐더러, 나방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파앙!
나방들은 마력의 부하를 이겨내지 못하고 일제히 터져나갔다.
다행히 나방은 곳곳에 널려 있어, 칸투버그는 남자의 행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 있었다.
그리고 칸투버그는 깨달았다.
저 남자는 자신이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마나 브레이크를 일으키는 남자라니, 완전 상식 밖의 존재잖아! 이런 게 어디 있어!”
공들여 쌓았던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기분이 이럴까.
천하의 예카테리나 2세마저 농락한 자신이 새파랗게 어린놈을 상대로 도망가야 한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가 없었다.
사락.
바로 그때.
계단 부근에서 누군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빠직!
이마에 핏대를 세운 칸투버그는 격분하며 소리쳤다.
“죽고 싶어? 누가 멋대로 내 연구에 손을 대라고 했지?!”
처음에는 윈스턴 자작이 보낸 밀정이라고 생각했지만, 눈앞에 나타난 남자는 칸투버그의 예상을 훨씬 빗나간 인물이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설원을 방불케 하는 은백발와 청명한 호수 같은 푸른 눈동자.
신장은 칸투버그보다 작았지만, 풍기고 있는 기운은 그를 압도했다.
게다가 새하얀 블라우스에 검은 바지라는 단출한 복장이지만, 옷맵시마저 좋아 마치 고급스러운 의상을 입은 것만 같았다.
“너, 너는 누구야?”
칸투버그는 뒷걸음질 치며 소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소년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칸투버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기껏 실험을 하라고 세력을 키워줬는데 이 모양 이 꼴이군. 애써 행했던 연구마저 상식의 틀에 갇혀 이딴 쓰레기 같은 부산물 밖에 내놓지 못했고 말이야.”
소년은 흥미를 잃었다는 듯 칸투버그가 집필한 서적을 뒤로 던졌다.
“다, 당신은 누구기에.”
“……나? 너를 여기까지 키워 낸 사람이야.”
“무, 무슨?”
“어두컴컴한 감옥에 갇혀있던 너를 탈옥시켜 이실리아까지 오게 한 다음, 윈스턴 자작을 꾀어내서 너랑 접선시켜주었으며, 새벽의 이슬이 알차게 클 때까지 너를 든든하게 지원해줬던 사람이지.”
“무, 무슨 소리야. 그, 그건 모두 내가…….”
칸투버그는 애써 부정하려고 했지만.
“내 뜻이야.”
소년은 단 한마디로 일축했다.
“뭐 만족스럽지 않지만, 이 정도라면 요긴하게 쓸 수 있겠어.”
“너, 너! 나를 폄하한 주제에 내 연구를 뺏을 생각인 거냐!”
칸투버그는 기가 차서 반박하니 소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아아, 칸투버그여. 누누이 말하지만, 네가 한 연구 따위 나라면 1시간이면 완성할 수 있는 일이야. 대단한 걸 했다는 듯이 으스대지 마.”
“그, 그렇다면 너가 직접 하면 될 일이지, 왜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는 거야?”
씨익.
소년은 얄궂게 웃으며 답해주었다.
“금기시되는 연구라서 내가 함부로 손을 댈 수 없거든. 그래서 너라는 수단을 통해 획득해야 했어.”
“…….”
어째서일까?
소년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칸투버그는 굴욕을 느끼기보다는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남자의 손에 농락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당신의 이름은 뭡니까?”
“데제스. 데제스푸아르다.”
이름을 들은 순간, 칸투버그는 즉각 무릎을 꿇었다.
“데, 데제스님. 저, 저를 거둬 주신다면, 제 목숨과 함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글쎄. 어떻게 할까?”
데제스는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그의 귓가에 한마디를 내뱉었다.
“충성의 증거로 지금부터 이곳에 올 남자의 목을 가져와.”
“그, 그건?!”
파르르.
칸투버그는 몸을 떨 뿐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충성을 바치겠다는 것도 사실 칼에게서 구해달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데제스가 자신을 사지로 밀어붙이고 있으니,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심해. 저 남자를 이길 수 있는 힘 정도는 줄 테니까.”
데제스는 싱긋 웃으며 칸투버그의 이마에 검지를 갖다 댔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해괴한 장난인가 싶었지만.
두근!
“크아아아아아아악!!!”
검지를 통해 흘러들어온 수상한 마력이 온몸을 헤집자, 칸투버그는 온몸에 경련을 일으켰고, 동공은 뒤집혀 흰자위만 남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콰앙!
별장 전체로 붉은 마력이 원형의 파문을 그리며 확산되더니…….
콰칭! 콰칭! 콰칭!
칸투버그가 공들여왔던 마법진을 모조리 파훼시켜버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데제스는 인상을 구겼다.
칸투버그의 연구를 활용해 훗날을 대비하려고 했건만, 결국 칼에 의해 모든 계획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하아. 마음에 안 들어. 슈타크 가문에 저런 놈은 없었는데……. 도무지 예상이 안 가는 놈이야.”
뜻대로 되지 않는 남자.
가만 풀어주면 미친개마냥 모든 것을 들쑤셔놓으니, 예측조차 되지 않았다.
사실 칼이 단 하루 만에 새벽의 이슬을 정리할 줄은 몰랐기에, 그의 상실감은 더욱더 컸다.
뚜벅뚜벅.
데제스는 곧 연구에 미련을 접고 그대로 발길을 옮겼다.
“여기서 살아남으면, 내 경쟁자로 인정해 줘야 되는 걸까나.”
스슥.
그는 그렇게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 * *
칸투버그의 거주지를 알아낸 칼의 발걸음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윈스턴 자작의 별장의 입구.
별장 주변에는 쇠창살 같은 울타리와 문이 세워져 있었고, 입구 앞에는 두 명의 문지기가 문을 지키고 있었다.
“멈춰! 여긴 꼬맹이가 올 곳이 아니야.”
“왜 여기서 서성이는 거지? 돌아가!”
입구를 지키고 있던 문지기들이 꺼지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사악!
하지만 칼은 두 사람을 무시하고 단숨에 문 앞에 도달했다.
“무슨 짓이야! 멈춰!”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한 문지기들이 칼을 만류하려고 했다.
우지끈!
콰앙!
그러나 칼은 쇠창살로 이루어진 문을 발로 걷어찼고, 철창문은 박살 나며 통째로 나가떨어졌다.
“…….”
덜커덩!
깜짝 놀란 문지기는 무심코 손에 쥐고 있던 할버드를 떨어뜨렸다.
그것을 집어 든 칼은 도리어 그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칸투버그를 숨겨 준 죄는 달게 받게 될 거다.”
“히끅!”
고분고분 감옥에 갈 것이냐, 아니면 칼을 죽이고 칸투버그가 이곳에 있었다는 증거를 인멸시킬 것이냐.
방법은 둘 중 하나였다.
그들은 감히 후자를 선택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
칼은 얼어붙은 두 사람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정원에 들어섰다.
꿈틀꿈틀.
정원에 배치된 마법진 위로 뼈들이 조립되더니 다수의 스켈레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꺼져.”
칼은 마지막 남은 팔찌로 트리거를 발동했다.
콰앙!
붉은 마력이 마나 브레이크를 일으키자 스켈레톤은 몸을 완전히 맞추기도 전에 우수수 무너졌다. 칼은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문지기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괴, 괴물.”
“어디서 저런 게 튀어나온 거야?”
* * *
끼익!
별장의 지하.
마침내 칼은 칸투버그의 비밀 실험실에 발을 들이밀 수 있었다.
칼은 눈을 반쯤 뜬 채, 눈앞의 상대를 바라봤다.
“크크크크크크. 애송이 주제에! 감히 날 이렇게까지 몰아넣다니.”
그는 정신이 무너진 건지, 침을 흘리며 칼을 비웃고 있었다.
하지만 쉽사리 얕볼 수는 없었다. 칸투버그의 전신에서 엄청난 양의 마력이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크크크, 네놈 덕분에 이 어마어마한 힘을 얻었다. 이제 너 같은 건…….”
콰직!
자신의 힘을 자랑하던 칸투버그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칼이 던진 할버드가 얼굴에 박혀서 그대로 터져버렸다.
“말이 너무 많아.”
……이걸로 끝인가?
온몸에 피로가 누적된 칼은 피곤한 표정으로 등을 돌렸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우적, 우적!
기이한 소리가 고막을 자극했다.
“?!”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칸투버그의 온몸에는 구더기가 들끓었고, 목 위로는 터져버린 원래 얼굴을 대신해 곤충의 얼굴이 생겨나 있었다.
해괴망측한 괴물이 돼 버린 칸투버그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크하하하하하! 난 불로불사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죽지 않아. 이 힘이라면, 이 힘이라면 너 따위는 가뿐하게 죽일 수 있어!]
그 모습에 칼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하루살이 인생이 아니길 기대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