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해질녘.
오닉스 스퀘어에 다시금 저녁 식사 시간이 찾아왔다.
몸을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피르는 릴리의 옆에 앉아 우물우물 빵을 씹고 있었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맥캘리는 뚱한 표정으로 칼에게 말했다.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 학파 연구실을 탁아소 겸용으로 쓰는 거냐?”
“뭐 어때? 친구도 생기고 좋잖아.”
빠직!
“이놈이, 감히! 스승을 하늘과 같이 대하라는 말을 몇 번이나 일렀거늘.”
자신을 또 골리는 말에 맥캘리는 분노하여 연신 칼을 갈구기 시작했다.
물론 칼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릴리는 피식 웃으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제는 누나와 말 안 듣는 남동생 같네.”
“그래도 공자님께서 웃으시는 건 맥캘리 교수님하고 계실 때라고 생각해요.”
때마침 레인이 갓 구운 체리 파이를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대화에 참여했다.
“어느 학파도 이렇게 하지는 못할걸.”
릴리는 부럽다는 시선으로 칼과 맥캘리를 바라보았다.
* * *
식사가 끝나고 어색한 침묵이 주변을 뒤덮었다.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피르는 곰 인형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엄마는 아낙스라는 여관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근데 어느 날 갑자기 밤에 사람들이 들이닥치더니 다 부수고 엄마를 잡아갔어요.”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는지, 피르는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엄마를 납치한 건, 누군데?”
“……잘 모르겠어요.”
다소 어휘력이 부족할 나이였기에 정확한 설명을 듣는 것은 힘들 듯 보였다.
하지만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는지 맥캘리는 질문을 던졌다.
“그때가 언제지?”
“하, 한 달 전이요.”
“‘새벽의 이슬’인가.”
맥캘리는 턱을 괴며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새벽의 이슬이 뭔데요?”
“근래 이실리아에서 인신매매를 벌이는 지독한 도적단이지. 점조직으로 구성돼 있어서 잡기도 힘들뿐더러,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터라 꼬리가 잘 드러나지도 않는다고 하더라. 여왕 폐하께서도 잡으려고 공공연히 노력하고 있지만, 그게 쉽지가 않아.”
“방법이 없는 건가요?”
릴리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을 때.
드륵.
칼은 의자를 밀며 몸을 일으켰다.
“꼬맹아.”
“네, 네!”
칼의 호명에 피르는 등을 꼿꼿이 세우며 답했다.
“만약 엄마를 데려오면, 보수로 이거는 내가 갖겠다.”
너덜너덜해서 솜뭉치가 튀어나오기까지 한 소녀의 인형.
이것에 대체 어떤 가치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피르는 인형을 꼭 안으면서 몹시 망설이는 듯 보였다.
그러나 세상의 그 무엇보다 소중한 엄마를 데리고 와 준다면, 너무나도 저렴한 대가였다.
“……약속이에요.”
피르가 인형을 꼭 건네자, 칼은 피식 웃으며 레인에게 인형을 건네줬다.
“깨끗하게 빨아서 꿰매 놔.”
“네?! 네!”
당황한 레인은 인형을 받았고 칼은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움직이는 칼을 보며 릴리는 눈총을 주었다.
이에 칼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처럼의 축제잖아. 즐기러 가는 것뿐이야.”
“……어째 내가 생각하는 축제랑 네가 생각하는 축제 사이에, 묘한 어감의 차이가 있는데.”
릴리는 이제는 놀라움을 넘어서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칼은 목의 관절을 풀어 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뭐, 하는 김에 약속을 지키러 가는 것뿐이야.”
“잠깐! 상대가 얼마나 위험한 상대인 줄 아는 거야? 적어도 근위병들한테 이야기는…….”
릴리는 다급하게 칼을 말리려 했다.
“내버려 둬. 맡겨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지만 다음 순간 들려온, 의외로 차분한 맥캘리의 반응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멈칫하고 말았다.
뒤를 돌아보니, 맥캘리는 평소와는 달리 냉정하면서도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녀석 말이 허세인지 아닌지 오늘 사건으로 결판이 나겠지. 무모하기는 하지만 쉽사리 자기 목숨을 남에게 내어 주지는 않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교수님.”
릴리는 보기 드물게 맥캘리가 칼에게 어떤 기대를 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발언을 마친 뒤, 맥캘리는 레인이 끓여 둔 홍차를 들이켰다.
후룩.
‘후후, 오랜만에 멋있게 말했네.’
물론 그 속은 영락없이 자아도취에 빠져 있었다.
한편, 릴리는 떠나가는 칼의 손에 잔뜩 들려 있는 팔찌를 멀뚱히 바라보다 맥캘리에게 말을 내뱉었다.
“……교수님, 칼이 트리거에 쓰이는 촉매를 한 다발로 가져가는데요. 괜찮은 거 맞죠?”
“푸훗!!”
눈앞에서 벌어진 연구실 소품 도난에 깜짝 놀란 맥캘리는 그대로 찻물을 뿜어냈다.
그녀는 입가를 소매로 스윽 닦더니 곧바로 기염을 토해냈다.
“내 이 자식을 그냥! 당장 잡아 와!!!”
“아까는 그냥 보내라고 하셨잖아요?”
“크아아아악! 그 자식! 가만 안 두겠어!!! 왜 저딴 걸 제자로 받아들여서!”
‘조금만 있으면 불도 뿜어낼 수 있을 것 같아.’
릴리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맥캘리를 달래기 시작했다.
쪼륵.
때마침 코코아를 타 온 레인이 피르의 찻잔에 코코아를 가득 채웠다.
“후훗, 먹어 봐.”
“네, 네.”
산만한 분위기 가운데, 눈치를 보고 있던 피르는 코코아를 홀짝 들이켰고.
“맛있다!”
달콤한 맛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런 피르를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던 레인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 * *
칼은 닥치는 대로 부수는 걸 선호하는 편이었다.
실제로 마계를 휩쓸었을 때도 그 넘쳐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 마계의 지형을 상당히 훼손시켰었다.
아마 그 추세가 이어졌다면 마계는 1년도 안 돼서 멸망했을 테지만.
완전히 소멸시키기까지 10년이나 걸렸던 것은 권모술수에 능한 마족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간사한 점에 있어서 인간은 마족과 너무나 판박이였다.
예전이라면 무차별적으로 힘을 난사해 소멸시켰겠지만, 인간의 몸으로 환생한 지금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마왕의 힘을 온전히 발휘하기 어려운 연약한 인간의 육신.
오닉스 스퀘어의 마나 연공식을 통해 차츰 강해지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그 한계는 명백했다.
더군다나 지금은 갱생 중이기에 죄 없는 사람들의 생명까지 고려해야 했다.
여러모로 번거로운 일이지만.
‘뭐 이건 이것대로 흥미가 있군.’
칼은 그 삶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아아아아악!
난롯불이 타오르는 한 저택.
창문을 가린 커튼 틈으로 도심의 거리가 엿보였다.
칼이 당도한 이곳은 다름 아닌 정보 길드 지부.
난롯불을 지피고 있는 이는 일전에 만난, 간부 레르노만이었다.
“다시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원래 귀하게 자란 도련님들께서는 저희를 찾을 때, 고용인을 통하시거든요.”
쪼륵.
인사와 함께 레르노만은 찻잔에 차를 부었다.
닫혀 있던 커튼을 젖힌 칼은 팔짱을 낀 상태로 창밖을 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새벽의 이슬이라는 조직의 본거지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
“짚어낸 장소가 있습니다만, 한두 곳이 아닙니다.”
“아낙스라는 여관에서 일했던 여자가 있어. 우선, 그 여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은데.”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레르노만은 정중하게 예를 갖추며 자리를 비웠다.
잠시 후.
도심의 지도를 들고 온 레르노만이 의자에 착석하자, 칼이 말했다.
“우선 그 조직의 배경에 대한 것부터 알려 줬으면 싶은데.”
레르노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새벽의 이슬은 이실리아로 밀항해 온 한 흑마법사에 의해 세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기 시작한 범죄 집단입니다.”
흑마법이란 대목에서 칼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입을 뗐다.
“스첼레투스랑 관련 있는 건가?”
“아마 관계는 없을 겁니다. 흑마법이라고 해도 스첼레투스 학파가 추구하는 것과 비교하면 질이 너무 떨어지거든요. 새벽의 이슬의 수장인 흑마법사의 이름은 칸투버그. 주로 사용하는 건 최면이나 벌레 그리고 구울을 조종하는 정도입니다. 뭐 그것만으로도 민간인들에게는 충분히 위협이 되지만요.”
“그 정도면 이실리아에서 못 잡을 리가 없을 텐데.”
레르노만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애석하게도 칸투버그의 특기는 흑마법보다는 조직을 이끌어 가는 지휘력과 외부와 결탁할 수 있는 협상술에 있습니다. 몇몇 관료가 그들에게 협력을 하고 있죠. 그 때문에 칸투버그의 소재지까지는 저희도 알아내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은밀하게 움직여도 결국 사람이 움직이는 이상 그 장소를 추려내기는 어렵지 않죠. 이 정도가 되겠군요.”
레르노만은 깃펜으로 지도에 다섯 군데를 표시한 뒤, 한 곳을 깃펜으로 지목했다.
“방금 전에 말했던 여인의 소재지는 여기입니다.”
그가 짚은 장소를 본 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여긴.”
“네. 아무래도 돈을 가장 끌어모으기 쉬운 수단은 역시 환락가니까요. 멀쩡한 여성을 억지로 집어넣었을 겁니다.”
“하아.”
기가 막힌다는 듯, 칼은 헛웃음을 터뜨리다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전부 부숴 버리면 나오겠지.”
가급적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했지만, 역시 성질을 참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짤랑!
칼은 금화가 담긴 주머니를 테이블 위에 던지며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르노만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녀석들은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가급적 신중하게…….”
“야.”
하지만 칼은 그의 충고를 단번에 잘라 버렸다.
그리고 심홍색의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누구한테 충고하는 거냐?”
오만하면서 분노가 짙게 깔린 목소리, 그 엄청난 기세에 레르노만은 기겁했다.
‘뭐, 뭐야?!’
단지 눈빛을 마주한 것만으로 이마에 식은땀이 흥건히 흐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는 직업 특성상, 많은 사람을 만나 왔다.
그중에는 당연히 신분을 감춘 소드 마스터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백도 지금만큼 오금이 저리게 만들지는 못했다.
“시, 실언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결국 그 기백을 이기지 못한 레르노만은 넙죽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의 사과에 칼은 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어느새 어두워진 밤하늘의 풍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럼, 슬슬 놀아 볼까?”
“네?!”
내가 뭘 들은 거지?
깜짝 놀란 레르노만이 고개를 들었을 때는…….
끼익.
칼은 이미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 뒤였다.
* * *
이실리아에 위치한 환락가.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은 꽤나 다양한 신분을 지니고 있다.
머나먼 항해에 지친 선원, 그리고 일탈을 꿈꾸는 귀족가의 철없는 도련님 등.
“크흐흐흐. 꼬맹아, 넌 여기 오려면 아직 먼 것 같은데.”
그 때문에 환락가의 문을 지키는 이들은 눈앞에 있는 심홍색의 머리칼과 눈동자를 지닌 칼을 보며 자기들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지나가야겠는데.”
“어이쿠, 기어코 가겠다고? 그렇다면 입장료를 내야지.”
“크하하하하하.”
문지기들은 아직까지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칼을 조롱하며 웃어댔다.
“새벽의 이슬한테서 되찾아야 하는 여자가 있어서 말이야.”
“…….”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지기들의 안색이 험악해졌다.
“아아! 가끔 있단 말이지.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나대는 정신 나간 것들이!”
문지기는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칼에게 주먹을 내질렀지만.
쾅!
그보다 먼저 칼의 주먹이 그의 턱에 꽂히며 나가떨어졌다.
“이 개자식!”
깜짝 놀란 남은 문지기가 기겁하며 검집에서 검을 뽑으려고 할 때.
우드드드득!
칼자루를 쥔 그의 손목을 낚아챈 칼은 그대로 우악스럽게 비틀어 버렸다.
“크아아아아악! 놔 줘, 제발!”
방금 전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그는 눈물과 콧물을 쏟으며 무릎을 꿇었다.
“시끄러워. 짖지 마.”
콰앙!
칼은 그의 절규가 듣기 거슬렸는지, 그대로 머리를 걷어차 기절시켜 버렸다.
그렇게 모든 문지기들을 제압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30초쯤이었다.
웅성웅성.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일제히 경악했지만, 칼은 아랑곳하지 않고 환락가에 들어섰다.
두두두두.
그때 어디선가 거친 발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는 다음 순간, 칼의 앞을 수많은 남성들이 막아섰다.
모두 이 환락가를 관리하고 있는 새벽의 이슬 단원들인 것 같았다.
“보통내기가 아니다. 단숨에 죽여!”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소리쳤다.
오랜 경험으로 칼이 자신들이 범접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은 남자는 손에 끼고 있는 반지로 마법을 구사했다.
화륵!
그것은 1서클의 마법인 파이어볼.
화륵! 화륵! 화륵! 화륵!
하지만 반지를 지닌 자는 한두 명이 아니었다. 허공에 생성된 엄청난 수의 파이어볼은 어느새 하늘을 낮처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비록 1서클 마법이라고는 하나, 이 정도 수라면 그 위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적들은 칼을 업신여기고 있는지 얼굴에 비웃음이 어려 있었다.
스윽.
이에 칼은 촉매인 팔찌를 들어 그대로 트리거를 발동했다.
파앗!
팔찌가 끊어진 순간.
콰칭! 콰칭! 콰칭! 콰칭!
붉은 마력이 원형의 파문을 그리며, 파이어볼이 담긴 마법진을 일제히 깨트렸다.
“마, 마나 브레이크!”
믿을 수 없는 현상에 새벽의 이슬 단원들은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었고.
저벅저벅.
칼은 그들을 향해 걸어가며 씨익 웃어 보이고는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벌써 꼬랑지를 말면 안 되지. 서로 즐겨 보자고. 버러지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