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미스틱 마운틴에서의 훈련을 끝마친 지, 어언 일주일이 지났다.
사락, 사락.
부상 때문에 침대에서 요양을 하게 된 칼은 많은 양의 도서를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공자님, 이럴 때 좀 쉬어 두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곁에서 간호하고 있던 시녀, 레인은 끓인 홍차를 잔에 담아 칼에게 건네줬다.
찻잔을 받아든 칼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입을 뗐다.
“이미 다 나았어. 참견 많은 여자 때문에 눈치를 보는 거지.”
“참견이 많아서 미안하게 됐네요.”
“푸훗!”
문 너머에서 들려온 음성에 깜짝 놀란 칼은 찻물을 뱉으며 바깥에서 서성이는 릴리아나를 쳐다봤다.
“네가 하도 고집을 부리고, 걱정할 만한 짓을 하고 다니니까 계속 찾아오는 거잖아. 세상에 어떤 미친 인간이 다이어 울프 떼를 때려잡을 생각을 해? 클로이한테 그 이야기 듣고서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알아?”
“그 정도는 별 대수롭지도 않은 일인데.”
빠직!?
“대수롭지 않기는 뭐가 대수롭지 않아! 누가 봐도 긴박한 상황이었잖아.”
“끄응.”
질타가 끊이지 않는 느낌에 칼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또 상대하기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네.”
이미 속내를 다 꿰뚫어 봤는지, 릴리가 불편한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오늘은 왜 온 거야? 필기해 주었던 교과 자료는 다 살펴봤는데?”
칼의 말에 릴리는 ‘그걸 벌써 다 봤어?’라고 말하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고는 자조 섞인 어조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왜 경쟁자를 이렇게까지 지극정성으로 돌봐 줘야 되는 거지.”
릴리는 본인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는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본 칼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선의에는 언젠가 보답을 할 거야. 반드시.”
“보자. 내가 베푼 선의만 해도 하나, 둘…….”
사사사삭.
손가락이 접혔다 펴지기를 무수히 반복했다.
삐질삐질.
그것이 자신이 친 사고 횟수인 것을 집어낸 칼은 살짝 눈을 회피하며 말했다.
“굵직한 걸로 갚을게.”
“푸훗, 됐어. 어차피 기대도 안 해. 오늘은 전에 약속했던 에리 선물을 사러 가자.”
“난 아직 내기에서 이겼다고 할 만한 성적을 받지 못했다만.”
“됐어. 생일은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있는데. 이러다가 내년에 주겠다.”
“…….”
‘내 의도는 이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기껏 온 릴리를 무작정 떠나보낼 수 없는 입장인 터라…….
“알겠어.”
대답과 함께 칼은 상의를 훌렁 벗었다.
칼의 몸 곳곳에 자리 잡은 굵직한 근육을 본 릴리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숙녀가 있는 곳에서 옷을 훌쩍훌쩍 벗지 마. 이 바보야!”
릴리는 레인이 들고 있는 칼의 의복을 집어 그대로 칼의 얼굴에 던진 뒤.
콰앙!
있는 힘껏 문을 닫았다.
칼은 긁적긁적 관자놀이를 긁으며 레인에게 물었다.
“내가 뭐 잘못했나?”
“자칫하다가는 노출증 환자로 오해받으니까, 가급적 삼가해 주셔야 돼요.”
레인의 충고에 칼은…….
“인간사란 복잡하네.”
라고 중얼거리며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 * *
휴일을 맞이한 이실리아의 도심은 발랄하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옷을 갈아입은 칼은 릴리와 나란히 시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칼, 이거 어때?”
릴리의 양손에는 돌고래 문양의 장식품이 쥐어져 있었다.
“좋군. 이거로 하지.”
“으음, 귀찮다고 대충 선택하기 없기.”
릴리는 볼을 부풀리며 칼을 찌릿 노려보았다.
“좀 더 둘러보지.”
그 말에 내심 양심이 찔렸던 칼은 릴리와 함께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한 나라의 공주가 좋아하는 게 과연 뭐가 있을까?’
칼도 신중에 신중을 기했지만, 답이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고심하고 있을 때.
“끼리끼리 어울린다더니, 아주 잘 어울리네.”
정면에서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누군가 말을 건네 왔다.
거대한 체구를 가진 이는 다름 아닌 프랭크.
그 역시 휴일이라서 그런지 다소 가벼운 복장이었는데, 뒤에는 그를 추종하는 무리가 네댓 명이 더 있었다.
그와 먼저 눈이 마주친 릴리는 웩 소리를 내더니 칼의 손목을 잡고 끌고 갔다.
“신경 쓰지 말고 가자.”
“그러지.”
칼 역시 차라리 지나가던 개를 상대하는 게 더 생산성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만큼, 프랭크와 대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두둑.
그 모습에 급격히 분노했는지 프랭크의 이마에는 핏줄이 잔뜩 도드라졌다.
하지만 의외로 섣불리 나서지는 못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눈치를 보던 릴리도 이해가 되지 않는지, 칼에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왜 저래? 훈련할 때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나?”
“아마 나서지 말라고 데제스한테 경고를 받은 거겠지.”
“칼, 너 데제스를 만났어?”
릴리는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반년 가까이 시험을 볼 때를 제하고는 데제스를 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만났어. 꽤 재밌는 놈이더라고.”
칼은 데제스와 대화할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전생에 마왕이었던 그조차 긴장하게 만들 정도의 존재감을 지닌 남자.
그게 바로 데제스였다.
‘알테어로 돌아갈 때까지 꽤나 재밌게 놀 수 있겠어.’
솔직히 인간으로 환생하고 나서 이렇게 흥미진진한 적은 처음이었다.
“아, 빌어먹을! 짜증 나네!”
카앙!
프랭크는 길거리에서 구걸하기 위해 놓은 놋쇠 그릇을 걷어찼다.
놋쇠 그릇 앞에 있던 소녀는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찔 떨었다.
얼핏 봐도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였다.
소녀는 낡은 헝겊 인형을 껴안은 채, 사슴 같은 눈망울로 주변에 도움을 갈구했지만.
“…….”
사람들은 프랭크의 기세에 겁을 먹고 아이의 시선을 외면했다.
“뭘 봐. 이 거지 계집애가.”
소녀의 시선을 눈치챈 프랭크는 놋쇠 그릇을 발로 콰직 짓밟아 그대로 짓뭉개 버렸다.
“뭐 하는 짓이야!”
보다 못한 릴리는 결국 발걸음을 돌리며 호통을 쳤다.
그러나 프랭크에게 먼저 도달한 것은 그녀가 아닌 칼이었다.
어느새 프랭크의 곁에 선 칼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딱히 도발할 의도는 아니었지만, 자신이 바라는 전개가 되자 프랭크는 칼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호오, 정의의 사도처럼 행동하시려고?”
“약한 사람 괴롭히는 게 취미인가 봐.”
“그렇다면 어쩔 건데?”
“얌전히 그릇값이나 내놓고 꺼져.”
“지난번처럼 한 대 치겠다?”
신경전이 가열되며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봤다.
꿀꺽!
조마조마한 건 시선을 부딪치는 당사자들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이들이었다.
보다 못한 프랭크의 동료들은 결국 그를 만류했다.
“차, 참아. 프랭크. 이번에 또 사고 치면 모리스가 화낼 거야.”
그 말을 들은 프랭크는 다시 한번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까지는 데제스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반항하는 이가 있다면 짓밟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유독 이 남자, 칼리언트만큼은 쉽사리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강함도 강함이지만, 이 미친놈의 사고방식은 도무지 예상할 수가 없었다.
데제스 역시 그를 얕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동등한 경쟁자로 인식하고 있는 듯 보였다.
프랭크는 그 사실이 못내 불편하고 거슬렸다.
‘정식으로 두들겨 팰 수 있는 기회만 있으면 이렇게 당하지 않아.’
한창 고심하던 중.
묘안이 떠오른 프랭크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 수가 있었군.’
프랭크는 동화 5닢을 소녀의 앞에 던졌다.
주먹이 날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칼은 의외다 싶어 눈썹을 꿈틀거렸다.
누가 봐도 기세에 굴복했다기보다는 한발 물러선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조만간 파르테스에서 검술 대회가 열릴 참이거든. 너도 나와.”
“검술 대회?”
아직 공식적으로 통보받은 적이 없는 내용이었기에, 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프랭크는 간사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자세한 건 조만간 나오겠지. 그리고 넌 첫 시합에서 나랑 맞붙게 될 거야.”
대진표 조작도 가능하다는 소리에 릴리는 화들짝 놀랐다.
‘이건 함정이야.’
그녀는 다급하게 거절하라는 뜻으로 칼의 손을 붙잡았지만 칼은 신경 쓰지 않고 대답했다.
“좋아, 거기서 보자고. 사냥개는 결국 사냥개일 뿐이라는 걸 알려 줄 테니까.”
“마음껏 조롱하시지.”
칼의 답변이 마음에 들었는지, 프랭크는 무리를 이끌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괜찮겠어? 프랭크는 파르테스에서 검술 실력으로 3위, 완력으로는 1위라고.”
칼은 나른한 눈으로 자신을 염려하는 릴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질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이에 대한 릴리의 답은…….
“……아, 아니.”
의심이 가득한 부정이었다.
빠직!
꽤나 심통이 났는지, 칼은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삐지지 마.”
릴리는 미안하면서도 무안한 표정으로 칼을 달래다가 뒤늦게 벌벌 떨고 있는 아이를 보고는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많이 안 다쳤어?”
“……응.”
아직까지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는지, 소녀는 미미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릴리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름이 뭐야?”
“……피르.”
“피르구나.”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릴리는 조심스럽게 아이의 눈치를 살폈다.
“부모님은 어디 갔지?”
“칼!”
그때 들어온 눈치 없는 질문에 릴리는 버럭 화를 냈다.
길거리의 아이들에게 부모가 없는 경우는 무척이나 흔했다.
그런 아이들에게 부모의 소재를 묻는 것은 무척 실례이거니와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만들 수도 있었다.
파르르르.
피르의 가녀린 몸은 더욱 세차게 떨렸고, 동공은 마치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공포로 뒤덮였다.
타악.
그 순간 누군가의 손이 피르의 머리를 꼭 눌렀다.
“우웃!”
깜짝 놀란 피르가 위를 올려다보자, 그곳에는 칼이 무뚝뚝한 눈빛으로 소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타오르는 것 같은 심홍색 눈동자.
때 묻지 않은 선명한 색깔에서 엿보이는 차가운 분위기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말해.”
그리고 다시 한번, 떨어진 말에 피르는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안도했는지, 아이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어, 엄마는……. 흑흑흑, 납치돼서 돌아오지 않고 있어요. 흐아아앙!”
대답을 하던 피르는 울음을 터뜨렸다.
릴리는 그런 피르를 껴안아 주며 칼에게 호통을 쳤다.
“애를 왜 울려!”
웅성웅성.
순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칼을 보며 애를 울리는 놈이라며 수군거렸다.
찌릿!
물론 칼이 한 번 눈총을 주니, 다시 제각기 갈 길을 가기는 했다.
“선물은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꼬맹이 이야기부터 들어 볼까.”
“진짜?”
릴리는 의외라는 듯 칼을 쳐다봤고,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기사는 여자와 애를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비원을 이루고 나아가 완전한 갱생을 하기까지 칼은 이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기사가 되겠다고 한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해 하는 행동이었으나, 릴리는 그런 칼의 등을 보며 살포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 아주 가끔이지만, 멋있어 보일 때가 있는 거 알아?”
“몰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낯간지러운 소리에 익숙하지 않은지, 칼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같이 가. 기사라면 숙녀들을 배려해야지.”
그러다 뒤에서 약 올리는 듯 던지는 릴리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속도를 늦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