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이른 저녁.
오닉스 스퀘어 학파에는 제법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시녀인 레인은 야외에서 장작불 위에 솥단지를 올려놓고서 요리를 하고 있었고, 릴리는 안경을 쓴 상태로 깃펜으로 양피지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칼의 초대로 오게 된 로웰은 학파의 분위기를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마지막으로 칼과 맥캘리는 실험을 하고 있었는데…….
파앙!
그들의 눈앞에 놓인 용액이 담긴 플라스크는 칼이 마력을 주입하자마자, 엄청난 소리와 함께 폭발했다.
이걸로 17번째.
“으아아아아악! 그러니까 그렇게 무식하게 마나 브레이크를 일으키지 말란 말이야! 이 바보야!”
이제는 진절머리가 났는지, 맥캘리는 칼에게 욕을 퍼부었다.
빠직!
이마에 핏줄을 세운 칼도 지지 않고 그녀에게 반박했다.
“제어하는 게 그렇게 쉬웠으면, 이 학파에 사람이 떼거리로 들어찼겠지.”
“…….”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로웰은 릴리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누가 스승이야?”
“헷갈리기는 하겠지만, 당연히 맥캘리 교수님이지.”
릴리는 로웰의 반응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잠깐, 나도 도울게.”
레인의 말에 릴리는 필기를 멈추고 테이블에 식기와 접시 등을 옮기는 걸 돕기 시작했다.
로웰이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자, 릴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너도 돕지 그래?”
“어? 어? 알았어.”
평소 시종에게 모든 준비를 시켰던 로웰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릴리의 지시에 따라 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레인이 정중하게 초에 불을 붙이자, 주변이 환하게 밝혀졌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먹음직스런 저녁 식사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레인은 자연스럽게 릴리의 옆에 착석한 다음 냅킨을 다리에 얹었다.
그 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졌는지, 로웰은 칼을 쳐다보며 말했다.
“시녀에게 시키면 되는 일을 스스로 하고, 이렇게 겸상까지 하다니. 이런 경우는 처음 봤어.”
“손발이 없냐?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자기가 하면 되는 것뿐이야.”
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방금 썬 고기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릴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시선으로 칼을 바라봤다.
“돕지도 않고서 그렇게 말하는 거 너무 뻔뻔한 거 알지? 꼭 싫은 말을 두 번은 해야 움직이면서.”
“쉽게 움직여 주는 남자는 매력이 없거든.”
“으이구~. 저 말본새는 대체 누굴 닮았는지.”
맥캘리는 쯧쯧 혀를 차다가 로웰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제자야. 친구를 불렀으면 소개를 해야지.”
로웰은 화들짝 놀라 자신을 소개했다.
“로웰입니다. 소속된 학파는 비블리오 마기아스입니다. 공통 분야는 검술이고 이번에 칼과 사소한 계기로 친구가 됐습니다.”
맥캘리는 ‘안 봐도 뻔하지.’라고 중얼거리면서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저 녀석만의 거칠고 투박한 배려를 알아봤나 보구나.”
그녀의 말에 로웰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맥캘리는 와인을 홀짝 마시며 주변을 살피다 훈훈하게 웃어 보였다.
“뭔가 사람이 많아지니 기분이 왠지 모르게 흡족하네. 그래서 로웰, 여기 온 소감은 어떠냐?”
“네?”
갑작스런 질문에 로웰은 조금 당황했고, 칼은 그 옆에서 고기를 뜯으며 중얼거렸다.
“난 ‘이렇게 구질구질한 곳에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을까?’라는 느낌이 들었었지.”
“닥쳐!”
맥캘리는 버럭 화를 내며 칼의 말을 끊었다.
“…….”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적잖이 당황해 할 말을 잃어버렸다.
“크흠. 저놈 말은 무시하고.”
그리 말을 한 맥캘리는 부끄러운지, ‘그래도 요즘은 청소한다.’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로웰은 피식 웃다가 오닉스 스퀘어에 대해 생각했다.
타 학파는 비교적 고급스런 시설에서 수업을 하며 학생들의 실력을 꾸준히 증진시킨다.
반면, 유감스럽게도 오닉스 스퀘어의 시설은 여러 가지로 미흡했다.
게다가 학파의 수장, 맥캘리는 옛 그랜드 마스터의 심법을 분석하는 중이라 아직 자신의 연구를 완성시키지 못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관심을 가지는 학생이 과연 몇이나 될까?
로웰 그 자신도 편협한 관념에 사로잡혀 당연히 이곳을 외면했었다.
하지만 칼과 만난 뒤.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서서 본 풍경은 달랐다.
위를 쳐다보면 잎사귀 사이사이로 부스러지는 달빛이 보였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에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시설도 연구도 미흡한데 그저 주변의 경치만 좋은 것은 아닐까.
처음엔 그렇게도 생각했었지만, 로웰은 어느새 자신의 마음이 평안해졌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칼이 들어오고 나서 연구도 조금씩 가다듬어지고 있다고 했지. 아마 이 학파는 조만간 스첼레투스를 뛰어넘는 성과를 보일 것 같아.’
고찰을 마친 로웰은 곧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루하루 변해 가는 재미가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냐?”
“네.”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맥캘리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곤 기분이 한껏 들떴는지 빈 잔에 와인을 콸콸 부었다.
“……교수님.”
릴리가 다급하게 말리려는 찰나.
툭.
칼은 그녀의 손에서 와인 병을 빼앗아 그대로 그녀의 머리에 얹었다.
“그만 마셔. 또 술 취해서 주정 부리지 말고.”
빠직!
“이놈 자식이 감히! 스승 보기를 금과 같이 하라는 말을 못 들었어?!”
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금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있지.”
“닥쳐! 어디서 감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나불거리고 있어.”
어지간히 분했는지, 맥캘리는 칼에게 주먹을 내질렀으나.
덥석.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칼은 긴 리치를 이용해 그녀의 머리를 밀어 주먹이 빗나가게 만들었다.
“으아아아아악!”
맥캘리는 분한 듯 손발을 버둥거렸고.
“하하하하!”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웰은 웃음을 터뜨렸다.
* * *
밤이 깊었다.
모두가 떠나간 자리.
본래는 숙소에 있어야 할 시간이지만, 칼은 맥캘리의 권유로 다시 연구실에 들어온 참이었다.
“밤에 안 자면 키 안 클 텐데. 무슨 일로 부른 거야?”
빠직!
“더 이상 자랄 키가 없다, 요놈아.”
맥캘리는 가까스로 분노를 참으며 실을 엮어 만든 팔찌를 칼에게 보여 줬다.
“……그건 뭐야?”
“흐흐흐흐, 궁금하냐? 이 스승님이 드디어 기술 하나를 완성시켰거든.”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던가.
맥캘리는 팔찌를 손목에 착용한 뒤, 접시에 놓인 씨앗을 향해 손을 뻗었다.
“…….”
잠시 눈을 감고서 호흡을 몰아쉬던 맥캘리가 눈을 번쩍 뜨자.
파앗!
손목의 팔찌가 갈가리 찢겨 나갔다.
“……그건.”
처음에는 별 흥미가 없는 표정을 짓던 칼이었지만.
곧 접시에 놓인 씨앗이 벌어지며 30센티미터가 넘는 줄기가 뻗어 나오는 것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평소 맥캘리가 마력을 일으켰을 때 나오던 줄기는 고작 해봐야 1센티미터 내외.
즉 평소보다 족히 30배나 빠른 성장 속도였다.
히죽.
맥캘리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기술의 이름을 나는 트리거(trigger)라고 할 참이야. 너한테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전수할 거야. 그 외에는 릴리나 소수를 제외하고는 다른 녀석들에게 가르칠 생각은 없으니까, 유용하게 써먹어 봐.”
“…….”
의기양양한 그녀의 표정에 칼은 처음으로 반박을 하지 못했다.
경외감이라고 할까?
그런 감정이 들었다.
오랫동안 연구를 해 왔지만 아직 완성시키지 못했다.
그 누구라도 앞이 보이지 않아 엄두도 내지 못할 상황.
맥캘리 역시 분명 그런 자신의 상황을 원망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두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열정은 꺼지지 않았고, 마침내 열매를 맺고 있었다.
맥캘리.
그녀는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칼의 앞에 서 있었다.
* * *
해가 중천에 이를 즈음.
“하암.”
육신의 피로를 이기지 못해서 쏟아지는 졸음에 칼은 눈을 거의 반쯤 감고서 걷고 있었다.
툭.
그러다 곁에서 걷고 있던 릴리의 어깨에 기대는 상황까지 오고 말았다.
“이제 그만 정신 차려.”
툭!
릴리는 얼굴을 홱 붉히며 들고 있던 두꺼운 책으로 칼의 머리를 살짝 쳤다.
작은 충격에 칼은 눈꺼풀을 비비며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릴리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 칼에게 말했다.
“근래 들어서 왜 그래?”
“오버 페이스야. 요즘 들어 1시간도 못 자고 있거든.”
대답 후, 칼은 찌뿌듯한 몸을 스트레칭을 하며 가볍게 근육을 풀어 주었다.
“……사람 맞아? 아무리 시험 기간이라고 해도 나 역시 그렇게까지는 못하는데.”
릴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휘둥그레 눈을 떴다.
릴리와 같이 걷고 있던 에리는 얼굴에 홍조를 피우며 입을 열었다.
“어머! 너 혹시 밤에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있…….”
“으아아아!”
“우웁!”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릴리는 소중한 책마저 바닥에 떨어뜨리며, 다급하게 에리의 입을 막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에리!”
릴리는 얼굴이 새빨간 홍당무처럼 변해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지둥했다.
“우웁!”
에리는 싱글벙글 웃으며 자신의 입을 막고 있는 릴리의 손을 가리켰다.
릴리는 찜찜한 표정으로 손을 놓기 전에 먼저 에리의 다짐을 받기로 했다.
“이상한 소리 하기 없기!”
에리는 웃는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푸하.”
릴리의 손에서 해방된 에리는 상쾌하게 웃으며 칼에게 말을 건넸다.
“칼리언트. 피곤할 때는 벌꿀과 유자를 섞어 만든 파이가 제격이거든? 레시피를 적어 줄 테니까, 레인에게 전해 줘.”
“아니. 필요 없는…….”
거부하려는 찰나.
스스스스슥.
에리는 진중한 눈빛으로 수첩에 글씨를 써 내려갔다.
너무나 빠른 속도에 릴리마저 깜짝 놀란 듯 보였다.
칼이 어깨너머로 보니, 무척이나 아름다운 필체로 쓴 글자가 가지런하게 나열돼 있었다.
쫘악!
레시피를 다 적은 에리는 칼의 손에 그것을 얹어 주었다.
“자. 칼도 궁금하면 봐도 돼.”
명랑하면서도 쾌활한 말투.
하지만 릴리를 등지고 있는 에리, 아니 에리스 폰 이실리아의 눈빛은 무척이나 진중했다.
‘호오.’
레시피가 자신에게 전하는 어떤 메시지임을 간파한 칼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재개했다.
“어쩔 수 없지.”
“호호호호, 효과 만점인걸. 자, 가자. 릴리, 이러다가 수업 늦겠어.”
“자, 잠깐 좀 천천히 가. 칼, 나중에 보자.”
에리의 손에 붙들린 릴리는 인사를 하며 그대로 발을 굴렀다.
스윽.
칼은 그녀들에게는 눈길도 건네지 않고 에리가 준 종이를 펴 보았다.
「오늘부터 대규모 수련이 있다고 했지? 학생들에게는 기밀이라고 했겠지만, 장소는 미스틱 마운틴일 가능성이 높다고 들었어. 거기는 이실리아에서 가장 행방불명자가 많이 나오는 곳이야. 리자크 교관은 너에게 적대적이니까 주의하는 게 좋을 거야. 나는 그냥 아프다면서 빠지는 걸 추천할게~, 칼리언트 군!」
피식.
걱정과 충고가 담긴 편지에 칼은 입꼬리를 올리며 그대로 종이를 찢었다.
이런 기밀 정보는 남에게 보여 봤자 득이 될 것도 없거니와.
“기껏 축제를 준비해 줬는데, 피할 이유는 없지.”
전생이긴 하지만, 마왕이었던 그가 고난과 역경을 피하는 건 얼토당토않은 일이다.
마왕이란 본래 남에게 고난과 역경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일이 어찌 됐든, 에리의 정보로 잠이 말끔하게 가신 칼은…….
벌컥!
그대로 연무장의 문을 열며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