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리자크와 충돌하기 5분 전.
팔 굽혀 펴기를 하고 있던 칼은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프랭크가 검으로 한 소년을 한껏 농락하고 있었다.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칼은 이내 신경을 끄고 다시 훈련에 몰입하려고 했지만.
-당당히 기사가 돼서 인정받고 싶어.
-약자를 수호하는 기사가 되겠습니다.
일기장에 쓰여 있던 문구와 사라의 앞에서 한 자신의 맹세를 떠올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절대자는 자신이 한 말을 엄격히 준수해야 하는 법.
차이트와 계약을 지키는 것 역시 칼 자신의 긍지 때문이다.
결단을 마치고서 몸을 일으킨 칼은 목인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곤 목인장을 치고 있는 소년을 향해 말했다.
“나와.”
“응?”
“내 차례니까, 나오라고.”
“으, 응.”
칼의 강압적인 말에 학생은 바싹 긴장하며 뒤로 물러섰다.
스윽.
목인장 앞에 선 칼이 발을 뒤로 빼자, 곁에 있던 학생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목검은 필요 없는 거야?”
그의 질문에 칼은 씩 웃으며 답했다.
“필요 없어. 먼저 이게 얼마나 튼튼한지 시험해 볼 생각이거든.”
말이 떨어진 직후.
콰앙!
칼의 발이 목인장을 요란스럽게 강타했다.
그 충격을 견딜 수 없었는지, 목인장은 뽀각 소리를 내며 부서져 그대로 프랭크를 향해 날아갔다.
쿠쾅!
다리에 부서진 목인장을 직격당한 프랭크는 볼품없이 넘어졌다.
* * *
그리고 현재.
서로를 노려보는 칼과 리자크로 인해 연무장에는 불길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와아. 쟤 진짜 성격 장난 아니네.”
“그러게. 프랭크가 순해 보일 정도야.”
빠직!
주변에서 수군덕거리는 소리에 프랭크가 학생들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시선이 마주친 이들은 모두 겁먹은 강아지처럼 깨갱 하며 얌전해졌다.
“흥!”
프랭크는 팔짱을 낀 채로 두 사람의 대치를 지켜보며 생각했다.
‘저건 완전히 미친개군.’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을 처음으로 마주한 프랭크는 내심 분통이 치밀었다.
마음 같아서는 힘으로 제압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주변에서 제지가 들어왔다.
하지만 상황이 그 반대라면 어떨까?
분명 칼은 주변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프랭크에게 공격을 가할 것이다.
주변의 이목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우선시하는 남자.
외적으로 별로 닮은 곳은 없었지만, 프랭크는 칼을 보며 그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데제스랑 닮았을지도 모르겠어.’
성향은 완전히 다르지만,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어째선지 매우 유사했다.
주륵.
칼에 대해 생각하던 프랭크는 문득 자신의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내가 저 녀석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빠득!
프랭크는 곧장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며 이빨을 갈았다.
‘그럴 리 없어. 저 녀석은 단순히 허세로 가득한 미친개야.’
한편, 칼의 도발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은 리자크는 주먹을 쥐고 펴기를 반복했다.
마음 같아서는 주먹으로 후려치고 싶지만, 어째서인지 이 녀석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응수를 해 올 것 같았다.
자칫하면 일이 커지는 관계로 리자크는 교관의 권위를 내세웠다.
“칼리언트, 아무래도 네놈은 아직 주제 파악을 못하는 것 같군.”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벌로써 오늘 이곳은 너랑 저 반푼이 놈이 청소한다.”
리자크는 검지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로웰을 가리켰다.
칼은 멀뚱히 로웰을 쳐다보다 리자크에게 말했다.
“이의를 제기해도 되겠습니까?”
“기각이다. 입 닥치고 시키는 대로 이행해. 퇴학 사유를 늘려 줄까? 시종을 시키는 것도 금물이다.”
“어쩔 수 없죠. 근데 벌을 주는 사유가 구체적으로 뭡니까?”
“나에 대한 반항이다.”
“마음에 드는 사유네요. 훈련 계속 진행하시죠. 끝나는 대로 청소를 해 놓겠습니다.”
칼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빠직! 빠직!
리자크는 이마에 핏대를 가득 세우며 전보다 더 분개했다.
밟으면 밟을수록 더 질겨지고 거세지는 완고함, 그리고 도통 말을 듣지 않는 청개구리 같은 심보.
리자크 스스로도 독종이었지만, 이래저래 자기보다 더한 상대를 만나니 당황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날 이곳에 보낸 건, 저놈을 짓밟아 놓으라는 거였군.’
리자크는 그제야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이유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 * *
훈련이 끝난 연무장.
칼은 빗자루로 지저분한 바닥을 쓸며 이빨을 빠득빠득 갈았다.
“내가 청소한다니까 엉망진창으로 어지럽히고 가다니.”
옆에서 쓰레기를 자루에 주워 담던 로웰은 그런 칼을 넌지시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아까는 고마웠어.”
“뭐가?”
“일부러 나 도와준 거잖아.”
“도와준 적 없어. 내 신념에 따라 움직인 거뿐이야.”
그 대가로 남아서 연무장 청소까지 하고 있지만, 칼의 표정을 봤을 때 딱히 후회 따윈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던 로웰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너처럼 당당했으면 좋겠는데. 아니 너처럼은 너무 과하니까, 한 방울 정도만.”
“뭐야? 그 표현은.”
다소 생뚱맞은 표현에 칼은 조금 당황했지만, 로웰은 부럽다는 듯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어딜 가든 세력이란 게 존재하잖아. 사람은 결국 강대한 세력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데, 비록 여긴 학교지만 너는 절대로 굽히지 않을 것 같아.”
로웰의 말에 공감하는지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무릎을 꿇어 본 적은 없지만, 한 번 꿇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자신의 것을 하나씩 내려놓겠지.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주인에게 길들여진 사냥개가 되어 있는 거고. 난 그런 건 사양이야.”
그 말을 듣던 로웰은 조금 놀란 듯 보였다.
그러다 곧 심지를 굳힌 얼굴로 말했다.
“내 이름은 로웰 로마노프. 너랑 같은 루콘 출신의 귀족이야, 칼리언트 슈타크.”
‘로마노프?!’
정세에는 딱히 관심이 없는 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가 따갑게 들어 왔던 명문가의 이름이었다.
슈타크 가문이 루콘의 북부를 지배하는 패자라면, 로마노프는 동부를 다스리는 패자.
로마노프는 두 명의 소드 마스터를 보유하고 있었다.
슈타크 가문의 검술이 패도적이라면, 로마노프의 검술은 질풍과 같은 쾌검이었다.
구도로 보면 경쟁자 가문의 사람을 만난 셈이지만, 칼은 신경 쓰지 않고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구태여 이름을 밝힌 이유는 뭔데?”
“어, 어떻게 알았는지 안 물어보는 거야?”
“물어볼 것도 없지. 이 머리칼과 눈의 유전적 특색만 봐도 짐작할 수 있잖아. 아마 학교 내에 있는 녀석들 중 몇몇도 알아봤겠지.”
이곳에서 서로의 신분을 묻거나 아는 것은 금물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칙일 뿐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오랜 시간 함께 지내다 보면, 깨닫게 되는 날이 분명 온다.
“그래서 자신을 소개한 이유는?”
“음, 그러니까.”
직설적인 질문에 로웰은 관자놀이를 긁적이다 이내 쑥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친구가 됐으면 싶어서.”
“친구라…….”
생각해 보니 이곳에 들어와서 자주 만난 이들은 릴리와 에리, 그리고 맥캘리 정도밖에 없었다.
차후 미래를 생각한다면, 인맥을 가지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러나 로마노프와 슈타크는 서로를 견제하는 앙숙지간.
사이좋게 지내면 득보다 실이 많을 게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나쁘지 않겠군.’
그러나 칼과 로웰은 가문이 아닌 서로를 살폈다.
로웰은 칼에게서 우애를 느끼고 있었고, 칼은 로웰에게서 진심을 느끼고 있었다.
어른들이 만든 편협한 관념에서 벗어나 서로를 바라본다는 것은 꽤나 진취적이고 멋진 일이기에…… 칼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나랑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하다니, 너도 어지간히 배짱이 좋군. 학교생활이 더 힘들어질 텐데.”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을 건네면서도 칼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것이 승낙임을 알아챈 로웰은 피식 웃으며 칼의 손을 붙잡아 악수를 했다.
“각오하고 말한 거야. 그리고 재밌을 것 같아.”
‘친구는 아마 처음인 것 같군.’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이를 만난 칼은 어색함에 뒷머리를 긁적였다.
* * *
파르테스의 내빈실.
“대체 내 아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입니까!!”
그곳에서는 얼마 전 행방불명된 에리얼의 학부모, 빈 라프타가 흥분한 어조로 스첼레투스 학파의 교수 첸 리들러에게 소리를 치고 있었다.
‘귀 따갑군.’
그와 면담을 하고 있는 첸은 어처구니없는 시선으로 빈 라프타를 살폈다.
애정이 있는 가족이 행방불명되어서 가슴 아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빈 라프타는 자신의 잇속을 위해서라면, 가족마저 팔아먹는 양반이었다.
지금 에리얼을 찾는 것도 가문과 가문을 연결 짓기 위한 수단이 하나 사라진 것에 대한 초조함 때문이다.
‘데제스는 대단해. 이런 인간의 속내까지 정확히 파악하고 협상할 방법을 일러주니 말이야.’
첸 리들러는 눈매를 좁히며 입을 뗐다.
“최근에 루콘에서 차명으로 재밌는 사업을 벌이고자 하고 계시더군요.”
“…….”
그의 말에 빈의 안색이 싸늘하게 경직됐다.
“그, 그걸 어떻게?!”
“사소한 건 제쳐두고, 들통났다가는 아마 루콘의 황가로부터 뼈저린 응징을 받게 되시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 지금 협박을 하는 겁니까!”
“경우에 따라 이건 협박이 될 수도 있겠군요. 아무튼 일개 상인 나부랭이가 귀족인 저에게 이렇게 불만을 표하는 것 자체가 심히 거북하다, 이 말입니다.”
“…….”
놀랄 만치 뻔뻔스런 그의 말에 빈의 안색이 창백해져 갔다.
그에 반면, 리들러는 오히려 당당했다.
어차피 듣는 귀가 없으니, 자신의 뾰족한 심성을 감출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리들러는 더욱 강하게 빈을 몰아붙였다.
“아들분께서는 라프타 상단이 벌인 만행에 회한을 느끼고 가출을 하신 거니까,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집안의 고충을 이해도 못 하는 그런 버러지는 버려 버리시지요.”
“그, 그런.”
빈은 식은땀을 흘리며 뭔가 말하려고 했으나, 리들러는 피식 웃으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가업은 장남 한 명에게 물려주면 그만입니다. 얻고 싶으신 것은 귀족의 작위가 아닙니까? 병환으로 죽어 가는 자작을 알고 있습니다. 그 자작은 10대 초반의 어린 딸을 두고 있지요. 제 이름으로 중매를 설 테니, 장남분과 연을 맺게 하시고…….”
스윽.
리들러는 고개를 내밀어 빈의 귓가에 무척이나 간사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직위를 가로채시면 됩니다. 라프타 자작님.”
자작이란 말과 함께 빈 라프타의 이마에 맺힌 땀이 턱 끝까지 흐르더니 그대로 떨어졌다.
씨익.
곧 빈의 입꼬리는 무척이나 교활하게 올라갔다.
* * *
면담이 끝난 후.
리들러는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유쾌한 걸음으로 마차로 향하는 빈 라프타가 있었다.
피식.
그 모습을 본 리들러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아들 한 명을 내어 준 대가로 귀족이 된다. 실로 엄청난 이득이군.”
후룩.
상담을 무사히 마친 그는 만족스러운 듯 차를 들이켰다.
똑똑.
바로 그때, 문 너머에서 누군가 노크를 해 왔다.
“들어오게.”
리들러의 허가가 떨어지자, 곧 문 바깥에서 리자크 바우만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인가?”
“조금 위험한 수업을 준비했는데, 교수님들의 허가가 필요하다고 해서 방문했습니다.”
리자크가 건넨 서류를 살펴보던 리들러는 인상을 찌푸렸다.
“자네, 제정신으로 나에게 서명을 받으러 온 건가.”
리자크가 준비한 수련은 무척이나 수상하고 위험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단 한 명을 빼고 말이죠.”
“한 명?”
“오닉스 스퀘어에 소속된 칼리언트입니다.”
“아, 그 건방진 놈을 말하는 거군.”
타오르는 불꽃과 같은 심홍색의 머리칼과 선명한 붉은 눈.
그는 얼마 전, 칼에 의해 오랫동안 공들여 왔던 스켈레톤 킹 소환 마법이 깨지는 굴욕과 수모를 겪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분노를 그는 결코 잊지 않았다.
피식.
다음 순간, 리들러의 얼굴에는 희열이 들어찼다.
“……이건 데제스의 뜻인가?”
그가 어린아이처럼 흥분이 가득 찬 어조로 묻자, 리자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데제스도 그놈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는 거겠죠.”
“그렇다면야 조금 명예가 훼손되더라도 도와야지.”
붉은 양초에 불을 피운 리들러는 곧 그 촛농을 양피지 위로 떨어뜨린 뒤, 촛농 위에 반지에 새겨진 인장을 꼭 눌러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