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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마왕은 갱생이 어렵다-16화 (16/197)

#제16화

수치와 굴욕감이 프랭크를 지배했다.

주변의 이목은 그에게 쏠려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주변의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 한 명도 입을 여는 실수는 범하지 않았다.

콰앙!

격분한 프랭크는 보물 상자를 발로 걷어찬 뒤, 칼에게 성큼성큼 걸어와 손을 뻗었다.

멱살을 쥐려는 의도였지만.

꽈악!

의도를 알아챈 칼이 쉽사리 허용할 리 없었다.

칼은 자신보다 훨씬 두꺼운 근육으로 이루어진 프랭크의 손목을 으스러질 듯 쥐었다.

‘이 자식, 대체 뭐야?!’

파르테스에서 검술 분야 3위, 완력에서는 1위인 프랭크에게 있어서는 무척이나 낯선 경험이었다.

자신보다 덩치가 훨씬 작은 이와 힘이 대등한 것은.

“나와. 새꺄, 밖에서 한 판 붙자.”

“괜찮겠어? 두 번이나 망신당하는 건 싫을 텐데.”

칼은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도전을 받아 주겠다는 의사에 프랭크는 주먹을 말아 쥐며 투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거기까지 해. 오늘은 보는 눈이 많아.”

언제 튀어나온 건지, 검은 장발을 나란히 모아 묶은 소년이 프랭크의 가슴을 손등으로 가볍게 치며 만류했다.

“……모리스, 너까지.”

그를 알아본 릴리는 심각하게 낯빛을 굳혔다.

‘저 녀석도 사냥개 중 하나인가.’

미간을 좁히며 모리스와 프랭크를 쳐다본 칼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놀랍게도 저 둘은 지금의 힘으로 쉽게 제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질도 드세고 아집도 강해. 저런 놈들을 둘이나 거느리다니, 데제스도 예사로운 놈은 아니군.’

슬쩍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역시 데제스로 추정되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데제스란 녀석은 존재하기는 하는 거야?’

실망이라는 표정을 짓던 칼은 이내 모리스와 눈을 마주쳤다.

모리스의 키는 180센티미터로 눈높이는 칼과 비슷했다.

“프랭크와 비슷한 완력을 지니고 있다니. 솔직히 조금 놀랐어.”

“압도하고 있었다는 말을 잘못 한 것 같은데?”

빠직!

칼의 도발에 프랭크는 다시금 격분할 뻔했지만, 이번에는 모리스 때문에 가까스로 화를 다스렸다.

모리스는 탁한 황동색 눈으로 칼을 쏘아보며 말했다.

“허세 그만 부리고 생각을 바꿔 보는 건 어때? 여긴 장차 라흐만 대륙을 비롯해 전 세계에 명성을 떨칠 위인들이 모이는 곳이니까. 우리의 인맥을 얻으면, 너 역시 유명세를 떨칠 수 있을 텐데…….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사죄하면, 너를 받아 줄 수 있어.”

모리스의 권유에 칼은 미간을 좁히며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애송이들한테 관심 없어. 꺼져.”

“……그렇다면, 넌 우리의 적일 뿐이야.”

생각보다 감정이 크게 흔들리지 않았는지, 모리스는 코웃음 치며 ‘돌아가자.’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프랭크와 스첼레투스 학파의 무리가 뒤를 따랐다.

*  *  *

칼과 프랭크가 일으킨 소란으로 인해 무도회장의 인원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의자에 앉아 쉬고 있던 에리는 골머리가 아픈지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차가운 물이라도 가지고 올까?”

릴리의 말에 에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됐어.”

그러고는 눈꼬리를 뾰족하게 세우며 칼을 쳐다봤다.

때마침 칼은 포도알을 집어 입안으로 쑥 넣고 우물우물 씹고 있었다.

“저렇게까지 거칠고 사나운 줄 몰랐어. 너한테도 그래?”

릴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의외로 여자한테는 상냥해.”

“호색한?”

“음, 그건 아닌 것 같아. 화는 내고 있는데, 절제하려고 노력하는 게 보이거든.”

“……릴리 많이 변했네. 전에는 공부, 공부, 공부에만 몰두하더니.”

릴리의 변화가 낯선지, 에리는 눈매를 좁혔다.

“뭐, 뭐야? 그 시선은?”

“혹시 칼한테 관심 있어?”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갑작스런 추궁에 릴리는 얼굴을 붉히며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다 관자놀이를 긁으며 조그마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냥 가끔 보면, 어쩐지 불안하고 조마조마해서 지켜보는 것뿐이야.”

릴리의 말에 에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후우, 엄마의 마음이었구나.”

“아니야!”

릴리는 당연 발끈했고, 장난이었는지 에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릴리는 ‘정말.’이라고 중얼거리며 이야기를 재개했다.

“사실 지금까지 나는 출세를 위해서 공부했어. 내 가치를 증명하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칼은 여기서 진짜 학문을 파헤치고 있어. 이게 왜 있는지부터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인지까지…… 시험에서 나오지는 않는 내용뿐이지만. 그런 칼을 보니까 부끄럽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했어. 나는 책에 있는 글귀밖에 읽지 않았구나, 하고.”

“보기엔 거칠고 투박한데, 의외로 현자의 기질도 있는 건가.”

에리의 평에 릴리는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저렇게 거친 현자는 없다고.”

“하긴.”

에리도 공감한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렇게 파티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을 때쯤.

띵♪

피아노 건반을 치는 소리에 이어 하프, 그리고 각종 관악기가 연주하는 음악이 무도회장에 울려 퍼졌다.

춤을 추는 시간임을 깨달은 이들은 각자 파트너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에리, 나와 춤추지 않을래?”

“릴리, 나와 춤춰 줘.”

이때가 기회라고 여겼는지, 주변의 남자들이 우글우글 에리와 릴리에게 몰려왔다.

“으윽!”

어마어마한 인파에 기겁한 릴리는 거절의 말부터 생각했고.

스윽.

에리는 그대로 몸을 일으켜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런 그녀의 분위기에 압도된 인파가 자연스럽게 두 갈래로 갈라졌다.

“에리?”

웅성웅성.

릴리를 비롯해 사람들은 그녀의 발길이 향하는 곳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신 포도를 먹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칼이 있었다.

스윽.

에리는 그런 칼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나하고 첫 곡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줄게.”

다음 순간, 그때까지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칼이 예의를 갖추며 그녀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

예상치 못한 부드러운 승낙에 에리도 조금 놀랐는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와 동시에 첫 곡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파트너를 찾은 이들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에리는 칼과 나란히 춤추며 남몰래 말을 걸어왔다.

“칼리언트, 오늘은 너 때문에 아주 최악의 생일 파티가 됐어.”

빈정대는 말투에 칼은 어깨를 으쓱이며 뻔뻔스레 말했다.

“꼭 그렇지만도 않을걸. 왜냐하면 내가 상자를 걷어찼을 때, 너 웃고 있었잖아.”

무뚝뚝한 표정이었지만, 그 안에는 확신이 들어차 있어서 에리는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그러다 곧 미간을 좁히며 쏘아붙이듯 말했다.

“일전에 내가 말했지. 여자의 비밀을 파헤치지 말고 눈감아줘야 될 때가 있다고.”

그 말에 대답을 하려던 순간.

파앗!

격정적으로 곡이 바뀌는 바람에 칼은 팔에 힘을 줘 에리와 세차게 회전하며 고개를 그녀의 곁으로 붙였다. 호흡마저 나눌 수 있을 만큼, 아슬아슬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

에리는 당황한 듯 동공을 파르르 떨었고.

칼은 그런 그녀에게 나지막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나한테 충고하지 마.”

다시 이성을 되찾은 에리는 박자에 맞춰 스텝을 옮기며 말했다.

“그러다 인기 없어진다.”

“그따위 구질구질한 것에 얽매이지 않아. 그리고 나는 슬슬 네가 누군지 알 것 같아.”

에리는 못 말리겠다는 듯 눈을 감으며 말했다.

“못 들어준 척해 줄 테니까 말해 봐.”

“이 정도 무도회장을 서슴없이 빌리는 재력, 거기에 프랭크를 비롯해 데제스 일당이 물러난 것도 사실 릴리의 발언 때문만이 아니라 너의 눈치를 살폈기 때문이지. 그 말은 즉, 데제스 일당은 너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거고.”

“그것만으로 내 정체를 안 거야?”

“결정적인 건 얼마 전, 학회에서 마주친 예카테리나 2세의 머리칼 색깔이 너랑 비슷한 색깔을 지녔다는 거야. 달빛과 유사한 금발을 말이지.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사교적인 너의 태도는 마치 외교를 하는 사람처럼 보였거든. 모든 사람과 친해야 한다. 그건 아무리 봐도 중립국인 이실리아의 외교관과 비슷했어.”

“…….”

정체를 간파당했다는 것을 눈치챈 에리의 눈동자가 다시금 뒤흔들렸다.

“너, 이 이실리아를 통치하는 여왕의 딸이지?.”

언급된 진실에 에리는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에리스 폰 이실리아. 그게 내 이름이야.”

정답을 맞혔다는 것에 희열을 느꼈는지 칼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칼리언트 슈타크다.”

“어머나, 생각보다 위험한 가문 출신이네.”

이미 알고 있었는지, 에리는 능청스럽게 감탄하다 곧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릴리도 지금까지 모르고 있는 사실인데.”

“릴리라면 이미 너의 정체를 알고 있을 거야.”

“어떻게?”

예상치 못한 소리를 들은 에리는 화들짝 놀라 칼을 쳐다봤다.

칼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릴리를 슬며시 쳐다본 뒤, 에리에게 말했다.

“무척이나 성실하고 똑똑한 여자, 출세를 꿈꾸지만, 이해타산적이지 못한 여자. 너의 정체를 알고 있지만 구태여 모르는 척을 하는 건, 아마 너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소중하기 때문이겠지.”

“……그런가.”

칼의 말이 마음을 움직였는지, 에리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근데,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뭔데?”

“어째서 이렇게 크고 화려한 생일 파티를 연 거지? 구태여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이유는 있어. 학교생활은 금욕을 요구할 수밖에 없고, 욕구를 절제하지 못하는 망나니들이 약물에 중독되거나 바깥에서 사고를 칠 수 있으니…… 이런 식으로라도 해소시켜줘야 되거든.”

“모든 게 계산적이라는 건가.”

질렸다는 칼의 반응에 에리는 눈꼬리를 뾰족하게 세웠다.

“모든 게 충동적인 너보다 나아.”

“질문에 답해 줬으니까 나도 질문 하나 해도 되지?”

“얼마든지.”

칼의 승낙이 떨어지자, 에리는 슬그머니 릴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릴리를 어떻게 생각해?”

“친구다.”

서슴없는 답변에 에리는 의심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녀석, 친구가 뭔지 알고 있는 거야?

딱히 음흉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존중을 안 하는 것도 아닌 관계.

남녀끼리 정말 그런 관계가 가능한 건가?

에리가 의문을 품고 있을 때, 칼은 한마디를 더 내뱉었다.

“……프랭크가 저 녀석의 선물을 모욕했을 때, 기분이 매우 언짢았어.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렇게까지 화는 내지 않았을 거다.”

“?!”

그 말에 에리는 눈을 크게 뜨다 이내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나랑 똑같네.”

칼의 대답에 만족한 그녀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칼. 오늘은 통쾌하게 프랭크한테 한 방 먹여 줘서 고마워.”

“훗, 선물…….”

“그래도 선물은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그건 선물 아니야.”

움찔!

대충 넘어가려 했다가 덜미를 잡힌 칼은 얼굴이 경직됐다.

그와 동시에 음악이 멈추었고 두 남녀는 손을 떼며 서로에게 인사를 마쳤다.

“슬슬, 다른 파트너도 찾아봐야지.”

에리는 릴리를 쳐다보며 피식 웃어 보였다.

‘춤을 생각보다 많이 추게 되는군.’

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릴리에게 다가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춤춰야지.”

“어?”

생각지도 못한 권유에 깜짝 놀란 릴리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가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바로 그 순간.

홰액!

두 사람 사이에 에리가 난입해 릴리의 손을 맞잡았다.

“춤추자, 릴리.”

“어?”

릴리는 다시금 당황했고 에리는 가볍게 뜀박질을 하며 칼에게 교활하게 미소를 지었다.

빠직!

당했다는 생각에 칼은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이 나라의 공주는 생각 이상으로 말괄량이군.’

하지만 그 모습이 마냥 얄밉게 보이지 않는지라 칼은 와인을 홀짝 들이켠 뒤, 피식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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