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샹들리에의 불빛이 반짝이며 무도회장 안을 밝혔다.
웅성웅성.
알록달록한 드레스와 정장을 입은 학생들이 사교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본래 용도는 국제 교역과 교류 그리고 외부 행사에 주로 사용되기 위해 설립됐으나.
경우에 따라, 학생 역시 이 장소를 빌릴 수 있다.
요금은 금화 50닢으로 통상 가격의 절반.
그렇다고 할지라도 귀족조차 하룻밤 빌리는데 지출하기에는 상당히 부담이 되는 금액이지만, 거액이 들어간 만큼 그만큼의 편의가 제공된다.
행사를 위해 시종들만 수십 명이 머물고 있는 데다 음식까지…….
파티에 필요한 모든 요소는 기본적으로 준비돼 있었다.
테이블에는 각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음식들이 즐비했다.
화이트소스에 버무려진 감자 반죽의 뇨키.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를 얇게 썬 살라미.
포동포동한 물고기를 버터에 구워 만든 솔 뫼니에르에서 나는 레몬 향과 버터의 풍미가 지나가는 이로 하여금 군침을 돌게 만들었다.
테라스의 난간에 기대어 그 광경을 지켜보던 칼은 트러플 파스타를 포크로 말아 입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지나치게 사치스럽군.”
적포도주가 담긴 글라스를 흔들던 릴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난 여기 들어오기 전까진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세상이야.”
“상상도 못 했다니?”
“말 안 했나? 나 그냥 평범한 서민이야.”
“구태여 그걸 말해 봤자, 너한테 득이 될 거라는 생각은 안 드는데?”
칼의 호기심은 파티에서 릴리로 옮겨졌다.
릴리는 포도주 한 모금을 들이켜며 쓴웃음을 지었다.
“왜 너도 천하다면서 나 차별하게?”
“천하다고 생각한 적 없다만.”
무뚝뚝한 칼의 반박에 릴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호, 에리랑 똑같이 말하네.”
“나는 사람을 아군과 숙적 정도로밖에 구분하지 않아.”
“난 아군이라는 말로 들리니까 안심이야.”
릴리는 개운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칼을 정리했다.
머리칼에 가려진 씁쓸한 그 모습에 칼은 시선을 슬쩍 던지다가 말했다.
“그나저나 이번 파티의 주인공은 어디 있는 거지?”
“에리는 인기가 많으니까, 여기저기 떠돌면서 인사하고 있을걸.”
“그 여자, 정체가 뭐지?”
“……?”
릴리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칼을 바라봤다.
사람에게 좀처럼 흥미를 가지지 않는 칼이 이렇게 흥미를 묻는 모습이 낯설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시선에 담긴 의미를 간파한 칼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다른 의도는 없어. 단지 보통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뿐이야.”
“여기서 정체를 알려고 하는 건 금물인데.”
릴리는 경계심이 어린 시선으로 칼에게 경고했다.
뜻밖의 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여 단속함.
“친구인데도 알면 안 되는 건가?”
한데 칼이 도리어 반박하니, 고운 아미를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알기 싫어.”
“왜?”
“알면 에리랑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갈라지는 것 같아서.”
지금은 서로 평등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친구이지만, 신분을 알면 금방 멀어지는 게 이 세계이기 때문이다.
“복잡하군.”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 자, 이제 그만 들어가자. 에리 생일인데, 선물은 줘야지.”
릴리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선물이라…… 흠.”
순간 뒤늦게 무언가를 자각한 듯 칼의 몸이 경직되었다.
낯선 모습이었지만 릴리는 대번에 그 이유를 간파했다.
“칼 설마…… 생일인데 선물도 안 가져온 거야?”
“…….”
대답 대신, 칼은 곤혹스런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릴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에리라면 오늘 당장 안 줘도 뭐라고 안 하겠지만. 뭘 줄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타이르는 듯한 그녀의 말투에 칼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를 준다는 것은 처음이라 잘 모르겠군.’
전생에서 자신의 종족이 모두 괴멸할 때까지 평생 사투만을 벌였던 칼에게 있어서 선물을 준다는 것은 무척이나 생소한 행위였다.
‘이것도 갱생이랑 관련이 있는 건지, 의문스럽군.’
잠시 후.
무도회장으로 들어온 칼과 릴리는 인파가 몰려 있는 곳에 다다랐다.
웅성웅성.
“생일 축하해. 에리.”
“호호호, 고마워. 이렇게 많이 와 줘서 정말 행복해.”
많은 이들이 오늘의 주인공을 향해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화려한 복장의 사람들 속에서도 에리는 눈에 띄게 도드라졌다.
단순히 그녀가 이 파티의 주인공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에리는 원래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만큼 빼어난 미소녀였다.
어깨까지 치닫는 금발은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달빛과 유사한 느낌을 주었다.
피부는 전반적으로 새하얗고, 속눈썹은 길었으며 에메랄드색의 눈에서는 발랄함이 묻어나왔다.
그리고 파티의 주역답게 그녀는 자신을 꾸미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보석이 달린 화려한 귀걸이, 약간 옅은 화장, 프릴이 달린 화려한 붉은 드레스까지.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는 그야말로 마성의 여인이었다.
“……예쁘다.”
옆에서 줄곧 같이 지내 온 릴리마저 얼굴을 붉히며 경탄을 금치 못했다.
“릴리!”
바로 그때, 먼발치서 릴리의 존재를 확인한 에리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생일 축하해. 너무 예뻐서 놀랐어.”
“어머, 뭘 그렇게까지 칭찬해. 네가 더 예쁘지.”
“우웃! 일부러 약 올리는 거지. 화낸다.”
“아니! 진짜라니까.”
서로 칭찬하면서도 옥신각신하는 그 모습에 칼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생각했다.
‘왜 같은 말을 여러 번 주고받는 거지?’
뒤이어 ‘이 대화는 언제 끝나는 거지?’라고 의문을 품은 찰나.
“아, 근데 릴리. 선물은?”
에리가 눈을 반짝이며 선물에 대해 물었고, 릴리는 약간 눈치를 보다…….
“여기.”
정성스럽게 포장된 케이스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줬다.
“열어 봐도 돼?”
“으, 응.”
에리의 질문에 릴리는 자신 없게 고개를 끄덕였고.
에리는 그대로 케이스를 열어젖혔다.
케이스 안쪽에는 꽤나 고급스럽게 생긴 깃펜이 들어 있었다.
생김새를 본 것만으로도 에리는 깃펜의 소재가 뭔지 정확히 간파했다.
“그리폰의 깃털로 만든 펜이네! 고마워, 릴리.”
깃펜을 쥔 에리는 허공에 ‘사랑해!’를 연신 휘갈기며 기쁨을 표했다.
“창피하니까 그만해.”
릴리는 상기된 얼굴로 서둘러 에리를 제지했다.
바로 그때.
“하찮은 서민 주제에, 꽤나 고생했겠어. 훔친 거 아니야?”
군중 사이에서 들려 오는 음성에 릴리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것은 에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목소리가 들려 오는 곳을 살피니, 남들보다 덩치가 한참 큰 프랭크가 그녀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에리는 미간을 좁히며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어머, 초대 명단에 없는 동기분이 와 주셨네. 어떻게 들어왔어?”
“초대장을 보여 주니까 금방 들여보내 주던데. 뭘.”
프랭크는 어깨를 으쓱이며 릴리와 칼을 한 번씩 쳐다보더니 에리에게 말했다.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랑 친하게 지내시네. 차라리 우리랑 어울리는 게 나았을 텐데 말이야.”
“지금 관계가 딱 적당한데. 선은 지켜 줄래?”
에리는 웃으면서 경고를 가했지만, 프랭크는 서슴없이 그녀와 거리를 좁히며 말했다.
“그렇게 따갑게 웃지 말라고. 모처럼 우리도 선물을 건네주려고 왔는데.”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뒤에서 프랭크의 시종들이 힘겹게 어린아이 크기만 한 함을 들고 들어왔다.
쿠쿵.
살짝 내려놨을 뿐인데, 바닥에서 미미하게 진동이 울려 퍼졌다.
저게 뭐지?
모두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지켜보는 그 순간.
끼익.
보물 상자가 열리며 안에 있던 휘황찬란한 금화와 보석이 반짝 광채를 발했다.
우와.
군중은 감탄과 호응을 내뱉었고, 일순간 릴리의 안색에 그늘이 졌다.
에리는 살짝 날카로워진 안광으로 프랭크를 쏘아보며 말했다.
“……이건 뭐야?”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실용적이고 값진 것을 선물하는 게 최고잖아. 넌 그만큼의 값어치가 있고 말이야. 그런 싸구려 깃펜을 보고 좋아하는 척할 필요 없어.”
그의 말에 심히 자극을 받은 걸까?
에리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자칫하면 뇌물이라고 오해받으니까. 갖고 돌아가. 프랭크.”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문제가 많은 선물.
“하긴 저 정도면…….”
사람들은 심히 공감한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프랭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하하하,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그냥 받으면 된다고.”
울컥!
도가 넘은 조롱에 에리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쥐었고, 릴리는 재빨리 그녀의 손등에 손을 얹으며 차분히 달래 주었다.
“참아. 에리.”
그녀의 말에 다소 안정이 됐는지, 에리는 스르르 주먹에 힘을 풀기 시작했다.
“이제야 고분고분해지는군.”
프랭크는 피식 웃으며 이번에는 칼을 돌아보았다.
“네가 이번에 전학 온 유명한 미친놈이냐? 생각보다 작은데.”
프랭크는 일부러 허리를 낮추며 칼에게 도발했다.
칼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응했다.
“……데제스의 개인가?”
칼리언트가 그 말을 한 직후.
릴리와 에리, 그리고 주변에 모여 있던 군중들의 표정이 사색이 됐다.
빠직! 빠직!
그리고 그 한마디를 가슴 깊이 새겨들었는지, 프랭크의 이마에 핏줄이 잔뜩 도드라졌다.
그걸 본 칼은 자신의 표현이 잘못됐다는 자각을 했다.
“아, 정정. 이번에 온 녀석은 살이 뒤룩뒤룩 찐 사냥개군.”
“…….”
프랭크의 눈 밑으로 그늘이 졌다.
불길한 전조를 감지한 몇몇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프랭크는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하며 말했다.
“아아, 이거 완전 생 또라이였네. 네가 지금 누굴 도발했는지 알고 있냐?”
“도발? 엄연히 사실을 말한 거다만.”
이게 왜 도발이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한 얼굴에 프랭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크크. 아, 이거 생각보다 재미있는 놈이 들어왔네. 오늘은 너에게 경고를 남기려고 찾아왔어?”
“무슨 경고?”
“오늘부로 너는 스첼레투스의 적이다. 이유는 뭔지 알고 있지?”
“글쎄.”
프랭크의 적의에도 칼은 팔짱을 끼며 무덤덤한 표정으로 반응했다.
숨 막히는 대치.
사람들의 얼굴은 순식간에 사색이 되어 어쩔 줄 몰라 했다.
상황 판단을 마친 이들은 프랭크의 눈에 띄지 않게 우르르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파티가 아니라 피 튀기는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스첼레투스.
여덟 학파 중 가장 영향력이 가장 강하며, 흑마법 계통의 마나 연공식을 그 근간으로 두고 있다.
그중 프랭크는 마법 계통이 아닌 검술을 주력으로 두고 있지만, 학교 내에서 실력으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최강자로 데제스의 왼팔이라고 불리는 남자였다.
그런 그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칼의 미래는 안 봐도 뻔했다.
결국 보다 못한 릴리가 눈을 치켜뜨며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억지야. 먼저 시비를 건 건 너희잖아.”
“천한 서민은 빠져 있어. 다치면 치료비를 낼 돈도 없잖아. 세컨드 프린세스.”
울컥!
학교 내에서는 그 누구도 신분을 비하하는 언행을 쓰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지만, 지독한 폭거를 벌이는 프랭크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어차피 무슨 일이 있든 데제스가 사건을 무마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릴리는 여타의 약자들과는 담력이 남달랐다.
“자꾸 그러면, 데제스하고 담판을 짓겠어. 그래도 괜찮겠어?”
“……흐음, 그렇게 나온다. 이건가.”
데제스란 말에 프랭크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데제스는 상식이 통하는 인물로 대체로 릴리와 이야기가 잘 맞는 편이었다.
실제로 프랭크를 비롯해 스첼레투스 학파의 학생들이 그녀를 괄시하면서도 쉽사리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은 데제스의 엄중한 경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쯧! 인사는 충분히 한 것 같으니까, 그만 가 볼까.”
결국 프랭크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성가신 계집애.’라고 중얼거리며 뒤로 돌아섰다.
그의 시선은 마지막까지도 칼에게 고정돼 있었다.
“흐음.”
칼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있다 이내 에리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너한테 줄 선물은 깜박했어.”
“이 와중에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에리는 애초부터 기대를 안 했다는 표정으로 칼에게 말했다.
“기분은 어때?”
“최악이야. 기껏 연 생일 파티인데, 기분이 아주 더러워. 마음 같아서는 저놈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야.”
불만 가득한 에리의 얼굴을 보며 칼은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그럼 생일 선물 대신으로 그걸 해 줄까?”
“무슨…….”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려는 찰나.
콰앙!
칼은 프랭크가 가져온 보물 상자를 힘껏 걷어찼다.
주르륵 미끄러진 보물 상자는 이내 프랭크의 다리와 세차게 충돌했다.
“뭐, 뭐야?!”
우당탕!
콰아앙!
갑작스런 기습에 당황한 프랭크는 그대로 균형을 잃고 고꾸라졌다.
“프, 프랭크?!”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당황해서 사색이 됐다.
콰아앙!
분노한 프랭크는 보물 상자를 주먹으로 후려쳤고.
쏴아아아아.
상자가 깨지면서 안에 담겨 있던 금화는 바닥에 잔뜩 흩뿌려졌다.
그는 곧장 몸을 일으킨 뒤, 칼에게 소리쳤다.
“뭐 하는 짓이야!”
칼은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나지막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뒤통수 후려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