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삽화)
쇄액!
내지른 주먹은 마치 튕겨 나간 용수철처럼 빠르고 유연하게 움직였다.
타점까지 도달하는데 걸린 시간은 1초 내외.
콰직!
타격을 당한 암살자는 날아오는 주먹을 식별조차 못 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너 이 개새끼!!!”
칼의 압도적인 파괴력과 움직임에 놀란 살수 중 한 명이 나이프로 가슴 부근을 베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칼이 거슬린다는 듯 휘두른 주먹에 뺨을 맞고는…….
우두둑.
콰앙!
목뼈가 통째로 돌아가며 즉사했다.
“마, 말도 안 돼! 매, 맨손만으로 어떻게 이런 짓을!”
실성한 듯 그 자리에 주저앉은 마지막 한 명의 명치를 칼은 그대로 발로 찍어 눌렀다.
콰앙!
지면과 등이 맞닿은 그는 골격이 우두둑 부러지며 토혈을 했다.
울컥!
“쿨럭, 쿨럭. 크아아아악! 살려줘. 그만! 내가 잘못했어!”
시뻘건 피로 젖은 복면.
그것을 손으로 집은 칼은 쫘악 소리를 내며 단숨에 풀어헤쳤다.
희미한 빛에 드러난 그의 얼굴은 놀랍게도 스첼레투스 학파의 학생인 에리얼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파르르 몸을 떨었다.
고작 한 명.
그 한 명이 오랫동안 살인을 업으로 삼아 온 암살자들을 상처 하나 없이 맨손으로 괴멸시켰다.
딱히 무도를 익힌 움직임은 아니었다.
그저 압도적인 동체 시력을 이용해 우악스럽게 팔, 다리를 휘둘렀을 뿐이다.
에리얼은 그제야 칼과 똑바로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깊이가 추정되지 않는 심홍색의 눈빛.
놀랍게도 그 눈빛은 심신을 압도하던 데제스의 것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를 능가하는 것 같았다.
“괴, 괴물 자식.”
그제야 자신이 상대를 잘못 건드렸다는 것을 인지한 에리얼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피식.
그런 에리얼을 보며 칼은 천천히 입을 뗐다.
“내가 봤을 때, 넌 주체성이 없어. 스스로 이런 일을 벌일 정도로 간이 큰 것도 아니야. 내 경험상 아마 누군가의 강요가 있었겠지.”
“마, 맞아. 이건 데제스가 시킨 거야. 진짜 어쩔 수 없었다고.”
칼의 말에 에리얼은 공감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호오, 그래?”
“내, 내 이름은 에리얼 라프타, 라프타 상단의 둘째 아들이야. 서, 성과 출신을 밝혔으니 잘 알겠지. 나를 살려 주면 너에게 한 영지의 영주와 버금가는 재력을 선사할 수 있어.”
칼은 지그시 눈매를 좁히며 입을 열었다.
“칼리언트 슈타크다. 슈타크 가문의 막내아들이지.”
“슈, 슈타크!”
예상치 못한 거물 가문의 이름이 언급되자, 에리얼은 휘둥그레 눈을 떴다.
루콘의 변경백, 슈타크.
이 가문의 혈족들은 하나같이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홀로 살아남은 독종 중의 독종이었다.
혈족이 죽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냉혈한.
뚝.
상대를 잘못 건드렸다는 것을 직감한 에리얼의 이마에는 어느새 땀이 흥건히 흐르고 있었다.
‘침착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어.’
이윽고 에리얼은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그, 그래. 그 말은 즉, 너와 내가 힘을 합치면 조만간 대륙에 위협이 될 정도로 강한 세력을 만들 수 있어. 오늘 일은 단순히 내 실수로…….”
뜬금없는 동맹 제안에 칼은 코웃음 치며 말했다.
“개소리를 잘하네.”
우두두둑.
콰앙!
“크아아아아아악!”
자비는 없다.
그것을 증명하려는 건지, 칼은 전신의 마력을 발에 집중해 에리얼의 명치에 압력을 가했다. 짓뭉개진 갈비뼈가 살점과 내장 등을 마구 찌르며 피가 잔뜩 튀었다.
에리얼은 눈물, 콧물을 쏟으며 자비를 간청했지만, 칼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뗐다.
“네가 데제스란 놈한테 세뇌를 당했건 말건 알 바 아니야. 목숨을 노렸으면 당연히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거다, 에리얼.”
“…….”
자비 없는 선언에 에리얼은 힘없이 손을 지면에 떨어뜨렸다.
* * *
정보 길드 이실리아 지점.
그들의 업무에는 정보를 거래하는 것 외에 정보를 은폐 및 조작하는 것도 포함된다.
타닥, 타닥.
거대한 소각장에서 다수의 시체를 불태우고 있던 정보 길드 간부, 레르노만은 의뢰자인 칼을 쳐다봤다.
업무 특성상 고객에 대한 정보를 캐는 것은 규정 위반이다.
하지만 모처럼 이런 특색 있는 남자를 만났는데, 한마디도 나누지 못한다면 아까운 기회를 놓치는 꼴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레르노만은 본인이 생각하기에 적정한 선에서 말을 걸었다.
“궁금한 게 있으십니까?”
슬쩍.
레르노만을 쳐다보던 칼은 눈살을 찌푸리며 달갑지 않은 이름을 꺼냈다.
“데제스푸아르에 대해 알 수 있을까?”
“하하하하하, 그건 특급 기밀인지라 손님께서 소지하고 계신 돈으로는 밝힐 수 없습니다.”
칼은 코웃음 치며 말했다.
“기대도 안 했어. 주도면밀한 놈이라는 건 오늘 일을 통해서 알았으니까.”
“기분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시는군요.”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고 뒤에서 사람을 조종하는 영악한 녀석.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지.”
“정의로운 면모를 가지고 계시는군요.”
“정의? 두 번 이상 손대야 하는 게 번거롭고 짜증 날 뿐이야. 흑막이 진작 튀어나왔으면, 바로 죽이고 끝낼 수 있잖아.”
“…….”
그에게 너무나도 걸맞은 이유였기에 레르노만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씨익.
잠시 후 칼은 영악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레르노만에게 말했다.
“오늘 정보 데제스푸아르한테 팔아도 상관없어. 오히려 환영이야.”
‘이놈 진짜 또라인가?’
레르노만은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이미 값을 지불하고 정보 은폐를 하셨으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 그런가. 어쩔 수 없네.”
진심으로 아쉬운 건지, 칼은 입맛을 다시며 자고 있는 레인을 업고서 기숙사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레르노만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거물인데. 칼리언트 슈타크.”
* * *
스첼레투스 학파 진영.
적막한 어둠이 드리워진 그곳은 분위기가 무척이나 고요했다.
사교를 위해 마련된 방에서는 스첼레투스 학파의 학생들이 심각한 낯빛으로 대화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야기의 화제는 며칠 만에 사라진 에리얼에 대한 것이었다.
“에리얼이 완전히 행방불명이 됐어.”
“그것 때문에 라프타 상단에서 파르테스까지 찾아왔어.”
“그 녀석 라프타 상단의 아들이었어? 꽤나 부자네.”
“최근에 대부업이랑 마약 밀매도 하고 있어서 꽤나 거금을 벌어들였나 봐. 그것 때문에 누군가 목숨을 걸고 찾아온 걸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
빠드득!
바로 그 순간, 얌전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자가 맨손으로 호두를 부스러뜨리며 말을 끊었다.
“…….”
엄청난 악력, 그리고 그가 뽐내는 박력에 모두 기가 죽어버렸다.
호두를 쥐고 있는 이는 2미터가 훌쩍 넘는 키, 민머리에 다갈색 피부를 지닌 남자였다.
“프, 프랭크 왜 그래?”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주변에서 슬그머니 눈치를 보자, 프랭크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말했다.
“이상하지 않아? 너희, 일부러 화제를 피하는 것 같단 말이지.”
“뭐, 뭐가?”
“에리얼이 칼리언트를 해치우려 했다는 걸 말이야.”
“…….”
“애써 부인하고 있는데, 이 가능성도 생각해야지. 에리얼은 칼리언트에게 당해 어딘가에 묻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그, 그건.”
“서, 설마.”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그 녀석 성질이 보통내기가 아니니까.”
프랭크는 칼리언트를 떠올리며 달갑지 않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생각해 보면, 전학 왔을 때부터 태도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 건방진 데다 데제스에게 머리를 조아리지도 않았지.”
프랭크는 굴복을 강요하는 자신들을 오히려 내려다보는 그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말에 공감하는 듯 동기들의 눈빛이 차분해졌다.
데제스푸아르.
그 이름을 언급한 것만으로도 그들의 마음은 그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 묘한 광기를 띠었다.
“구태여 충성을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녀석의 행보를 보면 데제스를 괄시하고 있는 건 틀림없어.”
지금은 목표를 위해 중립 성향을 가진 아이들은 건드리지 않지만, 데제스에게 저항 의지를 보이는 이에게는 강력한 응징을 한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모토였다.
빠드득.
프랭크는 주머니에 남아 있는 호두를 손으로 모조리 으깨며 말했다.
“에리얼은 분명 그 녀석한테 당했어. 그리고 녀석은 데제스를 업신여기고 있지. 이것만으로도 내가 움직일 이유는 충분해.”
“하지만 수업이 겹치지 않으니까, 만날 일은 없는데.”
방법을 고심하고 있는 찰나.
덜컹!
“안 된다면 사교의 장에서 만나야지.”
문이 열리며, 구타로 온몸에 멍이 한가득 난 학생이 누군가의 손에 끌려왔다.
“모리스.”
검은색의 장발을 지닌 소년.
어두컴컴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손에는 혈흔이 가득했는데.
분위기상 구타를 가한 것은 그가 틀림없었다.
모리스는 손에 들린 봉투 하나를 프랭크에게 건네줬다.
“초대 명단을 보니까, 그 녀석도 분명 이곳에 올 거야. 인사를 해 주는 게 어때?”
“오오! 그 녀석한테 뺏은 거냐? 꽤나 기특한 짓을 해 줬는데.”
초대장을 받아든 프랭크는 감탄사를 냈고 모리스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그 자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참에 제대로 인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둘 사이에서 오묘한 광기를 느낀 주변의 동료들은 저도 모르게 꿀꺽 고인 침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이 둘은 장차 데제스의 오른팔과 왼팔로 크게 두각을 드러낼 스첼레투스 학파의 에이스들이었다.
그런 둘이 작정하고 적의를 드러냈으니…… 이제 칼리언트가 이 학교에서 모습을 보일 일은 없을 것이다.
* * *
죽음의 땅 알테어를 통치해야 하는 칼리언트는 3년이라는 시간을 결코 허투루 낭비할 수 없었다.
계속 단련을 해서 강해져야 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귀족으로서 반드시 갖춰야 할 소양 역시 배워야 한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칼 역시 기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설명은 길었지만, 현재 칼은 사교 회장에서 파트너와 함께 춰야 할 춤의 안무를 익히고 있는 중이었다.
연습 상대가 돼 주고 있는 이는 시녀인 레인.
물론, 그녀가 무도회장에서 춤을 출 일은 없을 테지만.
슈타크 가문의 시녀가 되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소양을 당연히 갖춰야 했기 때문에 그녀가 안무를 아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주춤, 주춤.
칼은 박자를 맞추지 못하고 엉거주춤 움직이고 있었다.
“……공자님 진짜 못 하시네요.”
레인은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될지 모르겠다는 듯 막막한 표정으로 칼리언트를 바라봤다.
“시끄러워. 잠시 휴식이다.”
칼은 드물게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매만졌다.
생일 파티까지 어언 반나절이 남았지만, 안무만큼은 쉽사리 익혀지지 않았다.
‘어렵군.’
전생에서는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만을 벌였었기에, 인간으로 환생한 뒤 배우게 된 이런 문화적 교양에는 종종 약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방법을 모색하던 중.
묘안이 떠오른 듯 칼은 레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고질병을 앓고 있다고 통보하는 게…….”
“네가 아프다고 하면, 사람들이 잘도 믿겠다. 요령 부리지 말고 빨리 나와.”
칼의 말을 가로채고 말을 한 이는 다름 아닌 릴리아나.
어느새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칼을 지켜보고 있었다.
특별히 파티인 만큼 그녀는 물빛의 볼 드레스에 머리에는 꽃 모양 장식이 달린 모자를 얹은 우아한 차림이었다.
“…….”
일순간이지만, 칼은 뚱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옷이 날개라는 건가?”
빠직!
어째 한마디를 해도 저렇게 얄밉게 할 수 있는지.
릴리는 눈꼬리를 세우며 말했다.
“칭찬은 좀 더 신사답게 하는 게 어때?”
“간드러진 말투는 공적인 자리에서만 쓰려고. 그래도 거짓 없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솔직한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릴리는 어깨를 으쓱인 뒤 등을 돌리며 말했다.
“호호. 그만 가자, 칼. 늦으면 안 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