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파르테스에 입관한 지, 어언 석 달이 흘렀다.
삼 년 뒤, 루콘에서 가장 골칫덩이 영지인 알테어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강해질 필요가 있기에 칼은 오늘도 어김없이 수련을 하고 있었다.
꽈악!
웃통을 벗은 칼은 전신에 땀을 한가득 흘리며 물구나무를 선 채, 팔을 굽히고 펴기를 반복했다.
어찌 보면 단순한 근력 운동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오닉스 스퀘어에서 창안한 수련 방법으로…….
몸을 쓰기 위해 근육에 힘을 가할 때마다, 마력도 동시에 압축 후 이완해 주며 신체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세포 하나, 하나가 비명을 내지르며 찢겨 나갔지만.
상처 부위를 뒤덮은 마력은 회복력을 증대시켜 더 강한 근육으로 탈바꿈시켰다.
핏줄이 잔뜩 팽창한 근육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다.
수련을 시작한 지 어느덧 4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수련에 학업까지 병행하고 있는 칼의 수면 시간을 계산해 보면 4시간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정말 내가 알던 공자님이라고 보기에는 믿기지 않아.’
옆에 수건과 세안, 세족을 위한 대야를 갖다 놓은 시녀, 레인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이전이라면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는 자신의 상황에 절망해 강박 관념에 빠졌을 텐데.
지금은 마치 적이 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막말과 욕설을 퍼부을 것 같았다.
실제로 파르테스에서 이런 칼의 성격을 인지하고 있는지…….
파르테스의 망나니로 소문이 급격히 퍼져 나가고 있었지만, 정작 뒤에서 험담을 하는 이들은 칼의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했다.
여덟 학파의 교수들한테도 ‘그럼 너희가 연구를 대충 한 거지. 2년 동안 뭐 했어?’라고 막말을 퍼부었는데.
학생들한테는 그보다 험한 욕설을 할게 너무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노력의 진가를 인정받으시는 날이 올 거야.’
레인은 걱정되는 마음을 꼭 누르며 칼에게 말했다.
“공자님, 꼭두새벽부터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은데, 점심 드시고 하는 게 어떨까요?”
“그러지.”
파앗!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손바닥으로 바닥을 밀어 몸을 일으킨 칼은 그녀가 걸어 둔 수건으로 몸을 닦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똑똑.
누군가 방문을 노크했다.
“제가 가 볼게요.”
끼익.
문을 살짝 연 레인은 문밖의 손님을 쳐다봤다.
“나 왔어. 레인.”
“나도 왔어.”
문밖에서는 릴리와 에리가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 오셨어요!”
그녀들을 반갑게 맞이한 레인은 활짝 웃다 곧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공자님께서 아직 수련이…….”
하지만 그녀가 말에 매듭을 채 짓기도 전에…….
“누군데 고개만 빼꼼 내밀면서 이야기하는 거야.”
라고 말하며 칼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끼익!
순식간에 개방된 문.
안쪽에서는 칼이 수건을 목에 두른 채,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근육으로 다부진 그 몸을 본 두 여인의 반응이 확연히 나뉘었다.
“아이쿠!”
에리는 양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며 웃음을 터뜨렸고.
“옷 입어! 바보야!”
얼굴이 화악 달아오른 릴리는 있는 힘껏 소리쳤다.
잠시 후.
땀과 열기가 가득 밴 방에서 손님을 맞이할 수 없었던 칼은 식당 구석에서 그녀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저, 저도 여기 있어도 되는 건가요?”
졸지에 식사에 참여하게 된 레인은 어쩔 줄 모르고 곤혹스런 반응을 보였다.
당연했다.
제아무리 신분과 성을 감춘다고 하지만 파르테스에 입관한 학생들 대다수는 고위 귀족 및 관료의 자제들이기 때문이다.
확신할 수밖에 없는 이유 한 가지를 꼽자면, 파르테스의 1년 학비는 실로 어마어마한 터라…….
일반 귀족들은 감히 감당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우스꽝스런 이야기지만, 출세를 위해 자신의 자식을 파르테스로 보냈다가 영지가 파산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까지 있을 지경이었다.
그렇기에 레인은 이런 귀족들과 나란히 앉아서 식사를 하는 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 마음을 너무나 잘 아는지라 릴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여기 있을 때만큼은 그 누구도 권위를 내세울 수 없으니까.”
“실제로 파르테스의 교육 지침이기도 하거든.”
에리는 부가 설명을 하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이런 걸로 고민하지 마. 몸 편한 게 뭐가 잘못됐어?”
“아, 아니요. 죄, 죄송해요.”
거슬린다는 칼의 말투에 레인은 움찔 떨었다.
하지만 몸을 떨면서도 손에 들린 샌드위치를 한 입 깨물었다.
그 모습을 릴리는 뚱하니 지켜보다 칼에게 말했다.
“여자한테는 조금 친절하게 대하는 게 어때?”
“이 이상 친절할 수 있을까.”
“…….”
비아냥대는 것 같지만, 사실이기에 릴리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칼리언트.
이 간덩이가 부을 대로 부은 남자는 친절을 베풀 때도 무척이나 과격해 종종 오해를 산다.
자신이야 꽤나 오래 붙어 다녔기에 친절을 베푼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가 남들에게 오해를 산다는 것은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그렇기에 자신도 모르게 약간 퉁명스런 말투로 말을 내뱉었다.
“……너 친구 없지?”
“……친구라 그렇게 필요한 것 같지는 않은데?”
칼은 오기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눈동자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모든 것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인다.
에리는 그걸 고집이라고 생각했는지,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하루 종일 말을 안 하고 사는 건 심심하지 않아? 누군가와 함께 놀고 먹고 마시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라고. 그리고 진심으로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도 든든하고.”
“딱히.”
전생에 마족이었던 시절에는 오직 투쟁과 전쟁밖에 없었고.
그 결과 모두가 전멸한 가운데, 홀로 살아남은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슈타크 가문의 태생으로 태어난 지금도 마족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있다고 한다면, 불편하게 잔머리를 써야 한다는 것 정도.
하지만 칼의 말을 받아들인 에리는…….
“……진짜 없어?”
라고 말하며 진심으로 딱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빠직!
‘성질을 긁는 덴 이만한 녀석이 없겠군.’
지금까지 상대해 보지 못한 느긋한 부류라 칼은 짜증을 낼까 싶었지만.
곧 평정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외롭다는 건 잘 모르지만, 지금까지 그 말을 종합해 보면 나한테 친구란 녀석은 이 녀석이라는 거잖아.”
칼의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릴리아나에게로 향했다.
“……어?”
예상치 못한 지목에 릴리는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릴리는 말을 더듬으며 연신 손부채질로 열기를 식히기 바빴다.
에리는 그런 칼과 릴리를 번갈아 쳐다보며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
“생각보다 선수네. 칼리언트.”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칼은 차를 후룩 들이켠 뒤, 입을 열었다.
“가끔 보면 너는 말의 겉과 속이 너무 다르단 말이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
쩌적.
그 말을 들은 에리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경직됐다.
정곡을 찔려 미처 반응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에, 에리?”
처음 보는 에리의 반응에 릴리는 조금 당황한 반응을 보였고, 에리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호, 칼. 여자의 비밀을 파헤치지 말고 눈감아줘야 할 때가 있는데 말이야.”
“참고는 해 두지.”
칼은 듣는 둥 마는 둥 차를 후룩 들이켰다.
“진짜, 나 그러다 화낸다.”
에리는 뾰로통한 얼굴로 볼을 부풀리며 봉투를 칼에게 내밀었다.
“뭐지? 이건?”
“내 생일 초대장이야. 아주 호화롭게 열 테니까, 멋지게 차려입고 와야 된다. 그리고 겸사겸사 사람도 많이 모이니 사귀기 좋은 친구도 있을 거야.”
칼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생일 파티를 가느니, 차라리 수련을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고민하는 도중.
릴리가 차가운 표정으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거절하면 이제 놀러 오지 않을 거야.”
오지 마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흐음.”
어찌 된 일인지 칼은 잠깐 진심으로 고심했다.
“숙녀의 요구를 이유 없이 거절하시는 것은 기사도에 어긋나요.”
뒤이어 레인까지 가세하자, 칼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꼭 가지.”
* * *
날이 저물었다.
보통 때 같으면 기숙사에서 수련을 하고 있겠지만.
오늘은 보름에 한 번, 식재료를 사는 날이기에 시녀인 레인과 함께 밤 시장을 거닐고 있었다.
“저 혼자 와도 되는데, 죄송해요.”
“신경 쓰지 마.”
식재료를 들고 있던 칼은 착잡한 표정으로 몸의 전 주인을 떠올렸다.
과거, 그는 수십 번이나 죽을 뻔한 위기를 겪었었다.
그중 한 가지 방법이 바로 독살.
음식에 독이 있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그는 식음을 전폐하여 아사 직전까지 갔다.
사정은 잘 모르지만, 그때 칼리언트를 구한 게 바로 레인이었다.
어찌 보면 시녀로서 당연히 해야 될 일이지만.
그녀는 지극정성으로 칼의 식사를 챙겨 줬고, 그 뒤로 칼은 식사를 할 때, 레인을 대동해야만 했다.
지금이야 당연히 혼자 알아서 끼니를 채울 수도 있지만.
알아서 먹겠다고 말할 때마다 서운하다는 듯 꼭 눈물을 머금으니,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쉬며 그녀가 차린 음식으로 끼니를 채웠다.
‘뭐 실제로 밥이 맛있으니까 된 거지.’
“도련님의 수련에 지장 생기면 안 되니까, 다음에는 진짜 저 혼자 오겠다니까요.”
레인이 한참 떼를 쓰던 중 어두운 골목에 발을 들인 그 순간.
사아아아악.
오감을 자극하는 괴이한 느낌에 칼이 감각을 곤두세웠다.
그는 벼려진 동공으로 주변을 빠르게 살핀 뒤, 입을 열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이런 생각이 들더군.”
“어떤 생각이요?”
“세상이 평화로웠다면, 너 같은 순진한 녀석이 마음 편히 다녀도 되지 않나 하고.”
“그게 무슨?!”
“세상은 악의로 가득 차 있다는 소리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스팟!
칼의 손이 어둠 건너편에 있는 암살자의 머리를 붙들더니, 단숨에 벽으로 밀어붙였다.
콰앙! 콰직!
“크아아아아아악!”
칼에게 당한 남자는 끔찍한 비명을 토하다 머리에서 피를 흥건히 흘리며 그대로 쓰러졌다.
“이, 이게 무슨?!”
“악몽을 꾸게 하기는 싫으니까 자고 있어.”
칼은 맥캘리에게 배운 침술을 이용해 레인의 혈도를 엄지로 꼭 눌러 잠재웠다.
“…….”
그녀를 조심히 눕힌 칼은 날카롭게 눈을 치켜뜨며 어둠 건너편을 향해 경고를 읊조렸다.
“그만 나오지 그래?”
그러자 더 이상 인기척을 숨길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복면을 쓴 이들 다수가 칼의 앞에 튀어나왔다.
레인을 보호해야 하는 리스크가 있음에도 칼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절도범치고는 수준이 상당히 높네.”
“칼리언트. 네놈은 너무 설쳐댔다.”
“그 오만방자한 성격이 죽음을 자초했다.”
암살자들의 거들먹거리는 말에 칼은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진짜 날 죽이려고 할 생각이야? 얼추 봐도 스무 명 밖에 안 되는데?”
“?!”
숫자를 정확히 간파당한 그들은 당혹스러움에 휘둥그레 눈을 떴고.
바로 그 순간, 칼은 길거리에 굴러다니던 돌멩이를 힘껏 걷어찼다.
은은한 붉은 마력을 실은 돌멩이는…….
콰직!
콰앙!
단숨에 줄지어 서 있는 두 명의 복부를 터뜨렸다..
터져 나온 내장 파편과 흥건히 흐르는 피에 동료 암살자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실감을 하지 못한 듯 보였다.
스윽.
칼은 양손을 주머니에 꽂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고작 그 숫자로 날 칠 수 있겠어? 아, 의미 없는 질문이네. 이건 취소.”
‘이 녀석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꿀꺽.
예상치 못했던 말에 긴장한 암살자들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일 대 다수.
겁을 집어먹어야 하는 건 홀로 있는 칼이어야 될 텐데, 그는 오히려 지금의 상황을 반기는 듯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무척이나 음산한 한마디를 남겼다.
“맹수를 잡기 위해 개미가 얼마나 필요한지 세는 건 귀찮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