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9화
‘나 제대로 미친 사람을 만났구나.’
칼의 주먹에 얼굴을 강타당한 에리얼이 고꾸라지기까지.
릴리는 시간이 무척이나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자기가 어떤 짓을 저지르는 건지 제대로 자각은 하고 있는 걸까?
칼은 얄궂게 미소를 지으면서도 눈으로는 스첼레투스 학파 학생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구도를 보았을 때, 마치 흉포한 사자가 초식 동물들을 위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까까지는 분명 그 반대인 줄 알았는데.’
종잡을 수 없는 현상에 릴리가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
칼은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정했어. 오닉스 스퀘어로 가지. 고맙다.”
“……뭐? 너 지금 이 상황은 어떻게 수습하고 가려고?”
칼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다니?”
“이 녀석들은 절대 이번 사건을 공표하지 않고, 사적으로 보복을 가해 올 거야.”
“크윽!”
단번에 속내를 간파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스첼레투스 학파 학생들이 표정을 구겼다.
스윽.
칼은 그대로 양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으며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데제스에게 전해. 할 말 있으면 직접 오라고.”
“크윽! 건방지게!”
피식.
칼은 가소롭다는 듯 그들을 비웃으며 그대로 문밖으로 빠져나갔다.
“자, 잠깐!”
깜짝 놀란 릴리는 칼을 붙잡으려다 갑자기 같이 있던 에리를 쳐다보았다.
“에리. 나, 가도 괜찮지?”
“으, 응. 괜찮아.”
릴리가 초조해하는 기색을 느꼈는지, 에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사과를 한 릴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칼을 쫓아갔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에리는 훗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흐음, 앞으로 재밌어지겠네.”
“뭐가 웃겨? 너 미쳤어?”
학생들은 쌍심지를 켜며 에리를 노려보았다.
“오늘 일은 비밀로 부칠 테니까, 다음에는 조심해.”
에리는 검지를 입술에 붙이며 그들에게 윙크를 해 보였다.
“…….”
무척이나 얄미운 그 모습이 은연중 가해지는 협박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들은 분한 듯 몸을 떨었다.
파르테스에서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학생 중 한 명이 바로 에리였기 때문이다.
* * *
릴리를 통해 파르테스의 교육 체계를 숙지한 칼은 망설임 없이 본관을 나와 멀찍이 떨어진 오두막으로 향했다.
입구의 나무 간판에는 방패와 검이 교차된 모양을 한, ‘오닉스 스퀘어’의 심벌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다른 학파와 달리 완전 외진 시골 풍경이군.”
“그러니까 말했잖아. 너한테 득이 안 될 거라고.”
바로 옆까지 칼과 동행한 릴리는 푸념 어린 소리를 늘어놓았다.
“왜 쫓아오는 건데?”
칼은 어느샌가 자신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는 릴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게.”
자신의 행동이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지, 릴리는 곤란한 표정을 짓다 입을 열었다.
“너 아무래도 사고를 굉장히 많이 칠 것 같으니까, 당분간 지켜보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괜히 엉뚱한 학파로 가서 고생하면, 괜히 내 책임 같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말이나 걸지 말걸.’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아직까지 후회하고 있으면서도, 어째서인지 칼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칼은 절로 기분이 이상했다.
‘나를 걱정한다?’
어머니인 사라 슈타크에게서 들어 본 이후로 처음 듣는 말이었기에 당혹스러웠으나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럴 때는 칭찬을 하면 되는 건가.’
단 한 번도 칭찬이란 것을 해 본 적이 없기에 칼리언트 역시 이게 맞는지 알지 못했다.
탁.
칼은 자연스럽게 릴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착한 녀석이군. 뭐 먹고 싶은 게 있냐?”
빠직!
졸지에 펫과 같은 취급을 받은 것을 깨달은 릴리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죽을래?!”
짜악!
격한 타격 소리가 숲에 메아리치며 울려 퍼졌다.
* * *
‘……여자는 어렵군.’
기사가 되기 위해서 여자와 아이를 지킨다.
폭행을 가하거나, 이유 없이 검을 들면 거기서 아웃.
그렇게 행동 관념을 고쳤기에, 칼은 뺨에 손바닥 자국이 나더라도 릴리에게 뭐라 할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깊게 고찰할 뿐이다.
씩씩거리면서도 릴리는 칼을 꿋꿋이 오닉스 스퀘어로 안내했다.
“교수님! 들어가도 되나요?”
문 앞에 선 그녀는 그대로 노크를 했지만,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교수님, 들어갈게요.”
끼익!
릴리는 그대로 문을 열어젖혔다.
그런데 문을 열기 무섭게…….
쏴아아아아!
방대한 양의 도서가 발치에 쏟아졌다.
오두막 안 풍경을 바라보던 슈타크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마치 전쟁 통을 방불케 할 만큼 산더미처럼 도서가 쌓여 있었다.
“……쓰레기장인가.”
“실례야. 연구실이라고 불러야지.”
팔락, 팔락, 팔락.
한 치의 틈도 허용치 않겠다는 듯, 허공에는 무언가를 휘갈겨 써놓은 서류들이 팔락, 팔락 날아다녔다.
아마 문을 열면서 서류더미가 무너진 바람에 엉망이 된 것이리라.
종이를 붙잡은 칼은 그것을 읽다 일순간 눈을 빛냈다.
“오호라.”
그러고는 릴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감탄사를 냈다.
“맥캘리 교수님, 어디 계세요?”
한편 릴리는 교수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어디 간 거야? 연구 때문에 하루종일 연구실에만 갇혀 사는 사람이…….’
혹시 행방불명이 된 게 아닐까 싶어 그녀가 불안한 표정을 짓는 순간.
꿈틀, 꿈틀.
바로 옆에 있는 책더미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응?”
무심코 그곳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덥석!
책더미 사이로 튀어나온 자그마한 손이 릴리의 팔을 붙들었다.
이내.
“바아아압~~.”
책더미 사이로 튀어나온 손의 주인은 앙상한 몰골을 한 소녀였다.
“꺄아아아아악!”
갑작스런 상황에 릴리는 비명을 질렀고, 칼은 양쪽 검지로 귀를 막으며 릴리에게 붙어 있는 인간을 바라보았다.
뿔테 안경을 걸친, 분홍색 양 갈래머리의 여성.
키는 약 150센티미터 정도인 작은 소녀였다.
“설마 저게 맥캘리?”
칼은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전공을 바꾸려면 지금이 마지막이라고.
* * *
작은 소동이 종결된 후.
타닥, 타닥.
오두막 바깥으로 나온 칼은 야외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정말 깜짝 놀랐잖아요. 교수님.”
앞치마를 두르고 끓은 스튜가 담긴 단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릴리는 아직도 분하다는 표정으로 맥캘리를 바라봤다.
우걱우걱.
맥캘리는 정신없이 스튜와 빵을 허겁지겁 입에 넣고 있었다. 그러다 릴리의 말이 들렸는지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안, 미안. 하하하하. 열흘 내내 딜레마에 빠져 있어서 말이야.”
맥캘리는 털털하게 웃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슬쩍 칼을 쳐다보며 말했다.
“근데, 이 잘생긴 꽃미남은 누구야?”
릴리는 한쪽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번에 새로 온 전학생이에요. 오닉스 스퀘어에 편입하고 싶다고 해서 데리고 왔어요.”
“세상에! 그런 미친 짓을 왜 한대?”
“……교수님. 그렇게까지 솔직하게 인정할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맥캘리는 콧등까지 떨어진 뿔테 안경을 고쳐 쓴 뒤, 칼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정쩡한 생각으로 왔다면,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자기가 천재라고 생각했던 녀석들도 여기서는 쪽도 못 써보고 떠났으니까. 인생 쪽박 차지 말고 나가.”
나름 인생의 선배라고 조언한 거지만.
칼은 대답 대신, 맥캘리가 휘갈겨 놓은 논문 중 한 장을 테이블 위로 내밀었다.
“아! 주워 준 거야? 고마워.”
괜히 모질게 말한 걸까?
머쓱해진 맥캘리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논문을 손으로 집으려고 할 때.
칼은 논문 중 한 문단을 가리키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거 틀렸어.”
빠직!
거리낌 없이 내뱉은 반말.
거기에 자신의 논문에 이의를 제기하기까지 하자, 맥캘리는 눈 밑이 어두워졌다.
“햇병아리 주제에 파르테스가 낳은 수석 교수인 내 연구에 감히 지적을 해?”
“틀린 걸 틀렸다고 한 것뿐이잖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한 맥캘리는 결국 목에 핏대를 세웠다.
“어디가!!!”
잠시 후.
기나긴 논쟁이 끝나고 패배를 한 것은 맥캘리였다.
“훌쩍, 훌쩍, 훌쩍. 흐어엉!”
현재, 릴리에게 안긴 그녀는 비참함에 흐느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울지 마세요, 교수님. 뚝.”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릴리는 어쩌다가 자신이 이렇게까지 휘말렸는지 고민하다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칼을 바라보았다.
고향도, 어떤 가문의 자식인지 그 태생도 알 방법은 없지만.
그는 마냥 사고만 치는 거친 남자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이 남자는 파르테스에서 수석 교수인 맥캘리의 이론을 정확한 논리로 타파했다.
그리고 칼에게 대꾸만 하다 처절하게 깨진 맥캘리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흐끅! 저 자식 재수 없어!! 꺼지라고 해.”
“…….”
모처럼 자신의 학파에서 가르침을 청하려는 제자에게 할 소리가 맞나.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칼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마음에 들었어. 이 학파에 들어가 주지.”
“으아아아아악! 진짜 재수 없어!!”
진심으로 칼이 싫어진 건지, 맥캘리는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며 말했다.
“이 자식아! 경의를 가지고 대하란 말이야!”
“충분히 경의를 표하고 있다.”
“어디가!!”
“…….”
티격태격하며 싸우는 두 사람을 보며 릴리는 생각했다.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인 거야?’
구분은 안 가지만, 옥신각신하는 그들의 대화도 슬슬 끝날 기미가 보였다.
칼은 입꼬리를 비틀며 맥캘리에게 말했다.
“이론이 몇 군데 틀어질 수밖에 없던 것은 이 이론을 조율해 줄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거잖아.”
“……그, 그걸 어떻게?!”
“난 실제로 이 이론을 토대로 마나를 연단해 보다가 부작용이 있는 부분을 지적한 것뿐이야.”
“지, 진짜?”
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가에 살짝 웃음기를 띠며 말했다.
“나라면 당신의 연구에 참여해서 이 이론을 완성시켜 줄 수 있어.”
마치 악마의 유혹과도 같은 말이었다.
실제로 마음이 크게 흔들렸는지, 맥캘리는 안절부절못하는 반응을 보였지만.
“흥이다!”
곧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고 칼은 한숨을 쉬었다.
“……어렵군.”
“둘 다 고집불통이니까 그런 거잖아.”
릴리의 지적에 두 사람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칼리언트에게 있어서는 맥캘리의 이론을 바탕으로 설계한 마나 심공이야말로 마왕의 마력을 연약한 인간의 몸에 정착시킬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맥캘리에게는 자신의 이론을 조율해 줄 수 있는 참가자가 필요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인재였다.
바로 그 순간.
우웅.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수정구가 반짝 빛나더니, 수정구에 한 여인의 그림자가 생김과 동시에 음성이 흘러나왔다.
[오랜만이에요, 맥캘리 교수.]
“푸훗! 화, 황공합니다. 여왕 폐하!!! 이 늦은 밤에 어쩐 일로 연락을 주셨는지요.”
때마침 물을 마시고 있던 맥캘리는 입 밖으로 물을 분사하더니 곧바로 예를 갖췄다.
타악!
릴리 역시 크게 놀라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이실리아 내에서 전해지는 통신 마법.
수정구를 통해 맥캘리에게 통신을 한 이는 다름 아닌 이 나라의 여왕, 예카테리나 2세였다.
[연구는 잘 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연락하게 되었네요. 부족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지원해 줄게요.]
푸푸푸푹!
가슴에 화살이 꽂히는 기분이었다.
양심의 가책을 크게 받은 맥캘리는 정신이 아찔했다.
차라리 욕하며 성과를 재촉하는 게 마음이 편하지, 여왕의 기대감은 아무래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시, 심려 끼쳐 죄, 죄송합니다. 연구는 잘 되고 있습니다. 조만간 학회에서 그 성과를 보이겠습니다.”
[정말인가요? 그렇다면 저도 가 봐야겠군요. 근데, 오닉스 스퀘어에 제자가 있었던가요?]
두근, 두근.
심장박동이 멈추지 않는다.
대화의 분위기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직감한 맥캘리는 수정구가 비치지 않는 방향에서 멀뚱히 있는 칼에게 느닷없이 어깨동무를 해서 끌어당겼다.
“하하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만간 제 제자와 함께 학회에서 그 성과를 보이겠습니다.”
“뭐야? 갑자기 왜…….”
칼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려고 했으나…….
“웃어, 새꺄. 죽고 싶지 않으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협박을 가하는 맥캘리를 빤히 보다가 생각을 바꿔 경직된 웃음을 보이며 예를 갖췄다.
“……칼리언트라고 합니다.”
[호호호호, 사제 간에 사이가 다정한 것이 참 아름다워 보이네요.]
여왕은 안도하는 듯 웃어 보였다.
한편, 수정구가 비치지 않는 방향에서는 맥캘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칼을 쳐다보며 말했다.
“탐탁지 않지만 제자로 받아 주마.”
“내가 스승으로 받아 주는 거겠지.”
빠직! 빠직!
두 사람은 얼굴에 핏대를 세우다 서로의 주먹을 맞부딪쳤다.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릴리는 황당한 표정으로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어디가 아름다워 보이나요? 여왕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