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8화
파르테스의 시험은 1년에 두 번이나 치러지는데.
기존의 다른 아카데미와는 목적과 취지부터 달랐다.
이 시험의 목적은 성향 분석.
그리고 특기 재능에 대한 교육 강화였다.
예를 들면, 시험에서 낙제점을 받은 과목이 있더라도 그것은 낙제가 아니라 그 분야에 재능이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만약, 원소 마법에 대해 탁월한 재능이 있다고 판단되면…… 파르테스를 구성하는 8개 학파 중 하나인 ‘엘레멘탈 스피릿’으로 배정돼서 학문에 집중하게 된다.
물론 치러진 과목에 대해 등수는 매겨지지만, 크게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다만 상위권에 있던 학생들 대다수가 라흐만 대륙에 이름을 남기는 거장으로 성장한 만큼, 학년 수석에 대한 미련은 누구도 떨칠 수 없었다.
또한 상위 5위권 안에 있는 학생들에게만 장학금 혜택이 주어지니…….
서민 출신인 학생들은 더욱더 학업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릴리가 상위권을 노리는 이유는 후자에 속했다.
그녀의 본명은 릴리아나 아베티스트.
분명 귀족의 성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은 그 혈맥만 간신히 이어질 뿐, 그녀의 가문은 옛적에 몰락했다.
아버지는 잡화점을 운영하는 상인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아버지와 의절을 선택했다.
옛 귀족이었던 명성을 다시 가지고 싶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한 지방 영주의 첩으로 릴리아나를 보내기 위해 혼담을 진행했다.
그 사실을 사전에 간파한 릴리아나는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가출했다.
그 누가 자신과 30살 차이가 나는 배불뚝이 아저씨랑 결혼을 하고 싶을까?
영주는 그저 릴리의 미모에 현혹돼 탐욕을 부린 것이다.
빠득!
아직도 옛날 생각만 하면 이가 갈리는지 릴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튼 그 사건을 계기로 그녀는 자신의 외모가 아닌 실력으로 출세하기를 꿈꿨다.
‘그렇게 살려면, 1등이라는 결과를 내야 돼.’
그녀는 굳은 결의를 다지며 파르테스의 광장으로 발을 내디뎠다.
채점이 끝나면, 승부의 장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곳에 등수를 나열해 놓은 벽보가 붙기 때문이다.
웅성웅성.
오늘도 평소처럼 학생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뭐지?’
하지만 평소와 달리 그 사이에서 묘한 파란의 기운을 감지한 릴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라면 ‘오늘도 세컨드 프린세스 납셨네.’라며 조롱하는 이, 혹은 ‘안 됐어.’라고 위로하는 이들이 대다수일 텐데.
지금 그들은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볼을 꼬집거나, ‘이 녀석은 대체 누구야?’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리, 릴리.”
때마침 그곳에 있던 그녀의 단짝 에리도 당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그러는데?”
“그, 그게.”
“서드 프린세스로 전락했다고 말하면 되는데, 뭘 그렇게 더듬고 있어?”
근처에 지나가고 있던 남학생들은 릴리를 조롱하며 스윽 훔쳐보더니 그대로 지나갔다.
“?!”
스팟!
그들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간파한 릴리는 재빨리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벽보를 살펴봤다.
「1위, 데제스푸아르, 학파 선택 자유
1위, 칼리언트, 학파 선택 자유
3위, 릴리아나, 지정 학파: 룩스 루나에」
울컥!
벽보를 바라본 순간, 그녀는 격분과 절망에 휩싸였다.
……어째서?
그토록 열심히 했는데.
……왜 난 안 되는 거야?
어째서 괴물이 또 한 명 추가된 거야?
이 남자는 대체 뭐야?
릴리는 마음속으로 연달아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벽보 앞에서는 아무도 칼리언트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파르테스 역사상 공동 1위가 배출된 것은 그녀가 알기로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누군가가 이 정도 성적을 낸 적이 있다면 릴리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이러면 안 돼, 이러면 안 돼.
질투로 인해 그녀는 마음속이 어지러웠지만, 가까스로 그것을 수습했다.
바로 그때.
뚜벅, 뚜벅.
어째서인지 묘하게 한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크게 들렸다.
웅성웅성.
그것은 비단 릴리에게만 들렸던 게 아닌지, 인파는 양 갈래로 갈라지며 누군가에게 길을 터 주고 있었다.
슬쩍 뒤를 살펴보니, 그곳에는 시험장에서 보았던 소년이 있었다.
무뚝뚝한 표정에 심홍색의 머리칼과 눈동자는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
“……칼리언트.”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릴리는 이 남자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스윽.
그는 주변의 관심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조그맣게 자신을 부른 릴리를 쳐다봤다.
“불렀으면, 말을 해야지.”
목소리는 소년답지 않게 엄숙하고 낮았다.
무심코 부르기는 했지만, 딱히 별 뜻은 없었기에 릴리는 당황했다.
마음 같아서는 ‘너 커닝했지……!’라며 억지를 부리고 싶었지만.
그것은 추악한 질투란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어떻게든 개인적인 감정을 집어삼키며 입을 뗐다.
“그, 그게 너 어디 학파로 들어갈 거야?”
가까스로 생각해서 내뱉은 질문이지만.
막상 묻고 나니 호기심이 제멋대로 솟구쳤다.
추정컨대, 에리가 말한 전학생은 틀림없이 이 남자를 지칭하는 것일 거다.
오자마자 파란을 불러일으키는데, 호기심을 안 가지는 게 더 이상했다.
참고로 파르테스에서 1위는 무척이나 명예로운 자리였다.
전 과목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았다는 것은 곧 다재다능하다는 뜻이다.
그런 걸출한 인재를 교수들이 섣불리 평가해 실수로 엉뚱한 학파로 집어넣으면, 재능을 꺾는 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기에…….
1위에게는 무려 학파를 선택할 수 있는 특혜가 주어진다.
그녀의 말을 들은 칼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뭔데?”
휘잉!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자연이 반응이라도 해 준 건지, 느닷없이 쌀쌀한 바람이 불어닥쳤다.
“…….”
하늘거리는 흑발에 의해 시야가 가려진 릴리는 초점이 모호한 눈동자로 ‘이 자식은 뭐지?’라며 황당해했고.
주변은 순식간에 침묵이 감돌았다.
* * *
‘기왕지사 질문을 던졌으니, 이 남자의 대답은 들어야겠어.’
그렇게 마음을 먹은 릴리는 빈 교실을 빌려 칼을 책상에 앉힌 뒤, 분필로 칠판에 휘갈기기 시작했다.
탁, 탁, 탁.
신경질적으로 씀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필체는 무척이나 고와서 보기가 좋았다.
그녀가 칠판에 갈겨쓴 것은 파르테스 아카데미를 구성하는 8개 학파였다.
「엘레멘탈 스피릿, 룩스 솔리스, 룩스 루나에, 비블리오 마기아스.
글라우벤, 스첼레투스, 스파라기다.
오닉스 스퀘어.」
탁.
마침표를 찍은 릴리는 도도한 눈빛으로 칼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나열했는데 느껴지는 거 없어?”
“……필체가 화려하군.”
“…….”
예상치 못한 곳에서 칭찬이 흘러들어오자, 릴리의 얼굴이 상기됐다.
“어머.”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에리가 음흉한 미소를 짓자…….
“크흠.”
릴리는 손으로 입을 가려 헛기침을 한 뒤, 설명을 시작했다.
“모르면 됐어. 파르테스는 인재를 배출하는 게 목표지만, 기본적으로 마법사들의 입김이 강해 각 학파가 제공하는 마나 수련법을 배우는 것을 전제로 깔아두고 학문에 임해야 돼.”
“그 정도는 알고 있어.”
라흐만 대륙의 역사상 문화와 학문, 그리고 전술의 발전을 주도해 온 것은 마법사들이었다.
즉 마법사는 시대를 막론하고 교육자로서 채택되기 적절한 인재인 것이다.
이후, 릴리의 설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첫 번째 줄은 마나 속성에 따라 분류된 학파야. 가장 연구가 잘 돼 있고 밸런스도 좋아서 학생의 대부분은 여기 속해 있어. 엘레멘탈 스피릿은 원소 마법, 그리고 록스 솔리스는 양의 마력, 루나에는 음의 마력에 대해서 공부하게 돼. 비블리오 마기아스는 허무 속성 마력을 다루게 돼.”
“내 재능은 아니네.”
취향이 맞지 않다는 듯 칼은 입맛을 다셨고, 릴리는 쿨하게 설명을 재개했다.
“두 번째는 마법 중 특별한 재능이 필요한 것들을 구분한 거야. 글라우벤 학파는 신성 마법, 스첼레투스는 흑마법, 스파라기다는 소환 마법을 익히는 곳이지.”
“그나마 스첼레투스가 들어맞을 것 같지만, 영 끌리지는 않아. 제일 마지막은 왜 혼자 달랑 놓여 있는 거지?”
릴리는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오닉스 스퀘어’를 보며 입을 열었다.
“배우는 학생이 없으니까, 정보가 없어. 동방 대륙의 그랜드 마스터가 마나를 정제하는 방법을 학문으로 연구해 계승하고 있는 학파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 맥도 거의 끊겨서 맥캘리 교수님이 이론적으로 계승만 해 오고 있어.”
“그런 쓸모없는 학파를 왜 계승한 거지?”
“……쓸모없지 않아.”
릴리는 씁쓸한 표정으로 하던 이야기를 마저 했다.
“무려 그랜드 마스터의 유산이잖아. 마법사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여왕 폐하께서는 어떤 미련 때문인지 그 명맥을 유지시키고 있어. 자, 그래서 넌 어딜 선택할 건데?”
설명은 끝났다.
이제는 확답을 들어야 할 때다.
촤륵.
타악.
그러나 대답을 들어 보기도 전에 교실 문을 열고 다수의 학생이 칼에게 몰려왔다.
순식간에 그들의 정체를 간파한 에리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왜 스, 스첼레투스 학파에서…….”
갑자기 나타난 학생들은 교복 윗주머니에 흑마법을 상징하는 까마귀 모양의 심벌마크가 새겨진 배지를 착용하고 있었다.
“나가. 여기는 내가 빌린 교실이야.”
언뜻 봐도 좋은 의도로 다가오는 것이 아님을 눈치챈 릴리가 급히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 전학생한테 이야기 좀 하려고 왔으니까, 나와 줄래? 3등.”
자기도 모르게 울컥한 릴리는 목소리를 높이려다가.
“됐어. 이야기 들어 보는 게 뭐 어때서?”
칼의 제지에 불편한 표정으로 자리를 비켜 주었다.
“오호, 마음에 드네. 경청하는 자세를 취할 줄도 알고. 내 이름은 에리얼이야.”
릴리를 스쳐 지나간 금발의 남학생은 히죽 웃음을 터뜨리며…….
콰앙!
칼의 책상을 힘껏 걷어차 위협을 가해 왔다.
칼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에리얼을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최근에 커닝을 너무 잘하는 녀석 때문에 데제스가 화가 났거든. 적당히 했어야지, 느닷없이 정점을 가로채려고 빤히 보이는 수작을 부리면 안 지.”
“잠깐! 증거도 없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릴리가 어이없다는 듯 반박을 하자, 에리얼은 눈살을 찌푸리며 칼을 보고 소리쳤다.
“심증만으로 충분해. 어떻게 대륙에서 가장 어려운 시험을 두 사람이나 만점을 받아?”
“마, 만점?!”
릴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반면, 칼은 차분한 표정으로 에리얼을 보며 말했다.
“오히려 데제스란 놈이 커닝을 하지 않았을까?”
그 말을 기점으로 릴리와 에리의 안색은 새파래졌고.
쿠구구구구.
스첼레투스 학파의 학생들이 어두운 마력을 발산했다.
“너 우리가 누군지 알아?”
“관심 없어. 할 말만 하고 가지 그래.”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칼의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우리는 데제스를 따르고 있어. 그리고 우리는 널 데제스와 동급으로 생각하지 않아. 우리와 적이 되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스첼레투스로 들어와서 데제스를 따라.”
“억지 부리지 말고 가.”
“넌 입 닥치고 있어!”
에리얼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릴리를 향해 윽박을 내질렀다.
거친 기세에 조금 겁을 집어먹었는지, 릴리는 뒷걸음질 쳤다.
“…….”
그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칼은 곧 자리에서 일어서서 에리얼을 정면으로 쳐다봤다.
에리얼은 2미터 정도의 장한, 칼은 그에 비해 한참 왜소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아아…… 갱생 정말 어렵네.”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다시 한번 말해 줄래?”
“여기서 우리 말을 따르지 않았던 녀석들은 결국 자진해서 나가거나, 무릎을 꿇거나, 아니면 자살하거나 셋 중 하나였어. 어떻게 할지는 네가 선택해.”
에리얼의 말에 칼은 코웃음을 치며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확실히. 앞으로 학창 생활을 하려면, 너희들에게 빌붙는 게 좀 더 편하겠지.”
“이제야 말귀가 통하는군.”
“내 답은 4번이야.”
“4번? 난 4번은 제시한 적이…….”
콰직!
콰앙!
에리얼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 칼의 주먹이 순식간에 그의 얼굴에 꽂히며 에리얼은 그대로 기절했다.
후두두두둑.
주먹에 맺힌 피는 스첼레투스 학파 학생들의 얼굴에 흥건히 튀었다.
탁탁.
칼은 주먹에 흐르고 있는 피를 탈탈 털며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4번, 너희가 이 학교에서 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