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마왕은 갱생이 어렵다-7화 (7/197)

#제07화

알테어에서 이실리아까지 가는 데는 족히 한 달이 넘게 소요된다.

그야말로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야 하는 일정.

그 시간을 헛되게 소비할 수 없었던 칼은 수련과 지식을 쌓는 것에 열중했다.

먼저 체력을 기르기 전에 기본적인 몸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몸에 맞지 않는 고기 등을 억지로 삼키며 체중과 함께 근육을 늘려 가는 중이었다.

또한 이동할 때는 방대한 양의 저서를 읽었다.

주로 현재 머물고 있는 라흐만 대륙의 역사와 경제, 그리고 정치 체계 등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문학적 소양을 쌓는 것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그리 내키진 않지만, 어머니인 사라 슈타크의 간절한 애원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현재 그는 한 기사의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사락.

책장을 넘길 때마다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칼을 들며 명언을 날리는 기사의 그림이 보였다.

두근, 두근.

옆에서는 레인이 뭔가 기대감을 품으며 칼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도 돼.”

칼의 명령에 레인은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니에요. 죄, 죄송해요.”

“됐어, 따분하겠지. 책은 많으니까 아무거나 골라 봐도 돼.”

무덤덤한 칼의 반응에 레인은 아직까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늘 강박 관념에 시달리던 칼이 자살을 시도했다가 눈을 뜬 이후로 이렇게 차분해졌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사실 그 책을 엄청 재밌게 읽고 있거든요. 공자님께서도 재미를 느끼시나 싶어서요.”

“딱히.”

“……그래요.”

칼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부정했고, 레인은 실망한 듯 고개를 수그렸다.

“이렇게 살면, 무척 피곤할 것 같아.”

‘귀찮으면 다 죽이면 그만이거늘.’

“그건 현명한 처사가 아니니까요.”

“현명한 처사?”

“검을 들기 위해서는 정의와 명분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대중이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은 귀족 사회도 똑같잖아요. 기사는 그 극의를 실천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호, 날 가르치려는 것이냐?”

“아, 아닙니다. 죄, 죄송합니다.”

가소롭다는 칼의 말투에 레인은 바싹 긴장하며 등을 꼿꼿이 세웠다.

“뭐 됐다.”

금세 대화가 지겨워졌는지, 칼은 무심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남자라면, 선망할 법도 하구나.”

“네?”

“아무것도 아니다.”

사락.

바람이 마차 안으로 들어오자, 책장이 펄럭였다.

책장 마지막에는 저서의 주인공인 기사가 검을 들며 드래곤과 맞서 싸우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  *  *

이실리아는 중계 무역으로 유명한 섬나라다.

이곳을 통치하는 여왕은 예카테리나 2세로 그녀는 뛰어난 외교력을 한껏 활용해 강대한 부를 축적해 나가고 있었다.

그런 여왕이 애착을 가지고 살피는 것은 바로 인재였다.

그리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아카데미가 바로 파르테스였다.

마법과 검과 관련된 여덟 개의 학파를 중심으로 고도의 학문을 가르치는 교육기관.

그 명성만큼 이곳에서는 ‘공정과 평등’이라는 룰이 엄격하게 적용되는데…….

그 예시 중 하나로 이곳에서는 국적과 인종, 그리고 기타 어떤 이유로든 차별이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모두가 공평한 위치에서 자신의 실력을 쌓아야 하며…… 결코 자신의 출신과 성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물론 서로 간의 집단을 생성하는 학생들의 문화는 당연히 성행했지만.

중심이 되는 학생 본인이 지니고 있는 실력에 반해 수련생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 것뿐이다.

여기서 출신이나 성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고발당했다가는 제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곧장 퇴학이다.

출신과 신분을 밝혀도 되는 것은 수료식 때뿐이다.

커리큘럼을 수료한 이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이실리아에 남든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데…….

명망 높은 가문의 사람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고, 아닌 이들은 남아서 아카데미의 강사나 이실리아의 관료가 되는 것을 선택한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에서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쏴아아아.

푸르른 바닷바람이 창문 너머로 불어온다.

그로 인해 학관에 남아 공부에 집중하고 있던 소녀의 흑발이 치렁치렁 흩날렸다.

스윽.

소녀는 흐트러진 머리가 시야를 가리자 어쩔 수 없이 머리끈을 입에 문 뒤, 머리를 한데 모아 질끈 묶었다.

그로 인해 잘 보이지 않았던 외모가 훤히 드러났다.

먼저 눈에 띄는 부분은 상앗빛을 연상케 하는 흰 피부와 곱상하고 조그마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인상에 남는 것은…….

이실리아의 반짝이는 푸른빛 바다와 유사한 푸른 눈동자였다.

“…….”

무심코 그녀를 본 학생들은 그대로 넋을 잃었다.

“누, 누구야? 저 여자애.”

흥미를 가진 한 남학생의 질문에 옆에 있던 남자는 한쪽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반 학기가 지나가는데, 그거도 모르냐? 세컨드 프린세스, 릴리아나잖아.”

“세컨드 프린세스?”

“만년 2등이라는 뜻이지. 저렇게 죽어라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죽어도 1등은 못 되더라고.”

서로 수군거리는 말이 릴리의 귓가에 흘러 들어왔고…….

빠직!

그녀는 불쾌하다는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할 말 있으면, 여기 와서 해 주시지.”

움찔!

한기가 스며드는 듯한 그녀의 음성에 남학생들은 기가 죽어 서둘러 바깥으로 향하기 위해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콰앙!

“크아아악!”

느닷없이 문이 벌컥 열리며, 균형을 잃은 남학생들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바깥에서 문을 연 당사자인 세미 롱 헤어의 여학생, 에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들에게 물었다.

“……왜 여기 쓰러져 있어?”

“너 때문이잖아!”

남학생들은 울컥하며 소리를 내지르다가…….

쿠구구구구,

어두운 빛을 발산하는 릴리의 눈빛에 기가 죽어 허둥지둥 바깥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에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소녀에게 말을 건넸다.

“릴리. 왜 또 누군가 후려칠 것 같은 기세를 발하고 있어?”

“짜증 나게 하니까 그러지.”

공부할 기분이 가셨는지, 릴리는 책장을 덮고서 턱에 손을 괴며 에리에게 물었다.

“오늘은 또 어떤 소식을 물고 왔어? 구구.”

“으윽! 계속 비둘기 취급할 거지?”

에리는 뾰로통 볼을 부풀리며 릴리를 쏘아봤다.

“장난이야.”

릴리는 피식 웃으며 에리의 기분을 달래 주었다.

장난스레 말하긴 했지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이야기를 듣고 다니는 에리의 정보 수집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심지어 교수들 간의 은밀한 사생활까지 알아낼 정도였다.

농이기는 하지만, 파르테스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을 꼽으라고 하면, 학생들 중 대다수는 에리를 떠올리고는 했다.

하지만 성격이 활발하고 남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기 때문에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은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학업에 집중하느라 친구가 거의 없던 릴리에게 에리는 유일한 친구였다.

에리는 눈을 반짝이며 물어 온 소식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내일 전학생이 새로 온다고 하더라고.”

“하필 내일이라고……?”

“응, 내일이야.”

릴리는 이해가 가지 않는지, 뺨을 긁적였다.

왜냐하면 내일은 일 년에 두 번 있는 시험을 치르는 날이기 때문이다.

법과 정치, 산문 등.

봐야 될 시험의 과목이 무척이나 방대해 결코 단시간에 준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파르테스의 방침상, 이 시기에 전학을 온 학생은 입관 테스트 대신 시험을 치러야 했다.

“차라리 입관 시험을 따로 치르는 게 낫지 않으려나.”

“보통이라면 그게 맞지. 오자마자 처참한 성적을 받아서 입학하지 못하면 비참할 것 같아.”

“어떤 사람일까?”

“관심 없어. 지금 난 데제스를 이기는 게 목표야.”

다시 학구열이 끓어올랐는지, 릴리는 덮었던 책장을 열어젖혔다.

“못 말리겠네.”

쓴웃음을 짓던 에리는 책에 몰두하는 친구를 보며 중얼거렸다.

“너도 다른 사람한테 흥미를 가지면 좋을 텐데…….”

*  *  *

파르데스 아카데미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의복 상점.

그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레인은 탈의실을 가리고 있는 커튼을 초조한 표정으로 살펴봤다.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조금만 있으면, 파르테스에서 칼의 입학 겸 학년 시험이 있기 때문이다.

촤륵.

정작, 초조해야 할 당사자인 칼은 커튼을 걷어 내며 태연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한 달 동안, 꾸준히 체중을 늘린 덕분인지 제법 다부진 체격을 갖추게 됐다.

그로 인해 옷맵시 또한 몹시 빼어나게 변했다.

파르테스의 교복을 갖춰 입은 칼은 고풍스런 분위기를 자아냈다.

“어울려요! 공자님!”

깜짝 놀란 레인은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동하지.”

칼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스윽 쳐다보다 곧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 같이 가요.”

잠시 후.

시험 시작까지 20여 분을 남기고 칼은 파르테스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허억, 허억, 살았어요.”

회중시계를 연신 쳐다보고 있던 레인은 가쁜 호흡을 다스리며 안도했다.

“대기실에서 쉬고 있어.”

칼은 흐트러짐 없이 의복을 정갈하게 고치며 발길을 옮기려고 했다.

바로 그때.

“고, 공자님!”

레인의 다급한 외침에 칼은 홱 고개를 돌렸다.

“내가 뭘 깜박했나?”

“그, 그게 아니고요.”

이런 소리를 하면 건방져 보일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레인은 어떻게든 칼에게 이 말은 해야 될 것 같았다.

“침착하게 잘 임하셔야 해요. 또 알테어로 가면 곤란하잖아요.”

“싱겁기는.”

칼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등을 돌렸다.

괜한 소리를 한 걸까? 그녀가 의기소침해서 고개를 땅에 떨어뜨리려고 하는 찰나.

스윽.

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오른손을 들어 보이더니, 주먹을 불끈 쥐었다.

피식.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레인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많이 귀여워지셨네.”

만약 이 말이 칼의 귀에 들어간다면, 불같이 화를 낼 게 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느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  *  *

시험을 앞두고 모든 학생이 긴장하고 있을 때.

뚜벅, 뚜벅.

아슬아슬한 시간에 도착한 한 학생이 빈자리에 착석했다.

정리했던 자료를 꼼꼼히 살피던 릴리는 심홍색을 띠는 머리칼과 눈동자에 강한 인상을 받았는지, 저도 모르게 그를 쳐다봤다.

‘이번에 전학 온다는 그 사람인가.’

커닝을 방지하기 위해 인원을 뒤죽박죽 섞는 바람에 전학생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보기만 해도 압살당할 것 같은 기세를 뿜어내는 이 남자는 이곳에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보나 마나 성질이 사나워서 가문에서 억지로 이곳에 보낸 거겠네.’

첫인상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릴리는 자신의 첫인상이 틀렸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신경 쓸 필요 없어.’

시험지를 받아든 그녀는 곧 남자에게 관심을 끄고 문제 풀기에 집념했다.

하지만 그녀라고 알았을까?

자신의 평가가 틀렸다는 것을…….

그리고 이 만남으로 인해 나중에 자신에게 어떤 후폭풍이 불어닥칠지…….

머잖아 그녀가 확신하게 되는 것은 이 남자가 상상을 초월한 미친놈이라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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