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4화
오크 퇴치 결행까지 앞으로 이틀.
꽈악!
경갑을 갖춰 입은 칼리언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봤다.
짧은 시간 동안 살을 찌워 보려고 했지만, 오랫동안 제대로 안 먹은 영향 때문인지, 여전히 앙상한 몰골의 소년이 있었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눈빛에는 자신감과 신념이 서려 있었다.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뒤에서는 루크가 불안한 눈빛으로 칼리언트를 지켜보고 있었다.
“오크를 퇴치한다고는 했지만, 사실상 지금의 전력으로는 퇴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그러시면,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시는 게…….”
“아까 말하지 않았나? 내가 돌아오지 못하면 그때 내 명령을 철회하도록 해.”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비밀.”
답답함이 루크의 가슴에 물밀 듯이 밀려왔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막무가내로 자기주장을 밀어붙이는 독불장군이 됐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계기가 될 만한 일이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한편, 그런 루크의 모습에 칼리언트는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기분이 더럽군.”
“제, 제가 무슨 결례를 저질렀습니까?”
당황한 루크는 이유를 물었고 칼리언트는 인상을 홱 찌푸리며 그를 쳐다봤다.
“내가 누구지?”
“루드거 슈타크 님의 막내아들이신 칼리언트 슈타크 공자님이십니다.”
“그게 내가 불편한 이유다.”
“네?”
아직까지도 갈피를 잡지 못한 루크는 무례한 행동임을 알면서도 반문하였고, 칼리언트는 눈을 치켜뜨며 그에게 답해 주었다.
“난 내가 칼리언트 슈타크가 아니라 누구의 아들로 불리는 게 실로 불쾌해. 무엇보다 그걸로 나를 얕게 평가하는 시선도 마음에 안 들고 말이지.”
“…….”
‘정말로 강박 관념에 시달리던 그분이 맞는 건가?’
프라이드가 높아진 칼리언트가 루크는 아직까지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루드거 백작의 아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그 이름 아래 몸을 숨기지만, 조만간 내 힘이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 주지.”
자신만만하게 선언한 칼리언트는 루크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긴 뒤, 그대로 바깥으로 나섰다.
* * *
짙은 구름이 낀 날 밤.
성 밖으로 몰래 빠져 나온 칼리언트는 마왕이었을 때의 감각을 떠올려 보았다.
쿠구구구구.
감각을 떠올리기 무섭게 전신에서 붉은 마력이 피어올랐다.
스스스스.
그리고 이내 대기에 있던 마력마저 칼리언트의 피부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이대로 마왕의 힘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잠시 그런 착각을 했으나 곧 문제가 일어났다.
쩌적! 뚝!
피어오른 마력을 감당할 수 없었는지 팔의 피부가 갈라지며 그 사이로 피가 맺히기 시작한 것이다.
겨우 일부를 활용해 봤을 뿐인데도 말이다.
마왕의 힘을 발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몸.
그리고 누구도 감당할 수 없었던 마계의 최강자, 벨리앗의 영혼.
너무나 부실한 육체는 강대한 영혼의 힘을 감당하지 못했다.
이걸 과연 단련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계속 방법을 찾아봐야지.’
그것은 나중에 생각해도 되는 문제로 지금은 오크 섬멸에 초점을 두어야 했다.
휘잉!
그런 이유로 지금 칼리언트는 험준하기 이를 데 없는 높다란 암반 절벽을 오르고 있었다.
정점을 향해 올라가던 칼리언트는 순간.
파르르르.
손에서 힘이 빠져 하마터면 잡고 있던 절벽을 놓칠 뻔했다.
빠득!
“진짜 부실하군.”
이를 악문 칼리언트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최강의 마왕이 되었던 것은 압도적인 프라이드와 근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낱 인간의 몸이 됐다고 해서 쉽게 버릴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잠시 후.
등반을 끝마친 칼리언트의 눈앞에 1미터 크기의 생물이 보였다.
끼익, 끼익.
단단하게 결집된 비늘, 아직 촉촉이 젖어 있는 피막의 날개.
서로 부둥켜안고 모여 있는 그것은 새끼 와이번들이었다.
‘그래도 쓸 만한 녀석이었어.’
와이번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몸의 원주인이 알테어 주변을 시찰한 내용까지 일기에 수록했기 때문이다.
주변이 적으로 가득했기에, 만일을 대비해 몬스터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해 두었던 것이다.
칼리언트는 그 정보를 활용해 이곳에 도착한 것뿐이다.
“슬슬 어미가 올 것 같은데.”
칼리언트는 주변을 살피다가 새끼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 순간.
키에에에엑!
콰아앙!
보름달 아래로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와이번이 단숨에 둥지로 날아오더니 세차게 포효했다.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포식자의 포효에 숲의 날짐승들이 허우적 날갯짓을 하며 급하게 어디론가 날아갔다.
하지만 정작 그 포식자의 위협에도, 칼리언트는 와이번의 새끼 목 끝에 검을 겨누며 피식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크르르르르르.
계속 위협을 가한다면 새끼를 죽이겠다는 무언의 경고임을 깨달은 와이번은 낮게 울부짖을 뿐.
더 이상 칼리언트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칼리언트는 은은히 위협적인 기운을 발산하며 와이번에게 물었다.
[내 말 알아들을 수 있지?]
[어떻게 인간이 우리와 대화를…….]
피식.
칼리언트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빙의 전, 마왕이던 시절에 그는 몬스터를 비롯해 어떤 존재하고도 대화하는 것이 가능했었다.
차이트에 의해 환생한 지금도 그것이 가능할지 의문을 품었지만, 사념으로 서로의 의사를 주고받는 것이기 때문에 할 수 있었다.
[너는 누구냐?]
칼리언트에게서 불길한 기운을 느낀 와이번은 입을 쩍 벌리며 위협을 가해 왔다.
[새끼가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나에게 협조하는 게 좋을 거다.]
[……협조?]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대답을 마친 칼리언트는 검을 거두었다.
[내가 당장이라도 네놈을 물어뜯어 버릴 수 있다는 걸, 자각은 하는 거겠지?]
와이번은 날카롭게 벼려진 눈빛으로 칼리언트를 노려봤지만, 섣불리 덮치지는 못했다.
그걸 본 칼리언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사념을 토해냈다.
[지극한 모성애군.]
[닥쳐라.]
[아아, 아니면 내가 두려워서 겁을 집어먹은 건가.]
[…….]
정곡을 찔렸는지, 와이번은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
왜인지는 모른다.
다만, 칼리언트와 눈을 마주치자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놀랍게도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모성애를 뛰어넘는, 본능적인 공포를 자극하고 있었다.
잠시 후.
스윽.
[원하는 게 뭐지?]
와이번이 날개를 접으며 기세를 꺾자, 칼리언트는 천천히 입을 뗐다.
[이것은 결코 너에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일 거다.]
* * *
알테어에는 총 다섯 개의 오크 부족 부락이 있다.
그들은 왕성한 번식 활동으로 숫자가 늘어나면 먹이를 얻기 위해서 사냥을 시작한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오크들에게 있어서 짐승들은 그저 소소한 간식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오크 로드가 선택한 개체 수 유지 방법은 바로 인간을 사냥하는 것이었다.
인간들은 일정한 장소를 근거로 두고 있어 구태여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
또한 인간은 저항이 강해 사냥을 하는 과정에서 오크들도 떼죽음을 당한다.
그로 인해 전투가 끝난 후 살아남은 오크들은 개체 수가 줄어든 만큼 충분히 포식할 수 있게 된다.
쿠구구구구구.
사선이라 불리는 알테어에 위치한 슈타크 백작가의 성을 지켜보던 오크들은 게걸스럽게 침을 흘리며 진군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숫자는 무려 4천 마리에 이르렀다.
취익!
부하들을 대동한 오크 로드가 탐욕스런 표정으로 명을 내리자, 오크 군단들이 다시금 진군을 개시했다.
끼이이이익!
그와 동시에 와이번 한 마리가 오크 무리 위로 지나갔다.
평소에 흔히 보는 광경이었기에 다른 오크들은 대수롭지 않게 발걸음을 옮겼지만.
취익?
오크 로드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째서인지 평소와 달리 와이번이 활공하는 높이가 낮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의아함은 곧 불길한 일로 이어졌다.
후웅!
와이번이 발로 쥐고 있던 거대한 바위를 자신들을 향해 떨어뜨린 것이다.
취익!!!
오크 로드는 다급하게 대피 명령을 내렸지만.
콰아앙!
그보다 일찍 떨어진 바윗덩어리가 오크 무리를 덮쳤고, 압살당한 오크들의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다.
취익! 취익! 취익!
갑작스런 공격에 오크들은 당황하며 산개했다.
돌덩이를 던져도 닿을 리 없고, 화살을 쏜다고 해도 와이번의 두꺼운 가죽 때문에 제대로 박히지 않는다.
취익! 취익!
오크 로드는 제멋대로 흩어진 부하들을 다그쳤지만.
콰앙! 콰앙!
다시 하늘에서 바위가 쏟아지자, 자신 역시 발걸음을 옮겼다.
타닥, 타닥, 타닥.
그러다 코끝에 무언가 타는 냄새가 닿자…….
설마 하는 심정으로 부락 쪽을 살펴보았다.
키에에에에엑!
그곳에는 동족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새까만 연기가 하늘 위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취이이이이익!!
인간들이 벌인 짓임을 깨달은 오크 로드는 분노에 차오른 눈빛으로 목에 핏대를 세워 고함을 지르며 부락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것은 실로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휘잉! 화아악!
와이번이 진정으로 노린 것은 바로 오크 로드였기 때문이다.
순간 낮게 활공을 한 와이번의 발톱은 오크 로드의 살점을 짓이기며 그대로 붙들었다.
취익! 취익!
오크 로드의 통솔을 받던 오크들은 어쩔 줄 몰라 했고, 혼란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취이이이익!
분노한 오크 로드는 자신을 먹잇감처럼 집은 와이번의 발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늘로 날아오른 와이번은 지상 어딘가를 살피더니…… 발에 힘을 풀어 오크 로드를 놓아 버렸다.
취익? 취익!
당황한 오크 로드는 손에 쥐고 있던 무기를 집어 던지며 팔다리를 허우적거렸지만.
콰아앙!
이내 지면에 추락했다.
취이이이익!!
고통이 전신에 작렬했다.
가까스로 숨은 끊어지지 않았지만, 전신은 피범벅이 되었고 발은 완전히 으스러져 기어야만 이동이 가능했다.
주변 모래 먼지가 걷히자, 오크 로드의 눈에 보이는 것은 혼란에 휩싸인 인간들이었다.
그가 떨어진 곳은 바로 알테어의 성곽 안쪽이었던 것이다.
취익!!!
오크 로드는 이빨을 내보이며 포악하게 포효했다.
어떻게 해서든 이 분노를 그들에게 풀어낼 생각이었다.
반짝!
하지만 어떻게든 움직이려던 오크 로드는 눈을 멀게 하는 빛무리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스릉.
빛의 정체는 다름 아닌 검광이었다.
그리고 그 검을 손에 쥐고 있는 이는 자신보다 훨씬 여리고 연약해 보이는 붉은 머리의 소년이었다.
평소에는 그저 먹이로밖에 보지 않던 인간.
하지만 어째서일까?
이 소년 역시 자신을 마치 먹잇감으로 인식하는 것 같았다.
오싹!
그 기세에 겁을 집어먹은 오크 로드는 온몸이 경직됐다.
“제물로 선정된 걸 환영하마.”
그 말과 함께 칼리언트는 음산하게 웃으며 그대로 검을 휘둘렀고.
서걱!
오크 로드의 목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절단됐다.
* * *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땅, 알테어.
그곳에 모처럼 주인이 찾아왔다.
붉은 머리칼과 수염, 그리고 적색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안광은 한 번 본 이로 하여금 쉽사리 잊을 수 없는 중후한 인상을 남겼다.
남자의 이름은 루드거 슈타크.
바로 슈타크 백작가의 가주이자 이 나라의 변경백이며, 알테어의 지휘관으로 파견 온 칼리언트의 아버지였다.
성문을 통과한 루드거는 묘하게 긴장하고 있는 주민들의 표정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살아 있을 리는 없겠지. 뭐 1년이나 버텼으면 잘 버틴 거려나.’
그는 자신이 왔음에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칼리언트를 생각하며 쯧 혀를 찼다.
슈타크 가문에서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또한 죽은 자들에게는 정을 주지 않는 냉정한 관습도 있었다.
한창 생각에 잠겨 있던 루드거는 묘한 사실을 알아챘다.
‘이 시선은 나를 쳐다보는 게 아니군.’
영지민들의 시선은 그의 맞은편에 쏠려 있었다.
저벅, 저벅.
그곳에는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
그리고 그 남자가 자신의 아들임을 깨달은 순간, 루드거의 안색은 불쾌함에 찡그려졌다.
칼리언트의 양손에는 살벌하게 포효하는 채로 목이 잘린 오크 로드의 머리가 박제되어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피식.
미소를 띤 칼리언트는 루드거에게 그것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알테어 성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아버님.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지만, 제법 값진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본 모든 이들은 일제히 경악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루콘의 광견이라 불리는 자의 탄생을 알리는 전조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