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3화
울컥!
주륵!
칼리언트의 주먹에 얻어맞은 행정관은 피가 콸콸 쏟아지는 코를 꽉 누르며 몸을 떨었다.
갑자기 변한 칼리언트가 낯설고 두려웠기 때문이다.
콰앙!
칼리언트는 행정관의 머리를 짓밟으며 물었다.
“내 이름이 뭐지?”
행정관은 울컥 피를 토해내고서 입을 뗐다.
“카, 칼리언트 슈타크…… 공자님입니다.”
“눈깔을 치켜뜨고 얘기할 대상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구나. 프란츠가 비호한다고 해서 네가 슈타크 가문의 일원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행정관, 랄프.
그는 칼리언트와 같이 최악의 전선이라 불리는 알테어로 온 인원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는 칼리언트를 돕기는커녕, 알테어의 운영 자금을 야금야금 빼돌렸다.
벨리앗이 빙의하기 전의 칼리언트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랄프의 뒷배인 프란츠가 두려워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깜짝 놀란 랄프는 즉각 소리치며 칼리언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아닌 걸 알면 누구도 무너뜨리지 못하게 다시 보수 공사를 진행하는 게 좋을 거야.”
“아, 알겠습니다.”
칼리언트의 경고에 보수 책임자와 랄프는 벌떡 일어나 답했다.
“장난을 친 예산은 두 배로 불려 놔. 난 변경백의 아들이다. 네놈들쯤 죽인 것 가지고는 프란츠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는 걸 똑똑히 알아두도록.”
칼리언트의 협박에 그들은 으스스 떨다가…….
“아, 알겠습니다.”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방금 전과 달리 겁먹은 생쥐처럼 부리나케 움직였다.
지시를 무시하면, 목이 달아나리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이 광경을 지켜본 인부들은 일제히 말문이 막혔다.
그런 그들을 향해 칼리언트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식사는 끝났다. 언제까지 앉아 있을 거냐, 굼벵이들아!”
우르르르르.
그 말에 공포에 질린 그들은 성벽 보수를 하기 위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 * *
마왕 벨리앗이던 시절 칼리언트의 성정은 지극히 포악했다.
그리고 그 성정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유약하기 짝이 없는 백작가 공자에 불과했다.
‘같잖군.’
그 사실이 비위에 거슬렸지만, 칼리언트는 그걸 인정하고 과감하게 뜯어고치기로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삼 년이란 세월이 필요하다.
그 목적을 이루는 데 알테어는 너무 위험한 곳이었다.
위협 요소는 크게 두 가지.
첫째는 목숨이 위험한 전투가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것.
둘째는 칼리언트를 노리는 암살자들이 알테어 곳곳에 배치돼 있다는 것이다.
먹을 때도 입을 때도 그리고 전장에서 헤매고 있을 때조차 위협을 가해 오니…….
이런 약골인 몸으로는 살아남기 어려웠다.
“루드거를 만나는 게 마지막 기회겠군.”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변경백이자 칼리언트의 아버지, 루드거의 힘이 필요했다.
그가 알테어에 오기까지 열흘이 남았다.
그전에 반드시 협상 카드를 준비해야 했다.
책상에 앉아 한창 계획을 세우고 있는 칼리언트를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레인이 불안한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공자님. 아무리 그래도 백작님께선 공자님의 아버님이신데.”
“응? 아. 내 아버님이었지.”
순순히 호칭을 정정하는 주인을 보며, 레인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차라리 잘 된 것 같습니다. 이참에 백작님께 이야기 드려서 다시 가문에 돌아가는 게 오히려 득이 될…….”
“나보고 꼴불견이 되라는 거냐?”
“……그, 그게.”
순간 칼리언트가 목소리를 내리깔자, 레인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평소 힘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던 유약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지금의 칼리언트는 한없이 날카로운 기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꺼질 것만 같던 심홍색 눈동자도,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태워 버릴 듯이 활활 타올랐다.
쨍그랑!
그 눈빛에 깜짝 놀란 레인은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놓쳐 찻잔과 주전자를 깨뜨렸다.
“시, 실언을 했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겁을 집어먹은 레인의 눈가에는 눈물이 찔끔 흘렀다.
칼리언트는 아차 싶은 마음에 다급히 감정을 다스렸다.
차이트에게 패배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맹약이 그의 머릿속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그중에는 주체할 수 없는 성질을 다스리고 상대의 이야기를 경쳥하라는 말도 있었다.
맹약을 지키든 어기든 크게 부작용은 없지만.
절대자로서 그는 자신이 맺은 맹약을 준엄히 여기므로 지킬 생각이었다.
칼리언트는 가까스로 화를 다스리며 레인이 깨뜨린 찻잔과 주전자의 조각을 손으로 집어 들었다.
“다친 데는 없나?”
“고, 공자님?! 손 다치십니다. 제가 집겠습니다.”
달그락, 달그락.
그러나 칼리언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쟁반 위에 깨진 조각들을 올려놓았다.
그에 레인은 초조한 표정으로 다른 조각들을 집으며 칼리언트를 살폈다.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변해도 되는 건가.’
죽을 뻔하다 살아난 칼리언트는 말투부터 행동까지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평소에는 위협에 시달려 주변의 누구에게도 신경을 쓰지 못했다면, 지금은 무덤덤하게 주변을 살피고 이야기를 받아 주는 여유가 생겼다.
정리를 끝마친 후.
칼리언트와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게 된 레인은 눈을 끔뻑거렸다.
일개 시녀인 자신이 백작가의 공자님과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신다는 현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꿈을 꾸는 것 같은데.’
후룩.
차를 들이켜던 칼리언트는 지그시 미간을 좁히며 레인에게 물었다.
“……나를 어떻게 생각했지?”
“그, 그게…….”
다시 눈치가 보이기 시작한 레인이 말을 주저했다.
“있는 그대로 말해도 절대 문책하지 않겠다. 그저 최근에 사고를 겪고 난 뒤에 기억에 혼란이 생겨서 확인하는 것뿐이니 말이야.”
“아…… 네, 네. 솔직한 심정으로 가여운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가엽다?”
“죄, 죄송합니다!”
레인의 눈망울이 다시 촉촉이 젖어 들었다.
빠직!
슬슬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칼리언트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저도 모르게 짜증을 냈다.
“아무 짓도 안 한다고 했을 텐데. 그보다 왜 그리 생각했지?”
그 답답한 심정이 전달됐는지, 레인은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히 토로했다.
“네. 백작님께서는 험준한 영지를 다스리는 만큼, 엄격하고 강인하신 분입니다. 또 그렇기에 나라에서 공작과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고 있고요. 그 때문에 자식 교육도 철저하신데, 유일하게 백작님의 교육관을 쫓아가지 못한 게…….”
“바로 나라는 거군.”
“……죄송합니다. 결코 공자님을 평가하거나 그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칼리언트는 집무실에 있는 서류를 읽어 나가며 말했다.
“루크를 불러오도록.”
“아, 알겠습니다.”
레인은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지 허리를 꾸벅 숙이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 * *
해가 중천에 이를 즈음.
칼리언트의 호위 기사인 루크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루크는 얼마 전, 또 새로운 암살자의 습격으로 분질러진 오른팔에 붕대를 감은 채 칼리언트의 앞에 섰다.
생각도 못 했던 호출에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와서 자신의 충심을 칼리언트가 갸륵하게 생각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딱히 잘못한 것도 없었다.
‘평소처럼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건가.’
현재, 칼리언트의 앞에는 알테어에 관한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모습.
하지만 칼리언트의 표정이 평소와 남달랐다.
전에는 어쩔 수 없이 일을 처리한다는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무엇보다 심홍색의 눈은 평소보다 더욱 짙게 일렁이는 게, 어떤 계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열정이 생긴 것 같았다.
‘처음에는 또 자살 시도를 하셨다 해서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암살자들의 습격 이후.
칼리언트가 또 자살을 시도했다는 소식에 루크의 심정은 참담했다.
어린 나이에 이런 혹독한 환경에 처한 칼리언트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가, 슈타크 가문의 혈족으로 산다는 건 바로 이런 거다.
하지만 자신이 지키는 주인이 자살하려 했다는 건 슬프면서도 허무한 일이었다.
한참 서류를 훑어보던 칼리언트는 곧 고개를 들어 입을 뗐다.
“루크.”
“네, 네! 공자님.”
“최근 나는 어리석은 짓을 벌인 후, 기억에 큰 혼란이 생긴 상태다.”
“괘, 괜찮으십니까?”
소스라치게 놀라는 루크를 본 칼리언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건 어디까지나 사소한 일이다. 그보다 지금부터는 행동 방식을 바꿀 생각이야.”
“어떤 이야기신지…….”
“시련이 주어지면, 그것을 피하는 게 아니라 맞서는 거지.”
꿀꺽!
괜히 반란 같은 허튼수작을 부리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한 루크가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봤으나 칼리언트는 무덤덤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힘을 키울 시간이 필요해.”
“어느 정도나 필요하십니까?”
“3년.”
“……불가능할 겁니다.”
딱한 사정이지만 가문에서는 이미 칼리언트를 배제하기 위해 이곳, 알테어로 보냈다.
3년이나 여유를 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하지. 하지만 성과가 있다고 하면 어떨까?”
“성과라니요?”
“열흘 후에 아버지가 오신다. 그전에 나는 성과를 내서 협상을 하려고 한다.”
“협상 카드로 제시할 만한 성과를 지금에 와서 만들 수 있습니까?”
당황하며 묻는 루크에게 칼리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어떤 겁니까?”
스윽.
칼리언트는 지도를 루크가 보기 편하게 돌린 뒤, 질문을 꺼냈다.
“최근에 영지를 습격한 몬스터는 뭐지?”
“……오크 무리입니다.”
오크의 번식 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죽이고 또 죽여도 해가 지나면 죽인 것 이상의 수만큼 불어날 정도다.
더군다나 지금은 번식기를 거친 오크들이 불어난 새끼들을 위해, 먹이를 쫓는 사냥의 시기.
즉, 전력이 급격히 증대되어 있는 때다.
게다가 곧 다가올 험난한 겨울을 버티기 위해서 녀석들은 먹잇감을 갈구하며 더욱 흉포하게 움직인다.
하지만 알테어에는 오크를 월등히 뛰어넘는 포식자들이 넘쳐난다.
그러다 보니 녀석들은 결국 만만한 사냥감인 인간을 찾아 마을을 습격하는 것이다.
알테어의 성벽이 붕괴된 것도 오크 무리의 습격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금 사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틈을 노려 타국이 침략할 수도 있었다.
“설마?!”
답변을 내뱉은 직후.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루크는 눈을 부릅뜨며 지도를 살폈다.
칼리언트가 표시한 곳은 모두 오크가 주둔하고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녀석들을 쳐서 성과를 낼 거다.”
쿠쿵.
급작스러운 선언에 심장이 덜컹 가라앉을 것만 같아, 루크는 책상을 탕 치며 만류했다.
“말도 안 됩니다. 수성을 하고 있어도 모자랄 판국에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일 생각이십니까? 그럴 바에야…….”
무슨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자살을 하려면 혼자 해라. 이 말인가?”
“그, 그게 아닙니다.”
대담한 칼리언트의 발언에 루크는 신음을 흘렸다.
칼리언트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자살할 생각이 없다. 대신 욕망에 솔직해지기로 했지.”
“욕망에 솔직해지다뇨?”
“내가 갈 길은 스스로 개척하기로……. 또한 거기에 방해가 되는 녀석들은 그 싹조차 도려내기로 말이야.”
“그, 그 말은…….”
가주 자리를 노리는 것이냐고 말하려는 찰나.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야. 단지, 한 남자와의 약속을 지키려는 거지.”
“……?”
그 말을 이해할 턱이 없던 루크는 의아해하며 칼리언트의 말을 곱씹었지만.
사실 칼리언트의 속내는 무척이나 솔직하며 간단했다.
살육만을 일삼던 칼리언트에게 갱생을 한다는 것은 남에게 도움을 준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몬스터는 인간들에게는 물론, 나아가 환경에까지 큰 피해를 준다.
이런 마물을 퇴치하는 것은 분명 갱생하는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아아, 갱생이란 의외로 쉬운 걸지도 모르겠군.’
차이트가 만약 이 광경을 봤으면, ‘아니야! 이 바보야!’라고 소리쳤겠지만.
칼리언트가 신경 쓸 리는 만무했다.
이내…….
계획을 구축한 칼리언트는 혀로 윗입술을 핥으며 뜬금없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아, 파티가 시작되는 건가?”
“파, 파티라니요?”
“죽고 죽이는 혈향이 난무하는 파티 말이야. 살아 있다는 것을 만끽하는 최고의 순간이잖아. 기대되지 않나?”
오싹!
상상을 초월하는 말에 루크의 안색은 무척이나 새파래졌고.
‘……이게 아닌가.’
칼리언트는 뒤늦게 이게 아닌가 싶어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갱생은 어렵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