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마왕은 갱생이 어렵다-2화 (2/197)

#제02화

사락.

일기를 펼치자 첫 문장이 칼리언트의 눈에 들어왔다.

「이 일기는 가문에서 사실상 버려지는 것이 확정된 이후 쓰는, 나 칼리언트 슈타크의 유서이자 마지막 발자취가 될 것이다.」

「그레고리력 816년 4월 5일

나의 아버지 루드거 슈타크는 타국의 국경과 인접한 슈타크 영지를 통솔하는 변경백이자 백작이다.

난세의 강자로 일컬어지는 두 국가, 아벤트로트와 샤텐의 국력은 나의 조국, 루콘을 훨씬 뛰어넘는다.

또한 아르메 평야에 있는 흉포한 몬스터들이 예상치 못한 때에 슈타크 영지로 쳐들어올 수도 있다.

만약 이곳을 다스리는 게 슈타크 가문이 아니었다면, 이미 이곳은 정복당해 식민지가 되었거나 혹은 몬스터들의 먹이 사냥터가 되었을 거라는 게 영지민과 주변 영주들의 평가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것은 무척이나 옳은 말이었다.

따라서 이 지역을 지키는 의무를 지닌 슈타크 가문의 사람들은 강해야 한다.

……그래, 강해야 한다.

하지만 측실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난 나에게는 무력도 권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도 수모를 겪었다.

오늘은 셋째 형님, 프란츠와 식사하던 도중 와인을 뒤집어썼다.

이 정도 수모는 늘 겪어 왔으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참담한 심정이 든 것은 형님에게 내가 최악이라 불리는 흉지, 알테어로 파견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알테어는 몬스터들의 폭주로 정신이 없다는 흉지로, 파견된 사령관은 정신적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고 만다는 땅이다.

나는 그곳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잠이 오지 않는다.

아직까지도 심장의 고동은 빨라지기만 할 뿐, 안정되지 않는다.

난 이제, 이제 어떻게 하지.

어머니 앞에서는 애써 괜찮다고 했지만…… 오늘만큼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레고리력 816년 5월 6일

최전선, 알테어에 온 지 어언 보름이 다 되어 간다.

이곳은 무척이나 시끄럽다. 밤이면 밤마다 들려오는 다이어 울프들의 울음소리는 신경을 옥죄었다.

기사단의 병력은 용병처럼 거칠어서 통솔이 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처음 이곳에 파견된 날, 주변의 시종들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지켜봤다.

아마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도 알테어와 관련된 업무를 익히느라 여념이 없던 나는 저녁이 되어서야 첫 끼를 먹었다.

메뉴는 어린 암소의 등심살로 갓 구운 스테이크와 포도주, 빵과 수프였다.

그러나 속이 느글느글해서 식욕이 전혀 들지 않았다.

최전선을 지킨다는 중책을 맡은 만큼, 잘 먹어야만 한다.

그러나 애초에 이렇게 많이 못 먹는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먹기 위해 우선 수프를 입에 넣는 순간.

머리가 아찔해졌다.

입 안에 이상한 향이 감도는가 싶더니 혀가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재빨리 그것을 뱉고서 물로 입을 헹군 나는 미리 갖추고 있던 은 식기를 서랍에서 꺼내 수프에 넣어 보았다.

아니었으면 좋았겠지만, 참담하게도 은식기는 거뭇하게 변해 있었다.

성분은 분석해 봐야겠지만, 그것은 분명 독이 들어간 수프였다.

나는 이날 처음으로 날 죽이겠다는 살의를 확인했다.」

「그레고리력 816년 11월 17일

-한계다, 한계. 이 땅은 정말 미친 땅이다.

못해도 보름에 한 번은 수십 명의 사람이 죽어 나갔다.

묻을 땅조차 없어 길거리 곳곳에 방치된 시체에서는 썩은 내가 진동했고.

그로 인해 역병이 퍼져 나갈 것 같아서 시체들을 불태워야 했다.」

「그레고리력 816년 12월 22일

극한의 추위가 엄습했다. 뼈가 시리는 고통이 스며들었다.

오늘은 성곽을 중심으로 수색하던 도중에 시체 사이에 숨어 있던 암살자가 기습을 가해 왔다.

호위하고 있던 루크가 가까스로 암살자를 막아냈지만, 그로 인해 그가 부상을 입어 몇 달 동안은 요양이 필요했다.

……지겹다. 잠이 오지 않는다. 눈마저 침침하고 그저 모든 게 희뿌옇게 보였다.

만약 잠들 수 있다면, 잠에 빠져 영영 일어나고 싶지 않다.」

「그레고리력 817년, 4월 2일

거듭 실패만 한 나는 결국 슈타크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열다섯 살에 겪기에는 너무나 험난한 시련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누구도 이해해 주지 않는다.

누군가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무도 없다. 그렇기에 나는 생을 마감하려고 한다.

가능하다면 악마와 계약해서라도 이 부조리한 속박과 굴레를 부수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나의 몸, 나의 영혼 모두 불살라지더라도 상관없다.」

사락.

일기의 내용을 다 읽은 벨리앗, 아니 칼리언트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 역시 마계의 모든 주민을 몰살할 때.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이게 인간과 마족의 차이인가? 왜 죽일 생각을 하지 않고 죽을 생각을 하는 거지?”

공감되지는 않았으나, 이해라도 하기 위해 연신 생각을 곱씹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칼리언트는 상의를 벗고 자신의 몸을 살폈다.

제대로 먹지 못해 앙상한 체격과 몸 곳곳에 새겨진 흉터들.

“……약하군.”

단 한 번도 약자가 돼 본 적이 없는 칼리언트는 복잡한 심경으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몸으로는 마력을 끌어올리지 못한다.

검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한다.

마음마저 나약하다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놀랍게도 원래 몸의 주인은 이런 상태로 무려 1년이나 버텨 온 것이다.

“정신력이 약한 놈은 아니었나 보군.”

칼리언트는 평가의 일부를 수정한 뒤, 생각을 곱씹었다.

제아무리 마계 전체를 몰살시킨 대마왕인 그라 하더라도 빙의 전의 칼리언트가 겪고 있는 상황을 단기간에 해결하는 건 불가능했다.

“……시간이 필요해.”

최소 3년.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나약한 몸을 바꾸려면,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할 게 무척이나 많군.”

자신의 상황을 자각한 칼리언트는 깃펜을 들어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에 글귀를 새겨 넣었다.

「계약을 수락한다. 너의 적을 물리치고 너의 넋을 위로해 주마. 그리고 후회하거라. 네놈이 놓아 버린 빛나는 미래를 쟁취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칼리언트는 마침표를 찍어 넣기 무섭게 촛불에다가 일기장을 태웠다.

화륵.

심홍색의 동공으로 불타고 있는 일기장을 유유히 지켜보고 있을 때.

끼익.

젊은 시녀가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고, 공자님! 누, 눈을…….”

그녀의 반응을 살피던 칼리언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오늘은 며칠이지?”

“4, 4월 14일이에요.”

‘자살 시도를 했던 인간이 열흘 만에 눈을 떴으니, 놀랄 만도 하겠군.’

상황을 파악한 칼리언트는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뒤늦게 시녀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고, 공자님! 아무리 괴롭다고 해도 방에 불을 질러 자살을 시도하시는 건…….”

“……뭐야? 자살하려는 걸로 보였나?”

방에 불이 났다고 생각해 놀란 줄 알았건만, 그게 아니라 불을 지르고 자살하려는 걸로 오해한 듯했다.

칼리언트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시녀에게 말했다.

“놀랄 것 없다. 그냥 없애고 싶은 물건이 있어서 그런 것뿐이니…….”

“어, 없애고 싶으신 거라니요?”

“이렇게 멀쩡히 살아 숨 쉬고 있으니, 유서는 필요 없어졌거든.”

잠시 후.

일기장이 완전히 숯덩이가 되었다.

칼리언트의 명령에 대야에 물을 떠서 담아 온 시녀가 불안한 눈빛으로 칼리언트를 지켜보았다.

치익.

칼리언트는 다 타고서 가죽만 남은 일기장을 물이 담긴 대야 안으로 집어 던졌다.

“후우.”

이번에는 무난하게 넘어갔구나.

칼리언트는 안도의 한숨을 쉬는 시녀를 지그시 쳐다보며 말했다.

“이름이 뭐지?”

“레, 레인입니다.”

깜짝 놀란 시녀는 휘둥그레 눈을 떴다.

‘왜 그러시지?’

그녀가 놀란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착각이기는 했으나 다시 자살로 추정되는 행동을 보였다는 점.

두 번째는 가장 가까이서 칼리언트를 모시는 자신의 이름을 주인이 잊어버렸다는 점.

마지막 세 번째는 칼리언트의 분위기가 갑작스럽게 변했다는 점이다.

레인의 눈앞에는 평소 유약했던 칼리언트 대신, 냉정하고 침착한 얼굴로 고심을 하는 칼리언트가 있었다.

스윽.

칼리언트가 레인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레인.”

“네, 네!”

“내가 슈타크 영지에서 제일 믿었던 이가 누구지?”

“도련님의 호위기사로 있던 루크라고 생각됩니다.”

“흐음, 그래?”

생각을 마친 칼리언트는 곧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알테어의 상황은 지금 어떻지?”

“며칠 전에 몬스터가 또 난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성곽 일부가 무너져서 지금은 복구 작업 중에 있어요. 그리고 자꾸 재난이 연달아 터지는 바람에 결국 백작님께서 방문하시기로 했습니다.”

“백작이?”

“네.”

“그날이 언제지?”

“차례로 순방 중이시라 열흘 정도 뒤에 도착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시녀치고 제법 쓸 만한 정보를 가르쳐 주는군.’

잠시 눈을 감고서 생각을 한 칼리언트는 곧 입을 뗐다.

“……레인.”

“네.”

“배가 고프구나.”

“일단 요깃거리를 가져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네?”

“복원 중인 성터로 가서 식사를 하겠다.”

*  *  *

알테어의 성곽.

그곳은 번번이 침범하는 몬스터들 때문에 성한 날이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근래에는 외벽이 크게 허물어지는 바람에 시급히 복구가 필요한 터였다.

카앙! 카앙! 카앙!

하지만 복구는 지지부진.

인력을 아무리 동원해도 허물어진 벽은 메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늘도 한창 성벽을 복구하던 도중이었다.

웅성웅성.

“웬일이야. 저 약골이…….”

“이번에는 성벽에서 떨어져 죽는 걸 시도하려는 건가?”

인부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 곳을 쳐다봤다.

그곳에서는 알테어에 파견 온 백작가의 막내 공자 칼리언트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인부들은 물론, 병사들도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이곳은 최악의 흉지로 자신들이 매 순간 목숨을 걸고 이곳을 지키고 있지만, 책임자로 온 이들은 번번이 자살을 하거나 눈먼 칼에 베이거나 몬스터의 이빨에 물려 죽기 일쑤였다.

그러던 중 슈타크 백작의 직계가 책임자로 왔길래 뭔가 달라질 줄 알았건만.

그들의 일상은 변하지 않았다.

저벅.

“하던 일을 멈추고 이곳에 모여라.”

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칼리언트의 분위기가 달랐다.

연약하던 평소와는 달리 무척이나 냉정하고 침착해 보였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을 때.

“식사 시간이다.”

간단한 말과 함께 거대한 수레에 모두가 양껏 먹을 수 있는 양의 음식들이 실려 왔다.

잠시 후.

달그락, 달그락.

인부들은 정신없이 빵과 수프를 먹으면서도 한껏 눈치를 살폈다.

그곳에서는 칼리언트가 인부들과 마찬가지로 빵과 수프를 먹고 있었는데, 연약한 체구와 달리 그는 족히 3인분은 되는 양을 입에 구겨 넣으며 정황을 살피고 있었다.

그런 칼리언트의 앞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성벽을 건설하는 예산을 집행하는 행정관이고, 다른 한 명은 성벽 공사의 책임자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칼리언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칼리언트가 이곳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모두가 짐작할 수 있었다.

칼리언트는 나른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이게 최선이었나?”

“최선이고말고요. 예산도 부족할뿐더러, 매일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어떻게 합니까?”

행정관은 한껏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지금의 처지를 비판했다.

바로 그 순간.

칼리언트의 심홍색 눈이 무척이나 싸늘해졌다.

오싹!

차갑고 오만한 그 시선에 행정관은 크게 놀랐다.

‘뭐, 뭐야? 이 자식 갑자기 눈빛이 왜 이래? 돌았나?’

“방법을 바꿔야겠어. 보수는 이렇게 진행해.”

칼리언트는 깃펜을 들어 도면에 적혀 있던 성벽 재료를 하나씩 삭제해 나갔다.

그러자 누가 봐도 부실한 성벽이 구현되었고, 행정관과 보수 책임자는 기겁하며 소리쳤다.

“그, 그런!”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칼리언트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게 바로 네놈들 아닌가?”

“그게 무슨 소리입니…….”

당황한 행정관이 반박하려는 순간.

“야.”

귓가에 스쳐 지나가는 칼리언트의 음성에 전신에 소름이 쭈뼛쭈뼛 돋았다.

그 직후.

콰직!

칼리언트의 주먹이 행정관의 얼굴에 꽂혔다.

“크아아아아악!”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은 행정관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고통을 호소했지만.

스릉.

칼리언트는 자비를 베풀긴커녕 검을 뽑아 그의 목에 가까이 갖다 대며 더욱 위협을 가해 왔다.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모두가 안색이 새파래진 순간, 칼리언트는 한층 날카로워진 어조로 말했다.

“한 번만 더 개소리를 지껄이면 혓바닥을 도려내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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