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341화 (307/345)

341화

26장 3화 혁명의 불길(1)

순조가, 이제는 성조라는 묘호로 불릴 대한제국의 태상황은 영면에 들었다. 파주에 있는 인조의 장릉(長陵) 근처에 어질 인(仁)을 붙여 그의 묘를 만들었다.

그의 유언에 맞게 정조의 왕릉과 흡사한 형식으로 능을 만들고 훗날 황후가 세상을 떠나면 같이 합장할 예정이었다.

“아바마마. 소자가 언제까지 통치에 전념할지는 모르나 언제나 아바마마의 훌륭한 뜻을 생각하며 나라를 다스리겠사옵나이다.”

상복을 입은 효명제와 황실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절을 올렸다. 그동안 쌓아올린 수많은 하얀색 꽃들에서 꽃잎을 따로 떼어 묘소 주변에 흩뿌렸다.

그 뒤에는 능 밖에서 도열하고 있는 동티단원들이, 조만간 러시아로 돌아갈 이주민들이 있었다. 이들은 7개월에 걸친 장례가 끝나자 순조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다.

효명제는 더 이상 대한의 백성이 아니게 된 사람들을 스쳐 지나갔다. 이들은 지난 세월 동안 대한제국을 위해 봉사한 것에 대한 품삯을 챙겨 돌아갈 사람들이었다.

“황제폐하께 여쭈어볼 것이 있습니다. 감히 선제께 인사를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마음대로 하시오. 다만 여럿이 몰리면 어수선해질 수 있으니 다섯 명만 예를 올리도록.”

허가를 받은 드미트리를 시작으로 다섯 명의 대표가 묘소에서 가급적 멀리 떨어진 채 절을 올리고 마지막 이야기를 전하였다.

“새 아버지께 말씀을 올립니다. 저희와 인연을 맺었던 장소는 어느새 곡창지가 되었습니다. 한 번 농토가 만들어진 덕분에 계속 농토가 늘어나고 있지요.”

“더군다나 이 나라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쌀마저도 일부 재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듣자 하니 일본에서 건너온 종자를 엄선하여 각고의 노력을 하니 약간의 쌀이 나오더군요.”

“물론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밀 수확을 일백 석이나 할 때 쌀은 반석조차 수확하지 못하지요. 그래도 아버지께서는 대한 사람이고 대한 사람은 쌀을 좋아하기 마련이지요.”

드미트리와 동티단원들은, 이제는 러시아 혁명군이라 부를 사람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많은 고난이 있었고 순조 덕분에 이를 넘길 수 있었다.

순조는 필요한 물자를 모두 공급해주었다. 석유난로는 물론이며 농기구는 수리하기도 전에 새 물건이 배급되었다. 여기에 글과 학문을 가르치며 사람들을 교화시키려 하였다.

이미 성인 가운데 러시아어 식자(識字)가 사 할에 달하며 개중 일부는 한자에도 능통한 수준이었다. 여기에 전쟁 경험마저도 축적하였다.

모든 것은 순조의 절대적인 후원이 이룩한 결과였다. 드미트리는 자신의 가슴팍을 쓰다듬으며 순조에게 말하였다.

“저희는 이제 본국으로 돌아갈 작정입니다. 돌아가서 우리를 내친 옛 아버지, 차르를 권좌에서 끌어내릴 생각도 품었지만 생각하여 보니 그럴 필요가 없더군요.”

드미트리가 말을 마치자 나머지 동티단원들이 계획을 이야기하였다.

“아버지께서는 황제셨습니다. 그러하니 차마 다른 나라의 황족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하니 귀족들을 끌어내리고 저희가 차르를 올바른 아버지로 만들 예정입니다.”

사실상 차르의 권위조차 남기지 않은 채 모조리 쓸어버리겠다는 선언이었다. 드미트리와 동티단원들은 깊은 인사를 올리고는 말하였다.

“겨울을 틈타 저희는 나아갈 것입니다. 시베리아 철도 노선 부설 계획이 실현되어 측량도 실시되고 철도 자재가 배급되고 있지요. 갈 길도 편하다 못해 순탄할 지경입니다.”

“몇몇 사람들은 여기에 발을 붙이겠다고 하였는데 그런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지요.”

“저희는 아버지의 원대한 뜻을 러시아에 퍼트릴 것입니다. 이미 저희의 뜻을 받아들일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순조에게, 이제는 성조로 불릴 인물에게 새로운 아들들이 절을 올렸다. 쌍성자로 돌아온 드미트리와 러시아 혁명군 사람들은 앞으로의 계획을 확인하였다.

효명제는 한양 회담에서 영국과 밀약을 맺은 뒤 러시아 제국에 불씨를 전해두었다. 그 불씨를 더욱 크게 키우는 것이 혁명군이 꼭 해야 할 계획 중 하나였다.

“러시아에 보내는 물건들은 거의 다 보낸 것 같은데. 얼마나 남았소?”

드미트리의 질문에 항구 관리는 눈을 치켜뜨고 배에 올라가는 거대한 공장 기기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답하였다.

“아…… 러시아에 새로 세워질 탄약 공장 말입니까? 지난 일 년 동안 쉴 새 없이 기계를 보내서 이제 물량이 얼마 남지도 않았지요.”

“그렇소? 아주 기쁜 일이구려.”

“기쁘시겠군요. 하긴 러시아 제국에서 일하러 오신 분들의 피와 땀이 아닙니까? 지금쯤이면 러시아 공장에서 기초 교육이 끝나고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갔을 겁니다.”

그 말을 들은 드미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접한 정보에 의하면 러시아 제국은 무리한 공업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국가의 모든 경제적 지표가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그 선두에 선 사람은 카를 마르크스였다. 그 위대한 경제학자의 발언 하나하나가 러시아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이미 소작농 체제가 엉망이 되어가며 지방 귀족들이 줄줄이 도산하였다. 러시아는 곡식을 대량으로 생산하던 국가에서 곡식 수입 국가로 전락할 기세였다.

이로 인해 러시아 제국은 앞뒤를 안 가리고 대한제국에게 강요에 가까운 압박을 하였다. 소작농의 유배가 아닌 파견이며 이들에 대한 인건비를 지불해 달라는 요청을 보낸 것이다.

효명제는 이 강요를 몇 년 동안 무시하고 있다가 한양 회담 직후 수락 요청을 보냈다. 인건비를 대신해 군수품 생산용 공장을 설립해 주겠다는 기술 협력 제안이었다.

“그렇지, 다만 공장을 설립해도 군수품 공장을 설립할 줄이야.”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러시아에 왜 소총 관련 기기를 보내시는지…….”

이 결정을 러시아는 나쁘지 않게 생각하였다.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민중봉기와 이로 인해 독립 의지를 드러내는 지방 세력을 신무기를 통해 억누를 기회라 판단한 것이다.

반면 청나라라는 반면교사를 알고 있는 효명제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선물이라 생각하였다.

러시아 제국의 부패를 생각하면 지방 귀족부터 중앙 귀족까지 모두가 착취를 일삼으며 공장을 도구로 삼을 것이다.

이 안배를 떠올린 드미트리는 귀찮은 듯이 말하였다.

“높으신 분의 뜻을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이 알 필요는 없소.”

드미트리는 크레인을 통해 배에 올라가는 탄환 생산 기계를 보면서 슬쩍 미소를 지었다.

무기를 생산하되 그 무기와 함께 고통을 생산할 것이 분명하다. 공업화로 인해 소작농이 아닌 백성들, 평범하게 돈을 벌어먹던 사람들도 자신들을 지지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관리는 드미트리의 말을 듣고는 짜증을 섞어가며 답하였다.

“그런 생각이 잘못된 것이지요. 명을 받으면 그 명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잘 이행해서 더 높은 성과를 거둘까. 이 생각이 중요한 겁니다.”

“공장에서 물건을 제대로 생산하면 제대로 이행한 것 아니오?”

“그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만. 아무튼 저기 사람들이 또 가는군요.”

공장 기술자들이 기계와 함께 배에 탑승하였다. 이들은 머나먼 러시아에서 공장 기기 사용법을 알리고 생산 과정을 검수할 사람들이었다.

“이역만리에서 일 년 동안 일하면서 성과를 많이 거두기를 기원할 뿐이지요.”

“애석한 일이지만 내가 러시아 출신이 아니오. 아마 대부분 속이 터져 죽을 거요.”

항구 관리는 더 이상 이야기하기도 싫다는 듯이 고개를 홱 하고 돌렸고 드미트리는 헛된 기대를 품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러시아에서 벌어질 일을 기대하였다.

“그럼 슬슬 고향으로 돌아가 볼까?”

외부에는 러시아 횡단열차 노선 인근의 도적 토벌로 알려진 동티단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1863년 1월부터 출발한 이들은 머나먼 길을 거쳐 본국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각자 신형 갑식 소총, 구형 머스킷 그리고 군수품을 지참한 이들이 진군하였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이들을 맞이할 새로운 물건들을 한창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 * *

러시아 제국과 대한제국의 공식적인 기술 협력은 순조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862년 2월에 시작되었다. 최초의 후미장전식 소총 생산 공장에 알렉산드르 2세의 축사가 울렸다.

“새로운 러시아의 창칼을 벼려낼 공장이다! 대한의 소총을 개량하여 더 우수하고 품질이 좋은 소총을 양산할 것을 명한다!”

알렉산드르 2세의 준공식이 거행되고 귀족들이 각 공장의 권한을 구매해 운영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술 전수를 담당한 대한제국의 선임 기술자들은 난관에 봉착하였다.

“우리의 제도를 따르겠다면서 왜 제도를 무시하십니까! 출근 시간은 교대근무에…….”

“교대 근무는 복잡하고 사람들이 오가는데 귀찮아 못 하겠군.”

처음에는 유럽에 기술을 전파하는 위업을 달성하려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은 유럽 국가도 아니고 전 세계 기준으로 정상적인 국가조차 아니었다.

부패한 귀족들 입장에서 공장은 더욱 많은 착취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였다. 당연히 자신들의 편의와 더 많은 수익을 위해 대한제국이 정립한 제도를 멋대로 뒤틀어 버렸다.

“일을 더 많이 열심히 시키면 더 많은 수익을 거두지 않겠는가?”

“우리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아닙니다.”

“그건 대한의 방식이지. 우리는 러시아 방식으로 공장을 굴릴 거요.”

당장 출근 시간부터 수정되었다. 새벽에 출근하여 점심에 교대하는 1조, 점심에 출근하여 저녁에 교대하는 2조 제도가 아닌 14시간 출근이 기본이 되었다.

공장 근로자들은 새벽 5시에 공장에 들어와 저녁 7시에 퇴근하였다. 숙소는 목조로 만든 집단 기숙사였는데 열 평에 불과한 방에 사람 열 명이 거주할 수준이었다.

아무런 제도도 문제도 모른 채 산업혁명을 무턱대고 실시한 영국조차도 이런 짓을 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노동 효율이 엉망이 되고 피로에 찌든 사람들은 사고를 냈다.

-끄아아아아아악!

오늘도 한 사람이 기계를 다루다 실수를 저질렀다. 팔이 말려 들어가 뼈가 부스러진 사람을 실어낸 대한제국 기술자는 한숨을 쉬면서 다른 인부들을 돌아보았다.

“교육을 하면 뭘 해, 교육 목적의 시범 가동에도 이런 꼴이 나는데.”

프레스기계에 부품 구멍을 뚫는 대신 자기 손등에 구멍을 뚫는 근로자 정도면 양호한 편이었다. 나날이 늘어가는 부상자로 인해 업무 효율은 시궁창을 향해 달려 나갔다.

여기에 기본 방침도 엉망진창이었다. 분명 휴식시간에는 적당한 먹거리를 지급해 노동자의 기력을 북돋아 줘야 하는데 그 방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기술자는 인부들을 가르치느라 부르튼 목을 달래려 주전자에 담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차는 쉰내가 진동하고 홍차 잎이 발끝을 슬쩍 담근 것 같은 역겨운 맛의 덩어리였다.

“푸악! 웨에엑! 이게 홍차냐 똥물이냐!”

대한제국의 공장은 형편이 좋으면 식혜나 수정과 혹은 녹차를, 형편이 평범하면 우엉이나 모과차 같은 물건을 지급한다. 사정이 있더라도 최소한 숭늉이라도 지급하려 노력한다.

여기에 간식 또한 갓 찧어낸 떡이나 제철 과일을 지급하며 노동 의욕과 효율을 고취시킨다. 그러나 러시아의 공장은 다른 의지를 고취시키는 음식을 지급했다.

곰팡이가 피고 바구미가 꿈틀거리는 말라비틀어진 비스킷이 간식으로 지급되었다. 인부들은 간식에 손조차 대지 않았고 기술자는 이 모습을 보고 즉각 항의를 하였다.

“어디서 걸레 우려낸 물이랑 벌레 합숙소를 내와! 담당자 당장 나와!”

식당을 담당한 직원들은 기술자의 항의를 귓전으로 넘겨들었다. 그가 눈을 한참 동안 부라리자 뒤에서 말쑥한 차림새의 귀족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차의 정의는 식물의 잎을 물에 우려낸 것이오. 여기에 설탕을 넣으면 훌륭한 차지.”

기술자는 그 말을 듣고 멍하니 있다 그가 말한 ‘차’의 생산과정을 확인했다. 주전자에 구정물을 머금어 진흙처럼 변한 설탕 덩어리를 정체불명의 이파리와 함께 집어넣었다.

그는 공장 직원을 주먹으로 한 대 후려치려다가 화를 억누르고 뒤에 서 있는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풍이 느껴지는 데다 어딘가 익숙해 보였다.

가만 보니 공장을 관리하겠다며 호언장담을 하던 귀족 나부랭이와 외모가 닮아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술자는 머뭇거리며 질문을 하였다.

“혹여나 이 공장을 담당하시는 분의 자제분 되시오?”

“그렇소이다. 넷째아들이지.”

이 공장을 담당한 귀족은 친인척을 고용해 ‘가족’ 같은 공장을 만들어내었다. 말 그대로 귀족 가문 전체가 공장과 노동자를 생선뼈를 바르듯 철저히 착취하는 가‘족’ 같은 공장이다.

침묵과 함께 주전자 안에서 인류의 죄악이자 공산주의의 씨앗이 부글거리며 끓어올랐다.

기술자는 이를 부득부득 갈다가 하소연을 하듯이 말하였다.

“지금 저딴 물건을 차라고 내주는 거요? 차라리 숭늉이라도 끓여주시구려!”

“차를 내주고 있는데 뭔 개소리를 하고 자빠져 있는지 모르겠군. 규정은 지키지 않았소?”

대한제국의 기술자들은 쇠귀의 경을 읽느니 조금이라도 건설적인 일을 하였다. 대충 기입된 장부에는 분명 멀쩡한 찻잎이 들어오고 멀쩡한 설탕이 들어온 내용이 기입되었다.

그 멀쩡한 물건들은 죄다 보존기간조차 모를 찻잎 덩어리와 썩은 설탕으로 변질되었다. 호밀빵은 해군 창고 어디에선가 가져온 비스킷이 되었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공장을 운영하고 한 달이 지났을까. 근로자들이 퇴근하는 사이 인부들이 공장에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있었는데 창문과 환기구를 멋대로 뜯어내고 있었다.

“씨부럴. 아주 가지가지 해 처먹는구먼!”

다음 날, 창문과 환기구가 판자로 가로막혀 버려서 분진과 매연이 들끓는 너구리 굴 신세가 되어버렸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공장 기구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증기기관과 연결된 발전기가 사라지고 전구 대신 매캐한 악취를 뿜어내는 등잔이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당연히 공장 내부의 환경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조도(照度)를 준수하지 못하여 노동자들은 사물을 분간하지 못했다. 결국 사고율이 더욱 폭증했고 매연에 시달려 혼절하는 사람들도 속출하였다.

며칠이 지나자 비슷한 상황을 경험한 사람들이 한 몸으로 뭉쳤다.

“본국에 연락을 해도 우리는 기술만 가르치는 입장인데…….”

“애초에 우리가 의견을 제시하면 듣지도 않고 계약서만 들먹이지 않나.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계약 위반이라고 압박을 가하던데.”

“그래도 할 일을 해봐야지.”

이들은 청나라가 파멸한 과정을 근처에서 지켜본 덕분에 새로운 홍수전의 등장만큼은 필사적으로 막으려 하였다.

일단 각 직원들과 면담을 가진 다음 불순분자를 색출하고 그 공로로 공장 상황을 개선할 목적도 품었다.

이윽고 증기기관이 계획한 대로 굉음을 내며 오작동을 일으켰다.

“그만! 그만! 증기기관 오작동! 한 시간 정도 사람을 치우고 점검을 해야 하오!”

증기기관이 일시 중단되고 공장 직원들이 썰물처럼 공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미리 말을 맞춰둔 기술자들이 증기기관을 다루는 사이 다른 사람들이 질문을 하였다.

“사투리를 쓰는 것 같은데 어디서 왔소?”

“저는 스몰렌스크에서 왔는뎁쇼? 그나저나 여기는 어딥니까?”

“여기가 어디냐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아니오.”

“네? 제가 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와 있습니까? 저는 일거리가 있다고 해서 왔는뎁쇼?”

질문과 답변이 오가자 기술자들은 더욱 참혹한 현실을 알아차렸다.

공장에 불순분자는 없었다. 이 자리에는 불순한 방법으로 취직한 사람들만 있다.

러시아 제국은 청나라의 멸망 과정을 보고 배운 것이 있었다. 객가처럼 사람들을 움직이고 공장에 마음대로 취직시키면 반란의 씨앗이 될 것이라는 뒤틀린 믿음이었다.

그 대신 지방 귀족들에게 적당한 사람을 엄선해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은 파산 위기에 처한 귀족들의 작당으로 사실상 납치나 다름없는 행위로 바뀌었다.

반강제로 계약서를 작성해 납치당한 지방의 젊은이들은 공장에서 쉴 새 없이 착취를 당하는 부품 신세가 된 것이다.

이 몰골을 본국에 보고해도 별다른 답변을 내오지 않았다. 결국 대한제국에서 상상하지도 못할 참극에 스트레스를 받은 기술자들은 술로 이를 씻어내며 말하였다.

“이걸 서쪽 청나라라고 불러야 하나 아니면 청나라가 동쪽 러시아라고 불려야 하나.”

“그게 공장이야? 좋을 양(良)이 빠졌으니 ‘ㅇ’ 두 개가 사라져서 고자가 되었지.”

“우리가 고자를 가르치다니.”

술잔이 오가고 저절로 푸념이 섞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술에 거하게 취한 사람들은 물을 마셔 속을 달래면서 한심하다는 듯이 말하였다.

“그나마 청나라보다는 나아. 거기는 공장도 없고 기계도 없고 홍수전 쪽 놈들이 제대로 공장을 운영했잖아. 여기는 그나마 돌아가기는 한다고.”

“그래도 생산품 관리는 똑바로 한다고. 문제는 후안무치한 귀족들이 자기 이득에 미쳐서 사람을 쥐어짜는 거 아닌가. 물건이 나오면 뭘 해.”

“뭐 그래도 희망이 있기는 하더라고. 공장 열 개가 있으면 한 개 정도는 제대로 돌아가던데.”

물론 이런 과정에서도 양심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나마 대한제국의 방식에 최대한 맞추어 노동자들을 인도적으로 관리했다.

극히 일부에 불과했지만. 독한 보드카가 술잔에 따라지고 모두가 잔을 마주쳤다. 이들은 술안주에 손을 안 대고 현실을 술안주 삼아 술을 들이켜고 말하였다.

“사람을 극도로 쥐어짜고 오기도 전에 쥐어짜고 또 쥐어짜면 죽기 마련인데.”

“월급이 제대로 나오기나 할까 몰라. 저 사람들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르겠는데.”

저절로 원망과 분노가 섞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외국에 출장 나온 품삯을 충분히 쳐줄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다시 잔에 술을 따르며 말하였다.

“앞으로 일 년만 버텨서 준 숙련공을 만들어내면 우리 할 일은 끝이야.”

“그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구가 되고 죽어 나갈지 알 길이 없어서 문제지.”

대한제국 기술자들의 예측대로 사람들은 쉴 새 없이 교체되었다. 공장에서 망가진 사람은 길거리에 버려졌고 그 자리에 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1년이 지나 대한제국 기술자들이 돌아갈 무렵이 되자 전체 근로자의 15% 이상이 불구가 되어 교체되었다. 교육이 거의 다 완료될 시점에도 새로운 사람들이 공장으로 끌려 들어왔다.

“이번에도 희생양들이 왔군. 이 사람들은 얼마나 버틸까?”

이미 공장에 대한 괴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공장이 뭔지는 몰라도 ‘손등 학살자’, ‘들어가면 못 나옴’,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공장 노동을 피하자 알렉산드르 2세가 개입하였다. 그는 차르의 명으로 사람들을 설득하였으며 결국 설득이 아닌 폭력과 강압으로 공장 근로 계약서를 작성하였다.

이름을 적지 못하여 ‘V’자를 적은 것이 태반인 계약서를 확인한 기술자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러나 개중 한 계약서에는 뭔가 애매한 필체의 서명이 적혀 있었다.

“얼씨구. 이건 뭔 서예에 가까운 필체지?”

“특이하긴 하네. 마치 서예를 먼저 배우고 러시아어를 배운 것 같잖아?”

그 필체는 혁명의 불씨를 키우기 위한 동티단의 잠입을 의미했다. 이들은 기근에 시달린 지역의 소작농으로 위장하여 공장에 잠입하였고 노동자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변방에서부터 러시아 전역을 불태울 혁명의 불길이 사방에서 피어올랐다.

#작가의 말

우리가 알고 있는 산업혁명 당시의 노동자 처우는 영국에서 ‘잠시’ 일어났던 현상입니다.

양심을 가진 공장주와 의원들이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였지요. 시간이 지나 노동법이 계속 개선되며 어느 정도 인간답게 살았습니다.

대신 러시아에서는 언제나 일어났던 현상입니다. 아무런 타협도 없이 지방귀족 – 중앙귀족이 합세하여 노동자를 철저히 착취했습니다.

노동법을 지키지 않아도 귀족들이라 처벌도 안 받았지요. 오히려 신고한 사람이 몽둥이찜질을 당해 죽었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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