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화
26장 2화 귀천(歸天)(2)
당시 순조는 전쟁을 일으킬 생각조차 한 적도 없었다. 가급적이면 영국의 비위를 맞춰주고 청나라를 상대로 이득을 보기 위해 보신적인 태도를 유지하였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는 적합한 판단이지만 청나라와 영국의 압박으로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도 많은 일이 있었다.
“소자가 한 일이라고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정사에 손을 놓아 위기에 처하였고, 수많은 문물이 들어왔음에도 좋은 것 몇 가지만 주워섬겼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욕을 부리는 청나라와 이 나라를 집어삼키기 위한 영길리의 흉악한 속셈이 소자의 등을 밀어버렸습니다. 그나마 세자가 아니라면 고꾸라지고도 남았겠지요.”
결국 순조는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였다. 이미 승정원일기를 비롯한 서적에는 순조가 결단을 몇 번이고 망설였음을 증명하는 기록이 남은 상황이었다.
“영길리의 흉험한 계략과 반대로 청나라는 오만방자한 모습을 취하였습니다. 당시에 소자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친정(親征)을 단행하였지요. 사실 죽음을 각오하였지만요.”
당시 순조는 아버지의 묘소에 찾아오지도 못 하였다. 그가 짊어지지 못 하여 방임하였던 왕의 책임을 한껏 견디기 위해 억지로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만 예전의 굴욕을 당한 인조에게 제사를 올리고 스스로를 앞세워 패전의 책임을 짊어지려 하였다. 그 각오와 달리 순조는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청나라는 너무나 나약했습니다. 군대는 기강이 없이 노략질을 일삼았으며 장수들의 명령은 아무도 이행하지 않았사옵니다. 여러 일을 준비하였지만 모두 허사가 되었지요.”
“이 나라의 병사들의 주검을 마주할 줄 알았지만 청나라 백성들의 주검을 안장하였습니다. 이 나라의 병사들을 다독일 줄 알았지만 스스로를 다독이기에 이르렀습니다.”
순조는 여기서 잠시 멈칫하였다. 아무리 자신이 보아온 일이더라도 성벽에 분변을 칠한 몰골을 아버지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대신 애써서 돌려 말하였다.
“소자가 보고도 믿을 수 없었지요. 놈들이 성을 어찌나 흉하게 망가트렸는지 피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사옵니다. 그리하여 흥선군이 만들어낸 물건으로 성을 태워 버렸습니다.”
“지금에 와서 말씀을 드리는 것이니 후금의 수괴 황태극(홍타이지)의 묘소가 그 꼴이 될 줄이야. 졸지에 황태극의 묘소를 정비하고 민심을 다독이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만주에서 돌아오자마자 승전을 기념하는 제사를 종묘에서 올렸다. 당시에는 가장 큰 모욕을 당한 인조가 제사의 주역이었다.
그 이후에 모든 상황이 진정된 다음에야 아버지 정조에게 제사를 따로 올릴 수 있었다. 순조는 그다음부터 벌어진 찬란한 일을 이야기하였다.
“승리를 하여 이득을 본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소자는 어좌를 데우기만 할 적에 백성들이 겪은 고통을 나중에 알게 되었사옵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태상황의 지위에 올랐사옵니다.”
“각지를 주유하며 불편한 일을 모두 해결해 주었사옵니다. 하릴없이 산간오지를 지나는 동안 길을 닦고 개천 위에 다리를 놓으며 소통을 원활히 하였고 간혹 죄인을 다스렸지요.”
“제가 왕위에 있을 때 행하지 못하였던 일을 태상황의 자리에서 뒤늦게 한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보신다면 크게 질책하실 일이지만 제 능력이 미욱하여 별 방도가 없었사옵니다.”
한동안 이야기를 마친 순조는 고개를 돌려 숨을 골랐다. 하인이 다가와 찬물을 한 잔 건네자 그 물을 들이켜고는 고개를 돌려 화성 시내 방향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제가 사소한 일을 하는 동안 이 나라는 너무나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요순시대와 같이 백성들은 서로 다투지 않고 있사옵니다.”
정조는 실리적인 군주였다. 비록 여러 학문적 압박을 가했지만 쓸 만한 기술이라면 여러 검토를 거쳐 받아들이는 경향도 있었다.
그런 긍정적인 면모와 부정적인 면모가 함께한 정조를 아들인 순조가 그리워하였다. 세월이 지나면 추억이 되고 추억은 자연스럽게 긍정적인 면만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이 나라는 아바마마의 올바른 뜻을, 위민(爲民)이라는 뜻을 이룩하였습니다. 서역의 기술이 아닌 서역의 사람들을 조일준이 가르쳐 여러 물건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사옵니다.”
“산에 있던 화전민들은 새 땅인 만주에서 농사를 짓고 있지요. 옛 농토에는 비료라는 기물을 퍼부어 가을만 되면 황금빛 물결이 넘실거립니다.”
“예전에는 쉴 새 없이 길쌈질을 해 직물을 자아냈다면 이제는 공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양목을 재봉틀이라는 기계로 꿰매기에 이르렀사옵니다.”
“공장에서는 석탄을 때서 움직이는 기계가 쉴 새 없이 돌아갑니다. 이를 응용한 기차라는 물건을 사용하니 물산이 오가고 이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형통(亨通)하기에 이르렀지요.”
순조는 한숨을 돌리고 수원까지 오는 여정을 생각하였다. 예전이라면 4일이 걸렸을 여정이 고작 한나절이 지나가기도 전에 끝날 수준이다.
이 모든 것은 저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박현상과 조일준 덕분이다.
순조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아바마마께서는 서역의 사특한 학문이 이 나라를 더럽힐 것이라 염려하였사옵니다. 소자 또한 영길리에게 호되게 당한 다음부터 이런 염려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박현상의 덕분에 서역의 열국들이 함부로 이 나라에 손을 대지 못하였습니다. 예전에는 홍모귀라 불리었던 이들이 이제는 이 나라에 오가며 여러 일을 합니다.”
“왜국 또한 관계를 개선하였사옵니다. 임진년에 흉한 일을 겪은 사람들이 이 나라에 되돌아왔습니다. 왜는 모든 죄를 청산하고 이 나라에 음복(陰伏)하여 머슴 노릇을 하고 있사옵니다.”
“더군다나 일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청나라는 멸망하였사옵니다. 사람들은 이들을 청이 아닌 퇴(頹)금이라는 멸칭으로 부를 정도이며 사천 지방에 붙박이 신세가 되어 버렸지요.”
순조는 양팔을 벌리고 아버지의 봉분을 쓰다듬었다.
만약 정조가 살아 있다면, 지금 111세가 되어도 살아남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는 자신조차 상상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자신도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가누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순조는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자식의 마음을 담아 말하였다.
“언젠가는 저도 숨을 거두고 하늘로 혼백이 올라갈 것이옵니다. 아바마마를 만나 뵐 수 있다면 젊은 시절의 잘못을 질책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원할 뿐이옵니다.”
모든 말을 마친 순조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대한제국을 만들어내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신하 두 명에게 손짓을 하며 말하였다.
“이제 돌아갈 차례로구나. 아바마마께 너희 둘의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 앞으로 나와 같이 인사를 올리자꾸나.”
“하오나…….”
“어명이다. 즉각 인사를 올리지 않고 뭘 하느냐.”
순조는 뒤에서 걸어 들어오는 두 명신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늙어가듯 이 둘도 늙은 기색이 역력하여 세월의 흐름을 원망할 뿐이었다.
* * *
몇 달이 지나고 가을 수확 시기가 되었다. 재작년에는 전쟁 때문에 소모된 군량을 벌충하기 위해, 작년에는 중국 대륙에 곡식을 퍼부으며 민심을 달래기 위해 재정을 바짝 조여 버렸다.
“총리대신께 보고를 올립니다. 그나마 올해부터는 산동의 농가들이 정상적으로 농사를 지어서 큰 불편 없이 세수를 원상복귀 시킬 수 있었습니다.”
김좌근의 후임자로 부임한 탁지대신 윤정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보고를 올렸다. 지금 김좌근이야 박물관 관장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어서 다행이고.
여러 도표가 나열되는 가운데 생각 외로 빠르게 정상화된 중국 대륙을 보면서 안심했다. 윤정관은 다시금 고개를 숙이고 말하였다.
“모두 다 태자전하의 바른 판단 덕분입니다. 저는 원리원칙을 지켜서 하나하나 측량을 하고 비료를 지급할 작정이었는데 태자전하께서는 백성의 입이 중요하다 명을 내렸지요.”
“이야기는 이미 들은 것 같군. 듣자 하니 비료를 우선 공급하고 이를 역산하여 토지를 측량하라 하였던가.”
“총리대신께서 말씀하신 것이 맞습니다. 간혹 비료를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여 피해를 입은 자들도 있었지만 이들도 제정신을 차릴 것 같더군요.”
이 외의 구체적인 수치가 계속 나열되었다. 성품은 올바른 편이라도 재주가 평범한 윤정관이 그 성품을 높게 사서 새 탁지대신으로 발탁된 덕분에 일이 순탄히 돌아갔다.
“처음에는 뇌물을 보내며 어떻게든 인맥을 만들려 하였는데 이런 풍습도 고쳐나가야겠지요.”
꽌시(關係), 좋게 보자면 의협이고 나쁘게 보자면 뒤틀린 연고주의가 팽배한 청나라다. 만주야 다 거지꼴이 된 채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중국 본토는 이야기가 다르다.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는 과정만 따져도 한도 끝도 없는 업무다.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 윤정관을 격려해 주었다.
“그 일은 알아서 할 것이라 믿겠네. 올바른 제도를 마련하고 뿌리를 내리게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 순서는 끝난 것 같은데 다음은 농부(農部)의 차례입니다.”
농부대신 조병기는 예전에 죽은 조만영의 차남이었다. 그런데도 나이 터울이 워낙 커서 자기 형보다 20살이 어리다던가.
죽은 형을 대신해 조만영의 가르침을 물려받은 그는 가슴을 펴고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쌍성자 북방의 평야에서 드디어 곡식을 수확하였습니다. 정확히는 수확하고 남은 곡식을 이 나라에 조금이나마 들여올 정도로 여유가 생겨났지요.”
“고무적인 일이로구려. 그러하면 계속 수확량이 늘어난다는 말이오?”
“바로 보셨습니다. 올해에는 밀 기준으로 고작 사만 석에 불과하지만 내년이 되면 최소 삼십만 석, 앞으로 오 년이 지나면 수백만 석의 여유 곡물이 생겨날 겁니다.”
삼강평야의 개척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지금까지는 꾸준히 곡물을 퍼먹는 짐 덩어리나 마찬가지였는데 드디어 곡물을 토해내기 시작한 거다.
조병기는 자랑스럽게 현황을 보고하였다. 여기저기서 찍힌 사진들과 즉석에서 만들어낸 도면 사이에서 갈색의 거대한 쥐가 상당히 많이 찍혀 있었다.
“태자전하의 혜안이 빛을 발하였습니다. 해리(비버)의 숫자가 불어나 추산 십만 마리가 넘어갑니다. 이 짐승들이 장정보다 더욱 열심히 일하며 나무를 쏠아서 둑을 만들지요.”
“그…… 혹시나 해리들이 멋대로 둑을 만들면 농토가 침수되지 않겠소?”
윤정관의 질문에 조병기가 다음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사진에는 장대에 수없이 걸린 비버 가죽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래서 해리를 사냥하고 있지요. 잘못 만든 둑은 무너트리고 제대로 만든 둑은 내버려 두는 방식으로 대처하였습니다. 이를 감안해도 위대한 과업을 함께 수행한 짐승입니다.”
이 위대한 과업을 수행한 사람들은 대한제국의 소작농도 있지만 일본 사람들과 러시아 이주민도 있었다.
윤정관은 다음 도표를 보여주면서 말하였다.
“일전에 일본과 맺은 계약에 의거하여 여유분의 곡물은 인원에 비례하여 일본에 보낼 예정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열심히 일한 노서아 이주민들에게도 급료를 지급해야겠지요.”
“그 급료 지급은 일전에 태상황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면…….”
“총리대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현물 지급입니다. 쌍성자의 공장에서 생산한 물건이지요.”
현물 지급이라 대충 둘러서 말하였는데 무기로 지급하겠다는 말이다. 이주민 가구 한 명당 신식 갑식 소총 1정과 탄환 100발 그리고 기타 군수품이던가.
단순 계산으로 러시아 이주민이 절반만 돌아간다고 쳐도 러시아에 소총 20만 정과 탄환 2천만 개가 쏟아지는 꼴이다.
나는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대충 돌려서 말하였다.
“차라리 현물 지급이 나을 수도 있지. 어차피 노서아 본토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이 은을 유출시켜 보았자 시베리아를 거치면서 다 소모할 것 같군.”
“아예 총을 지급하는 건 어떻습니까? 시베리아 동토에 날뛰는 도적들을 제거하게요.”
이후 논의도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 외부야 워낙 할 일이 많아서 대신 한 명이 관할하는 게 아니고 동방 정세를 위해 외부대신이, 서방 정세를 위해 부대신이 일하고 있다.
“아이고 총리대신이 되니까 편하긴 하네.”
예전 같으면 쉴 새 없이 야근을 하거나 급박한 사태가 터질 때를 대비해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그러나 총리대신의 위치는 전체적 조율과 보고일 뿐 세부 사항을 논하지 않는다.
회의 이후 효명제에게 보고를 올린 다음 조금 일찍 퇴근했다. 그런데 길거리에서 러시아 사람들이 잔뜩 몰려서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거대한 가마니를 지게에 짊어진 몰골이었다. 면모를 자세히 살펴보니 흉터가 여럿 있어서 아마 해산된 동티단 소속일 것이라 판단하고 물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창경궁으로 향하는 것 같군. 무슨 일인가?”
“총리 대감께 인사를 드립니다! 태상황 아버지께 인사를 올리려 합니다!”
“인사라, 그러하면 이 곡물들이 삼강 습지에서 생산한 밀이란 말인가?”
“바로 보셨습니다!”
순조는 아버지가 자식을 대하듯 2기 동티단을, 러시아 이주민을 보살폈다. 그러한 동티단도 순조를 아버지처럼 모시면서 깍듯이 대우하고 있었다.
“그럼 함께 가도록 하지. 내 장남이 자네들을 맞이한 일이 엊그제 같은데.”
자연스럽게 행렬의 옆에서 창경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금군과 함께 경호를 담당한 러시아 이주민들이 이들을 맞이하였고 곧이어 창경궁의 전각 안으로 함께 들어갔다.
순조가 머무르는 장소는 정전이 아닌 침전(寢殿)인 환경전이다. 이제는 거동도 불편해져서 지팡이도 짚기 힘든 수준이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던가.
“태상황 폐하를 알현하고자 총리대신과 함께 방문하였사옵니다!”
동티단 전원이 무릎을 꿇고 대기하자 문이 열렸다. 그리고 몇 달 전보다 한껏 늙어버린 순조가 내관의 부축을 받으며 이들을 맞이하였다.
“반갑고 또 반가운 일이구나. 이미 서신을 통해 소식을 듣기는 하였노라.”
“태상황 폐하께서 저희를 보살펴 주신 덕분에 제대로 된 작황을 거둘 수 있었나이다!”
“내 일이 아니고 너희가 애쓴 덕이지.”
순조는 허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대청마루에 부축을 받아 걸터앉았다. 그리고 수백 섬은 될 법한 밀 가마니를 확인하고 말하였다.
“예전에 박현상 자네가 서역의 음식을 해온 적이 있었지. 당시에는 난고(卵糕 - 계란 떡, 파운드케이크)라고 말한 것 같은데 그 맛이 떠오르는구나.”
그런 적이 있었다. 당시에 파운드케이크를 조선의 물건으로 만들어내려고 여러 실패작을 양산했고 개중 그럭저럭 괜찮은 물건을 순조와 효명세자가 먹기는 했을 거다.
이 나라에는 이미 수많은 제빵사가 있고 나보다 훨씬 나은 기술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내 부족한 실력을 자랑할 이유가 없어서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였다.
“신은 서역의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기 위해 부족한 솜씨를 발휘했을 뿐이옵나이다. 태상황 폐하께서 드시기에는 격식이 지나치게 낮은 음식이옵니다.”
“격식이 어디에 있더냐? 나를 아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땅을 일구고 곡식을 만들어내었다. 이 자체가 크나큰 은혜이자 복이니 아무 생각을 하지 말고 만들어내거라.”
대한제국이 서양과 접촉하면서 보여준 파운드케이크가 대한제국에서 가장 최근에 일어난 변화, 러시아 이주민들이 일궈낸 곡식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절구를 가져와 밀을 탈곡하고, 그 탈곡된 밀을 다시금 빻아 밀가루로 만들어낸다. 사람이 워낙 많고 숙련되어 있다 보니 금방 밀가루가 완성되었고 여기에 재료가 추가되었다.
사람들과 협력하여 파운드케이크, 대한제국의 명칭인 난고를 만들어냈다. 먹기 쉬운 물건이 아닌 정말 옛 방식대로 단단하게 만들어낸 케이크다.
케이크가 어느 정도 식어서 칼로 썰어내 순조에게 먼저 한 접시를 올렸다. 손을 바들바들 떨던 순조는 이를 애써서 손으로 뜯어낸 다음 한 덩어리를 입 안에 넣었다.
“옛 맛과 흡사한 것 같으나 내 입이 거칠어져서 맛을 잘 모를 지경이로구나.”
나도 가슴이 먹먹해졌고 동티단도 가슴이 먹먹해졌는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순조는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섭식조차도 원활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순조는 자신이 손을 댄 파운드케이크를 동티단 간부들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애써서 마음을 정리하듯이 말하였다.
“무얼 그리 망설이느냐. 아비가 자식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야지 자식이 아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일이 옳더냐? 세상에는 순리가 있는 법이고 그 순리를 따르려는 것이다.”
“아니 되옵니다! 기력을 찾으시옵소서!”
나 또한 아무 생각도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순조에게 간청을 하였다. 그러자 순조는 목소리에 화색을 드러내며 말하였다.
“앞으로 즐거운 일이 얼마나 많겠느냐. 몇 달이 지나면 눈이 내릴 것이요, 여섯 달이 지나면 녹음이 물들고, 몇 년이 지나면 삼강 습지가 옥토가 될 것이다.”
“또한 열수를 가로지르는 철교가 놓여 기차가 소통하고 사람이 오갈 것이 아니더냐. 하루하루가 다르게 이 나라가 발전하고 있으니 앞으로 오래 살수록 볼 것이 많아질 것이다.”
점차 동티단의 고개가 올라가고 내 고개 또한 올라갔다. 고개를 돌려 우리 모두와 한 번씩 눈이 마주친 순조는 아쉬운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팔을 뻗으며 말하였다.
“이 몸이 그걸 따라가지 못하여 아쉬울 뿐이 아니더냐.”
“하오나 태상황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나를 아버지로 생각하고 있다면 잘 들어 두어라. 너희는 옛 아버지 차르에게 버림을 받은 자들이다. 양아들로 삼아 키운 내 입장을 생각해 보았느냐?”
“그저 저희를 아끼고 보살펴 주셨을 뿐입니다!”
“왜 보살폈겠느냐? 상처를 입고 고통을 겪은 이들이 다시금 제자리에 우뚝 설 때까지 보살펴 준 것이다. 그것이 너희가 할 수 있는 보답이다!”
동티단은 순조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러시아 혁명이라는 위업 가운데 고민하고 있었다. 순조는 이들의 미련을 끊어버리듯 명령을 하달했다.
“그러하니 마지막 어명을 내리겠다.”
동티단 모두가 벌떡 일어나 차렷 자세를 취하였다. 순조 또한 내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말하였다.
“내년 말일에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라. 고향으로 돌아가 너희가 원하는 일을 하여 이 의부(義父)가 올바른 사람을 키워냈음을 증명하여라.”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순조는 마지막 명을 내리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동티단원들이 두서없이 순조에게 청원을 하였다.
“폐하! 만수무강하시옵소서!”
“저희가 성과를 이룩하는 그 날을 꼭 기다려 주시옵소서!”
“많은 것은 바라지 아니하겠사옵니다! 부디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더 뵙고자 할 뿐입니다.”
순조는 망설이듯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문을 열면서 나에게 말하였다.
“내가 자식 복이 이토록 많을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방문이 닫히고 동티단원들이 궐 밖으로 사라졌다.
이후 한 달이 지나자 순조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제대로 거동하지도 못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