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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338화 (304/345)

338화

26장 2화 귀천(歸天)(1)

귀국 직후 효명제에게 즉각 보고를 올렸다. 지난 일 년 동안 중국 대륙에 생겨난 나라들에 대한 보고를 마치고 나니 거대한 산을 넘어갔다는 느낌이 들었다.

“평의 왕이 그러한 말을 할 줄이야. 혜안이 남다른 사람이로구나.”

효명제는 정보를 종합하여 중국 대륙의 훗날 구도를 예측하였다. 청은 그냥 고립된 외톨이, 후원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북방민족이다.

중화민국이야 내부 서열정리와 구도 개편에만 십여 년을 소모할 작정이고. 그런 상황에서 최우선 견제대상이 평나라다.

“평은 남방에 고립된 지세이옵니다. 고산준봉과 깊은 삼림이 남아 있사오며 해안가에만 제대로 된 고을이 펼쳐진 형편이나 앞으로 수십 년이 지나면 옛말이 될 것 같사옵니다.”

“그야 당연한 일이지. 조만간 서역에서 고난을 겪던 사람들이 돌아와 부족한 인력을 채워줄 것이다. 그 드넓은 산 사이사이가 개발되겠구나.”

석달개의 능력을 생각하면 산간 오지마다 최적화된 상품작물을 기르고 제도를 철저히 유지할 것 같다. 그나마 석달개에게는 억제기가 달려 있어서 다행이지.

“위치가 적합하여 당분간은 사소한 견제만 해도 될 일이기도 하지만.”

효명제는 적합하다는 말을 하면서 지도에 손가락으로 선을 긋는 시늉을 했다. 석달개가 세운 평은 다 좋은데 동쪽은 서양의, 북쪽은 청나라의 잔존 세력과 삼림으로 가로막혀 있다.

“짐이 보기에 석달개는 수십 년 동안 내실을 다지면서 세력을 온존할 것 같구나. 먼 훗날까지 그가 살아 있을지는 모르나 그때가 되면 기회가 생길 것이다.”

“기회라 하시면 영길리와 열국들이 반으로 분할한 흉한 지역 말씀이시옵니까?”

“당연한 일 아니더냐. 영길리의 방침이 속내를 숨기고 시선을 돌려 이득을 얻어낼 작정 아니더냐. 훗날이 되어 반발이 거세지면 대만 섬만 온존할 방침이라 하였지.”

이미 다 결정된 일이다. 공동 자치령이나 영국령 남중국이나 30년조차 버티기 힘들다는 계산이 영국 내부에서도 나왔고 그 계산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국은 올해부터 알뜰살뜰하게 세금을 거두고 있다. 창문 크기로 거두는 세금은 기본이고 기와세를 거두어서 기와의 개수로 세금을 매긴다고 하던가.

남경에서는 벌써부터 더 큰 기와를 만들어서 세금을 피하려는 움직임이 엿보였다. 그러나 영국이 어떤 나라인가, 성품 하나는 천하제일이라 자처하는 나라이다.

“영길리는 참으로 흉흉한 나라입니다. 창문 크기로 세금을 매기고, 기와의 개수로 세금을 매긴 다음 기와를 키우면 필요한 목재와 서까래에 세금을 매기려 하옵니다.”

“그게 사람이더냐 아니면 악귀더냐. 동인도회사의 지배를 받는 천축의 백성들은 여러 정책으로 세금이 내려가고 법이 온전히 규정되었는데 이 땅은 아닌 것 같더구나.”

“천축은 평생 지배할 땅이고 남경은 수십 년 동안 지배할 땅이니 당연한 일이옵나이다.”

“그 수십 년이 흐른 다음 평이 활개를 칠 것이다. 우리도 중화민국을 앞세워 견제하자꾸나.”

중화민국은 지금 속이 꽉 막힌 상태다. 덮어놓고 서쪽 내륙으로 진격하면 후원과 평의 견제를 받게 된다.

그러나 영국령 남중국과 남중국 공동자치령이 붕괴하면 중화민국이 남방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나라의 설립 취지 자체가 ‘한족’을 포함한 중화에 소속된 모든 민족의 부흥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중화민국과 석달개의 평이 나눠 먹을 땅이 남중국 자치령이다.

“상세한 사항은 각 부의 대신들이 논하기로 하면 될 것 같구나. 이제 산동반도를 시작으로 비수처럼 파고든 지형을 보살피고 이 나라의 사람들이 이득을 챙길 곳을 만들 작정이다.”

“산동반도의 평원을 곡창지대로 삼고 공장을 부설할 작정이시옵니까?”

“그러하다. 먼 훗날이 되어 산동반도를 유지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 다만 한껏 노력하여 이 나라가 받아낸 땅을 지켜보아야겠지.”

그 임무를 아마도 태자에게 위임할 생각인 것 같았다. 효명제는 얼마 전부터 노안이 와서 쓰게 된 안경을 고쳐 쓴 다음 말하였다.

“그나저나 총리대신과 조 총장을 아바마마가 뵙고자 하는구나.”

“신 또한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사옵니다.”

“그럼 참으로 좋은 일이로구나. 이틀 뒤에 두 사람을 데리고 능에 행차할 것이라 하시었지. 부디 잘 모시도록 하여라.”

순조는 왕위를 내려놓은 다음부터 간혹 정조의 능에 들러 성묘를 하였다. 조선시대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서 부담이 막중한 능행차인데 이 시대에는 편히 다녀올 수 있다.

태상황의 신분이라 공식 행사의 규모를 맘대로 축소해도 되고 효심을 드러내는 일이다 보니 시기를 마음대로 정해도 된다. 명대로 이틀을 기다리고 순조에게 방문하였다.

이틀 뒤 일준이와 함께 순조가 머무르는 창경궁에 방문하였다. 호위병 중 절반가량은 동티단 소속의 러시아 이주민들이 있었는데 그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태상황께서 이렇게 지내도 되나? 호위 규모가 왜 이리 적어?”

“태상황에게 헛된 마음을 품는 사람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냐? 청나라 빼고.”

그 청나라는 지금 사천에 쑤셔 박힌 상태다. 이미 다른 나라에서는 제국인 청이 아니라 여진이나 퇴(頹 - 무너지다)금이라고 얕잡아 보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지팡이를 짚은 순조가 걸어 나왔다. 처음 조선에 방문했을 때는 피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사람은 어느새 73세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철저히 관리를 받아 피부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시력이 감퇴해 눈을 가늘게 뜬 채였고 손에는 검버섯이 피어 있었다. 우리 모두 고개를 조아리며 절을 올렸다.

“태상황 폐하께 인사를 올리옵나이다.”

“그만하여라, 너희들을 손자나 조카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데 어찌 이리 예를 지키느냐.”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를 더 지켜야 하는 법이옵나이다. 부디 받아들여 주시옵소서.”

순조는 반색을 하며 몸을 움직였다. 억지로 힘을 내는지 몸이 크게 기우뚱거리다가 다시 지팡이에 의지하여 몸을 멈췄다.

“옛 능행(陵行)은 번거롭고 고달픈 일이나 새로운 방식이라면 능히 행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백성들이 번거로운 일을 겪지 않게 미리 다 배려를 해두었다.”

순조의 호위 병력은 정말 단출했다. 수천 명의 병력이 아닌 동티단 반, 기존 금군 절반으로 구성된 200여 명의 호위 병력으로 가뿐히 출발하였다.

“능에서 여러 일을 행할 것인데 이렇게 사람이 적어도 되는 일이옵나이까?”

“어제 사람을 미리 보내두었다. 먼 거리에서는 말보다 빠른 기차가 있지 않더냐.”

순조도 다 생각이 있었다.

수원까지 가는 데 조선시대라면 빠른 걸음으로 2일, 말을 타고 1일이 걸린다. 능행 같은 거대한 행사는 최소 4일이 걸린다.

그러나 이 시대라면 5시간조차 걸리지 않는다. 창경궁에서 출발한 행렬은 천천히 도심을 활보하였고 백성들 모두가 행렬에 절을 하거나 인사를 올렸다.

그 모습에 호응하려는 듯이 순조가 마차의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었다. ‘태상황 폐하 만세’라는 화답이 돌아오자 순조는 흐뭇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좌를 지킬 때에는 이 나라의 백성들은 가렴주구와 매점매석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신음하며 살았다. 그러나 고작 삼십 년이 지나기도 전에 이런 일이 사라졌구나.”

“이 모든 것은 태상황 폐하의 위업이옵니다. 폐하께서 친히 북변으로 나아가 병졸들을 통솔하지 아니하였다면 모두 물거품이 되었을 일이기도 하옵니다.”

순조가 있건 없건 이길 수 있었겠지만 청나라에 크나큰 충격을 줄 수는 없었다.

병력 규모가 줄어들게 되면 그루시도 요동을 헤집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더군다나 도광제가 순조의 행동에 자극을 받아서 과격한 개혁을 단행하다 자멸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고.

일준이도 나와 흡사한 대답을 하며 순조를 위로하였다.

“새로운 문물을 들여올 적에 폐하께서 친히 나셔서 용단을 보여주셨사옵니다. 그러지 아니하였다면 아직도 새 문물을 들여오느라 나라가 혼란하였을 것 같사옵니다.”

“네 말도 옳구나. 그러나 내가 새로운 문물을 들여올 적에는 퍼져나갈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기껏해야 양반가에서 즐기고 중인들이 간혹 다룰 줄 알고 있었지.”

순조는 말을 마치고 수레를 통해 옮겨지는 거대한 보일러를 바라보았다. 만주와 평양의 제철소가 계속 가동되며 점차 싼 가격에 이런 물건들이 공급되었다.

그 뒤에 있는 가게는 금은방이었다. 정확히는 전당포 역할을 겸하는 가게였는데 도난 방지를 위해 튼튼한 벽돌로 가게를 만들고 창문을 작게 뚫어두었다.

“전구라는 물건도 참 기묘하였지. 궁중에 전구를 처음 들여왔을 때 벌어진 일을 알더냐.”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사옵니다. 내시 가운데 나이가 많은 자가 곰방대에 불을 붙이려고 전구 알을 빼내고 곰방대를 들이댔다 호되게 당한 적이 있었다 하였지요.”

“그러기도 하였지. 입술이 벌겋게 부풀어 오른 모습을 보고 어찌나 웃음이 나오던지.”

그런 귀중품인 전구가 이제는 금은방 같은 값비싼 물건을 취급하는 가게에 설치되어 있었다. 어지러이 늘어진 전깃줄을 보던 순조는 일준이를 보면서 핀잔하듯 말하였다.

“이러다가 정월 대보름에 연을 날리는 사람들이 전기에 당할 것 같구나. 전깃줄을 땅 안으로 숨기는 방안은 없더냐?”

“있기는 하옵니다만 지금은 쓸 수 없는 방안이옵니다. 안사람이 한동안 연구를 해보았는데 거리가 조금만 멀어져도 힘이 급격히 감쇠하옵니다.”

“그렇기는 하겠구나. 다만 항시 정진하여 훗날에는 백성들이 전깃줄이 없는 푸른 하늘을 보고 마음껏 즐길 수 있게 하여라.”

운을 뗀 순조는 아쉬운 듯이 일준이에게 다시금 말하였다.

“그나저나 새 전기차를 타고 가지 못하니 아쉬울 뿐이로다. 무게가 너무나 무거워서 부교를 건널 수 없는데 어찌할 수 없겠더냐.”

“지금은 쇠로 벼려낸 외피를 나무로 바꾸면…….”

“안 하느니만 못하구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순조와 우리를 태운 마차는 한강 백사장에 도착하였다. 이미 순조의 도착을 알고 있는 관리 사무소에서 가설 부교를 조립하고 시험하고 있었다.

“모든 백성이 왕후장상과 같은 삶을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느냐. 그 길이 너무나 멀고도 험하여 아직도 보이지가 않는구나.”

순조는 부교가 놓인 곳 근처에 있는 파편들을 가리켰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교량 설치를 위해 대한제국의 기술력이 총동원되어 교각 기초를 만들었다.

그 기초는 작년 홍수도 아닌 일반적인 호우에 기울어지고 겨울 추위가 지나가자 옆으로 자빠져 버렸다.

순조는 혀를 차면서 나를 보고는 말하였다.

“이 나라의 백성들은 오십 년 전의 양반들과 같은 삶을 영위하고 있다. 배를 주리지 않고 언제나 배부르게 음식을 먹을 수 있으며, 옷 또한 양목으로 잘 재단된 옷을 입지 않느냐.”

“실로 그러하옵니다. 의식주 가운데 주거가 다소 문제일 뿐이옵나이다.”

“도성을 돌아볼 때마다 벽돌 건물이 늘어나서 그 문제도 해결될 것 같더구나. 그러면 누구나 너른 벌판을 다니는 것처럼 소통해야 옳은 일인데.”

어느새 부교 점검이 끝나고 마차가 다시 움직였다. 이미 한강 남북을 오가는 물동량이 증가하여 부교도 최대 12개까지 설치되고 있다던가.

그 부교의 사이사이에는 한강을 오르내리는 나루터에 머무르는 작은 배들이 빼곡히 밀집하여 있었다.

순조는 이를 보고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였다.

“인공석분과 철근으로 만든 튼튼한 다리가 설치되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저 이 나라의 강이 너무 크고 웅장하여 만들 수 없어 유감일 뿐이지.”

“언젠가는 가능할 것이옵니다. 올해 겨울에도 새 교량의 기초를 시험할 작정이옵나이다.”

“언젠가는 가능하겠지. 그때가 언제일지 기다려지는구나.”

일준이의 예상대로라면 앞으로 빠르면 10년, 늦으면 20년 뒤라 하였다. 그마저도 한강의 초대형 홍수를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던가.

그러나 순조가 교량의 완성을 기다리며 조금이라도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언젠가라고 말한 것이다.

부교를 지나 다시 황실 전용으로 배정된 기차를 타고 수원까지 나아갔다. 순조는 아직도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웃으면서 말하였다.

“예전에는 능행을 한 번 할 때 오며 가며 여드레가 걸렸지. 이제는 반나절이 걸릴까 말까니 얼마나 편하고 좋은 일이더냐.”

“듣자 하니 북변에서는 귀성(歸城) 행렬이 생겨났다 하였습니다. 도성과 근교에서 자라난 젊은이들이 북변에서 일하다 부모를 만나기 위하여 내려온다 하더군요.”

“그 또한 좋은 일이지. 다만 기차 가격이 조금이라도 내렸다면 더 좋은 일이겠구나.”

주요 노선 기차는 황실의 풍부한 자본으로 최소한의 유지비만 받아내는 형편이다.

그 가격조차도 한양-심양 노선으로 현대 기준으로 200만 원 정도, 서민이라면 일 년에 한 번 탈 수준의 비용이다.

언젠가는, 더 개량된 증기기관이 나오고 철로 보수비용이 내려가면 가능한 일이겠지.

다시 마차를 타고 예전에는 정종이 묻힌 왕릉인 건릉, 지금은 대한제국이 되면서 선황제(宣皇帝) 정조가 안치된 황릉에 도달하였다.

“아바마마께서는 번잡한 허례허식을 싫어하셨지. 더 많은 석물을 두고 봉분을 크게 쌓으려 하였지만 아바마마를 생각하여 옛 방식을 그대로 지켜보았다.”

우리는 객(客)의 신세이다. 순조와 달리 정조와 효의황후가 안치된 정릉에 들어서며 절을 올리고 예의를 갖추어 조심스럽게 왕릉까지 다가갔다.

간단한 성묘예절이 끝나자 순조의 몸이 휘청거렸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병이 그 몸을 부축하자 순조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하였다.

“아바마마께서는 나라의 일이 고단하신데도 매년 의황제(懿皇帝 - 사도세자)께서 묻히신 능에 매년 능행을 오셨지. 그에 비하면 내 효심은 한 줌의 싸라기보다 못할 지경이구나.”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한 번 수원을 오갈 때마다 오천 명이 넘는 사람과 천 마리가 넘는 가축을 동원하는 거대한 행사였다.

지금이야 마차와 기차를 타고 가뿐히 오갈 수 있는 행사라서 몇 번이라고 오지 못해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순조는 우리를 돌아보고는 손을 내저으며 잠시 뒤로 물러나라는 말을 하였다.

“아바마마께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싶구나. 잠시 뒤로 물러나도록 하여라.”

고개를 숙인 순조는 우리가 뒤로 물러나자 정조의 능으로 몇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는 불편한 몸으로 다시금 깊은 인사를 올리고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 * *

순조는 고난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오던 사람이었다. 어린 나이에 정조가 승하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막 세상을 깨우칠 무렵 왕이라는 지위에 오른 것이다. 그동안 겪은 고난을 토로하듯 순조는 자신의 어린 시절처럼 세상을 떠난 정조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이야기하였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아바마마께 말씀을 올리기에는 참으로 불민한 일이나 이 나라는 태평성대를 이룩하였고 이 드넓은 세상에 우뚝 솟구쳐 올랐습니다.”

순조는 절뚝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능 주변을 돌아다녔다. 불같은 성격을 자랑하던 아버지의 옛 모습을 떠올린 순조는 자신을 질책하듯이 말하였다.

“아바마마의 크디큰 빈자리를 채워 옥좌에 앉았을 때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지요, 마음을 가다듬기도 전에 나라가 뒤엎어졌습니다.”

순조가 고작 11살 때 벌어진 신유박해는 처음에는 그리 큰 충격이 아니었다. 순조는 어린 나이에 그저 잘못된 학문을 배운 것이 문제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무부무군이라는 글귀가 돌아다니고 황사영이 청나라 군대를 끌고 와 달라는 백서까지 작성하였다. 순조는 깊은 한숨을 쉬면서 말하였다.

“그 일은 시작에 불과하였습니다. 제가 나이가 차서 치세에 손을 댈 때에 서북에서 변란이 벌어졌습니다. 그 변란조차도 소자는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였지요.”

홍경래의 난은 10년 동안 준비한 계획적인 봉기였다. 이 상황에서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가세하였고 이로 인해 수많은 실책과 패전이 겹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정부는 진압에 성공했고 홍경래의 세력은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이는 순조의 성과이기도 하였지만 그는 자신을 질책하듯이 말하였다.

“소자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수많은 병졸들이 제 실책을 덮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고 수많은 피가 흐르고 사람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순조는 이 세상에 없는 아버지를 향해 깊은 인사를 올리면서 말을 이어갔다.

“유종지미(有終之美)라 하였습니다. 모든 일은 끝맺음이 좋아야 하는 법인데 정주성이 함락되고 이천여 명의 백성들이 모조리 처형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실 더 죽기도 하였지요. 소자가 매사에 거칠게 임하고 진압에 욕심을 부리니 장수들이 사기가 떨어진 병사를 처형하며 또다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그제서 잘못을 알게 되었습니다. 혈기만 앞세우고 판단을 그르치며 모든 것을 제대로 보지 않은 소자의 잘못이지요.”

순조는 분명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를 입고 위축되었으며 그 상처가 몸에도 영향을 끼쳐 잔병을 앓았다.

막대한 자신감과 자부심이 무너진 순간 그는 세도가들의 비리를 눈감아 주는 암군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과거를 스스로 책망하듯 순조의 말이 이어졌다.

“마음을 잃고 옥좌를 덥히기만 할 때에 세자가 장성하여 대리청정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자의 모습을 보며 아바마마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에 더욱 움츠러들기만 하였사옵니다.”

“뭘 해도 마음에 들지 않고 그저 소자의 불민함이 마음에 깃들 무렵 또 다른 일이 생겨났습니다. 바로 머나먼 이역만리에서 사람이 온 것이지요.”

박현상과 조일준의 방문, 순조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서양으로 도주한 조선인들이 있었고 그 후손이 이 나라에 돌아온 것이다.

순조는 뒤를 돌아보고 한껏 자부심을 가지고 말하였다.

“부모가 이역만리에서 낳은 자식들이 효심을 지니고 이 나라에 돌아온 것입니다. 그 정성을 어여삐 보아 성을 내리고 이름을 지어주며 제 조카 정도로 여겼습니다.”

“낭중지추라 하였지요. 놀랍게도 둘 다 빼어난 재주를 드러내며 조정에 이바지하였습니다. 사실 아바마마라면 달랐을 것 같습니다.”

정조의 인재 등용과 그 욕심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순조는 아버지의 옛 모습을 그리워하며 말하였다.

“아바마마라면 하루 종일 대화를 나누어 속내를 파악하고 높은 관리로 등용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아바마마의 치세라면 박해도 없었을 것이고 흉언(凶言)도 없었을 것 같지만요.”

“둘이 이 나라에 발을 들이고 몇 년이 지나기도 전에 세도가들이 조정에 고개를 조아리고 서역의 사람들이 교역을 청하였습니다. 둘은 이런 상황에서도 준비를 해두었더군요.”

“아바마마께 이미 말씀을 드렸다시피 불민한 일도 벌어졌사옵니다. 세자가, 지금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아바마마의 손자가 서역의 국가 영길리에 방문하게 되었사옵니다.”

계획하지 못한 사고에 가까운 일이었다. 본래 세자를 남겨두고 적당한 왕족을 붙여서 사절단을 편성할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큰 변수가 조만영에 의해 생겨났다.

이 변수로 인하여 세자가 직접 영국으로 향하게 된 꼴이었다. 그러나 순조는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듯이 말하였다.

“아바마마께서 아셨다면 대경하고 저를 호되게 질책할 일입니다. 다만 그 흉험한 영길리의 성품을 생각하면 차라리 잘된 일이라 사료되옵니다.”

“세자가 영길리에서 추악한 몰골을 보았기에 훗날 흉험한 속내에 덜미를 잡히지 않았사옵니다. 반면 저는 모든 수단을 차단당하고 청나라와 일전을 벌여야 하였사옵니다.”

순조는 몇 번이고 능행차를 와서 아버지에게 했던 이야기를 하였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보람찬 시기의 이야기. 이 조선을 제국으로 만들어낸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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