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329화 (295/345)

329화

25장 7화 한양 회담(2)

프랑스에서 좀 하는 시위는 화염병이 날아다녀 정부 청사가 불타고 시민들이 그 광경을 보면서 와인 정도는 마셔줘야지. 그러자 글래드스턴이 질린 표정으로 말하였다.

“프랑스야 일상적인 일이지만 우리는 나라가 뒤엎어지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무튼 영어 화자 육성계획은 아일랜드 대기근의 여파가 종료된 십 년 전에 중단되었습니다.”

“그 대기근은 사실상 영국이 저지른 문제 아니오? 서로 싸우게 하여 자신들의 통치하에 넣고.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내고 인구를 증가시키기 위해 감자를 심은 것이 문제지!”

영국을 두들겨 패는 걸 가장 좋아하는 프랑스 아니랄까 봐 사태가 과열되고 있었다. 내가 눈치를 주어 만류하자 파트리스는 손뼉을 치고는 말하였다.

“아무튼 구역질나는 이야기 잘 들었소. 계속 읊어보시오.”

“그 이후 신 페인 운동가들은 이하응 총장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아일랜드어 교육 운동을 벌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카를 마르크스가 끼어들었습니다.”

“냉동선을 대규모 발주하고 투자자를 유치하여 칼&프리츠 무역회사를 만든 사람 말이오?”

“그 친구는 사상가이자 역사가이기도 하지만 미국에서 가장 많은 쇠고기를 가져오는 업자이기도 합니다. 이들의 투자로 각 지역에 학교가 들어서게 되었지요.”

내가 알기로 본래 역사에서 아일랜드어 화자는 대기근의 여파로 급격히 감소했다. 인구 자체가 줄어들면서 영국의 개입이 커지며 식민지화가 가속되었다.

그러나 대기근이 나름 봉합되고 마르크스가 자금을 퍼먹이면서 상황이 반전된 것이다. 글래드스턴은 나를 바라보면서 말하였다.

“길거리의 어린아이들은 영어를 거의 모르고 아일랜드어로 대화를 합니다. 이제는 공문서를 보내면 아일랜드어로 바꿔서 읽고, 귀족들조차도 아일랜드어를 배우고 있지요.”

영국은 아일랜드를 지배하자마자 언어 말살을 통환 동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 장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여러 변수가 600년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든 상황이다.

“그동안 의회는 뭘 하였습니까?”

내 질문을 들은 글래드스턴은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거리고 답하였다.

“처음에는 학교를 단속하고 아일랜드어 교육을 중단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프린스 썬의 불길’ 혹은 ‘이시도르의 응징’이라는 발화성 액체가 날아오더군요.”

“그…… 그건 대한에서 군용으로 사용하는 백린탄인데?”

“이하응 총장이 창시했다고 아주 잘 쓰더군요. 이들은 조직적으로 메밀과 순무를 재배하고 비석을 세워 통제하면서 만들어진 하나의 군대이자 행정조직입니다.”

이하응의 정책이 가진 뿌리는 동양의, 그것도 중앙집권이 정점에 달한 조선 시대의 정책이다.

귀족과 지방 세력의 통제가 아닌 철저한 분류와 능력 위주 선발. 조선에서는 점차 부패되고 망각되어 가던 정책이 새 땅에서 올바로 발휘되며 새로운 효과를 불러온 것이다.

“아일랜드는 예전의 아일랜드가 아닙니다. 기근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결속되었고 더 이상 우리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 조직적으로 뭉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하면 아일랜드의 자치권을 보증하겠다는 말이 틀리지는 않은 것 같군요.”

“제가 보기에는 자치권을 보증하지 않으면 십 년, 아마 지금 아일랜드어를 배우는 아이들이 장성할 무렵에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납니다. 내전이 발생할지도 모르지요.”

나는 영국에게 거대한 짐을 짊어지게 할 생각이었는데 이런 상황일 줄은 몰랐다. 영국은 아마도 다른 나라에 들키지 않기 위해 이 사실을 숨긴 채 끙끙 앓고 있었겠지.

마치 종기를 칼로 째서 터트리듯, 내가 아일랜드의 현실을 국제 사회에 끌어낸 것이다. 글래드스턴이 처음에 고맙다는 눈치를 보낸 것이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아일랜드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치권을 얻어낼 정도의 역량을 갖추었다. 여기에 내 도움이 가해지면서 독립이라는 원대한 꿈까지 한 걸음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런 점에서 박 후작님의 요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우선 캐나다와 함께 자치령(Dominion)으로 독립시키고, 이후 독립 투표를 통한 영연방 존속 유무를 확인하겠습니다.”

“자치령이라, 영국 군주가 지배하는 영토로 남겨두겠다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헌법만 우리 영국과 공유할 뿐 통치는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투표는 자치령 존속, 영연방 존속, 완전 독립 세 가지 예시를 들도록 하지요.”

처음에는 영국에게 엄청난 짐을 지워줄 생각이었다. 그 생각과 달리 영국 입장에서는 앓던 이를 누가 두들겨 패서 뽑아낸 것과 같이 후련한 입장이다.

대한이 러시아 이주민이라는 변수를 꽁꽁 감춰둔 것처럼 영국도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라는 변수를 감춰두었다.

글래드스턴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아예 확정을 지었다.

“훗날 우리가 점거하는 남중국도 여론을 존중하여 같은 과정을 이행할 겁니다. 물론 지속적인 투자와 통치 체계 구축으로 이러한 불상사가 없도록 만들 예정입니다.”

직선으로 선을 그은 시점에서 지속적인 투자는 개판이 되고 통치 체계는 절대 구축할 수 없다. 남중국에서 수많은 부를 차지한 호족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글래드스턴도 속내를 숨긴 채 한발 물러나서 말하였다. 실질적으로는 타이완 섬을 먹어치우기 위한 기반으로만 사용할 예정이지만 그걸 말할 바보는 아니고.

영국이 이런 입장이 되자 프로이센과 네덜란드 그리고 미국 등의 국가들도 한 걸음 물러나 사태를 관망하였다. 이들도 나름 대화를 나누고는 결론을 내놓았다.

“아무리 보아도 여러 알력다툼으로 인해 통치에 난항을 겪을 것 같군요. 우리가 차지할 남중국은 자치령으로 출범하겠습니다.”

“좋은 방침입니다. 그러하면 우리 남중국 분할통치 관련 요구사항은 끝난 것 같군요.”

먹을 몫을 다 떼어낸 뒤에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차례다. 글래드스턴은 궁금한 듯이 청나라의 회복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 이야기를 다 제쳐놓고 청나라가 만에 하나라도 회복할 가능성이 있습니까?”

“절대 없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활동하시면서 청나라의 잔존 병력을 확인하신 적이 있습니까? 최소 연대 규모로 뭉쳐서 움직이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셨습니까?”

지도에는 아직 분할되지 않은 지역, 사천으로 향하는 입구 부분에 홍수전 세력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세력에 근접하는 두 병력을 표시하였다.

“청나라 추격대는 이미 끝났습니다. 사력을 다해봤자 뭘 어떻게 할 수도 없지요.”

“만에 하나라도 일어날 가능성은?”

“그리되면 제 정치적 외교적 목숨이 모두 날아가는 꼴입니다.”

정말로 없다니까. 이미 장교를 통해서 보고를 들었는데 공친왕이 얼마나 궁지에 몰렸는지 증국번에게 돈을 안 보낼 지경이라더라.

다들 내 판단에 고개를 끄덕이고 동의하였다. 그다음 과정은 청나라의 외부 영토에 대한 분할 시작이었다.

“먼저 신장은 티베트에게 분할하도록 하지요. 그다음은…….”

이 외의 영토 분할도 모두 마무리되었다. 외몽골이 북부를, 티베트와 위구르가 서부를 나눠 먹는 과정이다.

청나라는 사천에 콕 박혀버렸고 마지막 남은 영토는 너저분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이 지역은 어찌 분할할 생각이오?”

“못 합니다, 이 지역은 정말로 뼛속까지 중원(中原)이라 불릴 만한 땅이지요.”

낙양에 장안까지 있는 삼국지 시대의 땅에 손을 대면 정말로 아무것도 못 하는 꼴이 벌어진다. 최종적인 영토 분할은 여기까지로 하면 될 것 같다.

이제 남은 것은 증국번의 패배와 외몽골의 승리이다. 아마 후원(後元)이라 불릴 만한 국가가 형성되겠지.

* * *

한양에서 회담이 한창 진행될 무렵 중국의 명운을, 정확히는 청나라의 명운을 건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다.

태평천국군은 서안(西安), 옛 고도인 장안 인근에서 세력을 정비하고 한중(漢中)에서 사천으로 병력을 들여보냈다. 훗날 다시 대륙으로 나서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옛적 한고조 유방이 대륙으로 나설 때, 한중왕 유비가 촉나라를 세울 적의 전장이 바로 한중이다.

사천으로 향하는 길목이자 천혜의 요새이며 추격대를 붕괴시키기 가장 좋은 위치.

“폐하! 적도들이 엄습하고 있사옵니다!”

“드디어 왔구나.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는데 무턱대고 돌격할 이유는 없겠지.”

홍수전은 새로 만든 가마 위에 올라 머나먼 동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예상대로 추격의 주체는 대한제국이 아닌 청나라의 잔존 병력이었다.

머나먼 동쪽에서 집결한 적의 병력을 확인한 홍수전은 코웃음을 쳤다. 자신이 닥닥 긁어모은 2만 5천여 명의 병력과 비교하면 절반 이하에 불과하다.

그러나 기세 하나는 남달랐다. 그 병력의 출처를 대략적으로 알고 있는 홍수전은 아쉬운 듯이 혀를 차면서 말하였다.

“숫자가 적구나, 조선 놈들이 청나라에 돈이라도 많이 지급하였다면 짐을 위협할 만한 수를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인데.”

“실로 그러하옵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기세 하나는 삼엄하기 이를 데 없사옵니다.”

증국번의 병력은 박현상의 예상보다 조금 많은 9,000여 명에 달하였다. 홍수전의 도피 과정에서 친인척을 잃은 이들이 급료를 받지 않고 전투에 합류하였다.

그래도 희망이 없는 전투였다. 역사적으로 증명된 한중의 가느다란, 남북이 산으로 막혀 변수를 차단한 환경. 그리고 철저히 일전을 준비한 홍수전의 진영까지.

“아쉬운 일이로구나. 헛심이나 쓰고 돌아갈 것 같은 몰골이로다.”

홍수전은 멍텅구리거나 절박한 지휘관이 아닌 한 돌격 명령을 내리지 않을 것이라 방심하였다. 그러나 하루하루가 피가 말라가는 증국번 입장에서는 달랐다.

흙먼지에 뒤덮인 증국번의 진영에서는 돈 계산이 한창이었다. 후방에 있던 대한제국의 장교들은 금이 잔뜩 담긴 수레를 가져와 이를 잘게 쪼개서 급료 지급을 실시하였다.

“금 한 냥에 두 돈이오. 무게를 확인하시구려.”

“댁들이 지급하는 돈이니 맞겠지. 조선 사람은 믿을 만하다니까.”

수레 가득 담긴 금도 수많은 병사들의 손에 들어가자 어느새 바닥나기 시작했다. 급기야 금이 아닌 은을 섞어서 지급하고 마침내 증국번이 직접 재물을 분배했다.

“이 진주라면 금 한 냥 반 정도는 할 거요. 어쩔 수 없는 형편이니 받으시오.”

“그것보다는 덜될 것 같은데……. 뭐 진주도 괜찮은 편이긴 하지.”

본래 장례식 비용을 제외하고 500만 냥 이상을 보내왔어야 할 급료는 공친왕의 망설임 때문에 줄어들었다.

이번 달 급료를 지불하자 증국번의 장신구마저 뜯겨나갈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국번은 마지막 희망을 품고 있었다.

급료를 받기 위해 모인 병사들에게 증국번은 일장연설을 준비하였다. 저 멀리 있는 홍수전의 진영을 가리키고 어떻게든 최후의 일전을 벌이기 위한 모습이었다.

“병사들은 모두 들으라. 이제 놈들의 후발대를 추격하고 한중을 손아귀에 둘 차례이다!”

옛 고사와 설화에 능통한 증국번은 어떻게든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상황을 최대한 유리하게 포장하였다. 그는 최소한 홍수전을 죽이거나 사로잡기 위해 전략을 세웠다.

설령 태평천국의 잔당을 소탕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충분한 공훈을, 막대한 타격을 입히면 대한제국이 청나라를 당장 내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첩보에 의하면 역도들의 본대는 한중을 넘어 사천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할 일은! 놈들의 후발대를 제압하고 사천으로 향하는 잔도(棧道)를 막아 고립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월급은 어찌합니까! 우리 급료도 주셔야지요!”

어찌나 신뢰가 없는지 병사들이 벌써부터 급료를 지급하지 못할 것이라면서 아우성을 쳐댔다.

이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던 증국번은 너무나 합당한 답변을 제시했다.

“좋은 말이로구나. 한중을 차지하고 잔도를 막으면 놈들은 한 줌의 병력을 움직이는 것이 전부이다. 그 한 줌의 병력을 사냥할 병사만 남기고 놈들을 틀어막을 것이다!”

증국번은 어쩔 수 없는 거짓말을 하였다. 태평천국군은 추격대를 격파한 뒤, 더 많은 병력을 끌어들이고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한중에 남아 있었다.

그 진영이 얼마나 삼엄한지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기적 같은, 단 한 번의 승리를 위하여 거짓말을 하였다.

“그럼 공의 기준은…….”

“적도를 더 많이 죽일수록 공훈을 세울 것이다. 전열보병이라면 지휘관이 추측한 수급의 양으로! 포병이라면 정확하게 포격을 가한 횟수로!”

서쪽에 아득하게 펼쳐진 사천 지방, 옛 진나라의 영토를 가리킨 증국번은 큰 소리로 병사들에게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틀 뒤 새벽에 진격할 것이다! 떠오르는 해를 등져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놈들의 본대가 잔도를 통해 증원을 보내기 전에 격멸하려면 신속하게 적을 말살하라!”

증국번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도는 불꽃이라 표현할 만한 아름다운 돌격으로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홍수전이 남겨둔 후발대를 뚫고 무차별적인 진격을 거듭한 사람들은 돈에 고용된 이들과 친인척의 복수를 위해 집결한 이들이 함께하였다.

“돌격! 다들 돌격하라! 놈들의 방어선을 차지하고 일자진으로 진영을 고쳐라!”

“놈들은 우리를 노려 쏘지 못한다! 따뜻한 햇살을 등진 채 진격하라!”

무자비한 첫 돌격에 질린 개별 지휘관들이 무너져 내리는 동안 태평천국의 병사들이 속절없이 궤주하였다. 그러나 홍수전과 중앙 지휘관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나갔다.

“참 대범한 놈이로구나! 삼분의 일 조차 미치지 못하는 병력을 가지고 기습을 하다니!”

“천병 대령하였사옵니다! 폐하께서 친히 군을 지휘하시옵소서!”

전장은 공훈에 미친 병력들, 돈에 굶주린 이들 그리고 복수를 위해 움직이는 자들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되었다.

홍수전은 이 모습을 보면서 적의 약점을 찔러나갔다.

“짐이 보기에는 중앙에서 조금 좌측의 병력들이 처지는구나. 천병(天兵) 삼천 명을 투입하라!”

꽹과리 소리와 북소리가 울리며 홍수전이 자랑하는 천병, 북경에서 온존한 최정예 병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온전한 전열보병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막 함락된 진지를 사이에 두고 서로 일자진을 펼쳐 총격전을 이어갔다. 하나둘씩 병사들이 죽어 나가자 증국번이 고용한 병사들은 살길을 찾아서 분열되었다.

전투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미리 대피한 대한제국군 장교들을 따라, 마치 개미가 설탕을 따라가듯 후방으로 궤주하였다.

해가 점차 떠오르자 태평천국군은 시각적인 불리함을 극복하고 더욱 활발하게 공세를 취하였다. 기습의 효과가 사라지자 세 배에 달하는 병력이 쐐기처럼 증국번의 진영을 파고들었다.

“전열이 무너졌습니다! 포병대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우측면 궤주!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져 궤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적들이 돌입합니다! 소수의 기병을 앞세워 주파합니다!”

연이은 보고가 끝나자 만주족 고위 관료들과 증국번의 얼굴은 시체의 색처럼 푸르죽죽하게 변모하였다. 그러던 중 증국번의 어깨에 누군가가 손을 얹고 말하였다.

“적들이 예상보다 강하구려. 병력을 퇴각시킵시다.”

“우리는 할 일을 다 하였소. 공친왕 전하께서 자금을 모조리 융통하셨다면 모를까.”

“세 배에 달하는 적 병력에 저 정도의 피해를 입힌 것으로 만족합시다.”

진영을 살펴보던 증국번은 마지막으로 망원경을 들고 흙먼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세찬 바람이 불며 진영 안에 있는 황금색 가마, 홍수전이 타고 다닐 법한 가마가 보였다.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저 역도라도 죽인다면 공훈을 세우는 법 아닙니까?”

“그래도 우리 같은 놈들이…….”

“할 때까지는 해봐야지요. 저는 가겠습니다.”

평생 칼이라고는 잡아본 적 없는 증국번은 대한제국 장교에게 사들인 권총을 양 허리춤에 차고 말에 올랐다. 그러자 다 늙어빠진 만주족들도 코웃음을 치다 말 위에 올랐다.

이들도 지금까지 당해온 굴욕에, 청나라 황실이 당한 처우에 분노한 것이다. 한 만주족은 자신의 사라진 굳은살 자리를 더듬어 보며 말하였다.

“내가 창을 휘둘러 본 것이 이십오 년 전이거늘 또 휘두를 줄이야.”

“난 칼을 휘두르다가 내 뱃살을 찔러 버릴 것 같은데.”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었다. 가까스로 사기를 유지한 채 돌출된 병사들, 홍수전의 진격에 희생당한 이들의 유가족들이 모인 병력을 향해 증국번이 박차를 가했다.

“다이칭 구룬을 위하여!”

-다이칭 구룬 만세!

청나라를 위한 마지막 만세소리가 진영에 울렸다. 적진에 고립된 병사들에게 합류하는 동안 절반이 희생되고 증국번도 투구에 총탄자국을 남긴 채 가까스로 합류하였다.

병사들은 구원보다는 한 놈이라도 많은 적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말고삐를 고쳐 잡고 투구를 바꿔 쓴 증국번은 병사들 앞에서 권총을 들어 보이며 말하였다.

“가자! 병사들이어! 한 몸이 되어 역도를 죽이자!”

“알겠습니다! 장군께서 함께하신다! 우리가 길을 열어라!”

최후의 명운을 건 돌격이 시작되었다. 발작적인 기습에 대처하지 못한 천병들이 밀려나는 사이, 화살촉 형태의 진영 속에서 한 무리의 기병이 돌출하였다.

“장군님을 호위하라! 우리가 몸으로 막아내야 한다!”

“닥치는 대로 쏘아라! 길을 뚫어라!”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사이 증국번과 만주족 기병들은 점차 홍수전의 가마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이 모습을 지켜보던 홍수전은 코웃음을 쳤다.

“기습을 할 때부터 네놈들의 수작을 훤히 알고 있단 말이다!”

점차 다가오는 적 병력을 흘겨보던 홍수전이 명령을 내렸다. 지금까지 바닥에 엎드려 있던 천병들이 일제히 도열하며 진영을 갖춰 나갔다.

-사격 개시이이이!

만주족 기병들은 집중사격을 받아 말과 함께 평원에 널브러졌다. 이미 대부분의 병력이 멋대로 퇴각한 상황, 홍수전은 천병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게 전부일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궤주하는 놈들을 소탕하고 마지막 돌격을 실시한 놈들 중에 생존자가 있는지 확인하라!”

저 머나먼 동쪽으로 태평천국군이 뛰쳐나갔고 홍수전은 생존자가 있을지 기대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한 팔에 총탄을 맞아 피를 철철 흘리는 증국번이 사지를 사로잡힌 채 끌려왔다.

“자네가 이 자리에 있다니. 셍게린첸은 어디서 굴러다니다 죽었나 보군.”

“네놈은 천참만륙을 당해도 모자를 놈이다!”

증국번의 입에서 부러진 치아와 피가 섞인 침이 홍수전의 얼굴에 뿌려졌다. 그 피를 수건으로 닦아낸 홍수전은 못내 아쉬운 듯이 제안을 하였다.

“이제 다 망한 국가의 충성을 바치지 말고 내 벗이 되어 새로운 나라를 경영하세나.”

“새로운 나라? 피와 시신 위에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조금만 더 생각해 보게나. 지금 청나라가 사력을 다하여 이룩한 결과가 고작 이 한 줌의 병력 아닌가. 그런 나라에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다네.”

홍수전은 못내 아쉬운 듯이,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듯이 증국번을 설득하였다. 그가 진심으로 사귄 친구이며 처음으로 포섭하려다 포기한 올곧은 사람이었다.

“조만간 무너지고 비참한 꼴을 당할 네놈 아래에 들어갈 마음 따위는 없다.”

“아직 형편을 모르는군. 내가 사천에 들어가 몇 년 동안 세력을 부풀리면 조선 놈들이 전력을 다해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야. 그런데도 이토록 고집을 부리다니.”

홍수전은 점차 정리되어가는 전장을 보면서 고민에 빠졌다. 증국번을 죽여서 목을 되돌려 보낼지 아니면 적당한 장소에 유폐할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 와중에 저 머나먼 동쪽에서 함성과 기괴한 진동이 들려왔다. 증국번은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홍수전에게 질문을 하였다.

“지금 상황이 어떠한가. 자네 아래의 병력이 얼마나 남았는가?”

“제법 큰 타격을 입혔지. 보고에 의하면 병사 사천여 명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더군.”

“그래. 그러면 나는 실패했군.”

“나는 실패했다? 병력이 이만 명이 넘게 남아 있는데?”

홍수전이 동쪽을 보자 증국번의 병력을 추격해 소탕하기 위해 보낸 병사들이 어느새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 모습은 아무런 질서도 없는 패잔병에 가까웠다.

“후발대…….”

곧이어 먼지구름이 보이고 진동이 더욱 커졌다. 그 무렵 전방에서 보내온 전령이 홍수전에게 재차 보고를 올렸다.

“셀 수 없이 많은 기병들이 난입하고 있습니다! 최소 일만 명 이상입니다!”

한중의 진입로를 향해 적게 잡아도 2만여 명에 달할 외몽골과 셍게린첸 휘하 만주족 연합이 진격하고 있었다.

이들은 증국번에게 시일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양보하는 척 먼저 보낸 것이다. 홍수전이 증국번을 바라보자 그는 한참을 웃다가 답하였다.

“자네를 죽이기 위한, 청나라를 차지하기 위한 놈들이라네.”

증국번에 발작적인 돌격에 무너진 진영을 수습하는 것조차 문제였다. 더군다나 병사들의 보급과 병장기 손질조차 끝나지 않았다.

홍수전에게 마지막 심판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가 한때 읽었던 성경에 나오는 기수처럼, 한때 전 세계에 흑사병과 전쟁 그리고 황폐화와 죽음을 안겨준 몽골의 병사들이었다.

#작가의 말

지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많이 역겨운 지도라서 관람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삽화329-1

오로지 상대에게 딴죽 걸고 엿을 먹이기 위한 욕심이 그득한 지도지요.

삽화329-2

이쪽 지역은 50년조차 통치하지 못할 영국맛 지도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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