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321화 (287/345)

321화

25장 1화 추격 개시

영국군 해병대의 돌격과 세포이의 포위망 형성으로 양수청과 태평천국의 수뇌부가 사로잡히게 되었다.

태평천국의 손에서 북경과 남경이 재탈환된 시점에서 태평천국의 남은 세력은 도주를 이어갔다.

“며칠 뒤에 염군의 병사들이 합류할 예정이다! 이 지역에 진영을 설치하도록!”

북경이 함락당하고 3주일이 흘렀다. 쉴 새 없이 도주한 태평천국군은 진작 하북을 넘어 서안(西安), 옛적에 장안이라 불리던 지역 인근까지 도달하였다.

휘하 병력은 1만 4천여 명에 불과하였지만 하나같이 홍수전의 명령을 듣는 천병들이었다. 곧이어 진영이 차려지고 홍수전이 황색 옷자락을 흩날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수성이 퇴각하지 못하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후방에 남은 이수성은 결국 탈출하지 못하였다. 홍수전은 지금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이수성을 떠올리고 표정을 일그러트린 다음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황제폐하께 인사를 올리옵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으니 이제 보고를 들을 차례다. 각지에 파견한 첨병들은 돌아왔는가?”

“며칠 전부터 복귀하여 이제 장계를 정리하였사옵니다.”

홍수전이 잠시 기다리고 있자 에게 지난 3주일 동안 벌어진 일에 대한 보고가 시작되었다.

“먼저 북경 인근에 둔 세작의 보고입니다. 내부로 잠입하지는 못하였지만 계속해서 재판이 벌어지고 함성이 들려온다 합니다.”

“다음으로는 기이한 소식입니다. 북경에서 외부로 나온 사람의 증언을 들어 보았는데 수천여 명에 달하는 백성들이 자금성 인근에서 쟁의(爭議 -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합니다.”

“조선군은 아직 북경 인근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간혹 외몽골에서 내려온 병력들이 주변을 순시하지만 북경에서 멀리 떨어질 때쯤 다시 복귀한다 합니다.”

홍수전은 자신의 예상대로 상황이 돌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하였다. 그리고는 간부들의 표정을 한 번씩 살펴본 다음 호기롭게 말하였다.

“놈들은 지금 자중지란을 일으키고 있다. 아마도 몇 달, 길게는 몇 년 동안 고생하겠군.”

홍수전의 논리는 간단했다. 청나라의 핵심 계층인 만주족이 엄청난 타격을 입은 이상 대한제국이 할 일은 두 가지로 제한된다.

그 두 가지 모두 북경에서 퇴각한 태평천국에게 충분한 시간을 만들어 줄 것이라 자신하였다. 홍수전은 양손의 검지를 펴고 이를 좌우로 까딱거리며 말하였다.

“조선군은 북경을 함락하느라 보급이 떨어지고 힘이 빠졌어. 그런 상황에서 짐을 몰아내 북경을 탈환한 주제에 만주족 놈들을 복귀시키는 크나큰 실책을 저질렀지.”

“그러한 것 같사옵니다. 다만 만주족을 황위에 복귀시키는 실책이라 하시면…….”

“놈들의 선택은 두 가지다. 첫째는 북경을 함락시킨 공훈을 세워 만주족을 쫓아내고 자신들이 옛 만주족처럼, 아니면 그 이전의 수많은 왕조처럼 천자(天子)를 자처하는 것이지.”

홍수전은 자신이 배워온 역사에 근거하여 대한제국이 중국에 흡수된 수많은 이민족처럼 천명을 거머쥘 수도 있다고 판단하였다.

“자금성에서 만주족을 쫓아내고 조선 왕이 이 나라를 통치할 것이라고? 그게 쉬운 일 같나? 식자층은 물론이고 만주족의 잔당까지 모조리 청소해야 하는데?”

“하오나 만주족을 즉각 숙청하고 민심을 바로 휘어잡을 수도 있지 않사옵니까?”

“천명을 제대로 보존하려면 남경까지 탈환해야 한다. 그런데 양수청이 그리 호락호락한 놈이던가? 더군다나 곧이어 곡식을 수확할 시기인데 군대를 움직일 수 있겠나?”

천명을 거머쥐려는 순간부터 청나라라는 거대 국가를 온전히 통치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조만간 수확할 곡식들을 남경에서 가져와 화북 일대에 공급할 의무도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양수청이 점령한 남경을 탈환하고 빠르게 통치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홍수전은 까딱거리던 오른손 손가락을 접고는 코웃음을 섞어가며 말하였다.

“그 과정이 너무나 험난해서 포기하였지. 대신 다 죽어가는 만주족 놈들을 복귀시키고 이들을 앞세우려는 우둔한 수를 써버렸다.”

홍수전은 북경에서 일어나는 시위가 만주족이 권력을 다시 잡으며 벌어진 항의라 생각하였다. 그는 왼손 손가락을 여전히 까딱거리면서 자신이 저지른 일을 논하였다.

“짐의 계략이 통했다는 말이기도 하지. 조선 놈들은 효와 충을 중시하는데 만주족의 역대 자라새끼들을 능멸한 모습을 보고 어쩔 줄을 몰라 했을 거야.”

“실로 옳은 말씀이옵니다. 무능력하고 쓸모도 없는 만주족에게 명분을 준 시점부터 조선군은 놈들의 복수심에 휘둘릴 것이 분명하옵니다.”

“거기다가 또 다른 효과도 있지. 아직까지 재판이 벌어진다고? 그럼 우리의 병졸들을 모조리 죽인 것을 넘어서서 짐과 인연이 닿은 사람을 모조리 죽이고 있는 거다.”

실제로는 재판 과정을 정확하게, 사리를 분별하고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철저하게 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리는 상황이었다.

홍수전은 대한제국이 제3의 길, 천명을 붕괴시키고 중국을 분열시키는 길을 선택할 것이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의 관념을 한참 넘어선 행동이라 생각은커녕 갈피조차 못 잡은 것이다. 홍수전은 팔짱을 끼면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태연하게 말하였다.

“엉망진창이 된 북경에서 시민들이 쟁의를 일으킨다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어 나갔으면 쟁의를 일으키나? 조선군이 그 꼴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궁금하군.”

“혹여나 만주족을 뒤늦게라도 내치지 않을까요.”

“그럼 더 좋은 일이지. 짐이 보기에는 앞으로 짧아도 일 년, 길게는 삼 년 정도 대륙 전체가 혼란에 빠질 거다. 그럼 우리가 할 일이 뭘 것 같나?”

간부 대다수는 홍수전의 판단을 신뢰하였다. 대한제국군과 얽힌 순간부터 패전을 거듭했지만 그 이전까지는 대부분의 일이 홍수전의 판단대로 돌아갔다.

비록 퇴각 과정에서 주요 간부인 이수성이 붙잡혔지만 홍수전과 그 휘하의 충성스러운 병력, 천병만큼은 보존할 수 있었다. 간부들은 두서없이 의견을 제시하였다.

“신이 보기에는 아예 사천 지방까지 퇴각하는 것도 옳은 방법일 것 같사옵니다. 옛 촉한(蜀漢)의 땅을 기반으로 다시금 번성하시어 일전을 벌이시옵소서.”

“염군의 잔당과 백련교 잔당들을 훈련시키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북경에서 가져온 금은보화가 사백만 냥 가까이 있사오니 이들을 천병으로 새로 벼려내시옵소서.”

태평천국군은 추격대 편성에 여섯 달은 족히 걸릴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 생각과 달리 북경은 온전히 대한제국이 통치하고 있으며 추격대가 막 편성되기 시작하였다.

* * *

북경은 겉으로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태평천국군에 피해를 입은 백성들의 울분을 토해내기 위해 만주족 지배계층을 내세운 상황이라 연일 시위가 벌어졌다.

-조상이 부끄럽지도 않느냐!

-뇌물을 먹을 줄만 아는 놈들은 어서 꺼져라!

-고작 한 줌의 반란군에게 패한 놈들은 속히 자결하라!

새벽부터 백여 명이 몰려와 고함을 쳐댔고 시간이 갈수록 숫자가 늘어났다. 점심 무렵이 되자 수천여 명에 달하는 북경 시민들이 자금성 앞, 오문(午門) 앞에서 고함을 치고 있었다.

이들의 시위 대상은 오른쪽에 있는 태묘(太廟)에까지 미쳤다. 한 무리의 시민들이 담을 넘어 태묘로 침입하려다가 대한제국군 병사들에게 제지당하였다.

-연행해! 주요 건물에 무단 침입하면 재판에 처해진다고 그토록 말하였거늘!

-재판을 받아도 할 말이 있소! 놈들의 위패를 거두어주시오!

-할 일이 있고 못 할 일이 있지! 입 다물어!

지금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병사들의 손에 이끌려 노역 현장으로 끌려갔다. 그 모습을 보니 대한제국군이 철수한 이후 벌어질 일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이러다가 자금성이 백성들의 손으로 불타버릴지도 모르겠소.”

내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북경의 고위 관료, 홍수전에게 고개를 숙이고 복종을 맹세했던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였다.

이미 북경의 식자층과 부유층은 천명이 대한제국에 넘어왔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나와 태자에게 뇌물을 바치고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대한제국의 통치를 받아들이려 하였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나 천명을 상실하면 언제나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지요.”

“오히려 대한제국의 태도에 마음이 놓입니다. 저 궁궐에 새 지배자가 들어오는 그 날을 위해 옥좌를 덥힐 사람을 잘 관리하지 않습니까?”

늙수그레한 노인들은 탐욕과 권력욕에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에 자신들의 떳떳하지 못한 행위, 홍수전에게 동조한 행동을 드러내지 않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기회만 되면 효명제를 이 자리에 앉혀놓고 대한-청의 이중제국을 만들려는 생각이다. 애초에 천명을 집어삼키는 일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어서 이들의 말을 애써서 받아넘겼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동맹으로서 맡은바 소임을 다하고 있을 뿐이오.”

“그런 일을 하면 쌀이 나옵니까? 돈이 나옵니까?”

“그 소임이 끝나면 더 많은 일을 할 것 같은데요. 저 드넓은 궁궐을 정돈하는 일이라던가요.”

얼마 전까지는 간접적으로 의견을 드러냈다면 이제는 아예 제위에 얹어버리려고 소매를 잡아당기는 수준이다. 더 이상 답은 하지 않고 정기 보고를 들으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외부대신님, 조정에서 전신을 보내왔습니다. 듣자 하니 영길리에서 보내온 전신이라 합니다.”

“영길리에서 조정에 전신을 보내? 여기가 아닌 조정에?”

영국이 조정에 전신을 보낼 줄은 몰랐다. 궁금한 마음에 전신을 확인해 보니 권고를 가장한 명령에 가까운 내용으로 시작되었다.

-우리 영국은 불안한 청나라의 정세를 수습해 여러 국가의 안정을 추구하려 합니다. 따라서 남중국 일대를 남경을 중심으로 삼은 다국적 분할 통치로 지배하겠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눈앞의 이득에 취하여 무리수를 두었다. 영국이 간접 통치하는 인도 식민지처럼 남중국을 다국적 분할 통치하는 계획을 잡아둔 것이다.

내가 바보도 아니고 영국의 수준을 모를까. 놈들은 할 때는 하는 놈들이고 가장 잘하는 짓은 잘나가는 국가 다리걸기, 다음으로 잘하는 짓은 다른 국가 뒤통수 후려치기다.

이건 둘 다 해당 되는 행위다. 대한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다리를 걸듯 남중국에 자신의 세력으로 알박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던 일이기도 하지만. 그나저나 영국 꿍꿍이가 한눈에 보이는데.”

영국은 인도를 통치해 본 입장이라 중국과의 차이를 아주 잘 알고 있다. 중국을 단기간 분할통치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장기간 분할 통치? 절대로 불가능하다.

영국 의회는 이 사실을 알고도 대한제국을 쏙 빼놓고 분할통치 제안을 하였다. 이걸 보니 영국의 속내가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이놈들 완전히 졸아 눌려 버렸네.”

놈들은 대한제국이 천명을 획득하는 걸 두려워하고 있다. 애초에 대한제국은 열강의 말석이자 특기는 정교한 통치 체제와 빠른 발전도상이다.

이런 장점을 가진 대한제국이 거대한 중국 대륙을 꿀꺽 집어삼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대륙을 통치하려 허우적거리다 자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계획을 세울 때에는 최악의 경우를 감안해야 하는 법. 이들은 모든 부정적 요소를 극복한 대한-청이 한 몸이 된 초거대 국가가 만들어지는 미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여기에 또 다른 계산도 엿보였다. 영국은 굳이 영토나 통치권에 욕심을 드러내지 않은 채 영국에게 가장 좋은 지역을 슬쩍 끼워 넣었다.

-해당 지역에는 타이완 섬과 부속 도서가 포함됩니다. 다만 프랑스의 점령지는 주요 참전국인 프랑스의 권한을 존중하여 추후 협상을 한 뒤에 분할하겠습니다.

-이외의 사항에 대해서는 북경 혹은 남경을 중심으로 삼은 회담을 통해 규정하겠습니다.

“타이완 섬에 알박기를 시도하는구나. 하긴 지금부터 잘 투자하면 사십 년 정도 지났을 때에는 완벽한 영연방의 일원이 되어 있기는 하겠다.”

영국 입장에서는 회심의 수를 둔 것이라 생각하고 있겠지. 대한제국이 천명을 획득하지 못하며, 다른 국가들을 깊은 수렁에 빠트리고 자신은 유유자적하게 이득을 보는 수를.

그 회심의 한 수는 애석하지만 나와 대한이 원하던 행동이다.

상대를 낭떠러지로 밀어버린 것이 아닌. 험난한 산을 오르는 데 등을 떠밀어주는 행동이나 마찬가지다.

애초에 획득할 필요도 없는, 바닥에 즉시 내쳐버릴 천명이 강제로 손에 쥐어지려 할 참이었다. 그런데 그 천명을 획득하지 못하게 자기들이 내던지는 신세가 아닌가?

다음으로는 효명제의 명령이 적혀 있었다. 이미 천명 획득보다는 중국의 분열과 괴뢰국가 형성에 초점을 맞춘 정책을 펼치고 있어서 변명에 가까운 긍정이 적혀 있다.

-서역의 열국들이 이번 사태로 많은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이들의 권리를 존중하며 서로 지나친 이득을 탐하여 부끄러운 일을 벌이지 않도록 노력하라.

-또한 주요 참전국인 영길리가 남경을 단독으로 점령하지 아니하였다. 그러하니 이 나라도 북경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준에서 정책을 조절하도록.

효명제도 한 발자국 물러나 영향력 행사와 괴뢰국가 설립에서 만족하라 하였다. 아마 다른 국가와의 회담을 통해 직접 통치가 가능한 영역 정도는 선물로 챙길 수 있을 거다.

“이 정도 선물을 받았다면 타이완 섬 정도는 넘겨줘야겠지. 대신에 앞으로 남중국을 지배하면서 머리가 지끈거릴 일이 아주 많을 거다.”

나중에 시간을 들여 다른 선물도 제공하면 좋을 것 같고. 일단 대한제국에 줄을 대기 위해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는 북경의 부호들과 면담을 재개하였다.

“서신을 받으러 다녀오신 것 같습니다. 혹여나 황제께서 긍정을 표하셨는지요.”

“일이 그리 순탄히 흘러가지 않게 되었소이다. 이번 사태에 개입한 서역의 열강들이 이 나라가 천명을 획득하는 일을 거부하기 시작하였군.”

한문으로 번역한 서신을 보여주자 부호들이 이를 돌려보았다. 그들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 눈치를 살피더니 간절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말하였다.

“이 어찌 흉측한 일이. 홍이들이 감히 대한의 융성을 방해하는 꼴 아닙니까?”

“무시하시지요. 천하를 획득하면 홍이들을 물리치고도 남을 힘을 얻게 될 겁니다.”

그 홍이에게 탈탈 털린 것이 본래 중국의 역사이다. 또한 지금 대한제국의 역량으로 열강을 상대로 방어할 수나 있지 중국 대륙에 힘을 쏟아가며 맞서 싸울 능력은 없다.

“그 과정에서 수십 년 동안 고통을 겪게 될 거요. 우리 대한은 물론이고 이 나라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게 만들려고 혈안이 되어 한 몸으로 움직일 것 아니오.”

억지로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 표정을 관리하였다. 슬픈 생각, 정약용이 유언을 남길 때의 생각을 하면서 눈물을 한 줄기 흘리고 이를 훔친 다음 말하였다.

“나 또한 무능한 만주족에게 지배당하고 태평천국에게 가혹한 행위를 당한 북경의 백성을 다독이고 싶은 마음뿐이오. 그러하나 이 나라를 시기하는 세력이 넘쳐나지 않소.”

잠시 침묵한 다음 사람들의 태도를 살펴보았다. 이들은 연줄을 댄 대한제국이 물러나면 다시 만주족이 통치할 것이라 생각하여 발을 빼려는 눈치였다.

그러니 본래 의도를 숨기고 바짓가랑이를 부여잡듯 부호들에게 간절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서역의 열국들은 이 나라가 북경을 지배하고 대륙을 집어삼키는 꼴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거요. 그렇다고 무능하고 잔악한 놈들에게 북경을 넘겨주지는 않을 것이고.”

“그러하면 대안이 있습니까? 덕이 높은 사람을 왕으로 옹립하기라도 하면요?”

“의심할 거요. 아마 옹립 과정에서 대한의 의사가 들어가 엉뚱한 사람이 왕이 되었다고 시비를 걸고 헐뜯기 시작하겠지.”

아마 영국에게 이득 좀 떼어주고 프랑스에게 눈치 좀 보면 새로운 왕을 옹립하는 작업이 가능할 것 같다.

대신 열강들이 새로운 왕을 통해 대한을 견제할 길도 열어주는 꼴이고. 내가 의도한 대로 제3의 인물에게 북경을 넘겨주기 위한 제안을 하였다.

“답답한 상황이나 단 하나의 대안이 있소.”

대안이라는 말에 모두가 나를 바라보았다. 만주족도 아니요, 대한제국도 아니요, 새 황제 옹립도 아닌 상황에서 그나마 만족할 수 있는 답이 있었다.

“본래 이 나라를 지배한 만주족은 몽골과 동군연합을 맺고 양 국가를 지배하였소. 그러하니 외몽골의 왕족이 북경과 그 일대를 통치하면 어떠할 것 같소?”

“그……. 그런 무지렁이에 법도 질서도 없는 놈들은 아니 됩니다!”

“하지만 다른 대안도 없지 않소이까? 더군다나 외몽골은 우리 대한과 밀접한 관계라 통치를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우리 대한의 관료들이 보조를 위해 들어오게 될 거요.”

부호들 모두가 고민을 하였다. 옛 원나라의 실패를 떠올리고 만주족의 하수인 혹은 만주족에게 숙청당하여 갈기갈기 찢긴 몽골의 세력 구도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외몽골의 병사들이 공훈을 세우기는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보조 병력입니다.”

“서역 입장에서는 큰 공훈을 세웠소. 수백 명에 달하는 생존자들을 북경에서 구출하여 우리 대한으로 구해준 사람이기도 하지.”

부호들은 한참을 고민하며 서로 귓속말을 나누었다. 그리고는 최소한의 합의점을 제출하기 위하여 나에게 제안을 시작하였다.

“그러하면 외몽골 측에 조건을 제시하겠습니다. 우선 등용과 관련하여 차별이 없어야 하며, 옛 재산을 보존해야 하고, 사람을 핍박하거나 능멸하지 않아야 합니다.”

“여부가 있겠소. 오히려 내가 약조하고 싶은 바요.”

“또한 그 과정에는 대한제국의 엄정한 심사가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세금만 걷고 군대만 제대로 굴리라는 소리와 같았다. 지배자가 아닌 북경을 소유할 권리를 지닌 일종의 집 주인 이상의 권리는 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

그 관리자이자 중개인으로 대한제국을 내세워 폭압적인 통치를 방지하기까지 하였다. 여기에 셍게린첸과 약속한 사항을 논하기 시작하였다.

“그 제안은 받아들이겠소. 또한 공훈이 부족한 것도 인정하니 태평천국을 추격하는 작업을 몽골의 군대에 일임할 것이오. 이들이 홍수전을 죽이거나 생포해야 북경을 넘겨줄 거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미 도주하고 한 달 가까이 지난 적도들 아닙니까?”

“꼭 해야 할 일이오. 우리 대한제국군이 진군하면 얼마나 많은 자금이 소모되겠소?”

본래는 여러 작업을 통해 부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세심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런데 영국의 견제 때문에 이 작업이 매우 쉽게 되어버렸다.

부호들은 앞으로 외몽골 군대가 겪을 고난과 반란군 수괴를 사로잡는 공훈을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아직도 시위를 벌이고 있는 오문 앞 광장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만주족들도 조만간 병력을 이끌고 홍수전을 추격할 것이라 하였소. 둘 중 홍수전을 먼저 사로잡는 군대에 자금성을 넘겨주면 괜찮을 것 같구려.”

“자금성의 교환권이 홍수전의 목에 달려 있는 꼴이군요.”

부호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남은 자금을 털어내 외몽골 병사들을 지원할 것이 분명하다.

지금 외몽골에게 투자하면 나중에 더 많은 자금을 돌려받는 보답을 받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그 판단에 동참하고자 군자금으로 은자 이백만 냥을 먼저 투자하였다.

며칠 뒤, 북경에서 보인(保人 - 보조 병력)을 소집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공친왕을 앞세운 만주족의 모집 장소에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았지만 외몽골에게는 수많은 인파가 성 밖에서부터 몰려왔다. 아예 하북 전체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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