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320화 (286/345)

320화

24장 11화 흉악한 족속(3)

본국의 전신을 받은 장성들은 불편한 기색으로 전신을 읽어나갔다.

군대를 파견할 때는 완벽한 복수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제는 상반된 명령이 하달되었다.

<남경을 중심으로 삼아 남중국 일대를 분할통치할 예정>

<독가스 병기의 사용을 금지할 것. 또한 지금까지 지나친 사용으로 인해 훗날 문제를 야기할 것 같다면 최선을 다하여 사과하고 점령지 민간인의 민심을 영국의 편으로 만들도록>

<다른 국가와 연합작전을 벌여도 무방함. 대신 주 전선은 담당할 것>

<전신이 도착하기 이전에 발생한 문제에 대해서는 의회에서 책임을 질 것임>

“의회에서 집단으로 발작을 일으켰나. 남중국 일대의 분할 통치? 왜?”

담배 파이프에 불이 붙고 연기가 시커먼 막사 안을 가득 메웠다.

전신을 보낼 것이면 최소한 한 달 전에, 늦더라도 열흘 전에 보낼 것이지 이제는 일이 돌이킬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분할 통치고 뭐고 간에 승리를 거두고 빠져나오기 위해 전략을 세웠는데 갑자기 이 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머무르게 생긴 것이다.

제임스 호프는 아무 말도 없이 담배를 피워댔다. 그 연기에 다른 연기가 섞이며 너구리굴처럼 매캐한 연기가 막사 안을 메웠다.

이윽고 다른 장성인 마이클 시모어가 전신 내용을 몇 번이고 읽어본 다음 말하였다.

“의회가 어떻게 책임을 질까요?”

“낸들 아나. 적당히 경력 있는 허수아비 한 명을 데려와서 조리돌림을 시키겠지.”

제임스 호프는 아마 은퇴를 앞둔 어중간한 관료를 대상으로 삼을 것 같다며 중얼거리고는 파이프를 비우고 다시 담뱃잎을 눌러 담았다.

영국 의회의 명령은 앞뒤 내용을 쏙 빼놓은 결과만 전달되었다. 이들은 남중국을 분할하여 영구히 통치할 수 있다는 장밋빛 그림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실제로는 분할통치로 시선을 돌려놓고 타이완 섬의 영연방화를 위한 또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는 상황이다.

그 작업을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는 상황이라 현지 군대에도 더 이상의 정보는 주어지지 않았다. 성냥이 점화되고 담배연기와 함께 짜증이 새어 나왔다.

“민심을 어떻게 돌려놓으란 말이지? 우리가 역병신이라 불리는 꼴인데 그 역병신이 분할 통치를 한다고? 허수아비가 욕을 좀 먹는다고 끝날 일이긴 한가?”

“그게 말입니다. 제가 좀 생각을 해보니 청나라 사람은 돈에 미쳐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지. 지금 황제의 이복동생이 살아남은 이유가 반란군에게 뇌물을 먹여서 살아남았잖아? 더군다나 남경 수비병들도 뇌물을 먹고 근무를 태만히 하였고.”

“그럼 반란군이 약탈한 돈을 돌려주면 민심이 저절로 돌아오지 않을까요?”

제임스 호프는 불이 올라오는 담배 파이프를 빨아들이다 기침을 내뱉었다. 사레가 들려 한참 동안 기침을 한 그는 마이클 시모어를 빤히 바라보며 말하였다.

“제정신인가? 그 고통을 겪고 살아난 사람들이 몇 푼에 우리 편을 들어줄 거라고?”

“우리가 행패를 저지르긴 했지만 태평천국이라 칭하는 반란군보다는 덜 한 편입니다. 아시다시피 북경보다 덜할 뿐 남경 전선에서도 흉악한 일이 벌어졌지요.”

북경 전선의 객가들과 달리 남경 전선의 객가들은 조금이나마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사관 폭발 같은 사태도 없었으며 양수청이 농지에서 세금을 거둘 권리를 주었다.

북쪽의 태평천국과 달리 남쪽의 태평천국은 곡식을 기를 남경과 그 인근의 시민들을 덜 죽이며 조금이나마 상식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도 흉흉한 성품은 사라지지 않아서 포로 가운데 몇몇은 사람의 일부를 부적으로 삼는 경우가 있었다.

마이클 시모어는 다른 장성들에게 이 점을 주지시켰다.

“우리는 역병을 퍼트린 것이 아닙니다. 끔찍한 짓을 저지른 놈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천벌을 내린 사람들이지요.”

“그렇다고 민간인 피해를 덮을 수 있기는 한가? 대한도 일본도 저렇게 분노해 있는데?”

“잘못을 인정하셔야지요. 다음으로 민심을 다스릴 수 있는 이 지역 토착 세력들에게 많은 지원을 약속하고 약탈당한 재산 가운데 일부를 돌려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인도보다 꽤 난해할 것 같은데?”

제임스 호프는 부족한 정보로 인해 틀린 판단을 하였다. 그는 분할통치가 인도 식민지처럼 남중국 일대를 영구히 지배하는 계획이라 생각하였다.

영국 의회의 계획은 자신의 휘하 장성들조차 속아 넘어갈 정도로 완벽하였다. 이는 막 영국 의회의 결정을 확인한 유럽의 다른 국가들도 같은 상황이다.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근무한 인도의 상황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영국이 세운 동인도회사가 인도를 지배한 역사와 그 과정에 대한 기억을.

인도의 지방 토호, 스스로를 라자(왕) 이라 칭하는 자들은 별다른 반발도 없이 영국에 굴복했다. 자신들의 재산을 인정해주기만 하면 다른 자들을 짓밟고 죽여도 무방하다 생각했다.

오히려 동인도회사의 편을 들고 상대를 탄압하는 일에 동참하기까지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개 회사는 그 거대한 인도를 지배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위업을 이루었다.

“생각해 보면 자네 제안이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제임스 호프는 과연 인도와 청나라가 유사한 국가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명백한 중앙집권 체계를 갖추고 있음에도 엉망인 청나라, 그냥 시작부터 엉망인 인도.

부패한 제도로 인해 반란군이 정부를 무너트린 청나라와 애초에 부패할 제도조차 없고 카스트라는 악습을 광적으로 숭배하는 인도. 두 국가는 유사한 점이 제법 있었다.

다만 유사한 점이 있다 해도 같은 국가는 아니었다.

제임스 호프는 남경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면 자신이 분할통치 지역의 군사 담당자가 될 것을 알아차리고 담배를 빨아들였다. 깊은 한숨과 함께 희뿌연 담배 연기가 방 안을 메웠다.

한참 동안 담배연기를 내뱉은 제임스 호프는 다 타버린 재를 재떨이에 털어버리며 말하였다.

“분할통치에 성공하면 우리가 돌려준 재물을 모두 세금으로 돌려받을 수 있겠지?”

제임스 호프는 생각을 정리하였다. 그는 앞으로 24시간도 남지 않은 조일준의 최후통첩을 받아들이기 위해 변명이 아닌 진정한 사과를 준비하였다.

* * *

다음 날 점심 무렵, 제임스 호프와 영국군 장성들은 회의를 재개하였다. 제임스 호프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린 다음 사과로 회의의 문을 열었다.

“우리 영국의 군부가 과도한 행위를 하였음을 인정합니다. 그 근본에는 청나라 반란군의 비상식적이고 잔혹한 행위가 있지만 같은 수준의 모습을 보여준 것은 명백한 잘못입니다.”

모든 책임을 의회가 진다는 전신을 받았지만 제임스 호프도 책임이 있다. 그는 절실한 표정을 지으며 독가스 병기의 사용에 대한 확답을 내놓았다.

“저희는 시안화카코딜 살포를 전략, 전술적인 측면이 아닌 충격효과를 불러오기 위해 무분별하게 사용하였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임을 다시금 약속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 어떻게 없앨 것인지 궁금한데.”

“시안화카코딜 사용은 조 총장님 혹은 총장님이 권한을 내어준 연구진의 동의하에 사용하겠습니다. 또한 고통스럽게 죽어도 싼 흉악한 족속을 제거하는 용도로만 쓰겠습니다.”

조일준이 보기에는 더 이상 추궁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사과였다. 독가스 병기의 금지 조약은 나중에 국가 간의 회담에서 맺을 일이라 더 이상 나아갈 방법도 없다.

제임스 호프는 조일준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간이 서약을 담은 종이를 내밀었다. 조일준이 항목을 읽고 사인을 하기 직전, 다음 질문을 하였다.

“그럼 다른 건 다 이해한다 치고 이 사실을 영원히 묻어버릴 작정이오?”

“모든 사실을 공표할 경우 여러 문제가 벌어질 수 있습니다. 사기가 뚝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고 대한과 일본을 비롯한 국가들의 민간인 차원의 지원 또한 끊길 수 있지요.”

“그래서 공표하지 말고 묻어버리자는 말이오?”

가만히 듣고 있던 사이고 다카모리가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자 제임스 호프는 아니라는 듯 딱 잘라서 선을 긋고 말하였다.

“묻어버린다 해도 소문을 모두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대신 남경 전선의 주요 전투가 끝나고 종합 전투 보고서를 작성할 때 이 사실을 공표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러하면 대대손손 이 사실을 남기겠다는 말이신지요.”

“이 사실을 즉각 공개하고 저 혼자서 책임을 질 수도 있습니다. 다만 조 총장님과 관련되어 이상한 소문이 생길까 염려하고 고뇌하다 내린 결론이지요.”

조일준은 팔짱을 낀 채 제임스 호프와 시선을 마주쳤다.

영국은 그가 만들어낸 시안화카코딜을 남용하여 적이 아닌 애꿎은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이 소문이 와전된다면, 혹은 불순한 의도를 품은 자가 소문을 곡해한다면 조일준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조일준이 피식 웃으면서 답했다.

“고양이가 쥐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 기록할 건가?”

“생산자를 제외한 모든 사실입니다. 명령, 이행, 실무 그리고 피해자까지 기록됩니다. 물론 포격에 참가한 장교 개개인에 대한 기록은 가급적 배제할 생각이지요.”

“그 정도면 완벽하군. 완벽하다 못하여 가장 확실한 해결책이야.”

조일준은 본진에서 인화한 습식 건판을 안주머니에 미리 챙겨왔다. 이걸 건네준 다음 제임스 호프를 살펴보며 마지막 조언을 남겼다.

“그 완벽에 쐐기를 박아주지. 향후 영국에서 발간되는 보고서와 언론 자료에 이 건판을 사용해 인화한 사진을 꼭 첨부하시오.”

“자료를 제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여나 원본을 챙겨두시긴 했는지 궁금한데요.”

“보존성이 더 좋은 유리 건판으로 복제해 두었소.”

개수작 부릴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말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조일준이 사인을 마치고 서류를 돌려주자 첫 번째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다음으로는 군사 작전과 관련된 논의 사항이 시작되었다. 영국 장성들은 각 군대의 지휘관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다음 사과를 시작하였다.

“대한과 일본의 파견군 그리고 각 유럽 국가에서 보낸 원정군 여러분들에게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오만과 욕심으로 무리한 작전을 감행하고 여러 폐를 끼쳤습니다.”

“이제는 전략 자체를 수정하겠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적의 지휘관 양수청이 머무는 남경 공략과 관련하여 새로운 작전을 입안하겠습니다. 작전 지도를 확인해 주시지요.”

드넓은 장강을 끼고 있는 남경의 지도에는 그간의 첩보를 통해 확인한 적의 진영과 병력이 묘사되었다. 여기에 여러 화살표가 기입되어 각 군대의 진격 경로를 표현하였다.

여기에 초록색 화살표로 적의 추정 움직임을 묘사하였다. 제임스 호프는 새로운 작전지도를 가리키며 적의 퇴각 경로를 추산하였다.

“남경이 함락될 경우 반란군은 전선이 두껍게 형성된 곳이나 강을 통해 도망치려 하겠지요.”

“둘 다 일리가 있는 말이로군. 그럼 전체를 포위하겠다는 거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예비 병력을 긁어모아도 칠만여 명, 포위가 될 리가 없지요.”

제임스 호프는 여러 색으로 채색된 체스 기물을 가져와 지도 위에 얹어두었다. 남쪽에는 영국군을 표현한 붉은 기물, 동쪽과 강 위에는 대한과 일본을 표현한 청색, 갈색 기물이.

그 외의 기물들은 흰색과 회색으로 색칠되어 강 위에 배치되었다. 제임스 호프는 이 말들을 모두 남경으로 밀어 넣은 다음 제안을 시작했다.

“이번 남경 공략은 모든 군대가 자신의 역할을 담당하는 방식이 될 겁니다. 우리 영국군은 가장 전선이 두꺼운 남쪽으로 진입할 예정입니다.”

“피해가 엄청날 것 같은데. 이런 거대한 전선을 단번에 돌파하겠다는 말이오?”

“저희는 미끼에 불과합니다. 대한과 일본은 동쪽 전선에 병력을 파견하되 일부 병력을 다른 유럽 국가들의 병력과 함께 장강을 통해 상륙시키십시오.”

양헌수를 시작으로 장성들 사이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금까지 육해군이 동시에 장강을 공략하는 전략을 구상한 적은 있지만 영국군의 텃세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우리가 병력을 총동원하여 시가지를 함락하면 상대의 퇴각 경로는 남서쪽이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준비한 예비대가 마무리를 지을 것 같습니다.”

그토록 텃세를 부리던 영국에서 모든 병력을 총동원하자는 제안을 먼저 내놓았다. 양헌수는 한참 동안 끅끅거리면서 웃다가 고개를 들고 웃음을 가득 담아 말하였다.

“원하는 게 있을 것 같은데 뭐요? 혹시나 맥각(麥角 - 호밀에 피는 곰팡이, 유독성 물질이 많다)이 들어간 빵이라도 잔뜩 드셨소이까?”

“지금까지 맥각이 들어간 빵을 먹다가 어제부터 끊었습니다. 그래서 정신이 맑아지고 사리 분별을 정확히 할 수 있게 되었지요.”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친 제임스 호프는 천연덕스럽게 다른 국가 지휘관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양손을 모으고 고양이가 쥐 생각하듯이 엉뚱한 제안을 내놓았다.

“원하는 것은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남경을 함락하면 반란군이 약탈한 시민들과 부호들의 재산은 모두 우리의 것이 되겠지요. 그 재산 가운데 절반을 시민들에게 돌려줍시다.”

“혹시 남경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영국군이 칼을 맞아 죽을까 봐 그러는 거요?”

“바로 보셨습니다. 점령에 성공한 다음 민심을 다독이기 위한 방법이지요.”

다른 경로로 전신을 받은 네덜란드의 지휘관을 시작으로 유럽의 지휘관 대다수가 제임스 호프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이미 유럽 국가들은 남중국 분할 통치 제안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이들 또한 남중국을 분할통치하면 시민들에게 돌려준 재산을 세금으로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제임스 호프는 눈빛을 통해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태연하게 말하였다.

“나머지 절반은 남경 공방전에서 세운 공훈을 기준으로 각국에 분배하면 어떻겠습니까? 지금까지 우리 영국군이 세운 공은 민간인을 학살하며 세운 오명이 아닙니까.”

“이해는 하였소. 어차피 남경을 함락하는 데 성공하면 한동안 머물러야 할 터. 그동안 군대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남경 시민들에게 재물을 돌려줍시다.”

“영국이 잘못을 저질렀지만 우리는 연합군이오. 우리의 책임도 어느 정도는 있소이다.”

다들 영국 의회의 본심을 알지 못하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분위기에 휩쓸려 양헌수와 사이고 다카모리도 고개를 끄덕여 이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모든 사과가 끝나자 제임스 호프와 지휘관들은 최종 작전을 입안하였다. 각 국가의 군대를 상해까지 옮긴 증기선을 포함한 1,000톤 미만 체급의 증기선이 준비되었다.

7일 뒤, 남경 공략전의 서막이 올랐다. 수많은 증기선들이 점심 무렵 장강을 역주행하여 남경 외곽의 강가에 모습을 드러내며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상륙전에 적의 저항을 무력화하라! 동맹군의 진격경로를 열어라!”

선두에 선 함선은 영국 해군이었다. 양수청이 도주를 위해 준비한 나룻배는 선제 포격으로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고 그 직후 성에 포탄이 쏟아졌다.

태평천국군이 장강을 건너온 함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허둥거리는 동안 영국군은 배를 아예 정선시킨 채 쉴 새 없이 포격을 퍼부었다.

남경성의 강가에 축조된 외성(外城)의 망루가 터져 나가고 그 거대한 성벽 위를 순찰하던 병력들이 속절없이 도주하였다.

장교들은 하달된 임무를 재확인하며 병사들을 닦달하였다.

“우리는 교두보 확보 이후 다음 임무에 돌입한다! 사다리만 걸고 퇴각하라!”

북경보다 더욱 높은 남경성의 거대한 성벽에 사다리가 하나씩 걸렸고 영국 해군이 성벽 위로 올라가 주변을 호위하였다. 그동안 저 멀리 남쪽과 동쪽에서도 호응하듯 포성이 울렸다.

“본대도 열심히 하는군. 어느 쪽이 놈들을 잡을지는 모르지만 어서 움직이시오!”

“적일 때는 끔찍하지만 아군일 때는 믿음직하군. 혹시 우리 머리 위에…….”

“시안화카코딜은 여기에는 안 챙겨왔소이다! 어서 가시오!”

허를 찔린 태평천국군이 가까스로 대처를 시작할 무렵, 대한제국군과 일본군이 합을 맞추어 성벽 위를 점령하였다. 곧이어 다른 국가들의 병력도 산발적인 상륙을 실시했다.

대다수 병력이 상륙하고 교두보가 확보되자 영국 함선의 굴뚝에서 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함장은 깃발신호를 보내 재차 명령을 하달하였다.

“상륙 병사들의 포격 지원을 실시하라! 각도를 올려 성 내부로 포탄을 쏟아부은 다음 다른 방면을 공략한다!”

양면의 협공을 예상하지 못한 태평천국군은 제대로 된 시가전도 치르지 못하고 북쪽 방면을 내주었다. 여러 색의 군복들이 질주하며 남경 시내를 수놓기 시작하였다.

대한제국군도, 일본군도,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열강의 군대 모두가 따로 움직이며 남경의 사방팔방을 찌르고 들어왔다.

그 과정에서 세 겹에 달하는 남경성의 성벽이 하나씩 함락되기 시작했다. 북경처럼 온전한 시가전이 아닌, 방심한 상태에서 후방을 두들겨 맞은 결과물이었다.

곧이어 제임스 호프의 예상대로 성 안에 머무르는 양수청의 본대는 맞서 싸우는 대신 퇴각을 실시하였다. 한창 공격을 당하는 남쪽과 동쪽이 아닌, 남서쪽의 성문이 열렸다.

그러나 영국군은 이미 도주를 막기 위한 예비대를 준비해 두었다. 제임스 호프는 망원경으로 이 행렬을 바라보고 조일준에게 질문을 하였다.

“행색을 보아하니 적의 수뇌부가 퇴각을 단행한 것 같습니다. 시안화카코딜 탄두의 사용 허가를 내려주십시오.”

“만약 아니라면? 남경에서 탈출한 민간인들이라면 어찌하겠소?”

“그럴 때에는 조 총장님의 주먹으로 제 얼굴이 감자가 될 때까지 두들겨 주시지요.”

“그 판단이 옳을 것이라 믿겠소. 쏘시오.”

적의 퇴각경로에 산발적인 포격이 떨어졌다. 독가스 공격을 몇 번이고 당한 태평천국군은 공포에 질려 경로를 이탈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남서쪽이 아닌 서쪽으로 진로를 틀었다.

양수청의 퇴각 경로에 재차 상륙을 단행한 영국 해병대의 포격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망원경으로 확인한 제임스 호프는 흡족한 표정으로 양손을 비비며 보고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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