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24장 9화 천명, 소멸(2)
공친왕은 거의 반나절이 지나고 나서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렸다는 말도 애매한 것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눈동자가 상하좌우로 사정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 자신의 짐, 청나라의 친왕으로서 해야 할 일을 수행하였다. 그는 두서없이 말을 내뱉으며 마음대로 몸을 움직였다.
“조종(祖宗)에게 후손으로서 천 번 찢겨 죽어도 부족한 죄를 지었사옵니다. 부디 이 원한을 갚을 길을 마련해 주시며 이 후손이 역적의 몸을 갈기갈기 찢을 기회를 주시옵소서.”
뭘 하려는지 모르지만 분노를 담아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용천자기로 만든 병을 집어 깨뜨려 버렸다. 멍하니 있는 병사들에게 손짓하며 명령을 내렸다.
“공친왕 전하께서 무엇을 하시려는지 모르지만 돕도록 하게.”
공친왕과 황후는 어떻게든 유골을 수습하려 하였다. 유골을 보관할 만한 상자를 찾기에 옛적의 유물, 흑단나무로 만든 것 같은 상자를 가져오고 여기에 두개골을 담아두었다.
나도 그 작업에 동참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개골과 뼛가루를 살펴보았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홍수전이 개수작을 벌이지는 않은 것 같다.
“형상을 보아하니 역적이 유골을 거짓으로 뒤섞어놓은 것 같지는 않사옵니다.”
“그럴 수도 있지! 생각해 보니 날 격양시키기 위해 가짜 유골을 준비했을 수도 있어!”
공친왕의 눈동자가 나를 향해 고정되었다. 열망을 되찾은 건 고마운 일이지만 애석하게도 유골에는 명백한 증거가 남아 있었다.
“가짜 유골은 아닌 것 같사옵니다. 제가 알기로 성조(聖祖 - 강희제)께서 승하하신 이후 세종(옹정제)께서 예의를 달리하여 다비식을 치르지 않았다 하였지요.”
“그런 일을 어찌 아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관심이 많아서 알고 있을 뿐이지요. 가만히 보면 유골 가운데 세 개는 손상이 심하고 갈라진 부분의 색이 지극히 하얀색입니다. 나머지는 색이 조금 누런 모습이지요.”
밝게 변하던 공친왕의 표정이 순식간에 이십 년은 늙어버린 것 같다. 공친왕의 손이 움직이지 않자 상자 하나를 열고 그 안에 비단을 깔아두며 말하였다.
“이대로 두는 것은 온 세상의 예절에 어긋나는 것이옵니다. 서둘러 수습하시옵소서.”
가장 먼저 누르하치의 두개골, 가까스로 둥그스름한 두개골의 형태만 유지한 물건이 상자 안에 담겼다. 그다음으로 도광제의 두개골까지 상자에 모두 담겼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거의 좁쌀 크기로 빻아버린 유골이었다. 유골을 손으로 집은 공친왕은 더 이상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숨을 거칠게 들이켜다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하였다.
“이건 한 자리에…….”
“적어도 분류는 가능할 것 같군요. 다비를 치르지 않은 유골과 치른 유골을 분류하면 성조 이전과 이후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홍수전이 시종 가운데 몇몇 정도는, 궁궐의 일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은 살려두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경험이 많고 늙은 시종들을 미리 소집해 두었다.
이들을 데려온 사람은 외몽골의 장수가 된 셍게린첸이었다. 그는 더 이상 청나라의 사람이 아니었지만 상황 설명을 듣고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하였다.
“어쩐지, 놈들 가운데 삼천 가량의 정예 병력이 이상하게 멀리까지 나아가더군. 정확히는 동쪽으로 천오백 명, 서쪽으로 천오백 명 정도였는데.”
“그런 일이야 언제나 일어날 수 있지요. 시기가 언제입니까?”
“북방을 통해 서역인들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시기지. 당시에는 내 세력이 부족해서 대한에서 내린 밀명만 완수했을 뿐 그 이상은 하지 못했어.”
그럼 이 미치광이는 대사관 사건으로 북경 내부가 실시간으로 박살 나는데도 최정예, 아마 자신의 휘하 병력일 놈들을 보냈단 말인가?
아니지. 오히려 대사관 사건이 터지고 나서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이 논리적이긴 하다. 셍게린첸은 유골을 젓가락으로 하나하나 분류하는 시종들을 보면서 분노를 담아 말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미친 짓을 저지를 줄이야. 이해할 수가 없군.”
“저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놈은 병사들을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자마자 다른 방안을, 이를테면 자신의 패배를 가정하고 화근을 남기려는 작정이겠지요.”
“화근이라?”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가장 결속력이 약하고 잠재력이 부족한 군대가 어디입니까?”
셍게린첸의 시선이 젓가락을 들고 유골을 발라내는 공친왕에게 향했다. 그러고는 그 또한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고 턱에 손을 괴면서 심란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뭔 생각인지 알 것 같군. 의욕만 앞서는 장수가 능력이 부족한 병력을 이끌게 해?”
내가 추측한 홍수전의 의도를 셍게린첸도 알아차렸다. 자신이 여러 악재를 극복하고 승리하면 청나라 황실을 완전히 훼손하고 없던 것으로 만들 작업을 미리 해둔 것이다.
이 작업은 패배할 때도 적용된다. 자신의 병력이 북경에서 물러나면 공친왕이 기를 쓰고 달려올 명분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공친왕이 세력을 부풀릴수록 대한제국의 입지가 좁아지게 마련.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일으켜서 추격의 고삐를 늦추겠다는 방안이다.
그 전제조건인 천명 강탈이나 청나라의 괴뢰국화 모두 내 목적과 일치하지 않아서 문제지. 의외로 머리가 잘 돌아간 셍게린첸에게 맞장구를 쳐줬다.
“바로 보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도 정해져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할 일? 혹시 이건가?”
그는 공친왕을 가리키더니 목을 손날로 툭툭 친 다음 혀를 길게 내밀고 눈을 까뒤집었다. 그건 최악의 방법이자 가장 간단한 방법이라서 한숨을 푹 쉰 다음 설명해 주었다.
“뭐긴 뭡니까. 청나라의 이름으로 병력을 소집하는 행동을 막아야겠지요.”
“그게 쉬운 일이 아니잖나. 저 사실이 공표되면 사람들이 몰려올 것 같은데?”
“며칠 시간을 벌어둔 덕분에 문제가 줄었습니다. 대신 외몽골 측에서 가져오신 소와 말을 식량으로 배급해야 할 것 같군요.”
“왜 소와 말을 잡아서 식량으로 쓰나? 그냥 곡식만 먹여도 될 것을.”
정치에는 영 재주가 없는 사람이라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신뢰는 하였다. 그는 툴툴거리며 행랑에 쌓인 유물들을 둘러보고는 말하였다.
“이 물건을 팔면 돈은 썩어나고도 남는데 정작 소와 말이 필요한 세상이 될 줄이야.”
“가급적 많이 준비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쪽이야말로 옛 원나라의 물건을 가급적 많이 우리의 손에 돌려주게.”
셍게린첸이 외몽골의 본대로 돌아가 소식을 알리려 사라졌다. 그동안 공친왕과 황후는 한참 동안 작업에 몰두하다 밖으로 나와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얼마나 집중하였는지 공친왕의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황후는 체력 소모를 견디지 못해서 기절했다더라.
공친왕은 숨결이 뼛가루를 흐트러뜨리지 않도록 착용한 복면을 벗고 얼굴에 흐른 땀을 수건으로 훔쳤다. 그러고는 분노와 고통을 담아 북경 방향을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뭔가 좋은 소식은 있는가?”
“외몽골과 내몽골에서 협조를 할 예정입니다. 또한 이토록 끔찍한 비극을 목도하게 되어 저 또한 숨이 막히고 가슴이 미어질 지경이옵나이다.”
“내일 아침 당장 북경 안으로 들어갈 걸세. 안에 세작이 있거나 폭발물을 설치해 두었어도 상관없고 놈들의 세작과 배반자를 모조리 죽이고 병력을 소집할 것이고.”
홍수전과 연관된 사람을 모두 찢어 죽이겠다는 각오를 품고 있었다. 그 기준으로 따지면 자신도 증국번도 죽어야 하지만 아무튼 배신자는 무조건 죽인다는 뒤틀린 심보였다.
“막 중병을 앓다 가까스로 회복한 사람에게 일을 시키면 대번에 나자빠질 것입니다.”
“놈이 달아나서 세력을 불리는 게 더 위험하지 않나!”
그러다 난리 난다. 내가 아무 말 없이 공친왕을 바라보자 그도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시인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자 하반신이 물에 젖은 병사들이 달려왔다. 호수의 물이 대충 빠져나가서 금은보화의 양을 계산한 것 같았다.
“보고 드립니다! 호수 안에 잠든 물건은 금과 은이 대부분입니다!”
“내가 제법 오래 살기는 했는데 양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군.”
“물이 얕은 곳부터 금과 은을 끌어내서 쌀을 세는 저울로 무게를 매기고 있습니다. 눈대중으로 판단하건대 약 육백 톤 정도로 추측되는군요.”
600톤이라는 말에 머리가 멍해졌다. 금과 은이 섞여 있는 양을 모르겠지만 대략 대한제국의 화폐인 냥으로 약 1억 냥 수준의 자금이다.
현대로 따지면 수조 원을 가뿐히 넘나드는 미친 돈이고. 이 돈이 그대로 흘러들어 가면 대한제국의 화폐 구조가 붕괴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 막대한 자금 가운데 일부를 사용해 북경을 대한제국의 통제에 둘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 돈의 대다수는 백성들에게 갈취한 돈이다. 앞으로 북경 내부를 통솔해야 하니 군표(軍票) 대신 은을 녹여 군표와 흡사한 물건을 찍어낼 준비를 하도록.”
“네? 군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왜 은을 군표 형상으로 새로 만들어 지급합니까?”
“백성이 은을 강탈당하였다면 은으로 돌려받아야 마땅하지. 더군다나 이 나라의 백성들은 종이 쪼가리보다 현물을 중시하는 사람들이야.”
공친왕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 다음 괜찮은 방안이라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홍수전을 추격하기 위한 병력을 소집하려면 최소한 먹고 살길은 열어줘야 하니까.
“앞으로 몇 달 동안은 군표를 통하여 물자를 교환하도록 하게. 오랫동안 사용할 군표는 아니니 밀랍과 진흙으로 틀을 만들어 대량으로 찍어내면 금방 만들 수 있을 것 같군.”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일단 쇄은(碎銀)이나 마제은을 가져가도록 하지요.”
“북경에 잔존해 있는 백성은 대략 이십만 호 정도 될 것 같군. 우선 삼백만 개의 군표를 만들어 각 가족당 열 개씩, 가족 인원당 하나씩을 추가 지급하도록.”
은이 수레에 담겨서 북경으로 운반되는 모습을 공친왕이 지켜보았다. 내 몫을 언제 줄 것이냐는 표정이었는데 여기서 머리를 좀 굴려서 대처하기로 하였다.
“궁궐에서 일하던 시종을 시켜 궐 내부에 있는 물건을 도로 가져가게 하겠습니다. 나머지 물건 가운데 원나라 시절의 물건은 외몽골에게 돌려주도록 하지요.”
“그건 되었고 돈이 문제라네.”
“일단 군자금으로 사용할 은자 삼백만 냥을 떼어 드리겠사옵니다. 그 이상을 아무 명분 없이 드리면 형편이 영 마땅치 않을 것 같군요.”
내가 아무 이유 없이 줄 수 있는 한계선은 은자 300만 냥 정도이다. 여기 잠든 돈의 15% 정도이며 이 정도까지는 떼어 주어야 우리도 체면이 서고 명분을 들먹일 수 있다.
물론 공친왕에게는 본래 자신의 것이었어야 할 자금이라 미덥지 않은 눈치였다. 그는 해가 저물어가는 가운데 호수 바닥에서 빛을 내뿜는 금은보화의 산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저렇게 산더미 같은 돈이 있는데 삼백만 냥 가지고 뭘 그리 투덜대는가?”
“지금까지 사용한 화약의 가격만 따져도 은자 육백만 냥이 넘어갑니다.”
내가 추측하고 김좌근이 계산한 이번 전쟁의 총 소모비용은 사후 수습비용을 제외하고 약 2억 냥, 은자로 계산하면 4,000만 냥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이다.
그래봤자 조만간 미국에서 터질 남북전쟁의 총 소모비용 620억 달러와 비교하면 부스러기 가지고 손장난 치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아무튼 엄청난 자금이고.
“따라서 삼백만 냥을 제외한 자금과 여기에 보관된 유물의 절반을 대한제국이 가져가겠습니다. 역적이 철저히 분류하여 절반을 나누는 것은 아주 쉬울 것 같군요.”
“가치 또한 절반으로 나누는 것이 나아 보이는데.”
내가 이야기를 해도 공친왕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그걸 보니 좋은 방안이 떠올랐다. 나머지 절반의 유물을 어떻게 대한제국에 가져가서 대대손손 대한의 것으로, 욕을 안 먹고 얻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이.
“그래도 또 다른 명분이 있기는 합니다. 유물의 절반은 우리 대한의 몫으로 가져가고 나머지 절반은 영구 대여로 설정하여 삼백만 냥의 자금을 드리겠습니다.”
“유물의 영구 대여라? 기한이 영원하다면 말이 대여이지 강탈이 아닌가!”
“그래도 돈이 먼저가 아닙니까. 더군다나 이 유물을 팔아서 군자금을 만들려면 몇 달이 걸려도 모자랄 상황입니다.”
그냥 문화재를 들어다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나라도 많은데 이 정도면 자비로운 수준이다. 강탈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군자금 지급 목적으로 대여료를 계산해 주는 것이니까.
본래 역사에서는 북경이 함락되고 원명원이 불타며 수많은 문화재가 파괴되고 약탈당했다. 그래서 영국의 가정집 우산꽂이가 국보급 유물로 튀어나오는 경우도 있지.
여기에 비하면 공식 절차를 거쳐 유물을 영구 대여하는 것은 자비로운 절차다.
물론 공친왕이 유물 가운데 절반을 경매로 넘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경매에서 유물을 사들일 사람들은 홍수전에게 죽거나 홍수전에게 협력해 감옥에 갇힌 신세다.
“십 년 주기로 추가 대여료를 백만 냥씩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이 유물을 돌려받고 싶으시면 그동안 제공한 대여료에 복리로 닷 푼(5%)의 이자를 납부하셔야 하지요.”
10년 뒤에 은자 100만 냥을 추가 지급하겠다는 보증도 해주었다. 이자조차도 이 시대의 평균 금리인 12% 복리와 비교하면 너무나 자비로운 수준이지.
그는 빨리 병력을 동원해 홍수전을 처단하고 유물을 다시 사들일 생각만 한 것 같았다. 복리 이자 5%라 해보았자 10년이 지나면 480만 냥 정도에 불과하다 생각하겠지.
“자네도 생각이 다 있었군. 금방 채무를 이행하고 물건을 돌려받을 수 있겠어.”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러하면 병환으로 고난을 겪으시는 황상을 대신하여 서류를 작성하죠.”
그 생각과 달리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릴 거다. 미래의 중국이 분열되어 있을지 하나로 합쳐질지는 몰라도 100년 뒤 원금의 이자는 복리로 눈덩이처럼 불어나 4억 냥에 육박한다.
여기에 10년 주기로 지급된 100만 냥의 연장 대여료를 다 합치면 4억 냥이 훌쩍 넘어가겠지. 이걸 무게로만 따져도 은 2만 톤이 넘어가고도 남을 양이다.
문화재를 돌려받으려면 대충 35조 원 정도를 납부해야 하지 않을까? 그마저도 현대 기준 가치이고 이 시대의 가치로 따지면 100조 원이 넘어갈 거다.
“계약서가 완성되었습니다. 설령 황제 폐하께서 이 의견을 반려하셔도 제가 책임을 지고 대여비용으로 은자 삼백만 냥을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훌륭하군. 이제 조종을 뵐 면목이 생겨났어.”
그리고 후손을 뵐 면목이 사라지겠지. 이후 계약서와 제반사항을 한양으로 보낸 다음 분류 작업이 즉시 진행되었다.
다음 날 아침 무렵, 수백 명의 시종과 하인이 확인한 19만 점에 달하는 유물 가운데 4만여 점이 청나라 황실에게, 1만여 점은 외몽골에게 배정되었다.
그리고 한양에서 전신이 도착하였다. 내가 저녁에 보낸 전신을 밤 동안 확인한 효명제는 나에게 거래를 무조건 확정하라는 명령을 보냈다.
<은자 삼백만 냥으로 아무에게도 손가락질을 받지 않고 천하를 사들인 격이로구나. 공친왕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즉각 거래를 확정 짓도록 하라.>
나머지 14만 점의 유물은 7만 점이 대한제국 소유, 나머지 7만 점은 영구 대여가 확정되었다. 이 뿌듯한 상황에서 김좌근 또한 전신을 보내왔다.
<야! 그냥 자금을 이 나라로 가져와서 보급품을 보내지 돈을 먹여서 물건을 사게 만들어? 날 보고 죽으라는 소리냐! 북경 사람들을 먹여 살려!>
장문의 욕설을 읽자 김좌근에게 대한 미안한 마음이 생겨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좌근은 욕심이 동하였는지 나에게 적당히 안 걸릴 정도로 선물을 준비하라 하였다.
<황제 폐하께서 절반의 유물을 엄선해 경매로 부쳐 전시 채권 비용을 벌충할 것이라 하였네. 난 경매에 참가하지 않을 생각이니 적당히 작고 예쁜 유물 하나만 챙겨오게>
뭘 챙겨올까 하는데 인부들이 한 종류의 물건들을 옮겼다. 이 시대에서 꽤나 유행하는 다층구(多層球)들이다.
이 다층구 가운데 대다수는 엄연히 황실 소유였다. 대한제국에게 영구대여 및 판매되는 물건도 제법 많긴 하지만. 당대의 유행품이다 보니 현대 골동품 가게에서도 간혹 팔린다던가.
“어이쿠! 뭐 이런 작은놈이 다 있어?”
개중 한 인부가 다층구라 부르기 애매한 물건, 대충 야구공 크기의 구슬을 바닥에 흘려버렸다.
떨어진 구슬은 충격으로 겉 표면에 금이 쩍 가버렸고 바닥을 굴러 내 발치까지 다가왔다.
인부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어쩔 줄을 몰라 하다 날 보고 처벌을 두려워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세상에! 제가 큰 잘못을 하였습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지.”
저렇게 유물이 넘쳐나는데 처벌할 필요도 없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인부에게 눈짓을 한 다음 태연하게 말하였다.
“이 물건은 없는 것이 아닌가?”
금이 간 구슬이 왜 여기에 섞여 있을까. 자세히 보니 청자인데 이 또한 다층구에 속하는지 안에 여러 구슬들이 회전하고 있었다.
“처가에 보내기 적당하겠어. 그리 화려하지도 않고 청아한 멋이 있군.”
금이 간 물건은 가치가 뚝 떨어지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상아를 시작으로 상감 자기, 금, 칠기, 흑단 등등으로 만든 수많은 다층구와 비교하면 너무나 사소한 물건이기도 하고.
이제 과거의 천명도, 미래 후손에게 남겨줄 천명도 붕괴하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작업은 현재 이 세상의 천명을 무너뜨릴 며칠 뒤의 확인 단 하나다.
북경 외부에 설치된 군표 조폐소와 북경 내부의 배급소에서는 천명을 무너뜨리는 연기가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왔다. 공친왕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천명이라는 단어는 이제 소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