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313화 (279/345)

313화

24장 8화 공성전(2)

아버지의 궁전에서 여러 훈련을 했다. 벽을 끼고 싸우는 시가전이나 지붕 위로 올라가 고지를 장악하는 모의전도.

그러나 지붕이 무너지는 경험은 한 적이 없다.

“쑤까 불럇!”

단번에 기와가 가라앉고 서까래가 무너져 내리며 몸이 떨어졌다. 그나마 이 물건들이 충분한 완충재가 되어 다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른다.

희뿌연 먼지 속에서 사람이 여럿 움직이는데 하나같이 시뻘건 옷을 입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뻘건 몸을 향해 소총을 번갈아가며 쏘았다. 상대는 먼지 속에서 서로를 쏠까 염려하였는지, 아니면 마약에 취해 있는지 몸을 가누지도 못하였다.

일곱 발을 모두 소모하고 재장전에 들어가기도 전에 방 건너편의 누군가가 고함을 치고 있었다. 먼지가 걷히자 도저히 할 말이 없었다.

<홍모귀로구나! 이 몸은 관성대제의 가호를 받고 있는 몸이다!>

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상대는 총을 내버려 두고 거대한 폴암(언월도)을 사방으로 휘두르며 뭐라 중얼거렸다.

<하! 이 몸이 홍모귀를 수도 없이 죽인 기억이 떠오르는구나! 내 언월도를 받아라!>

굳이 어울려 줄 필요도 없다. 허리춤에 잘 쟁여둔 권총을 꺼내 두 발을 쏘아붙이자 더 이상 말조차 못 하고 바닥에 고꾸라져 피를 뿜어댔다.

“뭐 저런 머저리가.”

전쟁터에서 가끔 미친놈들이 생겨난다던데 그런 부류인가. 총을 장전하는 동안 살펴보니 얼굴에 시뻘건 물감도 급하게 바른, 아주 제대로 된 미친놈이다.

주변에서 총성과 청나라 언어로 된 비명이 들려왔다. 창문을 통해 본 길거리에는 소대원들이 날뛰고 있었고 몇몇은 집을 끼고 농성전을 벌였다.

“예고르! 놈들을 제압해!”

“알겠습니다! 중위님!”

창문을 통해 옆 건물에 지원사격을 날린 뒤 바로 밖으로 빠져나갔다. 건물 담장과 벽에 의지해 몸을 엄폐한 소대원들이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척탄 없나!”

“네 개 있습니다!”

“그럼 던져! 던져도 저항하면 벽을 뚫는다!”

적이 농성을 벌이는 집은 벽돌로 만든 벽이 아닌 진흙 위에 회반죽을 덧바른 물건이다. 제발 척탄에 제압되기를 빌며 척탄을 던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라나따(Граната - 수류탄, 척탄)!”

세 개의 척탄은 제대로 날아갔다. 그러나 담장 위로 날아가야 할 척탄이 담장 끄트머리에 적중하여 하늘 위로 치솟았다.

“머저리 새끼야아아아아!”

반사적으로 척탄을 걷어차자 운수 지지리도 없이 반대편 집 창문을 뚫고 날아들었다. 그러자 러시아의 말도, 청나라의 말도 아닌 대한제국의 말이 들려왔다.

“으아아아아악 사람 살려어어어!”

반대편 집에서 웬 사람이 달려 나온 직후, 척탄이 굉음을 일으키며 폭발했다. 가까스로 척탄의 폭발을 피한 사람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욕설을 퍼부었다.

“야 이 쌍놈의 새끼야! 너 어디 사단 소속이야!”

“일단 합류하시오! 방금 전 일은 미안하게 되었소!”

상대는 손가락이 잘려나가고 한쪽 눈을 쓰지 못하는 자였다.

그는 척탄을 잘못 던진 병사와 나를 노려보고 담장 옆으로 달라붙었다. 몇 번이고 호흡을 거르더니 욕설을 섞어가면서 정보를 알려주었다.

“난 부여왕께서 미리 잠입시킨 정보원이라고 이 대가리에 똥만 찬 놈아! 북경에 숨어있으면서 여러 정보를 입수했는데 말도 못 하고 뒈지는 줄 알았네!”

“먼저 잠입시킨 동지가 있다는 말은 들었소! 우리는 광거문(廣渠門)을 공략하는 부대인데 쓸 만한 정보가 있소이까?”

“저 집에는 진옥성이라는 고위 장수가 있다! 대가리 대신 수박 달린 너보다는 쓸 만해!”

그 말을 들으니 마음속에서 욕심이 샘솟아 올랐다. 과욕은 아니고 어느 정도 합리적인 욕심이.

우리의 목표는 시가전을 벌여 광거문을 열어젖히는 것이다. 그 목표는 달성하기 한없이 힘들고 실제로는 대한제국군과 협력하는 것을 전제로 세워졌다.

하지만 엉망진창인 적의 상황을 보아하니 계산이 틀어질 것 같다. 잘만 하면 대한제국군이 성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문을 뚫는 것도 가능해 보인다.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더욱 중요한 정보가 들려왔다.

“놈은 고위 계급인 의안이라는 직급을 지녔지. 여기에 댁이 목표로 삼은 광거문의 수비 담당이야! 이제 좀 정신이 들어?”

“그럼 뭘 하느라 저기에 박혀 있는 거요!”

“아편 처 피우느라고!”

이런 중요한 시기에 아편을 피우느라 자신의 책임을 버려? 우리 위대하신 차르와 비교해야 할 놈 아닌가?

“어떻게 합니까? 일단 적도 척탄에 놀라 더욱 숨어든 것 같습니다.”

“생포해. 생포하고 놈을 앞세워 성문으로 향한다.”

성벽 위에서 재차 ‘우라’라는 함성이 들려왔다. 우리가 실패해도 후발대가 합류하면 될 상황이라 생포 혹은 살상으로 결단을 내렸다.

“진입한다! 담 넘어!”

아버지께서는 ‘구렁이처럼’ 담을 넘으라 하셨다. 그 구렁이가 무슨 뱀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우리 모두가 담장 위로 몸을 놀려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총탄이 집 안에서 날아들어 한 명이 고꾸라졌다. 적들은 나름 머리를 써서 가구로 창문을 막고 안에서 총을 장전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집의 구조가 문제다. 소대원 가운데 힘이 좋은 녀석들을 한 자리에 집결시키고 창문도 없는 벽을 가리킨 다음 구령을 넣었다.

“셋, 둘, 하나, 밀어!”

“우라!”

열다섯 명의 병사가 일제히 벽을 걷어차자 으지직 소리가 나며 벽에 균열이 생겼다. 벽돌벽도 아니고 돌로 만든 벽도 아닌 나무에 진흙을 결합한 동양식 벽의 약점이었다.

왜 이런 건물에 들어갔는지는 모르지만 첫 발길질에 벽에 균열이 가고 크게 밀려났다. 재차 구령을 넣고 발길질을 하자 벽 자체가 무너지면서 상대의 얼빠진 모습이 드러났다.

<홍모귀다!>

얼이 빠지다 못해 제대로 된 대응조차 못 하였다. 총구를 돌리지도 못하고 몸이 얼어버린 것처럼, 마치 체르노보그(슬라브 신화의 사신)를 마주한 것 같은 몰골이다.

“쏴! 죽여도 좋다! 쏴!”

그 또한 좋은 일이었다. 소총과 권총이 불을 뿜고 방 안에 몰려 있던 놈들이 피를 내뿜으며 쓰러졌다. 개중에 몇몇은 허우적거리며 바닥에 엎드려 총탄을 회피하였다.

“운이 좋았소! 저놈이 진옥성이오!”

정보원은 개중에 금실로 수놓은 옷을 입은 놈을 지목하였다. 머리에는 금관을, 양팔에는 금과 옥이 어우러진 팔찌를 차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 천박함에 분통이 치밀어 올랐다.

“이 쉬, 쉬, 쉬발놈을 봤나.”

그 몰골을 보니 우리의 돈을 빨아먹던 귀족들이 생각난다. 익숙하지 않은 욕설을 내뱉으며 상대를 부여잡자 내 얼굴을 보더니만 손사래를 치면서 말을 마구 내뱉었다.

<나, 나는 잘못한 것 없다! 대사관에 가지도 않았어! 너희를 죽이지 않았단 말이다!>

놈의 몸뚱이 위로 발길질이 쉴 새 없이 날아들었다. 상대가 외마디 비명을 내뱉고 기절하자 궁금한 마음에 총알을 재장전하며 정보원에게 물어보았다.

“방금 전에 뭐라 한 거요?”

“홍모귀, 그러니까 댁들이 복수를 하러 왔다면서 겁에 질렸습니다.”

“우리를 죽여? 아, 그 대사관 사건 말이로군.”

뭔가 사리에 어긋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께서는 상대가 우리를 죽이기 위해 날뛸 것이라 하셨는데 일개 병사도 아닌 지휘관이 공포에 질리다니.

그러고 보니 놈들이 기괴한 행동도 자주 하였다. 심지어 총을 쐈으면 날 죽이고도 남을 놈조차 총을 안 쏘고 폴암을 들고 날뛰었고.

“줄기차게 죽인 홍모귀, 우리와 같은 서양인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죽여야 하는 거 아니오?”

생각해보니 우리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야 정상이다. 그 생각과 달리 정보원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이 상황에 대해 어처구니없는 설명을 내놓았다.

“내가 알기로는 미신이 팽배하고 헛소문이 퍼져서 겁에 질린 것 같소이다. 우리 대한의 병사들은 송장을 파내 악령을 불어놓은 놈들이라 하던데.”

“푸하하하핫! 아니 병사도 아니고 지휘관이라면서.”

“뭐? 시체? 웃기고 자빠져 있네! 니들은 송장을 몸에 달고 다니잖아!”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서 웃음이 한 줄기 새어 나왔다. 나도 웃음을 가까스로 억누른 와중에 정보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하였다.

“살아 있는 병사가 송장을 파내 악령을 불어넣었다 하면 죽은 서역인의 악령이 되살아나서 싸울 수도 있겠지. 적들은 아마도 그렇게 생각할 거요.”

“그러니까 우리가 죽은 영국이나 프랑스인의 악령이다?”

“바로 보셨소. 심지어 외모가 닮았다고 사람을 마구 죽여 버렸으니 더더욱 그러하겠지.”

머릿속에서 옛 기억이 떠올랐다.

막내가 아직 살아 있을 무렵, 크림 전쟁에 참가하기 이전에 동네 친구와 싸움을 벌인 녀석을 호되게 꾸짖으려 하였다. 그리고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들었던 바바 야가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날 밤, 녀석은 어린 시절의 나처럼 있지도 않은 괴물을 상상하며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였다.

“우리를 바바 야가로 생각하나?”

놈들이 괴상한 짓을 저지르는 이유를 이제야 이해했다. 성벽 위나 담장을 끼고 전투를 벌일 때에는 외모를 알아보지 못하여 그저 서양인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외모를 똑바로 파악할 수 있게 되자 자신들이 만들어낸 공포에 짓눌린 것 같다. 소대원 중 한 명이 날 흘겨보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하였다.

“그 닭다리 오두막집에 사는 꺽다리 할머니는 왜 찾으십니까? 정신이 좀 미친놈들이지 그 정도는 아니겠지요.”

“그럼 확인해 볼까? 다들 모자 벗어, 그리고 물 가져와.”

검증을 위해 기절한 진옥성에게 물 한 동이를 끼얹자 놈은 까뒤집은 눈을 바로잡고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내 얼굴을 보면서 더욱 겁에 질려 방구석으로 도망갔다.

<오지 마라! 내 혼령을 빼앗아가지 마라!>

“지금 뭐라 하는 거요?”

“혼령을 빼앗아갈 것이라고 애걸복걸하고 있습니다.”

예상대로 우리의 금색이나 갈색 혹은 회색 머리카락을 보자 더욱 겁에 질려 위엄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몰골이 되었다.

“이야, 내 아들놈이 바바 야가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반응이 더 좋은데요?”

구석에 웅크린 놈을 다시 발로 걷어찼다. 그다음 공포에 질린 놈의 멱살을 잡고 정보원에게 통역을 부탁하였다.

“이야기 좀 해주시오. 우리는 저승에서 연나? 연라였던가? 아무튼 그 사람에게 원한을 해소할 기회를 얻은 원혼이라고. 네 영혼을 지옥 구렁텅이로 가져갈 것이라고.”

대화가 오가자 진옥성이라는 자는 몸에 두른 재물을 모두 나에게 바치려 하였다. 그 재물을 빼앗아 창밖으로 집어 던지고 윽박질렀다.

“저승에서 재물은 아무 쓸모도 없고 영혼 열 개를 가져가야 직성이 풀릴 거라 하시오.”

“그 말을 왜 하시는지.”

“다 쓸모가 있소이다. 너는 이놈을 올려놓을 수레랑 통나무 좀 가져와.”

잠시 뒤. 우리 모두는 모자를 벗은 채 길거리로 나갔다. 그 뒤에는 진옥성이라는 작자가 수레 위에 묶인 채 사방팔방 소리를 질러댔다.

<다들 도망쳐라! 홍모귀들의 원혼이 되살아나 너희를 죽이려 한다!>

저 멀리서 달려오던 태평천국 병사들은 지휘관의 목소리를 듣고는 집 안에 숨어 우리의 금발을 확인하였다. 놈들의 대응이 뒤엉키는 것을 확인하자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진옥성이라는 자는 우리의 말을 믿고 한 명의 병사라도 살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고함을 쳤다. 보통 병사들이라면 지휘관을 쏴 죽이고 격렬히 저항하겠지만 놈들은 미신에 심취했다.

“이야, 역시 태평천국의 높으신 양반이라니까. 부적으로 쓰니까 효과가 죽여주는데?”

건물 안에 숨은 놈들이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가 탄환 세례를 받았다. 죽은 놈은 고꾸라지고 죽지 않은 놈은 건물 안으로 투입된 병사에게 저항도 못 하고 끌려 나왔다.

그러나 광거문으로 다가갈수록 조직적으로 저항하는 놈들이 생겨났다. 저 멀리서 함성이 들려오고 한 무리의 적들이 대열을 유지한 채 접근하였다.

“쏘고 옆으로 빠져!”

우월한 사거리고 뭐고 간에 우리가 훈련해 본 시가전에서는 엄폐가 중요하다. 적의 대열에 대충 몇 발을 조준해 쏘자 적이 쉴 새 없이 고꾸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의 수가 너무 많다. 반사적으로 손을 휘둘러 신호를 보내자 소대원들도, 정보원도 각자 보아둔 골목 안으로 숨어들었다.

-핑!

뒤늦게 발사된 총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적들도 우리가 튀어나오기를 기다리며 사격 대기명령을 내린 상태다.

잠시 주변을 살펴보는데 수레 위에 묶인 진옥성이 떠올랐다.

“아차! 야! 포로 끌고 와!”

“이미 죽었는데요.”

“망할, 부적이 그리 튼튼하지가 않네.”

머리에서 피를 뚝뚝 흘리는 진옥성의 모습을 살펴보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저놈을 계속 써야 하는데 이렇게 관리가 까다로울 줄이야. 그래도 배운 대로 다음 명령을 하달하였다.

“지붕 공격 실시. 연습대로 두 명이 조를 이루어라.”

“알겠습니다. 하나, 둘, 올려!”

아버지의 궁전에 있는 건물과 비교하면 북경의 건물들은 낮고 올라가기 편한 높이이다. 두 명이 협력하여 한 명을 지붕 위로 올린 뒤 적의 예상을 뛰어넘고 위에서 쏘아붙였다.

탄환을 모조리 퍼부은 병사는 지붕에서 뛰어내린 다음 혀를 내두르며 말하였다.

“위에서 보니 상황이 만만치 않습니다. 적의 예비대가 최소 오백 명 이상이 있습니다.”

“그럼 건물 뒤에 숨은 놈들까지 천 명이 넘을지도 모르겠군. 복장은?”

“절반 이상이 붉은 옷입니다.”

지독할 정도로 오래 싸운 것 같은데 시간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의 아들과 손자가 다루는 병사들이 막 진격할 시간이다.

“문이 코앞인데 진격을 못 하는군.”

초조함이 밀려왔다. 적이 저렇게 조직적으로 저항하면 그 기세에 우리가 몰살당하고 성벽이 역으로 점거 당할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더 정보를 얻으려고 고민하는 동안, 주변을 확인한 병사가 지붕 위에서 보고를 하였다.

“놈들이 성문 수비병력과 합류해서 우리 방향으로 진격합니다!”

상대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예상보다 빠르고 과감하게 수적 우위를 앞세운다.

여기에 보고가 추가로 들어왔다.

“대로를 타고 수레를 앞세운 채 들어옵니다! 천천히 오고 있습니다!”

“머저리인 줄 알았는데 완전 머저리도 아니고. 왜 괴상하게 머리가 좋을까?”

나름 엄폐물로 수레를 활용할 줄이야. 이대로 사방으로 퍼져 소모전을 벌여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성벽 위에서 함성이 다시금 들려왔다.

슬쩍 고개를 내밀어 성벽 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대한제국군이 약속보다 빠르게, 약속보다 더욱 흉측한 무기를 지참한 채 화력 지원을 준비하였다.

“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여. 위대하신 아버지시여.”

“지원입니까?”

“가장 든든한 지원이다! 이 머저리들! 저 물건을 성벽 위로 올릴 줄이야!”

성벽 위에는 대한제국에서 십혈포라 부르는 병기가 보였다. 해군에서 사용하는 소형 십혈포는 물론, 무게가 끔찍하게 무거운 육군용 십혈포도 한 정 끼어 있었다.

방열이 빠른 해군용 소형 십혈포 사수가 녹색 깃발, 사선에 주의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대충 거리를 가늠해 보았는데 유효사거리를 넘은 상황이라도 통하고도 남을 것 같다.

“사거리 밖이라도 밀집대형에는 통해! 다들 유탄(流彈 - 잘못 쏜 탄환)에 맞지 않게 엄폐해!”

특유의 모터 소리 대신 수동으로 크랭크를 돌려 콩 볶는 소리를 내며 탄환을 퍼부었다. 세 정의 소형 십혈포가 스치고 지나가자 지붕 위의 병사가 환호성을 질렀다.

“아후옌나!(Охуенно - 멋지다) 다 죽이고 있습니다!”

억지로 정란을 통해 올린 십혈포라서 탄띠를 많이 가져오지 못한 것 같았다. 각기 육백 발 정도는 쏜 십혈포가 쉬는 동안 우리가 나설 차례가 되었다.

“십혈포가 탄띠를 재장전하고 있다! 우라! 돌격해!”

“우라아아아아!”

세 정의 십혈포가 할퀴고 지나간 적의 대형은 수레가 부서지고 수없는 시신과 부상자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 길거리를 돌파하며 움직이는 모든 놈들을 쏘아 죽였다.

손가락이 까딱거릴 때마다 상대의 몸에서 피가 솟구친다. 간혹 무기조차 없이 공포에 떠는 놈들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병사의 자질이 보이지 않는 놈들이었다.

“뚱보나 말라깽이에게 총알 낭비하지 마!”

“총도 안 들고 있는 놈들이 태반입니다!”

“총알 아까워! 쏘지 마!”

이런 병사들이 왜 전선에 나선다는 말인가. 우리를 가혹하게 옥죈 차르도 궁지에 몰리면 이런 짓을 할 수는 있겠지.

그 감상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귓전에서 ‘핑’하는 소리가 들리고 총을 쏘아붙인 놈에게 즉각 응사하여 놈을 고꾸라트렸다.

피가 솟구치고 화약의 냄새가 코를 뚫고 폐 속으로 스며든다, 적의 총에서 불길이 간혹 뿜어졌지만 우리는 탄환을 모두 소진할 기세로 난사하며 길거리를 돌파하였다.

“재자아앙전!”

“엄호! 엄호해!”

“탄환 부족! 예비 탄환 없나!”

탄이 다 떨어지자 주변에 눈이 돌아갔다. 적의 시신을 짓밟자 물컹거리는 느낌과 함께 저절로 욕설이 올라왔다.

그 욕설을 내뱉는 대신 다른 병사가 준 탄환을 모아 권총을 재장전하고 개머리판을 분해해 탄약을 다시 넣었다.

목표까지 얼마 안 남은 상황에 후방의 소대가 합류하였다. 마지막으로 올라온 이들은 수레에 문을 가로막은 바위를 폭발시킬 폭약 덩어리를 지참하였다.

“드미트리 중위님. 성문 폭발물을 포함해 중대원 전원 도착하였습니다.”

“이제 마지막 전투만 남았다! 후방의 적 증원은 있나?”

“있습니다만 이제 없어질 겁니다!”

우리보다 더 빠르게, 남쪽에 있는 좌안문이 함락되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폭음과 흙먼지를 바라보고 있는데 지붕 위의 병사가 보고를 올렸다.

“대한제국군이 진입을 시도합니다! 적의 증원이 남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문루는 이미 게오르기 녀석이 점령했다. 가장 처음 성문을 돌파한 영광은 아니더라도 그다음 영광을 위하여 병사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양 문을 모두 돌파한다! 전원!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라!”

적들은 썰물처럼 북쪽을 향해 빠져나갔다. 어떻게든 내성으로 숨어들어 목숨을 부지하려는 상황 같은데 놈들의 뒤통수에 탄환을 몇 발 날려주고 성문을 확인하였다.

큰 바위를 석회로 붙여놓아 아예 문을 싸매두었다. 게오르기에게 깃발로 퇴각 신호를 보내고 폭탄을 설치하여 이 바위를 붕괴시킬 폭탄을 설치하였다.

“도화선 설치 완료!”

“문루가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일단 발파하겠습니다!”

배운 대로 건물 안으로 숨어들어 양 귀를 막았다. 곧이어 벼락이 바로 옆에 떨어진 것 같은, 혹은 그 이상의 굉음과 진동이 온몸을 휘감았다.

“뚫렸나? 제발! 뚫려야 하는데!”

흙먼지가 가라앉는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이 쿵덕거렸다. 제발 바위가 무너져 내렸기를 빌며 한참을 기다리자 함성이 들려왔다.

-대한제국 만세!

무너진 바위틈 사이에서 군청색 군복이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보자 땀이 가득 들어찬 온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리고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적들에게는 도주 혹은 의미 없는 항전 두 가지 길만 남게 되었다. 우리를 이토록 훈련시킨 아버지의 은혜를 되새기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이야, 구멍 한 번 시원하게 뚫렸습니다. 그럼 전장에서 뭐라도 좀 먹어야겠는데.”

어느새 성벽 아래로 내려온 게오르기가 천연덕스럽게 뭔가를 배낭에서 꺼내기 시작했다.

녀석은 재주도 좋게 연유 깡통을 몰래 가져왔다. 총검으로 깡통에 구멍을 두 개 내서 한 모금을 빨아먹고 입을 수통의 물로 대충 헹구고 나에게 건네주었다.

나도 대충 입구를 닦고 들척지근한 연유를 마시려 하였다. 그러나 내가 등을 기댄 집의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리고 앙상한 몰골의 아이와 엄마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천천히 먹어.”

연유 깡통을 받은 어머니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문을 다시 닫았다. 그러자 게오르기가 눈을 흘기며 아쉽다는 듯이 말하였다.

“그 아까운 연유를 왜 줍니까?”

“몰라, 죽은 막내에게도 먹이지 못했는데 좀 주면 어때.”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대충 끝난 것 같다. 적이 다시 내성을 끼고 항전하면 그때는 또 공성전을 벌여야 하지만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그런 선택을 할 리도 없고.

갑자기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외성 내부에 잔존한 적의 병력을 소탕하는 와중에 이런 소리가 들릴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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