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312화 (278/345)

312화

24장 8화 공성전(1)

*드미트리의 시점에서 진행합니다

우리 모두는 아버지의 양아들이자 대한제국군 소속이 아닌 의용병이다. 당장 내 계급만 따져도 부위(副尉 - 중위)가 아닌 중위, 포르치키(поручикъ)라 분류되고 있다.

“드미트리 중위. 자네들이 배운 모든 것을 활용해 보도록. 비용에는 신경 쓰지 말고 마음대로 하게.”

그런 우리가 마침내 최전선에 설 자격을 얻었다. 아버지의 친인척이자 군부대신이며 대한제국의 황족인 지휘관은 말 그대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지급하겠다고 하였다.

“일단 튼튼한 목재가 필요합니다. 최소한 정란을 만들 수 있는 목재가 필요하지요.”

“주변에 가옥이 많지 않나. 공병대를 잔뜩 붙여주면 괜찮나?”

“물론입니다. 여기에 증기기관도 가급적 많이 필요합니다.”

“증기기관을? 군용 증기기관이 제법 많긴 하지만…….”

아버지께서 훈련장으로 빌려주신 별궁으로 공성전과 수성전을 여러 번 연습하였다. 그 과정에서 증기기관을 활용한 병기에 대해 여러 고안도 해 두었고.

대한제국군은 증기기관을 많이 사용하는 군대다. 당장 전신기도 증기기관으로 전기를 만들어 사용하고 세탁기도, 하다못해 십혈포 충전지를 충전하는 데도 사용하고.

“증기기관을 굳이 사용할 필요가 있는가? 증기 톱이라도 사용할 생각인가?”

“좀 기발한 병기를 사용하려 합니다. 딱 한 번만 시험해 보았는데 괜찮더군요.”

“좋은 병기라면 채용하도록 하지. 공병들을 불러올 테니 효용을 서로 알아보도록.”

곧이어 부여왕이 부른 공병들이 내 앞에 집결하였다. 그들은 내 설명을 듣고 간단한 도면의 내용을 확인하더니 그럴싸한 물건이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참 대단한 발상입니다. 석유를 사용하는 증기기관은 석탄을 계속 넣을 필요도 없고 효율도 좋은 편이지요. 그 물건을 일회용으로 사용하실 줄이야.”

“일회용은 아니지요. 증기기관을 건져내면 다시 사용할 수 있지 않습니까.”

“과열된 증기기관이 해자에 빠져 버리면 무조건 전면 재수리가 필요합니다. 그래도 저 거대한 해자를 메우는데 들어가는 공임을 생각하면…….”

공병대 대장은 나와 북경성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우선 해자 돌파용 병기 서른 대를 만들어 봅시다. 고작 돈 몇 푼보다 태상황께서 자식으로 생각하시는 여러분들이 중요한 것 같군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뭐 감사할 것이 있겠습니까. 저 해자를 메우고 돌입하는 과정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지요.”

서로의 이해가 일치하고 공병대가 우리에게 사람을 붙여주었다. 목재를 결합해 정란을 만들고 증기기관을 자동차 형태로 개조하는 작업이 공격과 병행되었다.

17일 동안 수 없는 공방전이 이어졌다. 대한제국은 성을 두 면으로 포위한 채 쉴 새 없이 총탄과 포탄을 퍼부어 적에게 손실을 꾸준히 누적시켰다.

이윽고 정란이 한 대씩 완성되어 안전을 점검하였다. 참호 돌파용 증기 자동차도 완성되었고 마침내 본격적인 공성전의 서막이 열렸다.

새벽이 될 무렵 동티단 모두가 아무런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알아서 일어났다. 희뿌연 안개가 걷혀가며 전장의 모습이 드러날 때쯤 정란과 자동차가 후방에서 옮겨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죽어 자빠지기 좋은 날씨군요. 루살카(물요정)가 안개를 피웠습니다.”

내 옆의 중대를 담당한 게오르기가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이며 시시콜콜한 옛이야기를 하였다. 그 모습을 보고 아버지의 궁전에서 사고를 당한 녀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떨어져서 모가지가 꺾여 죽기 딱 좋은 날이지. 넌 운이 좋아 팔이 부러졌고.”

“중위님도 참, 그때는 손이 미끄러져서 바닥으로 떨어졌다니까요.”

“그래서 계집아이처럼 엉엉 울어댔었나?”

“댁도 발목을 접질려서 절름발이 신세가 되지 않았습니까!”

녀석은 옛 기억을 떠올리듯 잠시 말을 멈추고 아내가 남긴 십자가 목걸이에 입을 맞추었다. 서로 시베리아를 건너오며 아내를 잃고 자식도 잃은 사이라 저절로 옛 기억이 떠올랐다.

“죽더라도 아내를 볼 수 있으니까 얼마나 좋아.”

아직도 눈을 감으면 아내의 죽음이 떠오른다. 수술 중 사고로 인해 천국의 문턱에서 과다출혈로 죽은 아내의 모습이.

자비로우시고 인자하신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진작 절망하여 목을 매달아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게오르기가 당황한 듯이 호들갑을 떨며 날 다독였다.

“농담 좀 작작하십쇼. 혁명의 그 날을 완수하려면 끝까지 살아야 합니다.”

“그럼 왜 죽어 자빠지기 좋은 날이야. 죽지 않기 좋은 날이지.”

“아무튼 작전대로나 합시다. 중위님이 문루를 장악하셔야 합니다.”

이미 진입 경로와 작전 계획이 수립되었다. 작전은 세워지자마자 박살 나는 법이라지만 최소한 시작만큼은 제대로 꿰어둬야 한다.

“넌 내 후방에서 유입되는 적이나 죽여.”

“알겠습니다. 그러면 행운이 함께하기를!”

“행운 좋아하네, 새로운 아버지를 위하여.”

“새로운 조국을 위하여.”

인사를 마치고 박은찬이라는 양반 덕분에 맛을 들인 시가에 불을 붙였다. 시가를 반 정도 태워 나갈 무렵, 나와 같이 작전을 계획한 중령이 명령서를 지참한 채 다가왔다.

“드미트리 중위, 일찍 일어난 것 같군!”

“새로운 태양이 떠오를 날이지요. 그 태양을 보러 왔습니다.”

“아무렴, 적의 조직적인 저항이 분쇄된 지금이 가장 좋을 시기야.”

명령서를 확인해 보니 작전에 약간의 변경 사항이 있었다. 기존 작전을 이행하되 ‘유동적’으로 서로 역할을 교환하라는 조언이 첨부된 상세 내역이었다.

성벽에 접근하고 정란차를 붙여 성벽의 교두보를 확보한다. 여기서 여력이 남으면 문루를 확보하고 시가지에 난입하여 적을 분쇄하고 성문을 확보한다.

그다음에는 대한제국의 후속 병력의 길을 열어준다. 모든 내용을 확인하자 중령이 손을 뻗어 우리 모두를, 아버지의 새 아들이자 동티단 2기에 소속된 사람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곧이어 포격이 시작될 걸세. 미리 사기를 북돋우게 연설 한 번 어떠한가?”

말재주가 별로 없는데 굳이 연설까지 하라니. 그래도 돌격하기 전에 멋들어진 구호 한 번 뽑아줘야 사람들이 더욱 의욕이 샘솟는다.

정작 단상 위에 올라오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입고 있는 군복을 확인하자 저절로 충만한 용기가 솟아오르며 말이 나왔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뭘 주셨는가!”

-목숨을 주셨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또 무얼 주셨는가!”

-살 터전과 먹을 양식을 주셨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이 누구의 것인가!”

-아버지의 것이다!

한 번 대화가 오갈 때마다 점점 함성이 북돋아 올라왔다. 거대한 성벽 앞에 움츠린 모습도, 공성을 앞두고 겁을 먹은 모습도 새로운 아버지의 위엄 앞에 사라져갔다.

“우리는 태상황 아버지께서 새로 벼려낸 창칼이다! 우라(Ура) 대한!”

-우라 대한!

우레와 같은 함성, 우리의 고향에서 건너온 ‘우라’라는 함성이 퍼져나가고 모두가 열망으로 불타올랐다. 내 지휘 권한으로 내릴 수 있는 마지막 명령을 하달할 차례다.

“장비를 점검하라! 증기기관에 시동을 걸어라! 저 너머에 아버지의 적이 있다!”

-아버지의 적을 무찔러라! 우라 임피라타르(император - 황제)!

이제 내가 할 일은 끝났다. 아버지께서 내려주신 소총 두 자루 중 전장에서 사용하기 편하게 총열을 자른 갑식 소총을 등에 두르고 권총과 척탄을 허리춤에 착용하였다.

뒤에서 관망하던 중령조차 우리의 기세를 보고 잔뜩 흥분한 것 같았다. 그러더니 저 뒤에서 연기를 고요히 뿜어 올리는 공성용 증기 자동차를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자네들의 조언대로 해자를 미리 메워두려고 하네. 조만간 서른 개의 아가리에서 지옥과 같은 연무를 뿜으며 해자 위에 가교를 완성할 거야.”

“작전대로 잘 이행되면 더할 나위가 없이 좋습니다. 그럼 언제 돌격할까요.”

“돌격 시간은 포격이 한 번 중단된 다음이야. 자네들이 돌격한 순간 합을 맞추어 재차 포격을 이행할 걸세. 다만 상대도 바보는 아니니…….”

중령은 성벽을 망원경으로 재차 확인하였다. 그리고는 우리가 준비한 정란을 훑어보며 말하였다.

“사방에서 포격 지원을 실시하고 예비대를 배정할 거야. 여의치 않다면 퇴각하도록.”

“알겠습니다!”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중령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깃발을 휘둘러 후방에 명령을 보냈다.

“보내라! 해자를 메울 증기 자동차를 보내도록 하라!”

아버지께서 백성의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 채취하고 가공한 석유가, 중유라는 물건을 기술자들이 증기기관에 잔뜩 주입하였다.

이 증유는 과급기라는 도구를 통해 기관 내부에 유입된다. 한번 시동을 걸면 물이나 기름 한 쪽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굳이 통제할 필요 없이 작동이 가능하다.

“가라! 가서 해자를 메워 버려라!”

증기기관을 가공해 만든 자동차는 길쭉한 통나무 더미를 짊어진 채 벌판을 가로질러 성벽으로 향하였다. 곧이어 성벽의 적들이 자동차에 포탄을 퍼부었다.

사방에 흙먼지가 튀어 오르며 자동차 주변에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사람이라면 파편에 갈기갈기 찢겼어야 하지만 자동차는 좌우로 약간씩 허우적거리며 계속 나아갔다.

“사람이라면 죽었어! 하지만 증기기관은 망가지지 않아!”

“한 대 당했습니다!”

운수가 더럽게 없는 자동차가 포탄에 직격당해 굉음을 일으키며 터져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29대는 해자를 향해 계속 진격하였다.

“저거 하나하나가 아버지의 돈인데!”

내 옆에 있는 동료는 한 대씩 줄어드는 자동차를 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이론을 시험하고 실전에 투입하지 않은 물건이라 마구 엇나가는 물건, 혹은 가동을 중단한 물건, 그것조차 못 하고 옆으로 자빠져 버린 물건까지 생겨났다.

그사이 후방에서 포탄이 날아들고 개틀링 건이 성벽 위를 향해 맹렬히 불을 뿜었다. 적의 저항이 줄어든 사이 23대로 줄어든 자동차가 마침내 해자까지 닿았다.

“성공했다! 가교가 만들어지고 있다!”

첫 단계는 성공하였다. 포격이 조금씩 줄어드는 동안 자동차는 해자에 도달했고 그 위에 올라간 길쭉한 통나무가 해자 너머에 닿았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증기 자동차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 마침내 해자 안에 붕 뜬 상태가 되었다. 큰 충격에 절단되도록 만든 가죽 벨트가 끊어지며 온전한 통나무가 해자 위에 걸렸다.

그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다. 해자의 폭이 맞지 않아 빠지거나 벨트 결합이 온전하지 않아 통나무가 부러진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교가 속속들이 만들어졌다.

“가교 열다섯 개가 만들어졌다! 해당 경로를 확인하고 진군하도록!”

마침내 때가 되었다. 한 걸음을 옮기자 기묘한 느낌, 전구를 갈아 끼울 때 손을 잘못 움직여 전기라는 것이 몸을 통과한 저릿한 기분이 올라왔다.

정란의 몸통을 부여잡자 온몸에 힘이 들어온다. 주변에 동료들이 달라붙으며 서로를 다독이고 기운을 북돋아 서늘한 새벽 공기를 몰아내려 하였다.

“다들 출발한다! 경로를 똑바로 확인해!”

“하나! 둘!”

“하나아! 두우울!”

모두가 기합을 넣자 정란의 바퀴가 움직였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본래 정란은 화살을 막아낼 수 있도록 든든한 가죽과 두꺼운 판자를 덧댄 물건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누구나 총을 쏘는 시대라 엄폐물로의 가치가 부족했다. 정란을 밀고 가는 동안 적의 예비 병력이 쏘아붙인 탄환이 날아왔다.

“으아윽!”

“한 명 당했습니다!”

정란은 내 앞을 막을 뿐이지 옆에서 쏘는 탄환을 막을 수는 없다. 한 명의 전우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지독한 피비린내가 풍겨오며 모두가 겁에 질렸다.

“포격이다! 지원 포격이 재차 쏟아진다!”

성벽 위와 성벽 아래에서 재차 연무가 솟아올랐다. 그 올라오는 기세를 더욱 북돋기 위해 쌍성자에 잔존한 카자크 병사에게 배운 민요를 개사한 군가를 불렀다.

“우리가 시베리아로 떠나며 말하였다!”

“차르여! 잘 있으시오! 당신의 귀족들과 함께 놀러 다니시오!”

“돌아오라! 돌아오라! 나의 농노들이여!”

카자크는 두나이를 넘었고 우리는 시베리아를 넘었다. 그리고 이제 북경 성벽을 넘을 차례다.

주변을 돌아보자 화약의 연기와 전장의 풍경이 아로새겨졌다. 고향과 흡사한 녹음(綠陰)이 깃든 북경이라는 고장에서 점차 지옥으로 다가가기 시작하였다.

무인(無人)지대, 포탄이 만든 구덩이와 시신 그리고 가옥의 잔해라는 죽음을 딛고 우리 모두가 나아갔다.

마침내 덜컹거리는 소리가 나며 통나무를 디딘 것을 느꼈다.

“닿습니다! 조만간 닿을 겁니다!”

“성벽 위의 적은 얼마나 있어!”

“조금 있! 으악!”

정란 위에서 상황을 보고하던 파수병이 탄환에 맞아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다시금 피비린내가 솟구치며 다리에 힘이 저절로 들어갔다.

정란 후방의 가파른 계단을 밟고 올라가 성벽 위를 바라보았다. 열 명이 나란히 대열을 만들고 남을 두툼한 성벽 위에 붉은 옷을 입은 놈들이 제법 보였다.

“뒈져! 그냥 뒈져!”

갑식 소총을 대충 겨누어 마구잡이로 쏘아붙였다. 상대가 움츠린 사이에 정란차가 조금 더 전진했고 내 앞에 있던 파수병이 내 어깨를 부여잡으며 몸을 끌어내렸다.

“걸쇠가 젖혀집니다! 충격에 대비하십시오!”

“뭔 충격!”

내 옆에 있던 두툼한 스프링이 ‘철컹’ 소리를 내며 풀려났다. 그 순간 몸이 붕 뜨며 정란의 뚜껑이 굉음을 내며 젖혀져 성벽 위에 걸렸다.

“성공했습니다! 다들 올라와라!”

“우라! 우라아아아아아아!”

포탄으로 부스러진 성벽, 깨어진 돌조각, 널브러진 시신의 일부, 그리고 적!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여 레버를 젖히고 총구를 겨누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시야가 좁혀지는 그 흥분상태에서, 상대가 내 얼굴을 보고 목덜미를 쓰다듬는 것이 느껴졌다.

“쑤까(Сука)! 저게 그놈의 부적이구나!”

동양 사람들의 낮은 코와 달리 유달리 도드라지게 커다란 코가 하나 있었다. 그 흉물 위로 총탄이 적중하면서 부적이 끊기고 세상을 떠도는 원혼들이 해방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이제 막 만들어진 교두보를 더욱 확보하기 위해 바로 다리에 힘을 넣고 앞으로 박차고 나아갔다.

“다들 진격해! 보이는 놈들을 모두 쏴 죽여!”

눈앞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적들이 있다. 그 옆에는 통나무 십자가에 매달린 채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 송장이 있고.

희미한 바람이 불며 송장의 썩어 문드러진 악취가 코에 스며들었다.

그 순간 옛 기억이, 시베리아 도적 떼에게 살해당해 나무 위에 매달려 있던 고향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썩어 문드러지는 송장을 부여잡고 몸을 숨기려던 놈에게 한 발, 어떻게든 총을 장전하려는 놈에게 두 발, 그리고 탄환이 비어버려 찰캉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오한이 밀려왔다.

운수가 더럽게 없게도 송장을 부여잡은 놈은 어깻죽지에 한 발을 맞고 자신의 총을 재장전했다. 개머리판의 결합을 해제하려던 손이 마구 어긋나는 순간 뒤에서 총성이 들려왔다.

“중위님! 재장전할 때는 서로 신호를 보내야 하지 말입니다!”

“고마워! 아주 고마워!”

“그리고 권총은 뒀다 보르시 끓여 잡수셨습니까?”

날 겨누려던 놈이 배와 가슴에서 피를 뿜고 뒤로 자빠졌다. 아버지가 불러온 사람이 가르쳐 준 기초적인 가르침조차 망각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소총에 탄환을 밀어 넣으며 후방을 확인해 보니 내가 담당한 중대가 모두 진입에 성공했다. 주변의 정란 두 대도 우리보다 조금 늦게 병사들을 성벽 위로 올려두었다.

“전방에 적입니다! 아래에도 적이 몰려옵니다!”

<홍모귀(紅毛鬼 - 서양인의 멸칭)들이 나타났다!>

<어서 귀신을 죽여라! 우리가 놈들을 죽인대로 죽여라!>

뭐라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도 주눅이 들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자 자연스럽게 먼 훗날에 이룩할 혁명에 대한 열망이 온몸을 휘감았다.

“저놈들을 차르의 병사라 생각해라! 그놈들보다 약하고 훈련도 덜 된 놈들이다!”

“우라!”

적의 예비대는 붉은 옷을 입은 놈들과 평범한 동양식 복장을 입은 놈들이 뒤섞여 있는 몰골이었다. 총탄이 마구 날아들자 상대도 어쩔 줄을 몰라 허둥지둥거렸다.

병사들이 성벽 위를 점유한 채 계단을 올라오는 놈들에게, 계단 아래에서 허우적거리는 놈들에게 탄환으로 세례를 내려주었다.

저릿저릿한 어깨의 감촉, 진한 화약의 냄새를 느끼며 내 삶이 아직도 이어지는 것에 감사하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주변의 중대 배치를 확인했다.

작전은 이행한 순간부터 붕괴된다고 근처의 문을 점령했어야 할 우리 중대는 엉뚱하게도 시가지 돌입에 배정된 중대와 위치가 뒤섞여 버렸다.

“게오르기 녀석의 중대가 문루 장악조이다! 2소대! 녀석들에게 문루 장악용 장비 보내!”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시가지로 진입합니까?”

“당연하지! 다들 엄호해라! 나와 제1소대가 먼저 내려간다!”

딱 보아도 계단 주변에는 매복이 있다. 적은 설령 성벽이 점령당하더라도 계단을 내려오는 병력을 상대할 수 있도록 방어진을 구축해 두었다.

저 방어진을 뚫는 것은 두 번째 병력과 대한제국군 본대가 진입한 다음이다. 최대한 많은 적에게 타격을 입힐 수단은 갖추어 두었다.

“갈고리 결합해! 밧줄 타는 훈련도 해 두었잖아!”

“알겠습니다!”

“미리 척탄 까놔! 아래에 있는 놈들이 도망치게 만들어!”

모두가 허리춤에 준비한 척탄(擲彈)에 불을 붙이고 성벽 아래에 마구잡이로 내던졌다. 성벽 아래에서 비명 같은 것이 들리자마자 외측 성벽에 갈고리를 걸고 밧줄을 집어 던졌다.

-쿵!

두서없이 던진 척탄의 폭발음이 귓전을 계속 간지럽혔다. 그동안 밧줄의 고정을 확인하고 양손과 양발에 몸을 의지해 성벽을 기어 내려갔다.

역시 아버지이시다. 성벽을 오르는 것이 능사가 아닌 내리는 것도 중요하다 하셨다. 허를 찔린 적들은 우리 소대원의 진입을 넋 놓고 바라보기만 하였다.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고 성벽을 박차 지붕 위에 올라갔다.

“어 이거? 뭐야?”

평상시에 디디던 지붕과 다르다. 이 지붕은 썩어서 곧 무너질 녀석이었는지 단번에 무너져 내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