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311화 (277/345)

311화

24장 7화 북경, 남경(2)

태평천국은 풍운산이 방어선에서 시간을 끄는 동안 북경을 수비할 병력을 모으려 하였다. 간부들과 병사들이 사방을 쏘다니며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장정을 모으려 하였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넘쳐나던 북경의 길거리는 돌아다니는 들개마저 사라졌다. 한 병사는 창문 밖으로 한적한 길거리를 바라보더니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여기가 그 북경이 맞기는 한가?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네.”

이 시기 북경은 전 세계 상위권의 도시답게 인구가 약 110만 명에 육박했다. 여기에 주변 지역의 인구를 합치면 약 160만 명에 달하였다.

그건 예전의 일이었다. 북경 내부에서 죽은 사람은 추산치를 훨씬 넘은 15만여 명, 대부분 장정과 그 가족들이었으며 혼란을 틈타 빠져나간 사람도 그와 비슷한 15만 명에 달했다.

여기에 남은 장정들도 북경 주변의 인구들마저 방어선 구축에 동원되거나 피난민으로 전락해 무작정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미 피난민이 40여만 명에 달하였다.

북경은 이미 수도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사실상 거대한 수용소로 전락한 북경은 그 찬란한 건물들조차도 우중충하게 퇴색되어 보일 지경이었다.

두 번의 패배를 겪은 태평천국의 병사들도 가까스로 탈영하지 않는 것이 전부. 이들은 점거한 집에서 삼삼오오 모여 술을 퍼마시며 괴담을 안주로 삼기 시작했다.

“여기에 갇혀 있다가는 불벼락을 입에서 쏘는 조선 귀신들에게 다 찢겨 죽을 거야.”

태평천국의 뿌리는 객가이다. 객가들은 평상시에 도교에 그나마 가까운 미신을 믿는 성향이 강한 민족이었다.

평상시에는 홍수전의 교리를 믿던 이들은 그 광신을 서서히 상실하였다. 이 시대 특유의 미신과 결합하여 조선을 악마와 사령(死靈)들이 깃든 지옥에서 올라온 군대로 만들어 버렸다.

“자네도 그 소문 들었나? 조선에서는 귀신 병사를 부린다더군.”

술을 마시던 태평천국 병사는 거하게 취한 눈으로 동료들에게 말하였다. 그 괴담에 힘을 입어 서로가 알고 있는 소문을 사실처럼 논하기 시작했다.

“놈들이 시퍼런 옷을 입는 이유가 뭔지 아나? 송장에 주술을 걸어서 귀신을 덧씌워서야. 그걸 숨기려고 퍼런 옷을 입는다네.”

이해할 수 없는 사실에 미신이 덧붙여졌다. 그 절도 있는 모습과 지휘체계는 태평천국 입장에서는 강시나 요괴와 같은 몰골로 비추어졌다.

모두 다 대한제국에서 의무교육을 도입한 이후 사라진 모습이었다. 물론 대한제국에도 아직 미신과 괴담이 남아 있지만 뜬소문이나 겁을 주기 위한 소문 정도로 인식했다.

이미 이성적인 태도와 판단이 의무 교육을 통해 번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태평천국의 기반인 객가들은 미신을 믿는 성향이 더욱 강해 이 괴담을 스스로 키워나갔다.

“놈들은 총알을 쏘지 않아. 팔을 휘두를 때마다 손가락이 총알처럼 날아온다더군.”

대한제국 사람이 신형 갑식, 진식 소총을 보았다면 ‘신비한 방법으로 쏠 수 있는 소총’이라며 그 방법을 탐구할 것이다. 그러나 미신에 심취한 이들은 탐구를 포기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야. 놈들이 그 기이한 소리를 내면 치아가 수천 개나 튀어나온다 하더라고.”

“어유 끔찍해라. 치아라고? 날카로운 송곳니 말인가?”

“칼날만큼 날카로운 송곳니가 비처럼 쏟아지네. 그걸 피하려면 무릎을 꿇어야 한다던가?”

하다못해 열강국의 병사라면 개틀링 건에 대해서는 몰라도 합리적인 대응, 엎드려서 피탄 면적을 줄이거나 구덩이 속으로 숨는 행동을 할 것이다.

그러나 한번 미신에 빠져든 이들은 상대를 이해 불가능한 괴물로 보았다. 무릎을 꿇어서 우연히 사선(射線)을 벗어난 병사의 잘못된 생존법이 표준이 되었다.

“그게 다인가? 나는 가슴팍에 총검을 쑤셨는데 입이 생겨나 그걸 물어뜯은 이야기도 들었네.”

“놈들의 가슴과 배에는 입이 달려있어. 폭탄을 던져도 그걸로 먹는다 하더군.”

“그런 놈들을 어떻게 이겨. 우리는 상제의 뜻을 거역하는 만주족을 죽이는 사람들인데.”

결국 태평천국 병사들은 스스로 적의 힘을 키워나가는 미신적인 행위를 반복하였다. 이 미신의 끝은 결국 주술적인 믿음으로 돌아왔다.

“놈들은 쇳물을 마시고 척수를 빨아먹는다 하더라고. 그걸 막으려면 어린아이의 손을…….”

“야! 그게 아니고 노인 부부의 머리통이지!”

“다 틀렸어! 상제를 칭송하는 영험한 주문을 외워야 한다더라!”

아직도 충성심이 남은 병사의 말을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다른 병사들은 모두 자신이 소중히 간직한 부적을 흥정하며 값을 매겨나갔다.

“내 부적이 좀 더 좋을 것 같은데 자네 부적이랑 바꾸자고.”

“어허! 그러면 은자 열 냥 정도는 내주셔야지.”

탁자 위에 사람의 일부가 오가는 가운데 한 병사가 헛기침을 하였다. 그리고는 삼나무로 만든 손바닥 크기의 부적을 내밀며 말하였다.

“에이 이 촌뜨기들. 관성제군(關聖帝君 - 관운장의 도교 명칭)을 앞세우면 가호도 받고 조선 요괴를 죽일 수 있다니까. 서른 냥에 사겠나?”

“예순 냥! 예순 냥보다 더 나가는 금붙이 여기 있다네!”

본래 역사에서 홍수전이 없애려 했던 미신이 다시금 피어나기 시작하였다.

병사들이 한창 주머니를 털어가며 부적을 거래할 무렵, 간부 한 명이 문을 벌컥 열고 말하였다.

“할당량이 떨어졌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사람을 징발한다!”

대한제국군이 북경으로 진군하는 상황이라 한 명이라도 많은 병사가 필요하였다. 병사들은 술에 거하게 취한 채 간부의 명령에 따라 길거리로 나섰다.

그들의 앞에 허름한 옷을 입은 장정이 절뚝거리며 길거리를 걸어갔다. 간부는 지휘봉을 휘두르며 다가가 즉각 징발 대상자로 삼으려 하였다.

“네놈은 장정 아니더냐! 어서 태평천국에 가입하여 복록을 누리지 않고 뭘 하느냐!”

흠칫 놀란 장정은 말을 더듬거리며 두서없이 심한 요동 사투리로 답하였다.

“저, 저! 저는 아아아! 아닙니다! 당산(唐山 - 현 탕산시)의 광산에서 일하다가 몸이 망가졌는데 저를 징집하시면 아니 됩니다! 거지를 징집하시다뇨!”

장정의 정체는 어디서 구했는지 몰라도 제법 좋은 옷을 입은 거지였다. 그의 왼팔은 팔꿈치 아래에서 잘리고 오른팔은 손가락이 두 개나 날아간 몰골이었다.

“저를 데려가지 마십시오. 절름발이라서 팔다리 모두 엉망입니다.”

아예 바지를 벗자 정강이에 깊숙한 흉터가 남아 있을 지경이었다. 간부는 눈을 부라리더니 짜증을 한껏 담아 발길질을 하였다.

“어훅!”

“사지도 성치 못한 놈이 뭘 얻어먹으려고 길거리를 싸돌아다녀! 썩 꺼져!”

간부는 병사 열 명을 채우라는 할당량을 되새기며 주변의 집을 바라보았다. 주변의 모든 집은 이미 창문이 닫히고 인기척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시시각각 퍼져나가는 괴담과 뜬소문은 백성들도 겁에 질리게 하였다. 간부는 괜히 주변을 둘러보고는 자신의 공포를 억누르려는 듯이 말하였다.

“고작 두 번 패하였다고 저리 겁을 먹어! 그것도 한 번은 의비의 간사한 짓으로 패하였는데!”

소문으로 인해 간혹 보이던 징병자도, 그래도 제법 많던 노역 대상자도 사라졌다. 조금만 약탈과 살육을 자제했어도 할당량을 채우고도 남았을 간부는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지 않았다.

그의 기준으로 한간(漢奸)이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은 태평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 단 하나, 간부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박차며 선언하였다.

“문을 열어라! 네놈이 한간이 아니라면 어서 문을 열지 못할까!”

병사들이 담장 주변을 에워싸고 도망치는 사람을 잡아들이려 하였다. 그러던 중 남자의 비명소리가 집 안에서 들려왔다.

-아으아아악! 으악! 아으아아아아아악!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간부가 손짓을 하자 병사들이 문을 부쉈고 간부는 당당하게 방문을 박차며 말하였다.

“용기도 없는 놈이 자진(自盡)을 시도하였느냐!”

자살을 하려다 실패한 것, 혹은 운수 좋게 성공하였다고 판단하여 호통을 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양 눈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사내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모두가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사내의 몰골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사내가 고통을 억누르고 피에 범벅이 된 얼굴로 말하였다.

“소인은 삼 일 전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간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남자의 멱살을 잡고 뺨을 후려쳤다. 당장 칼로 찔러 죽이고 싶은 심정이나 홍수전의 임시 법령이 문제였다.

“이 미친놈의 새끼야! 복록이 눈앞에 있는데 눈을 쑤셔!”

홍수전도 사람이 모자란 상황을 알고 무분별한 사형 처분을 금지한 상태였다. 간부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자 남자가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으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몸이 성하다면 맹세를 하고 나아가겠지만 앞을 볼 수 없는지라 애석하게 되었습니다.”

병사들은 울분에 차서 모든 집기를 때려 부수고 다른 집으로 향했다. 그 집도 옆집과 마찬가지로 문을 걸고 버티고 있었다.

“문 열어! 네놈은 사내가 아니더냐! 어서 나오지 못할까!”

밖에서는 대문을 부수는 소리가 들려오고 바지와 속옷을 벗은 사내가 심호흡을 하며 독주를 병째로 들이켰다.

그는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하고 공포에 젖은 눈으로 작두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대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사내는 작두날을 잡고 위패에 사죄의 말을 남겼다.

“아버지! 이 아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대를 잇지 못하는 몸이 되었습니다!”

작두날이 떨어지고 외마디 비명이 들려왔다. 방 안으로 난입한 태평천국 병사들은 몰골을 확인하고는 헛구역질을 하며 방문을 닫았다.

위쪽의 두 알이나 아래쪽의 두 알을 훼손한 사례는 별로 없었다. 대신 서로 협력해 팔이나 다리 중 두 개 이상을 훼손하여 징집을 회피하는 방법이 유행하였다.

결국 홍수전의 명령으로 새로운 임시 법령이 배포되었다.

<징집을 회피하여 몸을 훼손한 자는 성벽 위에 매달아 두어 포화에 노출시킨다.>

북경 외성의 성벽 위에 인간 허수아비가 천여 개가량 생겨날 무렵 징발되는 사람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 수는 북경을 수비하기 위한 병력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였다.

성문을 지키고 적당히 성벽 위를 방어할 병력만 따져도 최소 7만 5천여 명의 병력이 필요하다. 실제로는 이 2배의 병력을 동원해야 효과적인 방어가 가능하다.

결국 태평천국의 간부들은 사지만 멀쩡하면 정신이 혼미한 자도, 체중이 이백 근(120㎏)이 넘거나 육십 근(36㎏)에 미치지 못하는 자도 징집하기 시작하였다.

후임이라 자처하는 이들의 몰골을 확인한 태평천국 병사들의 탈영이 빗발쳤다. 이 악순환 속에 점차 사지가 멀쩡하지 않은 이들까지 징병 대상이 되었다.

태평천국에 줄을 댄 사람들은 예외가 적용되었다. 평상시에 잘만 돌아다니던 상인의 아들은 아버지가 간부들에게 뇌물을 먹인 것을 기억하고 거드름을 떨며 말하였다.

“제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예전에 말에서 떨어져 척추가 뒤틀렸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 자네 아버지께서 많은 돈을 주신 이유가 다 있었군.”

절름발이가 징집되는 와중에 상인의 아들은 당당하게 면제 판정을 받았다. 주변에서 끌려가던 사람들은 그 당당한 모습을 보고 살기가 깃든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사람들이 줄줄이 끌려가는 모습을 확인한 거지는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한참을 고민하다 주머니에서 은자 하나를 꺼내 성문 수비병에게 간청을 하였다.

“저는 팔도 다리도 못 쓰는 형편이라 여기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쌀을 축내지 아니하도록 문밖으로 내쳐 주시지 않겠습니까?”

거지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수비병은 헛기침을 하면서 성 밖으로 나가는 짐수레를 가리켰다. 곧이어 북경 밖으로 빠져나온 거지는 더 이상 절름거리지 않고 태연히 한 곳을 찾아 걸어갔다.

북경 인근의 폐가에는 그를 비롯해 요동 일대의 사투리를 사용하는 거지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정작 한자리에 모이자 목소리를 낮추고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여섯 명이 안 왔군. 사지가 멀쩡한 사람은 죄다 징집 대상자가 된 것 같은데.”

“미친놈들, 우리 몸이 어디가 멀쩡하다고 징집을 시켜?”

모두 다 요동에서 군대훈련을 받다 사고로 불구가 된 청나라 계열 병사였다. 이들은 연금을 받아먹는 은혜를 갚으려 북경에 잠입하기로 결심하였다.

대부분 사지가 멀쩡하지 않은 데다 거지 신세라서 학살과 약탈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명을 잠입시켰는데 복귀한 사람은 14명에 불과하였다.

이들은 남은 6명의 안위를 걱정하며 부대로 신속하게 복귀하였다. 이들이 입수한 북경 내부 정보는 대한제국군에게 전달되었다.

* * *

“……이상 보고를 마칩니다. 복귀하지 못한 동료들을 구원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전투가 벌어지면 알아서 안전한 곳으로 숨어들 걸세. 돌아가서 푹 쉬도록.”

이최응이 미리 보낸 북경 잠입요원들의 보고를 듣고 어떤 나라의 군대가 생각났다. 그 나라 군대보다 좀 심한 상황이라 홍수전이 얼마나 궁지에 몰려있는지 잘 알 것 같다.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회의가 재개되었다. 전술회의를 주도하는 이최응은 심란한 표정으로 보고를 종합해 병력 추산을 대략적으로 마쳤다.

“적이 어떻게든 머릿수라도 채울 것 같군요.”

이최응은 한숨을 쉬며 다음 전장인 거대한 북경 성벽 모형에 부대를 배치하였다.

명나라의 전성기 시절에 축조된 북경성은 예산이 부족해서 설계보다 길이, 높이, 두께 모두를 줄여버린 물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기의 집합체라 할 거대한 규모다.

“적의 예상 병력은 나름 정예 병력 사만여 명, 이외에 머릿수만 채우기 위한 징집병력 육만여 명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축적을 1/100으로 잡은 북경 일대의 모형 하나가 탁자를 가득 메울 지경이다. 그 중심부에는 가로 60㎝, 세로 80㎝에 달하는 거대한 북경 성이 배치되어 있었다.

여기에 성 안팎으로 네모난 나무토막을 집을 대신해 대략적으로 배치해 두었다. 그리고 흙으로 만든, 7㎝ 높이의 성벽 위에 검게 칠한 이쑤시개와 붉게 칠한 이쑤시개가 박혀나갔다.

“여러 요소를 생략하였지만 적의 현황은 대충 이러합니다. 반면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육만여 명이 조금 넘는 정도이옵니다.”

“저런 성벽은 포탄을 비 오듯 쏟아부어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데.”

태자는 그나마 높이가 낮고 방어력이 부족한 외성(外城)을 가리키며 어떻게 공략할지 한숨을 쉬었다.

외성 성벽은 약 15㎞ 길이, 높이는 6m 안팎인데 두께가 12m에 달하는 벽돌 덩어리이다. 내성은 이보다 높이도 두께도 두 배가량 크고 두툼하다.

이최응은 태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무너트려도 안쪽에 쌓아둔 토사와 골재가 무너져 단숨에 넘어갈 수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하면 굴을 파고 그 아래에 폭약을 매설하여도 효과가 없단 말인가?”

“저 거대한 규모를 생각해 보면 기초도 튼튼하고 깊을 겁니다. 필사의 노력을 다하여도 성벽을 무너트려 진군 경로를 만드는 작업이 최소 두 달은 걸릴 겁니다.”

태자조차도 이 거대한 성벽에 질색을 하며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는 이 말도 안 되는 규모의 성을 단숨에 함락당한 만주족 지휘관을 흘겨보더니 질문을 하였다.

“대체 저토록 장엄한 북경을 어떻게 함락 당하였소?”

“그것이…… 문 두 개를 동시에 공략당했습니다.”

“그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나 다음이 문제요. 외성을 뚫고 시가지에 난입한 역도들이 더욱 튼튼한 내성의 문을 두드릴 때까지 대체 뭘 한 거요?

태자는 더 이상 논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다.

일단 북경을 공략해 홍수전을 죽이거나 내쫓아야 대한제국의 첫 목표를 달성하는 상황이다. 이최응은 난감한 표정으로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그렇다고 문을 공격하는 방법도 좋은 수는 아닙니다. 성문을 석회와 돌로 막아버릴 터. 폭탄을 터트려도 문루(門樓)의 잔해를 치운 다음에야 진입할 수 있사옵니다.”

결국 장기전 외에는 답이 없는 실정이다. 이최응은 앞으로의 대전제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적의 병력이 부족하지만 우리도 병력이 부족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성벽을 에워싸고 보급을 끊어 적을 고사(枯死)시키려면 병력이 두 배는 필요합니다.”

이최응은 허탈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지금도 군비 소모로 곳곳에서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 두 배의 병력을 동원하면 나라가 파산할지도 모른다.

“그 정도 병력 차이라면 그냥 사방에서 포격을 날려서 적을 무너트리고 말지.”

“외부대신께서도 병법의 핵심을 잘 알고 계시는군요.”

지금 대한제국군의 규모로는 북경의 네 면을 모두 포위할 수 없다. 포위하면 지나치게 대열이 늘어지고 빈틈이 생겨 적의 공격에 뚫려버리고도 남는다.

개틀링 건이고 뭐고 서로 화망(火網)을 형성할 수 없을 정도로 간격이 벌어지면 끝이다. 필사적으로 돌격하는 전열보병의 밥이 되어버리니까.

결국 북경은 수복할 수 있어도 홍수전의 탈출은 막을 길이 없다. 내가 원하던 바이기도 하고 홍수전이 멍청이가 아니라면 택할 길이기도 하지.

이최응은 여러 고민 끝에 다른 장성들과 합의하여 병력 배치를 마쳤다. 동쪽과 남쪽 양면을 공격하고 북쪽과 서쪽은 외몽골 기병으로 견제하는 방침이었다.

“이게 최선의 수 같습니다. 최소한의 전선을 유지하고 적을 압박할 수 있는 규모이지요.”

“옛 병법서처럼 정란(井欄 - 공성탑)을 붙여 적이 침묵한 즉시 성벽에 올라가는 방법도 있지 않소?”

태자의 말을 들은 장성들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대한제국군이 아닌 조선 시대의 병법을 동원해 보자는 제안인데 문제가 좀 많다.

조선 시대에는 홍경래의 난 이외에는 딱히 병력을 동원한 적이 없었다. 이후 군사체계를 영국과 프랑스 기준으로 완전 수정하였다.

40년 전, 약 1820년대의 조선군이라면 몰라도 지금 그 병사들은 대부분 죽고 손자가 군대에 발을 들일 나이다.

“공성전을 익히기는 하여도 서역에서 유래한 성형요새를 기준으로 삼았사옵니다. 이런 거대한 성벽을 상대로 공성전을 벌이는 훈련은 한 적이 없사옵니다.”

당연히 서양의 방식으로 공성전을 익혀서 공략 대상을 성형요새로 설정하였다. 성형요새에도 성벽은 있지만 그건 수많은 구성 요소 중 하나에 불과하다.

단순 무식한 단일 성벽을 기어 올라가는 훈련도, 여기에 필요한 병기 제조법도 실전된 것이다. 태자는 이 설명을 모두 들은 다음에 거대한 성벽을 바라보고 말하였다.

“적은 규모라면 몰라도 큰 병력이 한 번에 움직이면 손발이 맞지 않을 것 같구려.”

“그 정도면 다행입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적군이 성벽에 예비대를 보내서 막 공성을 시작한 병사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힐 것이옵니다.”

이최응은 그래도 태자의 의견이라 나름 존중하기로 한 것 같았다. 아무 조치도 안 하는 것보다는 예비 공성병력이라도 두어서 만일의 때를 대비하려 했다.

“공성전을 훈련받아 나름 선두에 설 수 있는 자원자들을 찾아보도록.”

전령이 밖으로 나가자 태자도 별 기대를 안 하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모형을 내려다보았다. 한참 동안 진영을 살펴본 다음 지나가듯이 중얼거렸다.

“참 우스운 일이구려. 새 병법을 배웠는데 옛 병법을 주먹구구식으로 다시 익혀야…….”

태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령이 돌아와 밝은 표정으로 답하였다.

“병사 가운데 오천여 명이 공성전에 능숙하다고 답하였습니다. 지원 유무를 물어보니 모두가 응할 것이라 답하였고요.”

이게 뭔 소리냐. 지금 들려온 답변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주변을 돌아봤는데 장성들 대부분이 나와 같은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봤다.

“우리는 가르친 적이 없는데. 혹시 군부대신께서 밀명을 내리셨소?”

“더더욱 내릴 이유가 없지 않나! 내 앞의 일도 벅차 죽겠는데!”

서로를 의심하는 가운데 예전에 태자에게 보고를 올린 2기 동티단의 대표. 드미트리 페트로프 중위가 막사로 들어와 인사를 올렸다.

“드미트리 페트로프 중위 보고 드립니다. 휘하 동티단 가운데 일찍 소집된 병력 오천여 명은 공성전 훈련을 철저히 이행하였습니다!”

“우리가 간혹 배우는. 성형요새를 가정한 공성전 훈련 말하는 건가?”

“아닙니다! 옛 방식의 성벽입니다. 대한제국의 전통 방식 성벽으로 훈련하였습니다!”

“그런 훈련장이 세상 어디에 있다고!”

군부대신 이최응도 모르는 훈련장이 이 세상 어디에 있는지 촉이 왔다. 이최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드미트리 앞으로 다가가서 더욱 상세히 물어보았다.

“성을 공략하는 방법을 어디에서 확실히 익혔는가? 혹시 석축 몇 개를 넘은 수준인가?”

“태상황께서 명을 내리시어 별궁 자체를 훈련장으로 삼게 되었사옵니다.”

“별궁을 훈련장으로 삼아!”

태자는 할아버지인 순조가 연관된 사실을 알아차리고 벌떡 일어나며 고함을 쳤다. 다른 장성들도 말이 안 된다면서 호들갑을 떨면서 말하였다.

이론상 가능한 일이다. 쌍성자 별궁은 산기슭을 깎아낸 물건이라 가파른 석축이 많다. 이 석축이 곧 성벽이고 담장까지 합쳐지면 거의 8m가량의 높이가 된다.

더군다나 순조의 거처이다. 훈련할 때는 사람을 모두 비워놓는다면 그저 ‘병사들을 잘 훈련한다’ 정도의 소문만 퍼지고 모든 일이 기밀 사항이 되어버린다.

거기다가 순조의 막대한 재력이과 풍부한 목재면 동티단 서른 명당 정란 한 대 정도는 지급하고도 남는다.

다들 이유는 몰라도 순조가 얽힌 이상 가능한 일이라 판단하였다. 장성들의 판단을 존중한 태자는 동티단 대표인 드미트리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그러하면 왜 이런 일을 가르쳤는지 저의가 궁금할 뿐인데. 태상황께서 무엇이라 하셨는가?”

드미트리 페트로프는 푸른 눈을 굴리며 당당한 표정으로 내가 예상한 답변을 하였다.

“저희가 먼 훗날 고국으로 돌아간 다음에야 필요한 일이라며 가르쳐 주셨습니다.”

순조는 아마 새 동티단이 혁명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덜 죽기를 원한 것 같다. 그래서 여러 훈련을 시키던 중 옛 시대의 공성전 훈련이 부족하다 판단한 것 같다.

그 판단착오가 돌고 돌아 이 상황에 쓰이게 되었다. 이최응은 탁자에 앉으며 북경 성의 모형을 가리킨 다음 진지하게 권유하였다.

“고국으로 돌아가서 어떠한 일을 할지는 모르겠군. 다만 태상황께서 가르치신 훈련을 세상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성 중 하나에서 실시해보지 않겠나?”

“저 머나먼 벌판 너머에 있는 성 말입니까? 너무나 좋은 명령이로군요.”

작전이 최종 승인되었다. 대한제국군은 남쪽과 동쪽에 무차별 포격으로 피해를 누적시키고 적의 전력을 갉아먹는다.

충분히 피해가 누적된 이후 순조가 키워낸 병사들, 드미트리를 비롯한 2기 동티단이 무력화된 성벽을 점령하는 작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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