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화
24장 6화 변방 세력(1)
프랑스 – 베트남 연합군에 합류한 석달개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발휘하려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일단 상대에 대해 수많은 정보를 입수하며 이들의 목적을 분석했다.
사람을 바꿔가면서 질문을 하고 여러 각도에서 내용을 분석하는 과정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프랑스군을 통해 현재 청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파악하였다.
“……북경에서 일어난 사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극이라네. 그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군사를 일으켰지.”
“민간인을 즐겁게 학살하는 놈들이라. 참 끔찍한뎁쇼.”
프랑스 장성과 면담을 가진 석달개는 자신이 예전에 해왔던 일. 계투를 일으켜서 다른 마을을 박살 내고 마을 주민과 협력한 한족을 포로를 쿨리로 팔아넘긴 과거의 기억을 되새겼다.
자신과 같이 한족과 어느 정도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정확히는 중립에 가까운 객가들도 계투를 벌이는 경우가 있다.
하물며 평상시에 한족과의 사이가 안 좋은 객가들이 주축이 되었다면 말을 다 했다.
석달개는 선을 확실히 그을 생각으로 장성에게 답을 내놓았다.
“저는 목숨이 아까워서 불란서의 요청에 응하였지요. 이런 참혹한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객가를 대표하여 놈들을 모조리 축출해 버리겠수…… 습니다.”
석달개는 새어 나오는 사투리와 객가의 말을 어떻게든 표준어로 바꾸면서 대답했다. 그러자 역관을 통해 말을 들은 장성이 눈을 굴리며 고개를 바짝 세우고 말하였다.
“자네가 객가였나? 반란군 수괴인 홍수전과 같은 부류라고?”
장성이 놀라서 눈을 흘기며 석달개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프랑스의 대외 정책은 굴종하는 사람은 명예 프랑스인, 반항하는 사람은 제거 대상으로 요약할 수 있다.
명예 프랑스인 조일준의 활약과 대한제국의 성장. 여기에 나폴레옹 3세의 명령 덕분에 아주 약간 상대를 포용하려는 마음을 품은 것이 전부이다.
방 안에 대화가 멈추고 숨소리만 들려오며 분위기가 싸늘하게 굳어갔다. 그러자 석달개는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머리를 긁적이고는 태연하게 말하였다.
“객가의 객(客)은 손님이라는 뜻입니다. 난세가 일어나면 고향에서 쫓겨난 백성들이 정처 없이 떠돌다 변방에 정착하기 마련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모두 객가가 됩니다.”
“아. 일종의 난민이라는 말이로군.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난민을 객가라 부르는군.”
“그래서 출신 지역도 다르고 성품도, 풍습도 모두 제각각입니다. 한마디로 홍수전의 휘하에 있는 객가들은 흉포하고 사람을 죽이기 좋아하는 놈들이우, 놈들이지요.”
다시 새어 나온 사투리를 석달개가 수습하는 동안 프랑스 장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유럽의 기준으로 세력을 분류하였다.
“자네들은 위그노쯤 되는 사람들이고 홍수전의 추종자는 집시(Gypsy)와 흡사한 놈들이군.”
한때 지독한 박해를 받았던 위그노, 프랑스의 개신교 신자들은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사면되어 어엿한 시민이 되었다.
반면 사방을 들쑤시고 다니며 범죄를 저지르는 집시들은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 민족이다.
장성은 집시들의 행패를 떠올리며 짜증을 섞어 말하였다.
“나라가 얼마나 엉망진창이면 집시 같은 놈들이 권력을 잡고 반란을 일으키는지.”
“제 생각도 비슷합니다. 차라리 제가 반란을 일으켰으면 학살은 안 했을 것 같은데.”
“권력을 잡으면 사람이 어떻게 변질될지는 아무도 모르지.”
프랑스 장성들은 석달개를 아직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그가 공훈을 세워 충분한 보상을 주었을 뿐 엄연히 양귀비를 재배해 판매하던 세력에 속하였다.
석달개는 머리를 굴려 이 사실 또한 자신이 극복해야 할 사항으로 넣어두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지휘할 수 있는 부대를 동원하여 첫 작업에 돌입하였다.
그는 진격 경로 외곽의, 연합군의 진군을 경계하여 응전 태세를 취하던 객가 마을들의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산세를 끼고 있는 요새에 웅크리고 있는 객가들은 석달개가 방문하자 극도로 경계하였다.
둥그런 토루의 문이 모조리 닫히고 판자를 덧대 못질을 하였다. 이 토루 안의 총안(銃眼) 역할을 하는 창문으로 총구가 비쭉 나와 있었다.
심지어 지붕에는 촌장이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소구경 대포 여럿을 세워놓고 석달개와 일행들을 위협하며 말하였다.
“홍이(紅夷 - 서양인)의 앞잡이 놈들의 말을 들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꺼져라!”
“나 석달개는 홍이의 앞잡이가 아니오! 내가 앞잡이라면 내 가족은 돼지새끼고 내 조상은 개새끼요!”
일부러 가장 심한 사투리로 답한 석달개를 보고 마을 주민들은 배꼽을 잡으며 화답하였다.
“그래? 이런 개돼지새끼를 봤나!”
예상과 다르게 온갖 욕설이 들려왔다. 그러나 석달개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더욱 당당하게 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내 이야기를 들어보시오. 홍수전이라는 자가 나라를 어지럽히고 반역을 일으키지 않았소. 이런 난세에 서로 힘을 합쳐 천하를 노려보지 않겠소!”
“개 풀 뜯어먹는 소리를 하는군. 천하? 홍이가 천하를 집어삼키게 내버려 둘 놈이!”
“옳소! 우리는 홍이의 끄나풀이 되어 천하를 더욱 어지럽히겠지!”
소식이 늦은 객가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석달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상대의 말문을 트는 것에 성공하자 석달개의 달변이 시작되었다.
“홍수전이 나라를 어지럽힐 때 서역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하였소! 이들이 홍수전의 군대를 때려잡는 것이 그토록 순리에 어긋나는 일인지 여쭈어보고 싶구려!”
“때려잡는 것은 옳다! 그러나 우리는 홍수전과 아무 관계도 없어!”
“옳소! 촌장님은 태평천국이라는 집회의 가입 요청을 받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셨지!”
“그 말을 홍이들이 어떻게 이해할지는 생각해 보셨소! 홍수전과 접촉한 반란종자로 보겠지!”
마을에서는 수없이 욕설이 터져 나왔다. 홍이의 번견(番犬) 정도는 양호한 편이고 대대손손 자라로 지낼 놈들이라는 욕설, 심지어 당장 죽이겠다며 칼을 뽑는 청년들도 있었다.
“죽기 싫으면 꺼져! 이 자라개돼지새끼야!”
“네놈이 홍이들을 앞세워 우리 모두를 죽이려 하지 않나!”
토루의 문이 열리고 석달개를 죽이기 위해 장정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까지 분위기를 격양시킨 석달개는 특유의 달변을 동원하여 사람들을 재차 설득하였다.
“그게 다 홍수전 탓 아니오! 조선도! 영길리도! 달자도! 불란서도! 하물며 서역의 수많은 국가들이 모두 한 몸이 되어 그를 죽이려 하는데 우리가 뭘 해야 하겠소!”
“조선이 쳐들어온다고?”
“이미 소식을 들었소. 산동반도를 통해 진격한 조선군이 북경 인근까지 넘보고 있소이다. 상해에는 영길리의 군대가 상륙하였고 이 외의 나라들이 모두 홍수전을 죽이려 하오!”
가장 먼저 문을 박차고 나온 장정이 석달개의 목젖에 창을 겨누었다. 그러나 석달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에게 창날을 들이민 장정을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가장 먼저 문을 박차고 나온 당당함이 마음에 드는구려. 당신은 내 부관이오.”
졸지에 부관으로 발탁된 장정에게 석달개가 태연하게 손을 내밀며 다가갔다. 그러자 창날이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가고 장정이 뒷걸음질을 치다 고함을 쳤다.
“이놈이 미쳤나?”
“댁들이 미쳤소! 눈앞의 이득만 따르고!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듣고 배웠음에도 손아귀 안에 쥔 약간의 이득을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지!”
석달개는 산 아래에 주둔한 프랑스-베트남 연합군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이 사태를 해결할 길을 마을 사람들에게 제시하였다.
“난세요, 난세에 우리와 같이 객가로 분류되는 학살자들이 온 세상의 국가에 공격을 당하고 있소.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같은 객가로 취급당해 뭇매를 맞을 터!”
“가만히 웅크리고 있으면 지나갈 일이야! 난 홍이들의 하수인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시오! 홍이들이 사는 땅과 이 나라까지의 거리는 사만 리가 넘소이다. 그 머나먼 길을 달려온 홍이들이 계속 머무를 것 같소이까?”
세상 물정에 어두운 객가들도 원정군이 돈 퍼먹는 기계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마침내 장정들 대다수가 무기를 허리 아래로 내리기 시작했다.
“난 홍이들이 일으키는 파도를 타고 그 위로 뛰어오르는 돌고래처럼 움직일 거요. 우리는 다른 객가들을 규합하여 홍수전을 징벌하고! 그 이후 나라를 세울 거요!”
“한족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한족이고 뭐고 필요가 있소? 우리가 힘을 합쳐 나라를 만들면! 일대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아래에서 백성으로 일하게 되겠지!”
홍수전은 눈앞의 이득과 객가가 지배층이 되어 한족을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려 하였다.
반면 석달개는 어떠한 차별도 없이, 모든 민족이 전공과 능력으로 대우받는 세상을 만들려 하였다. 그 기준은 난세에 얼마나 활약하였는가. 단 하나였다.
“과거는 잊으시오. 과거에 얽매일수록 홍수전과 같은 미치광이가 되는 법. 홍이들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공훈을 세우고 당당하게 나선다면 아무도 우리를 탓하지 않을 거요.”
“보증할 수 있는가? 정말 우리가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는다고 확답할 수 있냐고!”
“보증은 못 해드리오. 우리 모두가 한 몸이 되어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 그 나라를 유지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에 달려 있소.”
촌장은 옥상에서 내려가 마을 원로들과 회의를 하였다. 그리고는 토루의 모든 문을 열고 앞으로 나아가 석달개에게 말하였다.
“적어도 홍이들에게 짓밟히는 일은 피할 수 있겠지. 협력하겠네.”
“참으로 올바른 선택입니다. 어서 병사들에게 합류를 논하고 장정들을 소집해 주시지요.”
한번 시작된 설득은 연이어 퍼져 나갔다.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석달개 휘하의 병력이 1만 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대부분 어중이떠중이들이고 훈련도 제대로 안 되어 있는 이들이었다.
* * *
현지 정책에 미숙한 프랑스군은 오로지 편제 유지와 전력 투입에 골머리를 썩였다. 석달개는 이러한 프랑스의 약점을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보조하였다.
“점령지의 치안유지와 민심안정도 중요하지만 먹고살 길을 마련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합류한 사람들은 아편을 은자와 같이 취급하여 소모하는 사람들이지요.”
“그 정도로 마약이 만연하고 경제가 엉망진창이라는 말인가.”
“더군다나 일방적인 금지정책도 문제입니다. 저희야 생산도 많이 안 하고 별로 피우지 않는 부류라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지요.”
“반면 많이 피우던 협력자들은 난리를 피우겠군. 그렇다고 마약에 중독된 사람이 태반이면 훈련도 문제고 소집도 문제고 병사들 명령체계도 문제라니까.”
장 바티스트 루이스도 골머리를 썩이며 석달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가 처음으로 영입한 석달개는 능력이 출중하다 못해 지식만 쌓으면 프랑스군 장성과 맞먹을 인재이다.
석달개는 점령지의 치안유지와 보급경로를 개선하면서 몇 사람이 할 일을 동시에 하였다. 여기에 병사들을 통솔할 수단을 제시하였다.
“그런 점에서 금단증상에 시달리는 중독자를 줄일 성과제도를 도입하였으면 합니다.”
“성과제도라? 그 성과제도가 무엇인가?”
“병사들이 아편을 피우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대신 하루에 단 한 돈(3.75g)을 지정된 장소에서 피워야 하지요. 안 피우는 병사는 그 자체를 공훈으로 삼지요.”
철저한 관리 인력을 감안하면 이득보다 손해가 큰 상황이다. 장 바티스트 루이스가 난색을 표하는 것과 달리 석달개는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명령에 응해 움직이는 것 자체가 훈련이고 명령전달입니다. 또한 압수한 아편을 무턱대고 폐기하면 손해만 보기 마련. 미끼로 삼아 병사들을 끌어들이지요.”
“다른 곳에서 물건을 들여와서 몰래 피우면?”
“군율 위반 아닙니까. 궁둥짝에 불이 날 때까지 두들겨 패면 될 겁니다.”
제법 괜찮은 의견 같았다. 군율도 잡고 중독자도 줄이는 일석이조의 전략이라 즉각 채용할 마음으로 명령서가 작성되었다.
그 명령서를 확인한 석달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문을 또 하였다.
“제가 알기로 불란서는 산해진미를 자랑하는 나라입니다. 쓸 만한 음식이 있습니까?”
“쓸 만한 음식이라. 그러고 보니 베트남에서 생산되는 물건이 하나 있지.”
잠시 뒤, 당근이 좀 더 커진 명령서가 발부되어 석달개의 명령이 시범적으로 실행되었다.
병사들에게 훈련을 혹독하게 굴리고 휴식을 시켰다. 아편을 피우는 사람들에게는 정해진 양을 지급하였으며 다른 병사들은 형평성을 핑계로 진미를 맛보게 되었다.
바로 콜라였다. 베트남에서 생산된 향신료는 공장에서 프랑스제 콜라로 가공되어 유럽으로 배송되었다. 이 원액 가운데 일부를 프랑스군이 객가 병사들의 훈련 용도로 소모하였다.
“와! 속이 확 풀리고 입안이 짜릿하네!”
“이건 천상의 맛이야! 이 음료가 대체 무엇입니까?”
프랑스제 콜라는 대한제국의 동방콜라와 비교하면 맛이 부족한 물건이었다. 더군다나 병에 넣은 것도 아니고 원액을 대충 탄산이 조금 들어 있는 샘물에 섞은 물건이다.
그 부족한 콜라도 천상의 진미나 마찬가지다. 청량감이 입안을 감싸고 지친 몸에 당분이 공급되며 모두가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장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명예 프랑스인 닐슨 조가 만들어 낸 콜라라는 음료이지.”
한쪽에서는 맹물을 들이켜고 약기운에 취하기 시작하였다.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달달한 콜라를 한 잔씩 마시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염병할, 저 달달한 물건 한 모금이라도 마시고 싶은데.”
“얼마나 맛있으면 저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을까.”
곰방대를 빨아대던 객가들, 이제는 ‘프랑스 원정군 소속 현지 징발 병사’로 분류된 병사들이 바닥에 침을 뱉으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석달개의 부관이 코웃음을 치면서 말하였다.
“니들이 피우는 물건은 최상품이야. 저 물건의 열 배는 비싼데 뭘 투정을 부리나?”
“그래도 먹는 걸로 사람 차별하면 안 됩니다.”
“알았어, 저만큼을 줄 수는 없고 내가 특별히 봐주는 거니 딱 한 모금씩만 마셔라.”
부관은 석달개가 지시한 대로 가져온, 실제로는 몰래 챙겨온 것으로 보이는 콜라 원액을 가져왔다. 탄산수를 따로 가져와 이 원액을 섞고 병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탕약같이 거무죽죽한데 향은 참 기이하네. 이게 무슨 맛…….”
가혹한 훈련 끝에 한 모금을 들이켠 콜라는 천상의 맛처럼 다가왔다. 한 모금을 마신 병사는 아귀다툼을 벌이며 두 모금을 들이켠 병사의 멱살을 잡았다.
“이놈의 새끼들 아편이나 쳐 피워대니까 주먹부터 앞서지!”
약간의 소란 끝에 병사들 모두가 오리걸음으로 프랑스식 얼차려를 받았다. 다음 날 훈련에도 같은 과정이 반복되었다.
며칠이 지날 무렵, 아편을 피우는 병사들은 휴식시간에 지급받은 아편을 곰방대에 넣으려 하였다. 그러나 선뜻 곰방대에 손이 가지 않았다.
저 멀리서 오늘도 달달한 음식을 먹은 다음 그늘을 끼고 낮잠을 자는 병사들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러던 중 한 청년이 장교의 전달사항을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계속 뒤처질 게 분명해. 장교 나리가 이야기한 대로라면 우리가 더 구식 장비를 받고 더 후방에서 숫자나 불리는 역할이라 하지 않았나.”
“이걸 피우는 사람은 몸이 더디게 움직여서 믿을 수 없다 했었나.”
“그렇긴 한데 이 좋은 물건을 끊을 수도 없고.”
속속들이 연기가 피어오르자 그는 입술을 짓씹고 금단증상으로 덜덜 떨려오는 손발을 내려 보았다.
청년은 자신이 그저 숫자만 채우는, 이런 좋은 시기에 아무것도 못 하고 밥버러지 신세로 전락하는 것을 혐오하듯 말하였다.
“난 끊을 거야! 전방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공훈을 쌓아야 하는데 고작 이걸 못 끊어서 아무 짓도 못 하나! 사내대장부라면 출세를 해야지!”
마침내 약을 끊을 결단을 내린 사람이 처음으로 생겨났다. 청년이 아편 덩어리를 바닥에 내던지고 짓밟자 옆에 있던 다른 병사가 흙덩어리를 헤집으며 말하였다.
“이 친구! 그러면 날 주지!”
그 병사는 문제병사로 분류된 중증 중독자였다. 심지어 이틀 전, 야음을 틈타 초소 밖으로 나가 물건을 들여오려다가 적발되어 엉덩이를 몽둥이로 스무 대나 맞은 병사였다.
그러나 이런 중증 중독자도 지금까지 당한 대우와 자신의 비참한 몰골을 되새기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흙을 헤집으려다 허리를 다시 세우고 말하였다.
“내가 거지새끼도 아니고.”
중증 중독자들 모두 복용량이 부족하여 약간의 금단증상에 시달렸다. 그러나 청년의 말을 들은 다음이라 선뜻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중증 중독자들이 자신의 결심을 다지듯이 흙을 짓밟고 또 짓밟았다. 이 모습을 본 청년은 다른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다들 사내대장부가 되어 뭘 하는가! 고작 양귀비즙 따위에 취하여 세상을 허투루 살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사내대장부다!”
“끊자! 끊으면 부귀영화가 우리를 기다린다!”
석달개 앞에 65명의 병사가 더 이상 아편을 피우지 않겠다며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과 고난을 함께 할 생각으로 석달개는 병사들의 손을 맞잡으며 말하였다.
“너희가 정말 약을 끊는 데 성공하면 내 휘하의 돌격대로 삼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홍수전이 퍼트린 양귀비의 씨앗은 본래 역사에서 그의 충직한 부관 석달개가 거두기 시작했다.
조만간 이 세력은 객가가 아닌 또 다른 명칭으로 분류될 예정이었다.
#작가의 말
중국 대륙에 난세가 벌어지면 동네 백수, 하급 장교, 탁발승, 농민, 대추장수등이 영웅호걸을 자처하고 일어납니다.
그런 기상은 작중 시대의 촌구석 청년들도 가지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