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24장 4화 돌파(2)
지난 열흘 동안의 싸움은 지옥과도 같았다. 처음에 참호를 파고 철저히 방어할 때에는 포탄도, 총알도 절대 넘보지 못할 철옹성처럼 생각하였다.
[조선 병사들은 비겁하게 참호를 파고 우리를 맞이하였다. 우리도 비겁하게 싸우자!]
한 번 패배를 겪은 풍 승상 나리는 이길 수는 없더라도 지지는 않는다며 우리를 독려하였다. 그 독려와 달리 승상 아래의 병사들이 도주하였지만 별문제가 아니라 생각했다.
북경에서 협력자를 현지 징발하고 죄를 지은 놈을 강제노역으로 굴렸다. 든든한 진영이 완성되고 그 앞을 진흙 구덩이로 막아 방어를 더욱 든든하게 하였다.
[내 너희를 속이지 않겠다! 조선의 총은 우리의 것보다 더욱 정확하고 위력이 좋다. 하지만! 적이 벌판에 몸을 드러내는 상황이면 부족한 총으로도 버틸 수 있지 않더냐!]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는 모두가 조선 놈들을 일방적으로 쏘아 죽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 기대와 달리 조선은 철저히 이득을 보며 우리를 괴롭혔다.
내 총은 아무리 쏴도 상대를 스치지도 못한다. 반면 상대는 총을 어떻게 장전하는지 몰라도 마구잡이로 쏘아붙이며 철저히 이득만 보았다.
“우리의 것보다 위력이 좋고 더 정확하게 노려 쏘고 사정거리도 좋은데 뭘 어떻게 해.”
누군가 시신을 들쳐 업고 지나가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의 말 대로 조선 놈들은 극히 일부의 병력을 앞세워 사격하고 병력을 바꾸며 우리를 괴롭혔다.
높으신 양반들은 조선 병사 천 명이 죽고 태평천국의 병사 이천여 명이 상제의 곁으로 올라갔다 하였다.
영혼이 상제의 곁으로 올라갔는지 모르겠지만 시신만큼은 여기 남아 있다.
“천 명을 죽이고 이천여 명이 당해? 내가 보기에는 오십 명도 못 죽였는데?”
상대는 노출되어 있고 우리는 안에 숨어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우리만 부상병이 속출하고 사망자도 속출했다.
그나마 팔을 맞은 부상자들은 후방에서 신음을 흘리며 죽어가고 중상자는 치료도 못 하고 죽어간다.
내가 있는 구역에서 조선군은 네 명이 고꾸라졌다. 그마저도 후방에 있는 보병총(라이플) 사수가 노려 쏜 것 같은데 그 대가로 보병총 사수들이 모두 죽어버렸다.
동료의 시신에서 새어나온 핏물을 대충 발로 뭉개 덮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목덜미에 총을 맞은 시신이 뻣뻣하게 굳어서 꺼내는 일조차 벅찼다.
“힘줘! 하나! 둘! 끙차!”
뻣뻣하게 굳은 시신의 사지를 잡고 꺼내는 동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내 한숨을 듣고 오늘도 목숨을 건진 고향 친구가 시신의 다리를 잡고 옮기면서 말하였다.
“조선 놈들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마귀 같은 놈들이야.”
“그 마귀를 상대로 우리는 아무런 일을 못 하는군. 뭔 천국인가?”
“어허! 이 친구!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지!”
열흘 전과 달리 진영 내부는 초조함과 긴장 그리고 여러 불순종자의 처형이 벌어졌다. 지금까지 야금야금 도주하던 탈영병들은 어느새 무리를 지어 도주하였다.
진영 한복판에는 교수형을 당한 시체 30여 구가 아직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 시신을 넘어 구덩이에 시신을 던져 넣자 한숨이 또 나왔다.
“이러다가 시신으로 산을 이룰 것 같은데.”
“조선 놈들이 진군을 시작하고 벌써 사십 일이 지났는데 원군이 오겠지.”
“그 원군이 제때 후방을 기습할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버티면 될 거야. 놈들과 평원에서 맞서 싸우면 몰살당했을 것인데 버티고 있지 않나.”
아직도 독실한 신앙심을 버리지 않은 친구가 불쌍하게 보였다. 죽은 정승보다 산 거지가 났다는 말이 있듯이 영생불멸의 천국에 오르건 말건 이 세상의 복록이 중요하지 않은가?
희끄무레한 먹구름이 끼어 별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보자 저절로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북경에서 가져온 천막에 몸을 누이고 내일도 목숨을 부지하기를 기도하며 잠을 청하였다.
-다들 일어나라! 조선군이 공세를 취한다!
“조선군! 다들 일어나!”
“야! 언제 천막에 물이 들어왔어!”
일어나 보니 천막 안이 물에 잠겨 있다. 온몸에 빗물이 젖어 들어 싸늘한 한기가 맴돈다. 이미 손이 곱아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발은 진흙탕에 잠겨서 절벅거리고 있다.
밖으로 나와 장대비를 두드려 맞자 온몸이 써늘해지다 못 해 사지가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이 빗속에서 어떻게든 몸을 지키려고 횃불에 의지해 총을 들었다.
그러나 손과 발이 모두 빗물에, 보이는 모든 것이 모두 빗물에 젖어버렸다. 그나마 가죽으로 감싸놓아 빗물이 스며들지 않은 총을 확인해 보았다.
“습하면 부싯돌에서 불똥이 튀지를 않는데!”
총의 부싯돌을 젖히고 점화약을 넣어 방아쇠를 당겨보았다. 평소보다 훨씬 적은 불똥이 튀어 올랐지만 점화약이 픽- 하는 소리를 내며 타들어갔다.
그나마 총을 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대비를 충분히 해놓은 나와 달리 다른 녀석들은 푹 젖어버린 총을 움켜쥐고 무턱대고 걸레로 닦아서 정돈하였다.
“총을 들어라! 조선 놈들이 진영을 만들고 있다!”
“놈들도 이런 빗속에서는 총을 쏘지 못한다! 위치를 사수하라!”
높은 양반들의 위치를 사수하라는 말에 고함을 치며 반항하고 싶었다. 진 의안(義安 - 태평천국의 장수 진옥성) 저 애송이는 나와 비슷한 연배이면서 사람을 혹독하게 다루는 놈이다.
그래도 전선을 유지하고 맞서 싸우는 편이 났다. 도망쳐보았자 황무지를 헤매다 굶어 죽거나 놈들에게 추격당하다 총탄에 맞아 죽을 미래가 보인다.
그나마 비가 덜 내리는 천막 안에서 총을 장전하고 가죽으로 감싼 채 전선으로 달려갔다. 점차 동이 터오는 진영에서 참호 안의 비참한 몰골이 그대로 보였다.
“여기에 어떻게 들어가!”
“다들 참호로 들어가라! 평원에서 적을 맞이하고 싶은가!”
거대한 진영이라 구축할 때 다들 힘에 겨워 일손을 줄이려고 하였다. 결국 얕은 도랑이 장대비를 견디지 못하고 물이 넘쳐나 버렸다.
“여기서 몸을 제대로 놀리라고!”
“으헉! 여기는 수렁이 되었잖아!”
명령은 명령이라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무릎 위까지 차오른 흙탕물이 옷깃에 휘감기며 몸을 옭아매었다.
비가 그치면 물을 퍼낼 수 있겠지만 이슬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총을 재장전할 수 없이 단 한 발만 쏘아야 하는 꼴이라 날카롭게 갈아둔 총검에 눈이 쏠렸다.
“놈들이 육박전을 벌이면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모르겠어. 그 정도로 멍청한 놈들이 아닌데.”
나와 같이 철저히 대비한 사람은 열 명 중에 한 명에 불과하였다. 일단 벌판을 뛰어서 진격할 조선군을 쏘아 죽일 각오로 이를 꽉 깨물고 가죽으로 감싼 총을 움켜쥐었다.
우중충한 구름을 뚫고 점차 햇살이 비춘다. 손금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주변이 밝아지자 평원을 가득 메운 조선군의 모습이 보였다.
-놈들이 총공격을 준비한다! 총을 쏜 뒤에 육박전으로 격퇴하라!
“놈들이 뛰어드는 순간을 노려 배를 찌르거나 위에서 망설일 때 허벅지를…….”
선임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굉음이 울렸다. 우리의 화포는 대부분 침묵한 상황에서 조선군이 덮어놓고 무지막지한 포격을 쏟아붓기 시작하였다.
“참호 안에 포탄이 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잖아!”
“없기는 한데 저 정도로 많이 쏟아부으면 몇 발은 직격할 거야.”
저 멀리, 멀리라고 해도 대략 1리(400m) 거리도 안 되는 참호에 숨을 쉴 때마다 이십여 발 이상의 포탄이 쏟아졌다.
개중 한 발의 포탄이 내부에 날아들어 정확히 명중했다. 흙기둥이 아닌 물기둥이 피어오르며 굵직굵직한 파편들이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광경이 보였다.
이윽고 우리가 있는 곳에도 포탄이 쏟아졌다. 땅이 울리고 귀를 막아도 온몸이 뒤흔들리고 폭발하는 소리가 전달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끝없이 떨어지는 포탄 소리와 비명 그리고 겁에 질린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무언가 질퍽거리는 물건이 덮쳐와 몸이 옆으로 넘어졌다. 쑥쑥 들어가는 진흙과 흙탕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간신히 일어나자 멍한 귓전으로 굉음이 들려온다.
-우아아아아아아아!
저 멀리 평원이 요동치며 군청색 물결이 밀려온다. 반사적으로 총을 집었지만 넘어진 충격으로 물속에 빠져 푹 젖어버렸다.
“이걸로 어떻게 싸워! 어떻게!”
방아쇠를 당겨도 부싯돌이 불을 뿜지 않는다. 그나마 나처럼 꾀를 부린 사람들이 총을 쏘아봤지만 사정거리를 한참 넘어 쏘아서 헛된 사격에 불과하다.
반사적으로 몸을 숙여 총에 들어찬 물을 빼내고 탄환을 뽑아내었다. 무작정 재장전을 하려는데 약포가 푹 젖어서 화약이 모조리 물에 젖어버렸다.
-핑!
조선군이 사용하는 총소리가 쉴 새 없이 들리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연히 한두 발을 쏜 것도 아니다.
이전보다 더 많은 총알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수백 발 이상의 총알을 어떻게 비를 온몸으로 맞으면서 쏠 수 있는가.
그 생각이 오가는 사이 가슴에 총을 맞은 친구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황토색 흙탕물 위로 핏물이 번지자 머리가 멍해진다.
적은 비가 내리는 상황에서도 총을 쏠 수 있다. 모두 다 쏜다고 보장은 못 하지만 한 번 발사하면 비에 푹 젖어버리는 우리와 달리 몇 발이고 쏠 수 있는 무기다.
-맞서 싸워라! 응사하라! 총검을 들고 적을 공격하라!
후방에서 어떻게든 싸우라 하는 말을 했지만 우리는 독 안에든 쥐 신세보다 못하다. 몸을 드러내면 총에 맞고 안에 있어보았자 버티지를 못한다.
슬쩍 고개를 들어 주변을 확인한 친구는 물에 젖어버린 총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 내 손목을 잡고 도망가자고 종용했다.
“놈들이 이 일대로 모조리 몰려왔어! 지금까지와는 달라!”
“도망간다고 답이 있나? 어떻게든 지원이 오겠지!”
“지원은 염병! 못 싸워! 이걸 어떻게 싸워!”
그는 질퍽거리는 벽을 기어서 올라가려 하였다. 그 친구가 왜 그런지 몰라도 뭐라 몸을 멈춘 사이, 등판에 조선군의 총알이 쑤셔 박히며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생각해 보니 적의 일제 돌격에 대응하기 위한 작전이 떠올랐다. 전선이 돌파될 정도의 병력이 공격하면 후방의 부대가 맞서 싸우기로 되어 있었다.
질퍽거리는 적의 발걸음 소리가 들릴 무렵에도 후방이 조용하였다. 이 의미는 단 하나다.
“풍운산! 진옥성! 이 자라새끼들아! 우리를 버리고 도망쳤어!”
놈들은 우리를 앞세워 넣어 시간을 끌게 해놓고 북경으로 퇴각하였다. 당장 고개를 들어 후방을 바라보고 싶었지만 총탄이 점점 더 많이 날아들어 차마 확인할 수 없었다.
“승상님이! 의안님이! 우리를 배신할 리 없어!”
“지금쯤이면 지원이 왔어야 한다고! 우리는 버려진 거야!”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까. 지원도 없는데 조선군을 어떻게 상대할까. 적의 총탄을 피할 방법이나 있을까.
머리가 맹렬히 돌아가는 가운데 내 앞의 친구가, 수없이 많은 사람을 돌로 때려죽인 충성스러운 놈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는 적을 앞에 두고 나에게 총검을 들이밀었다.
“이 한간새끼! 배신자 새끼! 네놈을 죽이고 조선 놈들을 죽이겠다!”
총검이 날아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젖혀 총검을 간신히 피하자 상대도 나도 미끄러운 바닥으로 인하여 자빠져 버렸다.
적과 맞서 싸워야 할 상황에서 진흙탕을 허우적거리며 몸을 바로 세웠다. 상대는 나를 죽이려 작정하였는지 총검을 찔러왔고 나도 총으로 막아냈다.
“죽어! 이 한간새끼를 죽여 방패로! 억!”
총검을 찌르던 놈의 가슴에서 총검 끄트머리가 튀어나왔다. 상대가 피를 토하며 넘어지자 고향에서 형님으로 모시던 사람이 침을 뱉으며 손을 내밀었다.
“미친놈! 한시가 바쁜데 이런 미친 짓을!”
“형님! 참으로 고맙습니다!”
“그렇게 고마운 일이면 정신 단단히 차리고 저쪽으로 뛰어!”
저 멀리에서 비명과 고함이 연이어 들려왔다. 조선군이 마침내 참호로 난입하여 우리를 도륙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멀리서 조선의 말이 들려왔다.
<참호를 제압하라! 포로는 확실히 무장을 해제한 적으로 제한해라!>
“안 뛰고 뭘 해! 밖으로 나가면 죽는다고!”
형님이 독촉하자 저절로 발이 움직였다. 진흙을 헤치고 나아가며 뒤를 확인하자 조선 놈들이 여기로 뛰어들어 총을 쏘고 위에서도 총을 쏘아댔다.
탕, 탕, 탕 하는 세 발의 총성이 들리자 온몸의 털이 바짝 서고 숨이 막혀온다. 몸을 빨리 놀리려고 휘감긴 붉은 웃옷을 벗어 던지고 바지도 벗어 던지며 뛰어나갔다.
“안 싸우고 왜 도망치나! 네놈도 한간!”
“한간 다 뒈졌다 자라새끼야!”
앞에서 독촉하는 미치광이의 배를 걷어차고 나와 같이 옷을 벗은 형님과 함께 달려갔다. 우리의 뒤에 달라붙은 조선군은 계속 총을 쏘아대었다.
고개를 힐끔 돌려 뒤를 확인하자 조선군이 진흙에 물든 군청색 옷을 입은 채 달려오고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빨리 달리나 봤는데 정강이까지 올라오는 가죽 신발을 신고 있다.
“돈 더럽게 많네! 총도 더럽게 좋고!”
한 번 더 고개를 돌리자 조선군의 비밀을 알 수 있었다. 놈들의 총은 부싯돌이 없으며 방아쇠 부분의 걸쇠를 젖히면 다시 발사할 수 있는 신병(神兵)이나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돌린 사이 세 명이 죽어나가는 꼴을 보니 싸울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저 총이 몇 발을 쏠지 모르지만 멈춘 순간 내 등가죽을 뚫고 총알을 듬뿍 먹여줄 기세다.
어느새 나와 형님의 뒤로 도망치는 병사들이 늘어났다. 우리의 앞에 있는 놈들은 짓밟히지 않기 위해 총검을 들이대다 그 기세에 질려 우리와 같이 도주하였다.
“반대쪽에서도 사람들이 오고 있어!”
누군가 외치자 생존을 위한 질주가 멈추었다.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반대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조선 병사들에게 밀려 앞을 가로막았다.
사람의 덩어리가 안을 가득 메웠다. 보급을 위해 파놓은 광장으로 몰려들었는데 버틸 수 있을 뿐 탈출할 방법이 없었다.
“어쩌지요? 형님!”
형님은 나와 같이 옷을 홀딱 벗고 속옷 차림이 되어 있었다. 그나마 무기를 들고 있는 놈들은 가장 안전한 안쪽을 차지하고 우리와 같은 부류는 바깥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총성이 들려오며 조선군의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형님은 입술을 짓씹더니 앞으로 두어 걸음 걸어 나가서 말하였다.
“항복! 나는 항복하겠다!”
“감히 항복을 해! 한간새끼!”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한 미치광이가 형님에게 총검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형님은 고개를 돌려 나를 한 번 바라본 다음 다른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외쳤다.
“닥쳐! 난 항복한다! 여기서 뒈지거나 항복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형님은 양팔을 머리 위로 올리고 앞으로 나갔고 나도 앞으로 나가서 항복이라 하였다. 곧이어 조선군이 우리가 있는 광장으로 총을 겨눈 채 걸어왔다.
입이 바짝 마르고 온몸의 핏기가 마르는 것 같았다. 나는 한간이라며 다른 사람을 죽인 전적이 없지만 그 몰골은 몇 번이고 보아왔다.
온갖 누명을 씌우며 재물을 약탈하고 사람을 희롱하며 죽인 놈들을 똑똑히 기억한다. 조선군도 우리와 같은 놈들이라면 저 총에서 불을 뿜고 우리의 시신을 능멸하겠지.
<열을 셀 동안 무장 해제해라.>
위에 있는 좀 더 화려한 군복을 입은 사람. 장수로 보이는 자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조선의 말이라 모두가 뭘 해야 하는지 몰랐다.
“말을 하려면 우리의 말을 해야지.”
형님과 나를 한 번 바라본 조선 병사는 심호흡을 하며 우리 모두를 살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정상적인 상황이 아닌데 조선 장수가 다음 말을 하였다.
<하나, 둘, 열. 무장을 갖춘 놈들에 대한 격멸 실시.>
<실시!>
총구에서 불이 뿜어지자 눈이 질끈 감겼다. 형님과 내가 몸을 움츠리고 있는데 몸이 멀쩡하였다.
반면 내 뒤에서 여전히 총을 들고 있는 독한 놈들 여럿이 신음을 내며 고꾸라졌다.
<앞의 모범 사례처럼 무장을 해제해라.>
“자라새끼들아 우리말로 하라고!”
조선 병사들은 위와 아래를 가리지 않고 총을 쏘아댔다. 그 총탄이 나와 형님의 몸 근처로 날아가 무기를 갖춘 병사들의 몸에 하나하나 쑤셔 박혔다.
눈치가 느린 놈을 제외하고 모두 살아남을 방법을 알아차렸다. 무기를 버리고 군복을 벗고 속옷 하나만 입은 벌거숭이 차림만이 생존을 보증하는 수단이었다.
분노로 눈이 이글거리는 조선 병사는 내 몸을 거세게 밀치더니만 걸쇠를 젖혀 총탄을 장전하였다. 그리고는 분노를 담아 무장을 갖추고 있는 놈들을 노려 쏜 다음 말하였다.
“비켜. 네놈은 포로가 되었다. 반항하지 말도록.”
“우리말을 할 줄 알잖아!”
놈들은 고의로 자신들의 말을 하였다. 절반이 넘는 사람이 죽어나갔고 우리처럼 알몸이 되어 항복한 사람들은 조선군의 손길에 떠밀려 이송되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에 온몸이 쭈뼛거렸다. 잠시 발걸음을 머뭇거리자 발길질이 엉덩이로 날아들었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우리가 뭘 했다고 이러시오!”
“한 번만 더 반항을 했다가는 머리통에 총탄을 세 발 넣어서 확실히 죽일 거다.”
끌려가면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평원에 널브러진 조선군의 부상병과 시신은 어느새 하얀 완장을 차고 있는 병사들이 후방으로 이송하고 있었다.
참호는 대부분 군청색의 조선군으로 물들어 있다. 여기에 그 군청색 물결에 끌려 나온 나와 같은 포로들이 벌거숭이로 평야를 가로질렀다.
이 몰골을 보자니 앞으로의 전쟁이 어떻게 돌아갈지 한눈에 보인다. 사람을 그나마 소중히 생각하는 조선군을 상대로 홍수전은 얼마 버티지도 못하겠지.
형님과 내가 뭔 꼴을 당할지는 몰라도 험한 일을 겪을 것 같다. 아마 북경의 시민들이 겪는 꼴과 흡사한 험한 일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