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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297화 (263/345)

297화

23장 8화 시산 혈해(2)

이번에도 손쉬운 승리를 거둘 것 같았다. 지금까지 내가 상대해 온 사람들은 총소리만 들어도 지레 질겁해서 달아나는 일이 태반이었으니까.

배상제회는 위대하며 이 나라의 지배자이다. 우리는 객가로서 우리에게 합류하지 않은 다른 객가들과 한족을 지배할 자격이 있다. 위대한 황제께서는 질 싸움을 하지 않는다.

처음 총을 지급받고 진압한 농부들, 지방에서 수상한 짓을 벌이는 모리배들, 북경으로 진격하면서 상대한 주방팔기들 그리고 북경에서 쉴 새 없이 죽인 금려팔기들이 그러했다.

이제는 좀 더 색다른 적인 조선군을 상대할 차례다. 저 평원에서 두더지처럼 웅크린 멍청이들을 짓밟아 죽이는 것은 더욱 색다른 경험이리라.

기나긴 기다림 끝에 전투의 날이 밝았다. 새벽 동이 터 오를 무렵 위대한 태평천국의 승상 풍운산께서 일장 연설을 시작하였다.

“우리 병력은 총 오만 대군! 반면 조선군은 팔천 명의 병력을 한 자리도 아닌 저렇게 길게 늘어트려 놓았다! 저놈들의 한 귀퉁이만 무너트려도 모두가 무너지지 않겠나!”

아무리 보아도 오만 명은 아니지, 대충 세어보면 대충 사만 명이 조금 넘을 것 같다. 그래도 조선군과 비교하면 다섯 배에 달하는 수다.

열화와 같은 함성이 진영을 메우고 모두가 총을 들어 올리며 환호하였다. 나 또한 북경에서 즐겁게 만든, 길거리에서 사로잡은 오랑캐의 코를 잘라 만든 부적을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전투에서 전리품을 뭘 얻을지 궁금했다. 옆에 있는 사촌동생이 귀 여러 개를 엮어 만든 부적을 손보고 있는데 좀 색다른 물건이 필요해서 물어보았다.

“조선 놈들을 죽이면 뭘 떼어내서 부적을 만들지?”

“글쎄? 정력에 좋은 홍삼을 많이 먹는 놈들이니 정력에 좋은 부적을 만들까?”

“그거 괜찮을 것 같은데?”

“종형은 이 아우가 아이가 셋인데 아이 하나도 못 가진 양반 아니오. 많이 만들어두시구려.”

이번에는 좀 색다른 부적을 만들 생각으로 진영을 갖춰 나갔다. 자연스럽게 각 마을별로 형성된 진영이 중대가 되며 그 지역의 사람들이 뭉쳐서 대대를 형성한다.

우리의 지휘는 각 마을의 촌장 집안 자제가 하지만 이건 이해할 수 있다. 좀 지나자 어스름이 걷히며 여전히 참호에 웅크린 조선군의 몰골이 드러났고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저 꼴을 보라, 얼마나 비루한가! 어제까지는 새파란 옷이 드러났는데 지금은 누가 사람인지, 누가 흙인지 분간할 수도 없는 꼴 아닌가?

-우리의 목표는 저 얇은 진영을 분쇄하는 것이다! 놈들이 거만하게 본영 밖으로 나와 있으니 이 기회를 노려 놈들을 도륙하라!

명령이 떨어지고 할 일이 생겼다. 이제 조선군의 저 얄팍한 진형을 꿰뚫고 수를 앞세워 신나게 죽이면 되리라.

놈들도 도망갈 곳이 없는 참호 속에서 육박전을 벌이다 죽어나갈 운명을 모르고 있겠지. 아마도 고개만 내민 채 바짝 웅크려 우리의 위엄에 질려 있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사촌동생이 측은한 듯이 적진을 바라보고 말하였다.

“내가 알기로 조선군은 길가에 있는 사람을 아무나 때려잡아서 징집한다던데.”

“그런 놈들이 불쌍하기는. 빨리 죽여서 상제(上帝 - 하느님)에게 보내야 하지 않겠나.”

“그렇지, 우리는 하늘의 부름을 받은 군대이며 정당한 군대야. 아무리 악행을 쌓은 사람이라도 우리에게 살해당하면 천국의 문을 두드릴 수 있지 않나?”

북경에서 어느새 퍼져 나간 교리는 너무나 옳은 말이다. 자신들이 죽이지 않고 내버려 두면 천국에 갈 자격이 있다는 것이요, 자신들에게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

모두의 발걸음은 배상제회의 이 위대한 믿음과 진실을 전하며 태평천국의 천국과 같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정당한 성전(聖戰)이다.

-전군! 진격하라!

진격 명령이 하달되자 자연스럽게 허리에 힘이 들어가고 발이 움직였다. 서로가 한 몸이 되어 마을 단위로 훈련을 받은 성과가 여기서 드러나는 법이다.

조만간 저 치졸한 놈들이 내민 머리통에 탄환을 박을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놈들이 웅크린 참호로 다가가자 포성이 들려왔다.

“어이쿠 세상에! 역시 조선군은 포를 쏠 줄 아네.”

“그래 봤자 우리의 포가 더…….”

사촌동생의 말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지척에서 거대한 흙기둥이 피어오르고 사람들이 굉음과 함께 날아올랐다.

머리에서 삐- 하는 이명이 들려오고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이 자리에서 멋대로 멈추면 짓밟혀 죽으리라.

앞과 뒤에서 마구잡이로 포탄이 쏟아지며 포성이 들려왔다. 대충 세어보니 비슷한 숫자라서 자연스럽게 팔다리에 힘이 돌아오고 이명이 줄어들고 용기가 샘솟았다.

“이 멍청한 놈들! 병사가 많아야지 화포가 많다고 뭘 하나!”

“그렇지요 종형! 놈들이 우리와 비슷한 수준의 화포를 쏘면 소총수가 더 적다는 말이 아닙니까!”

-돌격하라! 돌격하여 놈들의 진영을 파고들어라!

뒤에서 명령이 하달되었다. 팔천 명조차 아닌, 실제로는 사천 명에 불과한 놈들을 마구잡이로 쏘아 죽일 차례가 드디어 찾아왔다.

갑자기 내 앞에 있던 친구가 가슴을 감싸 쥐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리고 줄줄이 사람들이 고꾸라지기 시작하였다.

“이 거리에서 쏘아서 줄줄이 적중한다고?”

“보병총을 쏘나? 전부 다 보병총을 사용하면 뭐가 좋다고!”

놀랍게도 조선은 우리가 별로 보유하지 않은 보병총(步兵銃 - 라이플)을 대량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상한 군대다.

보병총은 사정거리와 위력은 좋지만 장전이 느리다. 어떻게든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가 적을 더 많은 탄환으로 압박할 욕심으로 모두가 발을 더욱 빠르게 놀렸다.

그러나 탄환의 비가 멈추지 않는다. 놈들은 우리가 들고 있는 소총보다 빠르게, 보병총을 난사하고 있었다.

이 기이한 상황에서 사람이 줄줄이 죽지만 멈출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전원! 일백 보(120m) 거리까지 다가가라!”

이미 전열에서 독려하던 높은 사람이 죽어나가고 성격만 더러운 촌장 아들놈이 지휘관 자리를 차지하였다. 어쩔 수 없이 다가가자 적진에서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위이이이이잉

어디서 들어본 적도 없는 기묘한 소리가 들리며 적진 후방에서, 대충 사십 보(48m) 거리에 있는 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사람들이 줄지어 우측에서 좌측으로 쓰러졌다.

“우아아아악!”

미리 장전해 둔 탄환이고 뭐고 살길을 찾아 바짝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위엄이 넘치던 촌장 아들도, 조선군을 도륙하기 위해 칼을 챙겨온 놈도 바닥에 엎드렸다.

그 굉음이 멈추자 말 그대로 수십 명이 바닥에 널브러져서 피를 뿜어내는 시신이 되었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고 눈앞이 먹먹해졌다.

그 순간 눈앞에서 흙먼지가 튀어 올랐다. 적의 탄환이 운이 좋게도 바닥에 박혔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쏴! 쏴야지 뭘 해!”

몸을 곧추세워 탄환을 반사적으로 장전했다. 어떻게든 그 화약과 탄환을 장전한 다음 조선군의 참호를 향해 겨눠도 쏠 곳이 안 보인다.

“안 보이잖아!”

조선군은 흙의 색상과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상반신만 내민 채 기이한 총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불꽃을 뿜어냈다.

그 불꽃을 노려 대충 머리가 있을 위치를 노려 쏘았다. 그러자 적들 중 하나가 목덜미에서 피를 뿜으며 참호 안으로 가라앉았다.

“한 놈 맞췄어! 맞췄다고!”

“조…… 종 형.”

그사이 나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사촌동생이, 같은 마을에서 살던 사람들이 대부분 탄환을 맞았다. 재장전 따위는 생각조차 못 하고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피거품을 뿜어대며 죽어가는 사촌동생의 몸에서 시뻘건 웃옷을 뚫고 핏줄기가 새어 나왔다. 이미 가망이 없는 상황이라 어떻게든 살길을 찾으려 했다.

“야 이 자라새끼들아 엎드리지 마라! 돌격이다! 놈들의 참호를 향해 돌격해라!”

그 순간 권총 탄환이 몸 근처에 떨어졌다. 엉거주춤한 자세의 촌장 아들이 눈에 불을 켜고 돌격을 독촉했고 그제야 참호 앞에 있는 끔찍한 흉물이 보였다.

저 멀리 있는 물건은 사방에 날카로운 가시가 빼곡하게 박힌 끔찍한 철사더미였다. 소문을 들은 바로는 저기에 한번 얽히면 살점이 모두 찢겨서 죽는다 하던가.

명령을 수행하면 죽는다, 그렇다고 후퇴해도 저 촌장 아들놈의 탄환에 맞아 죽는다. 결국 살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어르신이 길을 인도해 주십시오! 이대로라면 살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개놈의 새끼야! 알았다! 다들 철조망을 향해 다가가라!”

가급적 자세를 낮추고 몸을 움츠려 어떻게든 철조망으로 다가갔다. 시퍼런 칼날과 가시가 사방에 뻗어 있는 흉물을 두고 모두가 망설였다.

심지어 촌장 아들조차도 성을 낼 뿐 대처방안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촌장 아들의 배 한복판에 탄환이 박혀 피를 토해냈다.

“어르신은 가망이 없으니 한 몸 희생해 주시지요!”

촌장 아들놈의 등을 걷어차 철조망 위로 집어 던졌다. 몸부림치던 놈은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며 숨이 끊겼고 그 위에 참호로 향할 길이 열렸다.

이 지옥에서 참호 속으로 숨어들면 어떻게든 살길이 열리겠지. 별다른 생각도 안 하고 물컹거리는 시신을 밟고 참호로 돌진하려던 찰나였다.

-키이이이이이잉!

다시 굉음이 들려왔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내 눈앞에서 흙이 사정없이 튀어 올랐다.

뭘 어떻게 할 새도 없이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고 전신에서 격통이 밀려온다. 고개를 돌리려 해도 아무런 힘이 들어가지 않고 사지의 감각이 사라졌다.

“우웩!”

내 입에서 튀어나온 핏물과 질척거리는 덩어리가 뒤범벅이 되었다. 내가 뭔 일을 겪었는지 모르지만 점차 포성도, 비명도 아련하게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 * *

어재연의 작전은 내가 딱히 손을 볼 필요조차 없었다. 기껏해야 백린탄을 활용해서 연막이나 좀 펼치라는 조언을 한 것이 전부였다.

은찬이는 어차피 포병을 지휘하고 있을 테니 녀석이 죽으면 본진이 무너지고도 남는다. 그러니 패배에 대한 염려도, 은찬이의 목숨에 대한 우려도 하지 않고 전장을 바라봤다.

물론 나와 달리 어재연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작전이 잘 진행되어서 다행이군요. 질 싸움은 아니지만 피해를 줄이는 것이 좋지요.”

“커피를 많이 마시는구려.”

어제부터 밤을 지새우다시피 한 어재연은 이미 커피를 여섯 잔이나 들이켰다. 그리고는 덜덜 떨리는 손을 감싸 쥐면서 억지로 너스레를 떨었다.

“긴장을 했을 때에는 커피 한 잔이 최고지요.”

어재연의 염려와 달리 이번 전투는 먼 훗날 열릴, 이제는 열릴지 모르는 보어 전쟁의 상황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기세등등한 보병들이 미리 준비하고 있던 상대에게 달려들었고 일방적으로 도륙당했다. 이 전투와 구도가 흡사한 보어전쟁 당시 영국군은 말 그대로 처절한 패배를 경험했다.

“대충 보아하니 전력 교환비가 일 대 칠십 정도가 나올 것 같은데.”

물론 희생이 없지는 않았다. 각 참호에서 부상병들이 본영으로 실려와 응급처치 이후 치료를 받고 있었다.

어재연은 이 모습을 보면서 나름 계산을 하여 답을 내놓았다.

“그 정도까지 나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사망자만 한정하면 그럴지도 모릅니다만.”

“사상자 포함이오. 사망자만 따지면 일 대 백이 나올지도 모르고.”

어재연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는데 이게 현실이다. 보어전쟁 당시 영국군 400명대 민병대 400명이 싸웠는데 전사자가 영국군은 90명 정도, 민병대는 1명이었다.

물론 영국군과 비교하면 태평천국의 수준이 너무 낮고 보어인들과 비교하면 대한제국군의 수준이 너무 높다. 이걸 감안하면 더 격차가 벌어질 거다.

여기에 전열이 붕괴하였음에도 돌격을 이어가는 차이가 있다. 보어 전쟁 당시의 영국군은 퇴각이라도 제대로 했지만 여기서는 그 명령을 내릴 경험이 부족했다.

지금까지 만만한 상대를 계속 공격해온 대가다. 공격을 잘하는 부대는 많지만 퇴각을 잘하는 부대는 찾아보기 힘든 이유기도 하고.

결국 시뻘건 옷을 입고 평원을 자신들의 피와 내장으로 물들이며 주검을 쌓아나갔다. 이 전투도 아닌 도축 작업이 언제 끝나나 나조차도 역겨워 견디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러던 중 우측 화력지원 중대 방향에서 끝없이 흑색화약 연기가 피어올랐다. 기이할 정도로 많은 연기와 함께 그 방향의 적들이 멀리서 보아도 갈려 나가고 있었다.

“저건 십혈포(개틀링) 포대 같은데 화재라도 났나?”

“다른 사람들은 탄환을 아끼려고 저속 발사하는데 저 포대는 미친놈처럼 발사하는군요.”

“누구인지 알 것 같구려. 예산 떨어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아.”

이토 히로부미 이 미치광이가 명령을 내렸건 사수를 내던지고 직접 사격을 하건 최고 속도로 난사하고 있다. 총열이 녹아내릴지도 모르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대충 살펴보니 적진은 이미 무너져 내렸고 어설프게 퇴각하는 놈들은 더 많은 화력에, 미리 명령을 내려둔 개틀링 포 집중사격에 산산조각으로 갈려 나갔다.

“보고 드리겠습니다! 적이 퇴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십혈포 사격 중단시키고 진격 명령을 내려! 적에게 최대한 많은 타격을 입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어재연은 기병대 출격 명령을 내렸다. 적은 대한제국군의 총인원이 8천여 명 정도라 판단했을 텐데 실제 전선에 나온 병력은 6천 명에 불과하다.

회전(會戰)이 아닌 공방전의 방어자가 된 시점에서 이 정도 격차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태평천국군의 약점 중 하나인 기병대의 부재를 노려 숨겨둔 병력들이 돌격하였다.

다음으로는 참호에 숨어 있던 병력들이 미리 준비한 널빤지를 들고 전선으로 달려갔다. 참호 벽에 기대둔 널판으로 철조망을 덮은 뒤 함성을 지르며 돌진하였다.

이윽고 해가 질 무렵 결과가 드러났다. 풍운산을 비롯한 수뇌부는 퇴각하였으며 돌격 이후 복귀한 병력은 전장 정리를 실시하였다.

“사망자 총원 보고 드립니다. 총 백칠십오 명 사망, 사백여 명 부상입니다!”

부령(副領 - 중령)이 일차 보고를 올리자 어재연이 당황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돌격 명령 이전에는 사상자가 다 합쳐서 400여 명에 불과했는데 더 늘어난 것이다.

“사망자가 예상보다 많은 것 같군. 돌격 과정에서 제법 많이 죽은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놈들이 거짓 항복을 한 경우가 있어서 손실을 보았지요.”

어재연의 실수는 돌격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 결과 광신도 특유의 목숨을 도외시한 놈들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손실을 누적시켰다.

이외에도 보고가 이어졌는데 거의 450만 발의 탄환이 소모되었다는 내용까지 있었다. 어재연은 전장 상황을 정리하고 나를 돌아보면서 최종 평가를 내렸다.

“앞으로 퇴각하는 적들은 가급적 노리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바로 보셨소이다. 미친놈들이 발악을 할 때가 가장 무서운 법이지.”

“그렇다고 잔존 세력을 남겨둘 수도 없는 일이고. 참 일이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복잡한 작업은 영국군이나 프랑스군에게 일임하면 되겠지. 특히 영국군은 지난 전쟁의 사실상 패전으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패잔병 사냥에 힘을 쓸 거다.

태평천국군의 예상 인원은 4만 2천여 명 정도였고 이중 절반이 넘는 2만 4천 명이 죽거나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혔다. 문제가 있다면 적의 포로에 대한 가혹행위였다.

포로가 잡혀 오고 무장을 해제하고 소지품 검사를 받았다. 그 소지품 검사장에서 계속 고함이 튀어나오고 비명과 사람을 두들겨 패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개새끼야! 부적을 그딴 걸로 만들어!”

이번에는 사태가 좀 더 심각했다. 병사들이 천막에서 포로를 걷어차 밖으로 내몬 다음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마구잡이로 짓밟았다.

“중단해! 더 이상 구타하면 군법 위반으로 징계에 처한다!”

“이 개놈의 새끼 보십시오! 사람 손으로 부적을 만들었는데 여성과…….”

듣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는 이야기라 자연스럽게 뇌에서 검열되었다. 그러자 병사를 뜯어말리던 장교가 몽둥이를 들고 포로의 머리통을 군홧발로 걷어차 버렸다.

그 폭력의 연쇄에 결국 영관까지 끼어들었다. 날 보좌하던 부령이 달려들어 장교를 뜯어말리면서 이 폭력의 연쇄를 멈추려 하였다.

“놈들은 영길리와 불란서의 군대에 넘겨 엄중한 처벌을 받게 할 것이다!”

“그냥 능지처참으로 즉각 처벌을 내리면 아니 됩니까? 이 꼬락서니를 보십시오!”

그조차 분노를 참지 못하였는지 날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재를 요청하였다. 내 선까지 올라온 일이라 어쩔 수 없이 몇 명을 죽일 생각으로 응답했다.

“몇 놈은 처형하시오. 법과 절차를…….”

중령은 처형이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권총을 들고 다섯 발 모두를 포로의 머리통에 쏘아버렸다. 절차고 법이고 다 무시하는 미친 짓이나 오히려 후련하다는 분위기가 퍼져나갔다.

“이러다가 우리도 피에 절어버리는 꼴 아닌가.”

병사들의 정신적 피해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대충 할 일이 끝나서 은찬이의 중대를 방문하였는데 은찬이는 부상을 입은 중대원을 확인하고 있었다.

“은찬아, 어디 다친 데는 없더냐?”

“없습니다. 다만 마음이 좀 다친 것 같은데…….”

녀석은 하루 사이에 표정 자체가 변해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뺀질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가느다랗게 눈을 뜬 채 전장을 돌아보았다.

“놈들의 상세를 알게 된 다음 흉터도 남지 않고 깨끗하게 아문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을 겪은 게냐?”

“항복한 놈이 품에 폭약덩어리를 안고 있다가 돌로 내려찍어 터트리려 하였습니다.”

이래서 포로 학대가 밥 먹듯이 일어나고 있었던 거다. 거짓 항복 후 기습도 문제이지만 폭발물을 사용한 자폭 테러까지 하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꼴이다.

놀라서 은찬이를 바라보니 녀석은 한쪽 구석을 가리키면서 자랑스럽게 답하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등박문이 칼을 놀려 놈의 팔뚝을 썰어버렸지요.”

이토 히로부미는 저 구석에서 보급관에게 온갖 욕을 먹고 있었다. 아마 개틀링 건을 무제한 난사해서 총열도 다 손상되고 탄환도 물 쓰듯 써버렸으리라.

그래도 은찬이를 구조하여 문책 선에서 끝나겠군.

다만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앞으로는 은찬이를 보호할 겸 후방 관리나 시키는 게 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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