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23장 8화 시산 혈해(1)
홍수전은 북경 인근에서 수비를 굳히고 민심을 서서히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 하였다. 이후 침공하는 적에게 침략군이라는 명분을 세워 지배 체계를 굳히려 하였다.
그 의도는 이미 대사관 폭발사건으로 일그러져 버렸으며 여기에 박현상이 쐐기를 박았다.
풍운산이 보낸 전신을 확인한 홍수전은 오히려 코웃음을 섞어가며 만족하였다.
“이미 일이 틀어졌는데 차라리 잘 되었군. 청도를 함락시키고 조선군을 몰아내면 서역의 군대가 상륙할 장소도 줄어들기 마련. 여기서 시간을 끌고 협상을 해야지.”
태평천국군은 이미 피를 보다 못하여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일으킬 기세였다. 사이가 안 좋은 세력끼리 이미 알력다툼을 벌이고 약탈한 물자를 놓고 싸우는 일이 발생했다.
홍수전을 비롯한 지휘계층은 자중지란이 격화될 시기를 열흘 뒤로 생각하였다. 그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으니 아무 세력이나 적으로 삼고 공격해야 할 정도로 수세에 몰려 있었다.
이 시기에 여론을 집결할 수단이 생긴 것이다. 독재자가 휘하 세력들의 결속을 위해 새로운 적을 만들 듯이 홍수전은 조선을 주적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번 사태의 원흉은 조선이더구나! 조선이 공친왕에게 뇌물을 먹여 그의 세력을 부추기고 이 나라가 무너진 다음 괴뢰 국가를 세우려 하였다!”
홍수전은 민심을 달래기 위해 서양인 대신 북경 대사관에 있는 백낙신을 비롯한 외교관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다시 천안문 앞에서 사형식이 개최되었다.
“보아라! 이 부패한 자들이 조선의 끄나풀이다! 모두 처형하고 머리만 조선으로 돌려보내라!”
“조선이 적이다! 조선을 죽여라!”
그나마 머리만 조선으로 돌려보낸다는 명목으로 참수형이 집행되었다. 이로 인하여 대한제국은 간접적인 명분은 물론 직접 개입에 대한 명분도 획득하였다.
이미 날뛰기 시작한 태평천국군을 더 이상 제지할 명분도, 이유도 없는 홍수전은 풍운산을 공격군 사령관으로 배정하였고 즉각 진군 명령을 내렸다.
양력 4월 17일, 슬슬 모내기를 준비하고 밀과 보리가 무릎 높이까지 자라야 할 봄날이었다. 반면 북경 인근의 평원은 여전히 겨울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동이 트며 한기가 걷힐 무렵 그 겨울에 가까운 평원을 태평천국군이 가로질렀다. 예전에는 농사를 지으며 살던 사람들이라 이러한 이변이 대화의 주제가 되었다.
“북경으로 진군할 때에도 계속 추운 겨울이었는데 아직도 날이 풀리지 않을 줄이야.”
“내 말이 그 말이야. 벼를 심을 적에 이렇게 추우면 제대로 크지도 못하고 이삭도 잘 여물지 않아. 고향에 있는 사람들이 흉년이 되면 쫄쫄 굶을 수도 있겠는데.”
아직도 밤에는 얼음이 얼고 서리가 내릴 정도의 이상저온이 중국 대륙에 찾아왔다. 간접 영향권에 속하는 대한제국도 농업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쓸 지경이었다. 한때는 농부로 생활하던 병사들은 이 추위가 어떤 시련을 가져올지 알고 있었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던 차에 다른 병사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미 북경까지 올라왔는데 다시 내려가려고? 두 달 동안 내려가서 농사를 지어봤자 뭘 할 수 있나?”
“그 말도 틀린 말이 아닌데. 농사를 지어야 할 우리가 없으면 뭔 일이 벌어지겠나?”
“더 좋은 일이 벌어지겠지. 이제 조선 놈들의 곡식을 빼앗아서 고향으로 보내줘야지.”
태평천국군은 이미 수많은 약탈과 폭력으로 북경 시내를 초토화시켰다. 재물 가운데 값진 물건들은 공을 세운 이들에게 재분배할 목적으로 원명원에 비축되었다.
반면 그리 값지지 않은 물건들, 음식이나 간소한 장신구 혹은 옷감은 마음대로 분배되었다. 제대로 된 군복이 없던 병사들은 고작 보름 사이에 수많은 군복을 갖춰 입었다.
한 병사가 발걸음을 옮기자 바닥에 얼어있는 살얼음이 으스러지며 흙탕물이 튀어 올랐다. 흙탕물이 웃옷에 묻자 병사가 짜증을 내며 이를 닦으며 말했다.
“쫄쫄 굶는 게 문제야? 복을 불러들이게 붉은 상의를 입게 되었는데 옷이 엉망진창이야.”
“행군하면서 옷이 좀 해질 수도 있지. 그래 봤자 북경에 돌아가서 또 만들면 되잖아.”
“내 옷은 문양을 아로새긴 비단을 쓴 군복이라서 값이 비싸다니까.”
“또 약탈하면 되지 뭘 그리 망설이나?”
중국 문화권은 붉은색을 가장 좋아한다. 피와 같이 아주 선명한 붉은 색은 기쁨, 경사, 복, 돈 등의 긍정적인 가치를 불러온다고 믿는 문화권이다.
북경을 약탈한 태평천국군은 온갖 붉은 옷감을 구하고 이를 군복으로 바꿔나갔다. 북경에 들어올 때만 해도 흙먼지에 물든 군대는 어느새 새빨간 빛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8일간의 행군도 막을 내리고 병사들이 속속들이 기차역에 당도하였다. 대한제국에서 감독하고 청나라의 기술력으로 설치한 철도가 이들을 전장으로 신속하게 보내주었다.
“조선 놈들이 만든 기차를 타고 조선 놈들을 죽이러 갈 줄이야.”
“이걸 타면 걸어서 열흘이 걸릴 거리를 하루 이내에 도달할 수 있다던가?”
난생처음 기차를 탄 태평천국군은 조선을 상대로 벌일 약탈에 심취하여 전선으로 향했다.
* * *
약속한 열흘이 지날 무렵. 풍운산은 병력을 정돈하고 적진을 살펴보았다. 박현상의 말대로 대한제국군은 정말 조차지 북쪽의 평원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대한제국군의 진영은 아주 길게 늘어져 있었다. 직선으로 각을 잡고 서 있지도 않았으며 언덕과 구릉을 끼고 참호 안에 틀어박혀 상반신만 내놓은 채 대기하였다. 간혹 대포를 설치한 것 같은 커다란 참호가 있었으며 이 참호 앞에는 넝쿨 같은 무언가가 설치되어 있었다.
풍운산은 대한제국군의 진영을 확인하고 입술을 핥으며 말하였다.
“참호를 믿고 고작 팔천여 명으로 저런 비대한 진영을 만들 줄이야. 대한제국의 장수는 이론을 잘 알 뿐 현실을 하나도 모르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참호에 숨으면 몸을 지킬 수 있다 해도 지키는 것이 다가 아니지요.”
부관이 맞장구를 치자 풍운산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제국군의 진영의 총 길이는 3㎞가 넘는 형편이라 어느 한 귀퉁이가 뚫리면 속절없이 붕괴될 진영이었다.
참호까지 전선을 밀면 수적 우위를 앞세워 단번에 격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풍운산은 이 기나긴 참호를 바라보며 코웃음을 치고 말하였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거야. 숫자가 더 많은 태평천국을 상대하려면 참호에 숨어야 하겠지. 근데 참호에 숨어 있으면 밖으로 뛰쳐나올 수 없으니 우회를 막을 수 없고.”
“우회병력을 막을 수 없으니 참호를 무작정 길게 늘어트리고 병사를 분열시켰지요.”
“그럼 저 진영을 어떻게 해야 하나. 이긴다고 끝이 아닌데.”
풍운산은 자신이 확인한 청도 조차지의 방어체계를 몇 번이고 되새겨 보았다.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과 이중 철조망으로 인해 공성전을 벌이면 피와 시체의 산을 쌓아도 모자라다.
실제로 조차지의 장벽은 침입자를 막아내는 기능에 치중하여 전면전에는 다소 취약한 편이다. 그러나 박현상이 일부러 보여준 터라 풍운산 입장에서는 압박감을 느꼈다.
결국 적진을 무너트리는 건 당연하며 그다음 적이 퇴각하지 못하게 최대한 많은 피해를 입혀야 한다.
풍운산은 머릿속에서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계획을 만들어냈다.
“병력을 양분한다. 중앙에 일만여 명만 두어 적진을 견제하고 좌우익을 나누어 일만 오천 명을 진군시켜 방어가 약한 적의 좌우익을 공략하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러하면 진군 명령은 언제 하달하지요?”
“내일 동이 틀 무렵이다. 포대를 미리 설치하고 적진을 향해 조준을 돌려놓도록.”
한편 대한제국군의 진영도 내일 전투를 준비하였다. 지금도 타격할 수는 있지만 적을 끌어들여 최대한 많이 분쇄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열흘 전부터 설치된 참호는 준비를 마쳤고 모든 물자도 보급되었다. 그리고 각 연대 단위로 작전을 하달하여 적의 침입이 예상되는 좌우 측 진영에 화력을 집중하였다.
그리고 전투의 날이 찾아왔다. 한밤중에 일어나 식사를 마친 중대원, 박은찬이 중대장으로 부임하는 화력지원중대는 전선에 투입되기 전 마지막 훈화(訓話)를 전하였다.
“전 중대원은 들으라. 청나라의 명운이 경각에 달하였고 백성을 수없이 도륙하고 만행을 저지른 적도들이 조만간 엄습할 예정이다.”
박은찬은 억지로 배에 힘을 꽉 주고 중대원들을 살펴보았다. 비록 우익을 담당하는 화력지원 중대라도 적의 공격에 노출되기 마련이라 언제 어떻게 병사들이 죽을지 모른다.
예전의 박은찬이라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빠질 궁리를 했으리라. 그러나 저 후방에서 어재연과 함께 모든 책임을 짊어진 아버지 박현상을 생각하면 자신의 책무를 이행해야 한다.
또한 박은찬은 쌍성자에서 수많은 죽음을 본 적이 있었다. 중대원 모두가, 여기에 부관인 이토 히로부미가 자신을 바라보자 박은찬은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하였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물러나면 조차지의 백성들이 해를 입을 것이요. 이 조차지의 문물을 흡수한 적은 더더욱 강성해질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모두가 대답하자 박은찬은 고개를 끄덕이고 저 머나먼 평원을, 적이 엄습할 북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리고 걷혀가는 밤의 어둠을 확인하며 마지막 명령을 하달하였다.
“각자 맡은바 소임에 충실하도록 하라. 본 중대장은 비록 한 걸음 떨어진 후방에서 포병 사격을 지휘하고 있으나 언제라도 너희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갈 것이다.”
중대원들 모두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자신이 배치된 참호로 달려 나갔다. 이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짙푸른 색의 군복을 걸치고 있었지만 한 가지 장비를 더 갖추었다.
모두가 트렌치코트, 본래 참호전에서 나왔어야 할 다용도 웃옷을 걸쳤다. 색상은 수풀의 색과 흙의 중간쯤 되는 칙칙한 갈색으로 주변 환경과 잘 조화되는 색상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부대원들 모두가 의복을 입은 것을 확인하고 그 두툼한 재질의 옷감을 매만지며 너스레를 떨었다.
“날이 추워서 다행이야. 여름철에 이걸 입을 생각을 하니 끔찍하더군.”
“부중대장님, 앞으로 더 끔찍한 일이 기다리고 있는데요?”
“내 입장에서는 끔찍한 일이 아니지.”
전방 지휘를 담당한 이토 히로부미는 그 작달막한 체격으로 참호 밖을 바라보기 위해 뒤꿈치를 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런 부중대장을 위해 병사가 적당한 돌을 가져와 깔아주었다.
“참호 안에 돌은 들이지 말라 했는데. 포격을 맞으면 돌이 깨어져서 파편이 튀지 않나.”
“그럼 돌은 좀 던져 버리고 모래주머니나 깔아 드리겠습니다.”
즉석에서 참호 보수용 모래주머니를 만드는 사이 적진에서 나팔소리가 들리고 북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모두가 긴장하는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는 흥분과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적은 예전과 같은 방식의 전술을 구사하였다. 두툼한 전열보병이 진군을 거치며 차츰 분열하여 횡대를 구사하려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태평천국군의 전열보병 진영에 흙기둥이 피어오르며 사람의 사지가 날아올랐다. 다양한 구경의 암스트롱포가 쉴 새 없이 발사되며 적진에 가장 막대한 타격을 입혀나갔다.
이에 응해 태평천국군 진영에서도 발작적으로 포격을 시작하였다. 참호 근처에 떨어진 포탄도 몇 발 있었지만 참호 벽의 모래주머니에 박혀 내부에는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다.
거의 대등한 수의 포격이 양 진영을 수놓았다. 그러나 대한제국군의 진영은 무연화약을 사용해 연기가 거의 없는 반면, 태평천국군의 진영에서는 흑색화약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금 뒤 펼쳐질 광경을 기대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격 속도와 사정거리 모두가 우수한 암스트롱 포의 진정한 목표는 적의 병력이 아닌 화포였다.
“전장에서는 정보가 중요한 법이지. 우리가 던진 떡밥을 네놈들이 잘 물어뜯었구나.”
백린탄의 연막이 대한제국군 진영이 아닌 엉뚱한 곳, 좌우측에 위치한 산봉우리에서 피어올랐다. 그러자 태평천국군은 이 연막이 적의 포대 위치라 오인하여 대포병 사격을 개시했다.
참호를 두드려야 할 포격이 끊기고 병력 가운데 일부가 분열하여 언덕을 향해 질주하였다. 그 병력들은 하나둘씩 수풀 속에 숨은 저격병에 의해 고꾸라지고 무너져 내렸다.
그 직후 대한제국군의 대포병 사격이 적진을 강타하였다. 첫수부터 지리멸렬하게 밀린 태평천국군은 마침내 일제 돌격 명령을 하달하였다.
-우아아아아아!
전열보병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전술, 적진을 향해 빠른 속도로 움직여 최적의 사거리에서 일제사격을 벌이는 전술이 펼쳐졌다. 이에 화답하듯 참호 안에서도 명령이 하달되었다.
“작전대로 자율사격을 실시한다! 자신 있는 병사는 미리 사격을 해도 좋다!”
명령을 내린 이토 히로부미는 참호의 모래주머니를 밟고 상반신 전체를 드러낸 채 레버를 젖혔다. 신형 갑식소총의 내부 부품이 움직이며 일곱 발의 탄환 중 한 발이 장전되었다.
참호 앞에 적게 잡아도 수백여 명의 전열보병이 속보(速步)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잠시 중앙을, 적이 상대적으로 적게 밀려드는 중앙을 돌아본 다음 중얼거렸다.
“그래, 이쪽으로 많이 기어들어 오다니 잘 되었다! 오늘 실컷 죽여 보겠구나!”
심호흡을 세 번 행한 이토 히로부미는 개머리판을 제대로 붙이고 숨을 들이쉬었다. 조준선을 일치시키고 가늠자를 약간 위로 조준한 다음 탄환을 발사하였다.
1초가 조금 지날 무렵, 허공을 가르고 지나간 탄환에 가슴을 맞은 적병이 고꾸라졌다. 바로 레버를 젖힌 이토 히로부미는 장전된 다음 탄환으로 한 명의 적을 쏘아 죽였다.
총 일곱 발의 탄환을 십 초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쏜 이토 히로부미는 참호로 뛰어내려 안주머니를 더듬어 탄환 뭉치를 꺼냈다. 일곱 발이 한 덩어리로 묶인 탄환이 다시금 장전되었다.
고작 십오 초 만에 장전을 마친 이토 히로부미는 참호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 무렵 병사들 모두가 참호에 머리를 내밀고 사정없이 자율사격을 실시하고 있었다.
아직 태평천국군의 화력이 투사되기도 전, 사정거리에 도달하기도 이전인 200m 거리에서 수많은 총알이 쏟아져 내렸다. 여기에 박은찬이 재차 명령을 하달하였다.
“십혈포! 저속으로 적진을 향해 발사하라!”
후방으로 약 50m 떨어져 배치된 개틀링 건들이 포화를 내뿜었다. 속도를 가장 늦춘 포화는 좌우로 길게 흩뿌려지며 적진에 강철과 화약의 불길을 내뿜었다.
그 순간 박은찬의 중대에 소속된 개틀링 건 중 하나가 침묵하였다. 부중대장으로서 사격과 부대원 관리를 함께 하던 이토 히로부미의 귀에 보고가 들려왔다.
“유탄(流彈 - 눈먼 총알)이 십혈포 사수를 직격하였습니다!”
운수가 없어도 지지리도 없는 경우였다. 태평천국군에 라이플 사수가 있지만 극소수에 불과하고 이들은 지금 전선에서 탄환에 맞아 죽어나가고 있으리라.
그 사수 중 한 명이 철판으로 보호받는 개틀링 건의 사수에게 탄환을 적중시킨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눈을 굴려 자신을 대신할 사람을 찾아 고함을 쳤다.
“소대장! 일 소대장 어디 있나!”
“이등 부중대장님! 저 여기 있습니다!”
“본 부중대장은 십혈포 사수를 대신하겠다. 적진에 계속 화력을 투사하라!”
“네? 아니 저도 아니고 십혈포 사수는 다른 소대장이 대신해야 할 일인데요!”
그 말은 이토 히로부미에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그는 대한제국군의 화력에 심취하여 있으며 더 많은 청나라 역도들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십혈포를 고속으로 쏘았어야지! 보이는 놈을 모두 다 갈아 죽여야지!”
개틀링 건이 설치된 참호에는 팔뚝을 맞아 피를 철철 흘리는 사수가 응급 치료를 받고 있었다. 지혈대로 출혈이 억제된 것을 확인한 이토 히로부미는 사수의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뭘 하나! 적도들이 참호로 밀려드는데 사격하지 않고!”
“하지만 부중대장님이…….”
“명령이다! 재가동해!”
배터리에서 다시금 전력이 공급되고 탄띠가 장착되었다. 그사이 조금 높은 진영에서 전선을 확인한 이토 히로부미는 흥분과 열망으로 가득 찬 눈으로 이를 지켜보았다.
시뻘건 복장의 태평천국군은 무조건 걸어와 죽음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간혹 참호를 향해 돌격하는 놈들은 참호 앞에 설치된 다섯 겹의 철조망에 몸이 걸려 허우적거렸다.
“저쪽이군! 저쪽이 뚫리려 하지 않나!”
그 철조망을 돌파하는 시도가 있었다. 개틀링 건이 잠시 침묵한 사이 동료의 몸을 밟고 개틀링 건을 넘나들려는 한 무리의 태평천국군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에 응해 보조 인원들이 크랭크를 돌려 조준선을 정렬하였다. 육중한 기계음과 함께 방아쇠가 당겨졌다.
단 한 무리의 사람을 향해 날아간 수백 발의 탄환은 철조망을 넘어오려던 병사들을 한 줌의 시체로 돌려버렸다.
다시금 크랭크가 회전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눈을 굴리며 적진을 확인하였다. 저 시뻘건 무리의 전열보병을 향해 무자비한 탄환이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