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292화 (258/345)

292화

23장 5화 태평 지옥

한편 홍수전이 소유한 개인 병력, 자신이 북경 내부에 침투시켜 천병(天兵)이라 이름 붙인 병사들 가운데 절반, 약 2,000여 명은 다른 임무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임무를 마친 홍수전의 사촌동생이자 또 다른 재상, 홍인간(洪仁玕)이 돌아와 보고를 시작했다. 그는 피로에 지친 몰골로 임무 완료를 보고했다.

“폐하께서 명하신 바를 그대로 이룩했나이다. 북경에 미리 심어두었던 세작과 병력을 동원하여 영웅약 제조에 가담했던 모든 인원을 추포하는 데 성공하였나이다.”

그나마 반가운 보고를 듣게 된 홍수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부분의 왕공족을 사로잡거나 죽이는 데 성공하였는데도 가장 중요한 공친왕의 소재가 불분명한 상태였다.

더군다나 자신이 가장 중요시하는, 신하로 반드시 섭외해야 할 인물인 증국번도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홍수전은 고개를 끄덕이며 상세한 일을 캐물었다.

“혹여나 한 놈이라도 빠져나갔다면 일이 틀어질 것인데. 모두 사로잡았나?”

“거사일이 전날부터 미리 인원을 배치하여 준비를 하였습니다. 대다수는 도망치지도 못하고 사로잡혔고 나머지는 퇴로를 에워싸 체포하거나 그 과정에서 살해당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홍수전의 개인 병력이 활약할 기회를 놓치고 북경에 만연한 혼란을 잠재우지 못하였다.

홍인간은 여기에 자신이 나름대로 거둔 성과를 말하였다.

“혹시나 제조법이 새어나갔을 때를 대비하여 이들의 지인 가운데 연단술에 능한 자와 친인척을 선별하였습니다. 그 덕분에 사로잡은 인원이 좀 많았습니다.”

홍수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옥좌에서 내려와 홍인간을 일으켜 세웠다. 그가 반란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과정이 바로 영웅약 제조자들의 체포이다.

홍수전은 늦게라도 혼란을 잠재울 생각으로 가장 빠른 처형방법을 동원하였다.

“놈들을 모두 처형할 것이다! 천안문 앞에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어 놈들을 산 채로 묻어라!”

“무엇 하느냐! 천병들은 황제폐하의 명을 받들어 구덩이를 파라!”

법률을 배포하는 장소인 천안문 앞의 대로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문의 누각 위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홍수전은 홍인간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체포 인원은 폐하께서 이미 작성해 두신 목록에 의거하였고 여기에 지인이나 주변인을 합쳐 일천여 명을 잡아 두었습니다.”

홍수전은 이번 처형을 기강을 잡기 위한 본보기로 삼으려 하였다. 대충 천여 명이 묻힐 구덩이가 만들어졌지만 더 많은 구덩이를 파내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구덩이가 적구나! 앞으로 명령을 무시하는 놈들을 산 채로 묻어버릴 구덩이를 계속 파도록 하라!”

점차 늘어나고 깊어지는 구덩이를 바라본 영웅약 제작자들은 저 구덩이에 자신이 생매장될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들은 천안문을 향해 머리를 찧어가며 간청하였다.

“저희는 오로지 명령대로 임하였을 뿐입니다!”

“저를 고용하신 분이 좌, 옥좌에 오르신 황제폐하가 아닙니까! 믿어 주시옵소서!”

“신의 잘못은 미숙한 실력으로 약을 만든 것이 전부이옵니다!”

홍수전은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이, 실제로는 자신이 이용하고 버린 사람들에 대한 양심의 가책으로 몸을 돌렸다. 즉시 명령이 떨어지고 자금성 앞에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났다.

그 구덩이 중 하나를 사람을 묻어버린 천군에게 다음 명령이 하달되었다. 홍수전은 천병으로 기강을 잡기 위해 홍인간을 앞세울 작정으로 이들을 인솔하게 하였다.

“승상에게 명을 내리겠다. 천병을 이끌고 영길리의 대사관에 방문하라. 아마 이들 모두가 곤경에 처해있을 터. 항복을 종용하여 신병을 인솔하도록.”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무얼 하느냐! 어서 영길리 대사관으로 향하지 않고!”

홍수전은 아마 자신의 명령이 지켜지지 않았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이번 기회에 몇 명을 본보기로 처형하고 생매장하여 위엄을 세우고 안전을 보장할 방침이었다.

문제는 그의 생각과 달리 영국 대사관에 몰려든 서양인들이 이미 대부분 사망하였다는 점이었다. 기껏해야 대사관 내부에서 보호받는 오백여 명의 민간인과 직원들이 전부였다.

영국 대사관을 포위한 태평천국 병사들은 여러 방식으로 즐거운 놀이를 하였다. 특유의 미신과 지금까지 핍박당한 기억이 어우러져 온갖 방법으로 서양인을 처참히 살해하였다.

길거리에서 대놓고 톱을 바꿔가며 즐기는 이들, 뒷골목이나 점거된 민가에서 즐기는 이들, 창과 칼로 즐기는 이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이들이 다양한 방식을 동원하였다.

대사관에 들어가지 못해 사로잡힌 사람이 천여 명에 달했다. 이들이 사라지자 대사관이 공격 대상이 되었다.

공격이 시작되자 대사관의 문이 열리더니만 수십 명의 사람들이 튀어나와 양손을 들고 자비를 구걸하였다.

“제발 살려주시오! 무엇이든 하겠소! 목숨만은 살려달란 말이오!”

노인부터 청년까지 다양한 남성들이 무릎을 꿇고 양손으로 싹싹 빌어대며 자비를 구걸하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태평천국 병사들은 코웃음을 치며 말하였다.

“양이들이 하는 꼴 봤지? 저놈들은 도깨비도 아니고 허연 돼지새끼들이라니까.”

“그럼 돼지 도축이나 해볼까? 다들 저놈들을 기둥에 묶어라!”

자비를 구걸하며 나온 남성들도 온갖 방식으로 즐거운 놀이의 대상이 되었다. 시신에서 코와 귀를 잘라낸 병사는 이걸 엮어 부적으로 삼기 위해 목걸이로 만들었다.

그 끔찍한 광경을 창문을 통해 지켜보던 전직 군인은 헛구역질을 하면서 대사관 안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북경 탈출을 위해 아녀자들과 전직 군인들이 인솔자가 되어서 움직였다.

“다음! 다음 조 통로로 오시오!”

영국은 무능한 국가가 아니었다. 소요사태를 대비하여 북경 대사관에 인근 호수와 이어진 비밀 통로를 마련해 두었고 서양인들을 이 통로로 대피시키려 하였다.

문제는 소요사태를 한참 벗어난 학살극이었다. 며칠에 걸쳐 사람들을 대피시킬 용도의 비밀통로는 한 번에 많은 사람을 도주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통로로 가장 먼저 들어가려던 부인이 고개를 돌리면서 뒤를 살펴보았다. 전권대사는 그녀의 등을 밀어대며 빨리 가라고 독촉하기 시작했다.

“부인! 안 가고 뭘 하시오!”

“남편이 밖에 있어요! 전 남편을 두고 갈 수 없다고요!”

“애통한 말씀입니다만 이미 명을 달리했습니다. 그 용기를 헛되이 하지 않게 북경에서 꼭 탈출하십시오.”

울먹거리던 부인은 아예 울음을 터트리며 비밀통로로 몸을 들이밀었다. 그녀의 뒤를 이어 10여 명의 사람들이 비좁은 비밀통로로 탈출하였다.

지금까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다른 국가를 합쳐 민간인 400여 명이 대피한 것이 전부였다. 프랑스 출신 상인은 삿대질을 하며 대사관 직원에게 따지고 들었다.

“놈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왜 이리 대피가 늦습니까!”

“통로가 좁아서 한 번에 많은 사람이 대피할 수 없습니다. 안 그러면 숨이 막혀서 통로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어나갈 겁니다!”

“그래? 그럼 우리가 나서서 시간을 더 끌어야 할 것 같군.”

굶주린 호랑이에게 먹이를 주어 관심을 유도하듯. 지켜야 할 사람을 지키기 위해 국가를 가리지 않고 신사들이 모였다. 이들은 제비뽑기로 희생될 사람을 정해 문밖으로 나섰다.

“이번에는 내 차례로군. 내 부인은 탈출하였으니 댁 부인도 탈출하시오.”

“다음에는 내 차례가 될 것 같은데. 죽고 난 다음 천국에서 보세나!”

“그 천국이 프로이센 천국이오? 아니면 오스트리아 천국이오?”

“어디든 여기보다 나은 장소겠지!”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전권대사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적어도 아녀자들과 이들을 인솔할 전직 군인들은 탈출시킬 수 있으리라.

물론 전직 군인들도 권총이나 소총 몇 자루로 무장한 것이 전부이다. 이들이 있더라도 북경을 탈출하긴 힘든 일이나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놈들이 또 노래를 부르고 고함을 칩니다!”

전권대사는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짓씹으며 지하실에서 올라왔다. 지금까지 희생양을 계속 제공하여 돌격 시간을 지체시켰는데 상대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그러던 중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광기에 사로잡힌 태평천국 병사들이 오열을 정리하고 뒤로 물러나며 새 병사들이 들어왔다.

“놈들이 왜 뒤로 물러나지?”

“저 뒤를 보십시오. 이 날씨에 양산을 머리 위에 올리고 가마 위에 탄 사람이면 간부입니다. 놈들의 간부가 이제야 도착한 겁니다!”

홍수전의 명령으로 홍인간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방문하였다. 그 틈을 타서 전권대사는 마지막 명령을 하달하였다.

“모든 대사관 직원은 마지막에 탈출한다. 나는 이 자리에 남을 것이니 두고 가도록.”

“전권대사님은요!”

“나? 나는 가장 즐거운 일을 해야 하지 않겠나?”

서태후의 부탁으로 들여온 1톤의 불꽃놀이 화약이 대사관 지하실에 엄중히 보관되어 있었다. 전권대사는 이 화약에 불을 붙여 자폭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청나라와 관련된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전권대사이다. 설령 영국으로 돌아가도 모든 책임을 묻고 최악의 경우에는 사형, 아무리 운이 좋아도 평생 골방 신세이리라.

더군다나 이 책임으로 인해 자신을 임명한 디즈레일리 총리가 실각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깔끔하게 폭사(爆死)하여 비극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여러 면에서 편리하였다.

“다음! 다음 조가 마지막 조이군! 근데 한 조가 부족한 것 같은데…….”

홍인간이 주변을 시찰하고 기강을 잡는 사이 대사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탈출하였다. 그 과정에서 전권대사는 한 조에 해당하는 장정 여섯 명이 부족한 것을 알아차렸다.

혹시나 자신의 계산이 틀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명부를 확인하려 1층의 집무실로 향하자 프랑스 상인 6명이 흑색화약 통에 등유를 섞어 임시 도화선을 만들고 있었다.

“역시나 영국 놈들은 생각이 짧고 남에게 엿 먹이는 짓거리만 좋아한다니까. 그딴 식으로 사람을 비워두면 반란군이 속아 넘어가겠어?”

이들은 방 귀퉁이의 목재 바닥에 구멍을 뚫고 그 공간을 걸쭉한 흑색화약-등유 혼합물로 채웠다. 그리고 이 임시 도화선을 양탄자 아래로 숨겨 전권대사의 책상까지 연장했다.

이 양탄자 위에 불똥만 떨어져도 등유가 발화되어 화약이 점화되고 지하실의 폭죽 덩어리까지 불길이 스미리라.

전권대사는 여섯 명의 상인들에게 역으로 질문을 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우리 모두가 남아서 대사관 직원인 척 위장해야지. 직원 혼자만 대화를 나누자는 것과 직원 여럿이 같이 남아있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설득력이 있겠나?”

전권대사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프랑스 상인들을 살펴보았다. 이들 또한 공포에 사로잡혀 당장 도주하고 싶은 마음이나 그 공포를 억누르고 당당하게 나섰다.

“예전에 백년전쟁 당시의 일화 아나? 칼레의 시민 말이야.”

“아, 에드워드 왕의 자비로 목숨을 구한 사람들 말이구려.”

“하여튼 영국 놈들은 제정신이 아니라니까. 에드워드가 칼레를 도저히 함락시키지 못해서 협상을 한 거잖아. 아무튼 여러모로 우리가 남아서 댁을 도와야 할 것 같더라고.”

상인들은 힘을 모아 탈출구를 원래대로 되돌린 뒤 제대로 된 웃옷으로 갈아입고 스카프를 둘러 외교관인 척 위장하였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며 말하였다.

“비밀통로로 도망친 사람들이 무사하려면 놈들의 지휘관을 한 명이라도 죽여서 혼란을 부추겨야지. 외모가 다른 사람들이 탈출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잖나.”

“댁이 남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우리도 남기로 했네. 평상시에는 사이가 안 좋은 나라이지만 저 돼지만도 못 한 쓰레기들을 앞에 둔 상황이니 옛일 따위는 훌훌 털어버리자고.”

“칼레의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여섯이 희생양이 되어 다른 사람을 살리겠다는 말이야.”

전권대사는 눈을 돌려가며 여섯 명의 상인들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 인원이라면 그럭저럭 구색은 맞춘 셈이고 최후의 생존자에 걸맞은 숫자다.

-항복하면 네놈들을 안전한 곳에 감금할 것이다! 어서 문을 열고 무장을 해제하라!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던 태평천국 병사들이 사람을 살려주겠다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였다. 전권대사는 배에 힘을 꽉 주고 창문을 연 다음 고함을 쳤다.

“못 믿겠다! 네놈들의 지휘관에게 공식 협약을 받을 것이니 최소한의 병력만 들어오라!”

그래 보았자 대사관에 남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못 믿기는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이 어떠한가.

질서도 없이 서양인을 끔찍하게 죽이기 위해 움직였다. 설령 제안이 이행되어도 자신들이 목숨을 건질 뿐 비밀통로로 도주한 사람은 살해당한다.

제안이 전해지기 무섭게 온갖 욕설이 시작되고 총탄이 대사관 창문을 깨트렸다. 전권대사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불을 붙이려는 순간, 답변이 돌아왔다.

-알겠다! 네놈들이 순순히 항복할 수 있도록 내가 직접 나설 것이다!

“당신의 직책은 무엇이오! 혹여나 지휘관이 아닐 수도 있으니 명백히 하시오!”

-나는 태평천국의 승상이자 황제폐하의 사촌인 홍인간이다! 이제 되었는가!

상인들 모두가 주먹을 움켜쥐고 흥분을 담은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상대에게 뼈아픈 타격을 입히고 지휘체계를 흔들어 버리기 가장 적당한 최고위 간부가 낚였다.

평상시라면, 자국 민간인이 살아남은 상황에서 홍인간과 함께 자폭하면 그 보복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하리라.

지금은 북경에 살아남은 서양인이 거의 없는 시점이라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혼란을 부추겨야 더 많은 사람이 탈출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제 다 되었군. 다만 함께 죽기 전에 놈과 대화라도 좀 나눠봤으면 하는데.”

“대화를 왜 나누시오? 그냥 근처에 오면 불을 붙이시구려!”

“그래도 사람이 대화는 나누어보고 태도를 확인해야지.”

모든 준비가 끝나고 여섯 명의 상인과 전권대사가 일 층의 집무실에서 홍인간의 방문을 기다렸다. 먼저 홍인간이 들어오기 전 스무 명의 천병이 달려들어 안전을 위해 이들의 몸과 소지품만 살펴보았다.

“흉기 없음! 담배와 점화궤(라이터)는 어떻게 합니까?”

“그 정도는 내버려 둬라. 다들 방 밖으로 나오지 않고 뭘 하시오?”

“아예 승상이라는 분과 함께 우리의 생존권에 대해 명문화를 시키면 더욱 좋을 것 같아서. 이 방에서 직인을 찍는 것이 규정이지.”

“쓸데없는 짓거리는 그만두고…….”

천병들은 대사관 직원들을 바로 끌어내려 하다 제안을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공식 서류가 작성되고 직인이 찍힌다면 태평천국은 서양인의 보호를 위해 나름 노력을 한 것이다.

그 서양인 가운데 생존자는 고작 일곱 명에 불과하지만 노력은 하였다. 천병의 호위를 받아 방 안으로 들어온 홍인간은 인사를 하면서 지금까지의 상황에 대해 변명을 하였다.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부 불순한 놈들이 서양인에게 해를 입히지 말라는 황제 폐하의 명령을 어기고 참으로 끔찍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아, 일부 불순한 놈들이 그럴 수는 있소. 틀린 말은 아니지.”

전권대사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뒤틀었다. 그 조소(嘲笑)를 알아차리지 못한 홍인간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양팔을 벌려 나름 자비로운 답을 하였다.

“이제 모든 일은 끝났습니다. 영국에서 공식 사절이 오면 여러분의 신병을 양도할 겁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소이다. 지금 반란을 일으킨 세력은 여러 세력이 이합집산(離合集散)을 하여 공동으로 통치하는 거요? 아니라면 한 명의 지도자가 있는 거요?”

“그야 지엄하신 태평천국의 새 황제께서 모든 이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사태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 자신이 거느린 병력과 자신의 명령을 받드는 지휘관이 이런 짓을 저질렀는데도 우리 목숨만 살려서 사태를 해결하겠다?”

홍인간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새빨갛게 물들어 버렸다. 그 또한 대사관으로 들어오며 길거리에 즐비한 시신과 차마 말할 수조차 없는 끔찍한 흔적들을 확인했다.

모두 다 태평천국의 이름으로 실행한 시점에서 홍수전이 책임을 져야 마땅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권위를 살리기 위해 억지로 변명을 시작하였다.

“역성혁명에 성공한 직후여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깊은 유감을 표하지요.”

“그러하면 이번 사태에 대해 새 황제께서는 어떻게 책임을 지실 거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아랫놈들이 멋대로 일으킨 사태인데 왜 황제께서 책임을 지십니까?”

프랑스인은 물론 영국인이 보기에도 기가 차다 못해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대답이었다. 한 국가의 지도자로서, 하다못해 도적떼의 지도자도 이보다는 책임감이 있으리라.

부하가 잘못을 저지르면 부하의 잘못이고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부하가 공을 세우면 자신의 위업 덕분이며 부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어느 시대고 존재하는, 책임감이 없는 지도자의 전형적인 꼬리자르기요 책임 회피이다.

전권대사는 홍인간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지만 그 기회를 본인이 걷어차고 시궁창으로 쑤셔 넣었다. 프랑스 상인들은 침묵이 이어지자 휘파람을 불고 박수를 치며 환호를 보냈다.

“이야! 전권대사양반! 대화 나눠서 기분이 좋겠소이다!”

“아주 좋고말고! 더 이상 이야기를 해보았자 내 뇌가 썩을 것 같군!”

책상 위에 놓인 파이프의 불똥이 양탄자 위에 떨어졌다. 등유에 불이 붙으며 삽시간에 방구석으로 불길이 밀려들었고 흑색화약이 점화되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뭘 하는 거냐!”

천병들이 전권대사를 걷어차고 흑색화약이 점화된 방향을 살펴보았다. 바닥의 구멍을 타고 들어간 불길이 잦아들자 전권대사가 웃음을 섞어가며 말하였다.

“같이 저승에서 보자고! 네놈을 위한 저승이 이 세상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당장 피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지하실에 보관된 일 톤의 폭죽이 점화되었다. 이후 연쇄 폭발이 일어나며 지하실이 뒤엎어지고 폭음과 불길이 지상으로 솟구쳐 나왔다.

영국 대사관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천병과 이들에게 밀려나 있던 태평천국의 병사들 모두가 폭발에 휩쓸렸다. 불행히도 나름 지위가 높은 천병들이 이 폭발에 먼저 휩쓸렸다.

대사관에서 반경 30m 이내에는 생존자가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거대한 흙먼지와 뒤얽힌 흑색화약의 연기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태평천국 병사들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였다. 홍인간이 남긴 물건이라고는 대사관 안으로 가져가지 않은 부채가 전부, 모두가 목소리를 높여 고함을 쳤다.

“승상께서 양이들의 수작질로 폭사하셨다!”

홍인간과 천병의 대사관 파견은 홍수전에게 최악의 결과로 돌아왔다. 그의 사촌이 죽고 핵심 병사들이 줄줄이 죽어 나간 것은 악재의 시작에 불과하였다.

만약 서양과의 화친을 주장하면 휘하 태평천국의 간부들에게 밀려 폐위당하거나 아무 권위도 없는 허수아비 신세가 되리라.

그리고 동료의 시신을 뒤집어쓴 병사들이 다시 총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

“양이를 죽여라! 모든 양이들은 악적이니 철저히 죽이고 또 죽여라!”

“양이들이 어디 숨어 있을지 모른다! 눈의 색상이 다른 놈! 머리가 누런 놈! 피부가 허연 놈! 코가 큰 놈을 가리지 않고 죽이란 말이다!”

이미 북경 내부의 서양인을 거의 다 죽인 시점이지만 새로운 희생양이 생겨났다. 각지의 소수민족 가운데는 서양의 혈통을 지닌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또한 몽골 일대를 거친 사람들도 러시아의 혈통이 섞여 서양인의 특징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소수민족들이 또 다른 학살대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작가의 말

1톤의 흑색화약의 폭발력은 155㎜ 고폭탄 15발 정도입니다.

좀 경감되어도 천지가 뒤엎어지는 대폭발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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