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22장 10화 대화합(1)
라코타 부족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 처음 취한 움직임은 소르칸을 비롯한 몽골계 미국인들이 보호할 의무가 있는 훙크파파 일족의 견제였다.
수천 단위의 병력이 훙크파파 일족의 영토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소르칸은 즉각 명령을 하달했다. 그의 간부 중 하나인 타탕카 아요탕카의 일족을 지키기 위한 조치였다.
“타탕카! 네놈 아래에 카우보이를 포함한 병력 천오백 명을 보내주겠다! 너희 부족으로 향하는 모든 놈들을 도륙해 버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병참선은 어떻게 유지합니까?”
“그 정도는 알아서 약탈……. 아니다! 그냥 보급도 잔뜩 가져가!”
순간 옛 기억과 관습대로 약탈 명령을 내리려던 소르칸은 휘하 부족을 약탈하는 꼴이 되어 보급을 잔뜩 얹어주는 꼴이 되었다. 여기에 각지에서 보고가 이어졌다.
“놈들이 아파치 부족의 전사들을 앞세워 사방을 정탐하고 있습니다.”
“후방에 둔 바토르들을 노리고 있군. 그렇다고 병력을 후방으로 뺄 수도 없는데.”
이번 사태를 만들어낸 셔먼은 태연한 척 작전 지도를 같이 작성하며 적의 공세를 예측하였다. 적은 수백 단위의 분견대를 보내려 하였다.
아마도 각 마을에 머무는 포로를 노리는 것 같았다. 셔먼은 작전 지도를 가리키며 대평원의 일정 지역을 가리킨 다음 말하였다.
“저들의 목적은 포로의 구원입니다. 포로를 구한 다음에는 목적도 없이 보급 부대를 사냥할 것 같은데 무시하고 진격해서 단 한 번의 회전(會戰)으로 몰아넣으시지요.”
셔먼은 군인 입장에서 사태를 파악하였다. 분견대는 각 지역이 방어하게 내버려 두고 주 전선을 소탕한 뒤 토벌하면 될 일이었다.
몽골 평원 시절의 소르칸이라면 이 말에 동의했으리라. 오히려 후방의 희생을 유도하고 적진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들어 수레바퀴를 돌리며 모조리 파괴할 것이다.
그러나 소르칸은 임시 주지사이며 백인들을 오로지 보급 목적으로 고용하였다. 몽골 고원에서 고려할 필요도 없고 알지도 못하였던 보호의 의무가 그의 양어깨를 짓눌렀다.
“그렇게 되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나? 자네가 들먹인 연방헌법에 의거하면 각 주를 침략으로 보호할 사람은 대표인 나야. 당연히 내가 고용한 사람도 보호할 의무가 있지.”
“그래도 토벌이 우선 아닙니까?”
소르칸은 자신이 실각했을 상황을 염려하였다. 자신이 실각하면 바토르로 고용된 흑인 노예들의 시민권 부여 계획도 물거품이 되고 애리조나는 준주로 남으리라.
그렇게 되면 링컨의 대통령 선거에 투표를 보내지 못하는, 쿠릴타이에 참가하지도 못하는 군소부족의 신세가 될 것이다. 소르칸은 이를 감안해 명령을 하달하였다.
“밍칸(천 명) 규모로 부대를 재편성한다! 적의 공세가 예측되는 지점에 먼저 나아가서 각기 분열해 적을 요격하도록!”
이후 소르칸은 부대 재편성과 보급 부대 파견을 비롯한 여러 업무를 처리하며 전선을 형성하였다. 셔먼이 보기에도 딱히 흠잡을 곳이 없으나 전제 자체가 잘못되어 있었다.
이윽고 열흘이 지날 무렵 전선에서 소식이 도착하였다. 정보가 제한된 불리한 환경에서 격전을 벌인 몽골계 미국인들과 카우보이는 적잖은 피해를 입은 채 귀환하였다.
“사 조 귀환하였습니다. 일부 부대가 포위 당해 격전을 치렀고 일흔 명이 죽었습니다.”
“염병할. 시신은 다 챙겨 왔는가?”
“챙겨오기는 했지만 적이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어서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습니다.”
“퇴각할 때 보니 적들이 우리가 들어온 경로에 수비를 강화하고 목책까지 설치해 두더군요.”
부족한 정보로 적을 먼저 요격한 결과는 적의 경계 강화로 돌아왔다. 기선제압에 실패한 시점에서 이 원정은 장기 원정이 될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날 밤, 소르칸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비판을 수용할 생각으로 돌아온 간부들과 게르 밖에서 술을 마셨다. 그러나 간부들은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결국 침묵을 견디다 못한 소르칸이 알타이를 바라보며 질문을 하였다.
“내 판단이 틀리다 생각하면 뭐라 말이라도 하라고. 이거 답답해서 술을 마실 수도 없네.”
“고향의 있을 때라면 틀린 판단이라고 즉각 항명했을 겁니다. 그러나 소르칸 님은 임시 주지사 아닙니까?”
“우리도 고향에 있을 때처럼 내 몸과 가족만 건사하면 되는 전사가 아니지요.”
“우리 보급 부대는 장인어른의 입김이 닿은 사람들 아닙니까? 후방의 보급 부대가 습격당하는 걸 방치하면 장인어른께서 호되게 질책할 겁니다.”
이미 이들의 생활은 변하였다. 점차 정주민족의 방식을 수용하였으며 업무와 관련된 환경조차도 점차 정주민족에 가깝게 변질되었다. 대신 많은 것을 얻었다.
옛 몽골제국군과 비교하면 지금의 몽골계 미국인들은 너무나 풍족한 삶을 보내고 있다. 과장을 하나도 안 보태고 툼스톤 일대에 축적한 재산은 몽골 고원의 몇 배는 되리라.
개개인이 어설프게라도 보수하고 정비할 수 있는 활과 화살 대신 공장에서 만들어 낸 총과 총알을 사용하였다. 여기에 입맛조차도 변했다.
“우리들의 입맛이 언제 이렇게 변한 건지 영문을 모르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예전에는 차디찬 겨울에도 귀리죽 한 그릇이면 배가 불렀는데요.”
“우리 식사는 그렇다 치자고. 말이 엄청나게 먹어서 목초지가 사라질 지경인데.”
소르칸은 며칠 단위로 사라지는 목초지를 볼 때마다 신음성을 흘렸다. 예전 몽골고원에서 사용하던 자신들의 말은 체격이 작은 데다 점점 늙게 되어 더 이상 쓸 수 없는 말이 되었다.
그렇다고 몽골에서 가져온 말을 번식시킬 이유도 없었다. 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작은 말을 타고 다닐 재주도 없어서 몽골계 미국인들 대다수가 크고 늠름한 서양 말을 타고 다녔다.
“기를 때는 잘 몰랐는데 장거리 원정을 뛰니 확실히 티가 나는군.”
“고향에서 타고 다니던 말의 세 배 정도는 퍼먹고 있습니다. 여기에 전투 이전에 기력을 북돋우려면 어찌나 많은 곡식을 먹여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덩치가 크고 힘과 속도가 뛰어난 서양 말은 그만큼 많은 먹이를 필요로 하였다. 진영 인근의 초원에서 먹을 만한 풀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전투 이전에 먹일 곡식도 문제였다.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아파치 부족의 농경지는 이미 수레바퀴로 인해 파괴되었고 남은 농경지도 작물을 수확할 시기가 아니었다.
결국 물자 배급을 위해 텍사스에서부터 배송시켜야 하는데 그 과정도 문제였다. 소르칸은 옛 기억을 떠올리며 손목시계를 잘그락거렸다.
“우리에게 군살이 붙은 거야. 뺄 수 없는 군살 덩어리들이.”
“그렇지요. 예전 같으면 앞도 뒤도 바라보지 않고 닥치는 대로 뛰어들었을 텐데요.”
“당연한 말이지. 서신을 박박 찢어놓고 눈앞에 보이는 마을 몇 개를 쓸어버려야지.”
“수레바퀴를 돌리고 남은 생존자는 오르도(숙영지 및 관리지)의 노예로 배정해야죠.”
술병을 마주친 소르칸과 간부들은 질 좋은 위스키를 목으로 넘긴 다음 입을 닦았다. 그리고는 안주로 잘 익은 말고기를 한 입 뜯어먹은 뒤 코웃음을 치며 말하였다.
“대신 이런 좋은 술도 없이 쉬어가는 마유주를 마시고.”
“다른 건 몰라도 옷도 문제고 씻는 것도 문제지. 고향에 있을 때에는 일 년에 한 번 씻을까 말까라서 온몸에 때가 끓고 이와 벼룩이 기어 다녔잖아.”
알타이는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때의 기억을 되살렸다. 당시에 몸을 안 씻는다고 시비가 붙어서 몇 놈을 쏘아 죽인 기억이 피어났다.
“그게 사람 몰골인가? 난 고향에 돌아가면 돈을 써서 사람들 목욕부터 시킬 거야!”
“거 우리가 도착했을 때 기억나? 먼저 왔던 사람들이 몸부터 씻으라고 비누를 줬잖아.”
“이야! 우리 마누라가 옛날 모습 보면 아주 질색을 하겠는데요?”
“그걸 사람으로 볼까 짐승으로 볼까?”
아내의 이야기가 나오자 다시금 이야기꽃이 피었다. 아이가 활 쏘는 시늉을 하는 대신 권총 잡는 시늉을 하였다는 둥, 아내의 타박으로 교사를 들여 여러 문물을 배운다는 둥.
몽골 고원의 척박한 환경에서 경험하지 못한 수많은 경험들이 몽골계 미국인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이들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은 유목민이지만 그 위를 다른 경험이 덮어나갔다.
술병을 다 비운 소르칸은 새 병을 뜯고 몇 모금을 들이켰다.
기껏해야 수십 명 규모의 부족을 책임지던 옛 생활과 비교하면 감당해야 할 일도, 배려해야 할 일도 너무나 많았다.
당장 아래에 딸린 식솔만 따져도 수천 명에 달하였다. 여기에 자신들의 풍습과 다른, 정주민족이자 근대의 문화를 지닌 미국인들이 이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아마 우리는 옛 풍습을 더 이상 지킬 수는 있을 것 같아. 근데 우리가 옛 생활을 꿋꿋이 지키려 해도 손자가 장성할 때가 되면 우리의 문물이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 같다고.”
다른 이들도 독한 증류주를 들이켜며 말없이 동의하였다. 이들은 새로운 땅에 도착하여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알게 모르게 정주민족과 동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나마 척박하고 막 개척이 시작된 서부라서 동화가 점진적으로 진행되었을 뿐이다. 알타이 옆에 있던 간부는 막 두 살이 되어가는 아이의 사진을 꺼내 보며 말하였다.
“그때쯤 되면 손자들이 죄다 볕에 타들어 간 벌건 피부에 금발, 은발, 적발로 뒤엉키겠군요.”
“손자? 내 아들은 아내를 닮아서 벌써 주근깨가 피어오르더라. 처음에는 피부병인 줄 알았지.”
“그렇게 되면 지금 동부 연안에 있는 사람들처럼 위세만 떨어댈 것 같은데요.”
“그건 아니지, 우리의 풍습은 이 나라, 예케 아메리카 울루스에 맞게 적당히 남을 거야. 이를테면 수레바퀴 같은 건 우리 시대의 옛 풍습으로만 남겨두고 말이나 잘 탈걸?”
알타이의 말을 들은 간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였다. 이들도 주변의 시선을 느끼고 이대로 옛 풍습을 이어가다가는 마찰이 벌어질 거라 판단했다.
“정당하고 신성한 복수를 할 때에만 수레바퀴를 굴릴 수 있게 되었군.”
“그러면 이번 전쟁은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걸어온 싸움에서 꼬리를 말고 도망치면 위신이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은데요.”
알타이는 술에 취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소르칸을 바라보며 질문을 했다. 그러자 소르칸은 반쯤 비어 있는 술병을 바닥에 내려놓고 곰방대에 불을 붙이며 답하였다.
“이건 수레바퀴의 연장이다. 놈들이 우리와 같은 시민권을 지닌 미국인이라면 모르겠는데 엄연히 쿠릴타이, 연방 정부에서 주시하고 토벌하는 자들이잖나.”
“어쩔 수 없는 일이로군요. 저들이 갑자기 뿅!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면 모를까.”
“앞으로 손해가 막심할 거다. 내가 보기에 병참 문제로 인해 이번 원정은 실패할 거고 몇 년에 걸쳐서 철저히 준비해서 원정을 또 해야 일이 끝날 것 같군.”
소르칸은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고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뿅’이라는 소리를 냈던 알타이의 뒤통수를 후려치면서 말했다.
“뿅! 하고 와인 병마개 따는 소리 좀 내지 마라. 아무튼 손해만 보고 실리는 별로 얻을 수 없는 기나긴 전쟁을 또다시 준비하라고.”
소르칸은 자신들의 삶을 안정화시킨 미래의 칸, 링컨의 얼굴을 떠올리며 막사로 돌아갔다. 그라면 아주 신비한 방법으로 이번 사태를 막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 * *
라라미 조약 시절에 집결한 경험이 있는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은 처음에는 백인들의 졸개, 타타르 부족을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하였다.
여기에 아파치 부족의 영토에서 도주한 전사들이 합류한 덕분에 일만 명의 군세를 만들었다. 그 군대는 단 한 번의 전면전에서 비참하게 붕괴하였다.
“놈들은 악마입니다! 전 그런 놈들은 본 적이 없습니다!”
“차라리 알몸으로 몽둥이 하나만 들고 곰을 상대하고 말지요!”
부상자들은 자신들이 선출한 전투추장 하얀 방패를 바라보며 전투의 참상을 말하였다. 이들은 지형을 잘 활용하여 상대를 포위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몇 배에 달하는 인원으로 포위하였지만 비참하게 패배하였다. 하얀 방패는 이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 시신들을 살펴보았다.
“내가 수많은 백인들을 상대해 보았지만 이토록 잔혹한 놈들은 본 적이 없군.”
기껏해야 한 손으로 총을 쏘아대는 미국 기병대와 달리 상대는 두 손을 한자리에 모아 권총을 난사했다. 이 난사로 인체의 정중선에 위치한 약점을 철저히 공략하였다.
두 발의 총알이 거의 같은 자리에 박힌 시신은 흔하게 보였다. 간혹 몸놀림을 포기한 대신 두툼한 곰 가죽으로 총탄을 막으려던 전사들은 다섯 발의 총알을 맞고 즉사하였다.
하얀 방패와 추장들이 보기에는 상대를 죽이기 위한 최선의 수단만 사용하는 놈들이다. 한 추장은 총알이 지나간 시신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이 자들은 사람인가 아니면 다섯 개의 손이 달린 괴물인가.”
“아무리 보아도 사람의 거죽을 뒤집어쓴 괴물 같습니다. 아니라면 사람을 가장 확실히 죽이기 위해 살아가는 자들일지도 모르지요.”
“정체가 무엇이건 간에 둘 다 끔찍하군. 그러면 피해 현황은 어떠한가?”
“적 칠십여 명을 죽인 대가로 사백 명이 죽고 이백여 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다른 추장들이 비통해하는 사이 하얀 방패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진영을 바라보았다. 정보를 종합해 보면 적의 총인원은 칠천여 명이 조금 안 된다 하였다.
개중 1%, 고작 70명을 죽이고 600명이 죽거나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몸이 되었다. 하얀 방패는 손을 꼽아가며 대평원에 소속된 여덟 부족의 전사 수를 추산하고 말하였다.
“우리 대평원의 장정들을 모조리 박박 긁어내면 이만 명 정도이지. 그러면 적들의 삼 분의 일을 죽이고 나면 평원의 모든 장정의 씨가 마른다는 소리 아닌가.”
“그 사람들을 모두 데려올 수 없지 않습니까? 백인들이 우리 영토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이 이상 병력을 빼 오면 조약을 어기고 멋대로 침공할 겁니다.”
“이미 조약을 거의 다 어겨 놓은 상황 아닌가. 침공할 것이 확실하군.”
어느 쪽으로 보아도 대평원 부족들의 미래는 없었다. 이대로 타타르라는 부족을 내버려 두면 아파치의 영토를 통합하고 양면으로 포위망을 형성해 자신들을 토벌하리라.
그렇다고 전투를 치러보았자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든 병력을 동원해도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힐 뿐 토벌당하는 쪽은 자신들이었다.
하얀 방패는 자신들의 진영에서 어떻게든 사기를 끌어올리려 하는 아파치 전사들을 노려보았다. 그들의 증언대로라면 적은 파괴의 화신이며 모든 원주민을 몰살하려 하였다.
“애초에 인과관계를 확인하고 적에게 정중한 서신을 보냈어야 하는데.”
“아파치 놈들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았습니다.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놈들이더군요.”
말 그대로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든 격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얀 방패는 호기롭게 나서 부족의 운명을 시궁창으로 몰아넣은 자신의 판단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였다.
“하얀 방패 추장님! 백인들이 공식 문서를 보내왔습니다!”
“하얀 놈들이 또다시 우리의 삶에 간섭하려 하는 것 같군.”
하얀 방패는 자신의 천막으로 들어가 서신을 펴 보았다. 예전의 라라미 조약을 맺을 당시에는 자신들의 땅을 ‘통행하는 권리’를 아무것도 모르고 5만 달러의 헐값에 팔아치웠다.
이번에도 연방 정부 입장에서는 단 한 톨의 손해도 보지 않고 자신들만 멍에를 짊어질 제안이 도착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서신은 유감의 뜻을 표명하였다.
-연방 정부는 이번 아파치 부족 토벌 사건에 휘말리게 된 대평원의 여덟 부족에게 깊은 유감의 뜻을 전합니다. 저희는 오로지 아파치 부족에 대한 토벌을 허가하였을 뿐입니다.
-기밀 유지를 위해 협정 당사자인 대평원의 여덟 부족에게 어떠한 정보도 보내드리지 않은 점 또한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마 이 서신이 도착할 시기에는 여러분의 영토 인근까지 토벌대가 접근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토벌대와 마찰을 일으키지 말고 가급적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해 주십시오.
하얀 방패는 눈에 핏발을 세우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서신을 찢어발기려 하였다. 지금까지 읽은 내용을 종합하자면 ‘늦게 알려줘서 미안하지만 아무튼 몸조심해라.’라는 변명이다.
그러나 다음 내용을 읽자 하얀 방패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연방 정부가 뭘 먹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들은 나름대로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혹여나 토벌대와의 분쟁이 벌어졌을 경우 여러분의 목숨을 구제할 방법이 있습니다.
-현재 발의되어 비준(批准)을 위한 최종 심사에 들어가는 미합중국 수정헌법 제13, 14조에 의거하여 여러분이 시민권을 얻을 경우 토벌 대상이 아닙니다.
-전쟁 상황이 아닌 한 시민은 법의 절차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에게 시민권과 함께 또 다른 권리, 여러분의 땅을 구매할 자금도 드리겠습니다.
-우리 연방 정부는 이번 협정의 보상으로 20만 달러의 자금을 1년 이내에 제공할 것이며, 추후 20년 만기 연이율 3%의 채권을 30만 달러까지 제공해 드릴 것입니다.
하얀 방패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전 라라미 조약에 의거하면 그 드넓은 대평원을 마음대로 헤집고 다니는 비용으로 50년 동안 5만 달러, 연간 1천 달러의 푼돈을 쥐여주었다.
미합중국의 시민으로 합류하면 전쟁을 피할 길도 만들어주며 20만 달러의 돈을 즉각 제공하겠다고 하였다. 이 정도 돈이라면 반발하는 부족을 사들일 정도의 자금이나 마찬가지였다.
“평상시라면 서신을 찢어버렸겠지. 지금 이걸 안 받아들이면 바보 천치로군.”
평상시라면 하얀 방패는 물론이고 대평원의 모든 부족이 제안에 반대하여 결사 항전을 택했으리라. 그러나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에 모두가 멸절당하리라.
무력으로 해결하려 해도 이미 한 번의 전투로 격차가 증명되었다. 몽골계 미국인들이 대평원으로 서서히 진격하는 가운데 각 부족들은 연방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