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276화 (246/345)

276화

22장 8화 바늘(1)

광주 의원의 대표격인 황기영은 휴일을 맞이하여 통역관과 같이 광주 시내를 돌아다녔다. 통역관은 조-청 전쟁 이후 조선에 정착한 요리사였다.

둘 다 모자를 쓰고 다니는 대한제국의 풍습을 존중해 패랭이를 머리에 쓴 채로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황기영은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고 궁금한 듯이 질문을 하였다.

“생각 외로 이 나라 사람들이 별 말을 안 하는구려.”

“저희 가족과 같은 동네 사람들이 여기에 정착하고 십오 년이 넘게 지났지 않습니까. 이제는 이웃사촌 소리가 저절로 나옵니다.”

예전에 조선에 흩뿌려진 요동 지역의 청나라 사람들은 하인 겸 통역관으로 고용되어 의원들과 함께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가진 기술을 이용하여 정착에 성공하였다.

“다만 문제가 좀 있기는 하군요.”

“문제라? 저 객잔은 분명 자네가 운영하는 객잔인데…….”

광주 시내에 있는 음식점에는 황기영과 함께한 통역관과 똑 닮은 아들이 요리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의 말이 서툰 통역관과 달리 언어가 아주 유창하였다.

-자장면 곱빼기에 사리 잔뜩 얹어서 나왔습니다!

“저게 문제지요. 며느리를 참한 사람을 고르다 보니 대한 사람을 고르게 되었고 자식 교육도 대한에서 시키게 되었습니다.”

“이미 새 나라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큰 문제는 아닌 것 같군.”

“그렇긴 합니다만 아비 입장에서 가슴이 먹먹해지기는 합니다. 우리 가문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만 그 뿌리를 찾아와도 말과 습속이 통하지 아니할 것 같군요.”

박현상의 정책은 청나라에서 이주민을 대한제국의 시민으로 변질시켰다. 그나마 어린 시절을 요동에서 보낸 세대조차도 자신의 정체성을 간신히 잡고 있는 지경이다.

심지어 다음 세대가 성장하면 의무 교육을 받게 되고 더욱 많은 세월이 흘러 ‘산동에 본적과 조상을 둔 대한제국인’으로 변질되리라.

황기영은 자신의 아들을 떠올리며 말하였다.

“내가 이래서 망명을 올 생각을 접어두었지. 아무리 그래도 고향은 지켜야 하지 않겠나.”

“옳은 말이지요. 저를 비롯한 당시 사람들이야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로 거부를 못 했지만요.”

“그러니 이 나라의 문물을 가져가 고향을 더욱 부흥시킬 거라네.”

대한제국의 신문물 중 황기영의 마음에 와 닿은 것은 바로 신문이었다. 대한제국은 유럽으로 유학을 다녀온 양반가 자제들이 신문사를 차리는 경우가 흔했다.

정부 기관인 박문국(博文局)에서 만들어 낸 한성주보, 4쪽으로 양을 줄여서 수도권의 간단한 기사만 올리는 매일신문 등등. 전국적으로 따지면 20종류가 넘는 신문이 있었다.

이러한 신문 대다수는 널리 읽히고 판매 부수를 늘리기 위해 국한문 병용(倂用)으로 가급적 한글 비율을 늘렸다. 반면 고리타분한 옛 계층을 위한 신문도 존재하였다.

“황예신보를 있는 대로 얻을 수 있겠는가?”

잡화점 앞에서 신문을 바라보던 황기영은 자신이 찾는 신문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통역관에게 이야기를 하였다. 통역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주인을 불렀다.

“거기 주인장, 황예신보 있소?”

“그 신문이 있기는 하던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바로 황예(皇裔 - 황제의 옷자락)신보라는 순 한문 신문이었다. 발행 시기마저도 음력 7일, 21일로 양력에 따르지 않는 오로지 옛사람을 위한 신문이었다.

이 신문은 한자 어휘에 능숙한 청나라 의원들이 어렵사리 읽을 수 있었다. 황기영은 광주 시내를 샅샅이 살펴 오래 묵은 황예신보 세 부를 사들이고는 배움의 중요성을 느꼈다.

“불편해서라도 대한의 글을 배우긴 해야 할 것 같은데.”

고리타분한 옛사람만 읽는 순 한문 신문이지만 청나라 의원들에게는 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황기영은 최신간의 표지를 확인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본 신문은 정사년 임자월 무술일의 기사가 허위 기사임을 공표하고 벌금을 납부했습니다.>

<본 신문은 작년 말엽의 기사에서 정부 고관과 사기업 간의 뇌물수수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였습니다. 이 기사는 잘못된 것이며…….>

대한제국의 언론 규제는 기밀 정보에 대한 검열과 허위 기사에 대한 처벌이 전부였다. 벌금과 신문 1면 전체를 채운 사과 보도를 확인한 황기영은 저절로 쓴웃음을 지었다.

“필화(筆禍 - 글로 말미암은 화)를 밥 먹듯이 하는 어느 조정과는 천지차이로군. 고관대작의 진상에 대해 논하기만 하여도 목이 줄줄이 잘렸을 터인데 거짓을 논하고도 살아남아?”

의원들은 강의가 중단되는 휴일이라 삼삼오오 모여 자신들이 배운 의술을 정리하고 복습하는 시간을 가졌다. 서로 머리가 아파오면 대련을 시작하고 몸이 아프면 서적을 읽어댔다.

“형님 오셨소? 이번에도 신문을 사오셨구려?”

“그렇긴 하지. 그나저나 자네는 왜 그리 눈이 부어 있나?”

“이 눈 말이오? 권투라는 새로운 무술을 배우다가 이 꼴이 되었지.”

광주 출신 의원들은 나름 무술에 소질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있어 권투라는 무술은 양손을 사용하는 제한이 있을 뿐 현대의 기술이 접목된 독창적 무술이었다.

“형님은 못 배우시는 몸이라 이 아우가 배웠소. 놀랍게도 이 무술은 온 몸의 힘을 주먹에 집중하고 체간(體幹 - 중심)까지 뒤흔들며 전력으로 주먹질을 하더군.”

“그러다가 주먹을 날린 사람의 손이 먼저 부러질 것인데?”

“그래서 이 두툼한 장갑을 끼고 무술을 하는 거요. 말 그대로 장갑을 껴서 더 강해지지.”

황기영은 서로 주먹을 휘두르며 기술을 익히는 두 의원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 의원의 주먹이 코에 쑤셔 박히며 대번에 코피가 터졌다.

“아무리 보아도 저 친구 비골에 금이 갔군. 치료할 수 있겠나?”

“물론, 우리가 의원인데 저 정도를 못 하려고.”

“교보재가 저절로 생기는군. 아주 좋은 일이야.”

광주 출신 의원들에게 대한제국은 모든 문물을 새로 받아들여 더욱 개선할 수 있는 낙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광주 지역 의원 가운데 네 명이나 망명을 하였다.

“난 여기에 뼈를 묻을 생각은 없지만 비홍이는 여기서 교육이나 좀 시켜볼까.”

황기영에게는 아버지가 피를 흘리며 지켜낸 광주에 머무를 의무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망명을 오지는 않더라도 자식 교육은 대한제국을 통해 시켜 볼 의향이 있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자네도 그 생각을 했다고? 하긴 광주 말고 다른 고장에 가면 아편이나 피워대는데.”

“그런 썩은 땅에서 출세해 봤자 뇌물 먹이기나 아편 피우는 재주만 익히겠지.”

청나라 의원들은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한양 외곽의 강당에 모여 회합을 하였다. 박현상이 제시한 명분이야 교육이 미비할 수도 있으니 이를 확인하라는 뜻이었다.

그 명분과 달리 대부분의 청나라 의원들은 지난 두 달 동안 청나라 내부의 현실. 자신들이 모르고 있거나 알더라도 넘겨짚고 있던 잔혹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제 세 번째 회합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황기영은 고통을 호소하며 코뼈를 맞추는 동료 의원을 지켜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나라의 내장을 다 들어내지 않는 한 자식 교육은 외국에서 시켜야 할 것 같아.”

“그러고 보니 이틀 뒤가 회합이지. 그동안 얼마나 정보를 모았을까?”

“모르지만 아마 크게 실망할 것 같아.”

황기영은 신문 기사의 비평을 살펴보았다. 그 자리에는 자신들이 아편을 퍼트릴지도 모르니 경계하라는 논평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자신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청나라는 이미 아편을 전 세계에 퍼트리는 제 2의 영국이 되어버렸다.

아마 이틀 뒤에 있을 회합에서 이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리라.

* * *

이틀 뒤, 전국에 퍼져서 교육을 받는 청나라 의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세 번째 정기 회합이며 지난 회합에서 헤어질 때 각 지역의 상세에 대해 논하기로 이야기를 해 두었다.

“다들 지금까지 입수한 정보에 대해 논해봅시다. 아편이 얼마나 퍼졌소?”

광주에서 올라온 의원들이 운을 떼자 다른 지역의 의원들 모두가 눈을 굴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들 가운데 한 의원이 쭈뼛거리면서 의견을 내놓았다.

“안 퍼진 지역이 없소. 그냥 광주를 제외하고 다 퍼졌다고 보면 되겠지.”

“그쪽 사람들이 오기 전에 미리 도착해 이리저리 대화를 나눠보았는데 없는 지역이 없더군.”

황기영을 비롯하여 황용으로 활약한 의원들은 눈을 내리깔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더 말해보라 손짓을 하였다.

“나는 우리 지역에 드나드는 놈들 때문에 아편이 퍼진 줄 알았는데.”

“그렇긴 하지, 예전부터 화란(네덜란드) 상인이 오가는 지역이라 물산이 모이기 마련 아닌가. 거기다가 광주 일대가 불란서에게 양도되어서 아편도 이쪽으로 오가는 줄 알았어.”

일본에 아편을 수출한 전적이 있는 복건성 출신 의원들이 어떻게든 변명을 하였다. 그러자 바로 옆 지역인 절강성 의원들이 이 점을 파고들며 맹렬히 비난하였다.

“그걸 자네들이 할 말이야? 복주(福州) 일대에서 왜국에 아편을 수출하였잖아? 대체 복주 놈들은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네놈들도 마찬가지잖아! 조차지에 아편을 들여놓으려는 놈들은 절강(浙江) 놈들 아니야?”

“뭐가 잘났다고 싸우고 자빠져 있어! 의원으로서 자존심도 없나?”

“양귀비를 길러서 퍼트리는 놈들이 말이 많네. 입 다물고 반성이나 하쇼!”

그런 노력도 허사였다. 의원들은 한 번 입이 열리자 서로 삿대질을 하며 헐뜯고 악의적인 비난을 하며 감정을 마구 터트려 댔다.

“그럼 댁들은! 댁들은 양귀비를 안 길러? 기차 노선이 있는 곳 주변이 다 양귀비밭이라며!”

“댁이 지난번에 땅 좀 만지는 부호 가문이라 했잖아! 그럼 책임이 더 큰 거 아니야?”

“그 책임 때문에 돈을 얼마나 많이 뜯겼는데! 기차노선을 증설한다고 내가…….”

이미 광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아편이 퍼져나간 상황이었다. 지역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본래 역사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대규모 재배가 이루어졌다.

어차피 다 죄를 지은 입장이라 이야기의 주제는 기차 노선으로 변하였다. 이미 대한제국에 와서 기차 맛을 본 의원들은 자신들의 지역에 있는 ‘청나라 기차’의 이야기를 하였다.

“애초에 그게 기차냐! 난 지금까지 기차를 사람이 끄는 물건인 줄 알았다!”

“내 말이. 아니 나무로 철로를 대충 비슷하게 흉내 내고 우마차나 사람이 수레를 끌어?”

“그 정도면 양반이지. 난 기차노선을 증설하는 작업을 두 눈으로 보았다, 이 말이야.”

“기차 노선을 증설했다? 그게 말이나 되오?”

부패한 청나라 관료들은 본래 역사와 동일한 방법으로 기차 노선을 ‘증설’하였다. 정확히는 토목공사 예산과 기차 설비 예산을 받고 토목공사를 실시했다.

현장에 나가 부상자를 치료한 의원은 혀를 차며 당시의 일을 이야기했다.

“물론 별장 한 채 짓고 경관으로 삼을 호수도 하나 만들고 산도 좀 깎아서 꽃나무를 심기도 하였지. 중요한 건 일단 기차 노선이 완공은 되었어.”

“혹시 완공되고 나서 철로를 뜯어갔소? 아니면 어떻게 착복이라도 하였소?”

“그건 양반이지, 소음이 심해서 소가 피를 토하고 산이 메마른다고 항의가 들어왔어. 제대로 만든 철도가 해체되고 그 자리에는 어느새 소와 말 그리고 사람이 수레를 끌고 다니더군.”

본래 역사의 청나라도 비슷한 행위를 하였다. 자금을 들여 철도를 설치하고 여러 항의를 받아 철도를 바로 해체한다. 설령 철도가 있어도 소음 문제로 시비를 걸어 금지시켰다.

결국 처음 설치된 철도는 2년 만에 해체, 철도 개설 19년 차에 설치된 최초의 자력 철도는 기관차 대신 소와 말이 끌고 다니는 신세로 전락하기까지 하였다.

그나마 도광제가 조선에게 호되게 당한 이후 설립한 철도만 일부 정상 가동되었다. 정확히는 대한제국의 기술력을 도입한 노선에 한정하여 올바로 작동하는 상황이었다.

“어쩌다가 나라 꼴이 이렇게 개판이 되었을까?”

“본래 조선이 우리보다 못 사는 동네였잖아. 내 조부님께서 육십여 년 전에 조선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당시에는 한양도성도 비좁기 짝이 없는 동네라 하였지.”

“그럼 뭘 해, 지금 북경보다 한양이 훨씬 더 나은 고장인데.”

예전이라면 어느 누구도 현실에 대해 불만만 가질 뿐 개선점을 논하지 못하였다. 각 지방에 고립되어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 알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이 중심을 깨트려 버렸다. 신문물이 가득하고 이 신문물을 통해 모두가 이득을 보는 새로운 세상.

그와 달리 청나라는 부패로 인하여 변화가 없었다.

“서양에서 들여온 문물로 이득을 보는 게 아니고 뱃속을 챙기려 하니 이 꼴이 되었겠지. 철도가 소를 죽이고 산을 메마르게 해? 그러면 이 나라의 강산은 왜 이리 푸른데?”

“윗대가리들이 썩어 문드러졌으니 이 꼴이 나지.”

“그 윗대가리들에게서 단물을 받아먹던 양반들이 말이 많네.”

“앞으로는 안 그럴 거라니까! 내 고향부터 조금이라도 개선하려 한다!”

지금까지는 잘 모르고 있던 나라의 현실이 대화를 나눌 때마다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자신만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 모두가 부패한 나라로 인해 고통을 겪었다.

그나마 세상이 변할 줄 알았지만 변한 것이라고는 지방에 착복을 일삼는 공장이 설립되고 양귀비가 퍼진 것이 전부였다.

그러던 중 한 의원이 의문을 품고 광주 일대의 의원들에게 질문을 하였다.

“광주의 의원나리들에게 묻겠소이다. 댁들이랑 같이 싸운 객가들은 뭘 하오?”

황기영은 질문을 듣자마자 불쾌한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그는 자신들에게 혜택도 주지 않는 배은망덕한 놈들에 대해 논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말하였다.

“뭘 하긴. 조정의 부패한 신료들의 뒤나 닦아주면서 권력의 맛을 보고 있겠지.”

“아닌 것 같던데? 우리 지역에 양귀비를 퍼트린 놈들이 객가라는 소문을 들었어.”

“어? 자네 지역도 그런 말이 돌아다녔나? 난 직접 양귀비 씨앗을 주던데?”

황기영은 물론이고 광주 일대 의원들의 뱃속이 분노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객가들이 자신을 배신하고 어떠한 혜택도 주지 않았으니 자신들이 뒤통수를 좀 세게 맞은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청나라 전역에 양귀비를 퍼트려 아편을 재배하게 하였다면, 그로 인하여 아편 중독자가 판을 치고 세상 만국의 사람들이 이를 아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래도 황기영을 비롯한 향용들은 자신과 같이 피를 흘린 객가들을 믿고 있었다. 최소한 사람 같지도 않은 얼뜨기라는 믿음이며 사람 이하의 짐승은 아니라는 최소한의 신뢰였다.

“우리가 한자리에 모였으니 조정에 이야기라도 해 봐야겠지. 이 나라의 외교 담당자를 불러서 정말 객가들이 양귀비를 퍼트렸는지 그 진위라도 물어보자고.”

심호흡을 몇 번이고 한 황기영은 담당자에게 요청을 하여 도성의 외부(外部)에 연락을 넣었다.

제발 이 소문이 진실이 아니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며 임칙서에게 기도를 올리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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