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21장 10화 옛 가르침(2)
한가위를 맞이하여 은찬이와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학생들이 한양으로 돌아왔다. 녀석은 내 예상대로 고작 6개월을 머물렀다고 사람이 변해 있었다.
“부친께 인사를 올립니다! 소자 쌍성자의 사관학교 분원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네가 고생이 많은 것 같구나. 생각대로 일이 잘되더냐?”
“하나도 안 되었습니다! 제가 헛똑똑이요 책상물림 신세임을 다시금 체험하였습니다!”
녀석이 책상물림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 난 엄연히 서류작업을 하는 외교관이지만 공식적으로 젊은 시절에는 런던 빈민가에서 험난한 생활을 하였다.
내 정책에서 백성을 보호하고 아끼는 방향성은 모두 이 험난한 생활 때문이라 인식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은찬이 옆에서 같이 인사를 올리고 우렁찬 목소리로 말하였다.
“형님과 함께 러시아 이주민들을 돌보았습니다. 당시에는 너무나 험난한 일이었지만 태상황 폐하께서 사재를 모두 털어내시어 사람들의 목숨을 건졌지요!”
“뭐? 태상황 폐하께서 사재를 모두 털어내?”
“수천 명의 사람을 동원하고 이들이 먹고살 기반을 마련해 주셨는데요.”
이토 히로부미의 말을 듣고 두 가지 문제를 발견했다. 첫 번째로 순조의 재산은 고작 수천 명의 사람을 동원하고 오만여 명의 이주민을 돌본다고 사라질 양이 아니다.
“말이 안 되는 소리로군. 태상황 폐하의 공식 재산은 환전 가능한 양만 따져도 이천오백만 냥이요, 여기에 각종 토지와 채권 그리고 유전을 감안하면 오천만 냥이 넘어.”
“네? 그렇다 해도 일천여 명의 유생과 이들의 시중을 들어줄 하인들도 불렀는데요?”
고작 그 정도 쓴다고 사라질 자금이 아니다. 그래도 나라를 위해서 사용해 다행이기는 한데 좀 이상한 방식, 내 계산을 모조리 틀어버릴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버지, 태상황 폐하께서 저에게 내려주신 서신입니다.”
은찬이는 품속에 넣어둔 순조의 서신을 건네주었다. 이 서신을 읽자 북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올 지경이었다.
-내가 이주민을 보고 어여삐 여겨…….
장문의 편지에는 이주민을 알아서 돌볼 것이니 국가의 이득으로 만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미 조정에서는 러시아 이주민을 소작농으로 삼기 위해 이미 지원을 했는데 또 했다!
“예상보다 이주민의 도착이 빨라서 대처가 좀 늦은 감은 있기는 했지. 그래도 이건 아닌데.”
“네? 태상황 폐하의 은혜가 아닙니까!”
내 계획이 완전히 헝클어지는 신호였다. 역사에 수많은 변수가 생겨나 이를 예측하고 계산하였는데 순조라는 거대한 변수가 이 계산을 완전히 망쳐 버렸다.
러시아를 여러 갈래로 찢어버려 대한제국의 영향권 안에 두려는 계산 자체가 틀려먹게 되었다. 이 정도로 잘 대해주면 러시아 사람들이 뭔 일을 벌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내 어가를 헐어 이주민들에게 주었다. 새 어가를 만들면 어떠하겠나?
이주민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지원, 여기에 나이 많은 유생들을 엄선해 가르치는 유교 교육 및 각종 혜택. 심지어 적응이 끝나면 군대에 들여오겠다는 말까지 있었다.
내 원대한 계획인 동 시베리아 공화국의 괴뢰국화는 아예 물거품이 되었다. 오히려 러시아 이주민을 주축으로 하여 정말 공산혁명이 성공할 것 같은 조짐마저 보일 지경이다!
* * *
삼강습지의 추위는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하였다. 허리춤까지 물이 차오른 습지도 영하 25도가 넘는 혹한을 만나자 수렁이 아닌 진흙과 낙엽이 뒤섞인 빙판으로 탈바꿈했다.
이런 삼강습지에 수많은 사람들이 통나무집과 석유난로에 의지해 겨울을 지내고 있었다. 일본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은 추위에 약해 아예 문밖을 나서지 않을 지경이었다.
“장 서방, 날이 너무 춥지 않은가?”
나이 많은 유생은 콧수염에 달라붙은 서리를 녹이기 위해 입김을 뿜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옆에서 아예 서리가 달라붙은 두툼한 곰 가죽이 꿈틀거렸다.
“저야 이렇게 옷을 껴입어서 견딜 수 있습니다. 나리는 어떠하신지요?”
유생은 장 서방이 받은 지원에 대해 떠올렸다. 자신의 예상대로 조정에서는 이주민에 대한 기본 지원금을 지급해 주었다.
여기에 순조가 추가 지원을 하였다. 평상시에는 상상조차 못 할 곰 가죽을 통째로 갖옷으로 입더라도 어느 정도 여비가 남을 수준의 지원이리라.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다시금 확인한 유생은 싸늘한 겨울바람에 몸서리를 치며 말 위에 오르려 하였다.
“뼛속까지 추위가 스미는군. 그래도 배움을 청하는 이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가세.”
“잠시만 준비를 해두겠습니다. 따듯한 물을 담은 오줌보를 대령해 드리지요.”
유생은 장 서방이 오기 전 잠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한가위가 끝나고 북방으로 올라온 천여 명의 유생들은 한 달 동안 러시아어 회화를 배우고 철저한 준비를 마쳤다.
“참 순박한 사람들이 어찌 그런 험악한 일을 겪었는지.”
막 겨울의 혹한이 찾아올 무렵 나이 많은 유생들이 제자들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러시아 이주민들은 유생들의 차림새와 나이를 보고 귀족 출신 교사인 줄 알고 경계하였다.
그 경계는 유생들이 국가고시에 합격하였음을, 그리고 대학교에서 학문을 익혔다는 사실을 말하고 나서 사라졌다. 이후 경계가 사라지고 순박한 면모가 피어나왔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귀족 자제들의 가정교사가 되어야 할 사람들이 백성을 가르치는 꼴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학이라는 새 학문을 별다른 경계 없이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시간이 좀 남으면 수학, 지리학, 한글을 비롯한 다른 학문도 익혔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익힌 진도를 떠올리던 유생은 하인이 가져온 오줌보를 챙겨 들었다.
“나리! 여기 따듯한 물을 담은 오줌보입니다!”
“고맙네. 그럼 어서 움직이도록 하세.”
한 마리의 커다란 말과 두 명의 사람이 얼어붙은 습지를 가로질러 나아갔다. 유생이 타고 있는 말도 추위를 견디기 위해 두툼한 모피로 옷을 입혀두고 발에는 두툼한 짚신을 신겼다.
유생의 수염에 얼음이 다닥다닥 달라붙을 무렵 러시아 이주민들의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그 마을에서는 지붕 위에 내린 눈을 걷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스승님께서 오신다!
모든 마을 사람들이 작업을 중단하고 마을회관으로 모여들었다. 본래 러시아 농노들이 가지고 있던 농민 공동체인 미르를 그대로 적용하기 위한 장소였다.
마을회관 안에 비치된 석유난로 두 개에 기름이 들어가고 한참 뒤 불이 붙었다. 추위로 인해 걸쭉하게 얼어붙은 경유가 서서히 녹으면서 한기가 잦아들기 시작하였다.
“다들 겨울은 잘 지내고 있는가?”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어른도, 아이도 심지어 아녀자들도 배움을 위하여 마을회관에 모여들었다. 유생은 잠시 일손을 도운 적이 있던 의무교육 이상의 열정을 느끼며 교육을 시작하였다.
“때때로 배우고 익히니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오늘은 맹자의 구절을 논하여 보세나.”
삼강평야의 개척 과정에서 가장 흔한 자원은 목재와 석탄이었다. 특히나 질 좋은 역청탄이 생산되는 광산이 여럿 개척되어 이 두 개의 자원을 합쳐 가장 좋은 문물을 만들어냈다.
바로 역청탄에서 추출한 유황으로, 이를 다시 황산으로 만들어 분해한 펄프였다. 삼강평야의 남부인 쌍성자에는 이 막대한 양의 펄프를 사용하는 제지공장과 제본소가 설립되었다.
이 공장에서 순조가 대량 발주를 넣어 수많은 유학 서적을 러시아어로 번역해 인쇄하였다. 한 가족마다 유교 경전을 한 부씩 가지고 교재로 사용할 지경이었다.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나와 같은 사람도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느냐. 그러자 맹자가 말하길 가능하다 하였다…….”
배움이 부족한 러시아인을 위하여 최대한 말을 풀어 쓰고 대화문에 가깝게 해석한 경전이었다. 러시아 이주민들은 이 말을 듣고 글을 따라 읽으며 점차 언어를 배워나갔다.
한 구절의 낭독이 끝나고 뒤늦게 글을 더듬더듬 읽어가던 사람들도 낭송을 끝마쳤다. 유생은 고개를 들고 칠판에 분필 대신 물에 축인 분필 가루로 붓글씨를 쓰면서 말하였다.
“정치에 힘을 쓰고 백성을 평안하게 하면 자연히 천하가 왕을 따르게 되는 법이다. 이 방법을 모르면 올바른 스승을 두고 능력 있는 신하를 선별함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일전에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선왕은 종리춘을 왕후로 책봉하고 간신을 추방했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선별을 어찌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유교 경전의 한 구절이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차르에 대한 분노를 불태웠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순조는 유학자들에게 이런 기질을 완화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유학자들 입장에서도 이 요청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요와 순과 같이 능력이 부족한 왕이 다음 왕에게 선위(禪位)함이 마땅하며 피를 흘리는 혁명은 피해야 할 일이다.
“나라를 위해 일하는 이들이 맛난 음식을 먹고 좋은 집에 사는 것은 스스로의 권위 이전에 충실히 일하기 위한 기반이다. 간신은 축재를 일삼고 도를 넘어선 사치를 하는 법이지.”
“그 사치의 기준 또한 궁금합니다.”
“백성이 굶주려 먹거리를 찾아 사방을 떠도는 것이 기준이 아니겠느냐.”
질문과 답변이 끝나고 다시 가르침이 계속되었다. 러시아 이주민들은 다음 구절에 대해서도 질문을 하였다.
“군주가 신하를 수족처럼 여기면 신하는 군주를 자신의 몸처럼 여긴다, 군주가 신하를 쓰레기처럼 여기면 신하를 군주를 원수처럼 여긴다. 이 구절은 지극히 옳은 말이다.”
“그러하면 백성을 쓰레기처럼 여기는 군주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는 살펴봐야 할 것이다. 영락한 임금이 신하를 통솔하지 못하면 간신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마련이요, 간신이 임금의 뜻을 어기고 왜곡할 수 있다.”
이 가르침 또한 역성혁명을, 최소한 차르의 목을 베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어느 정도 자의적인 해석을 덧붙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해가 서서히 저물어 갈 무렵이 되었다. 유생은 책을 덮고 칠판에 물을 묻혀 글자를 지우며 마침 인사를 하였다.
“오늘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고 집에 돌아가서 복습하도록.”
“여부가 있겠습니까!”
“내일은 대한제국에서 건너온 천주교 신부가 미사를 집전해 내가 쉬는 날이지. 자네들은 정교회라는 분파를 믿고 있으나 그 분파의 신부는 이 나라에 없어서 못 불러왔음을 알아두게.”
미사 집전 소식을 듣자 모든 사람들이 순조에 대한 찬양과 주님의 자비하심을 논하며 성호를 그었다. 유생이 흐뭇한 표정으로 물러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아직 열기가 남은 마을회관에는 시베리아를 건너오며 혁명을 원하게 된 젊은 남자들과 참전용사들이 남게 되었다. 이들은 집기를 정리하고 탁자에 둘러앉아 여송연에 불을 붙였다.
“가르침이 조금 이상한 것 같지 않아? 왜 차르의 권위를 그토록 옹호할까.”
이들은 이미 글을 알고 있어 유교 경전을 미리 익힌 사람들이었다. 지금까지의 가르침을 자기가 해석하고 확인하여 어느 정도의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한없이 많은 은혜를 내린 순조의 가르침에는 ‘역성혁명’이 가급적 피해야 할 일이라 규정되어 있었다.
다들 궁금해하던 처지에 한 사람이 여송연을 빨아들인 다음 자신이 생각해 둔 답을 내놨다.
“나도 좀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가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서 차르의 목을 자르면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겠는가.”
“하긴, 차르 한 명만 죽인다고 수많은 차르의 친인척들을 다 죽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선생님들 입장도 생각해 봐. 임금을 모시는 처지에 다른 나라 임금을 죽이라 가르칠 수도 없잖아.”
담배 연기가 짙게 피어오르며 토론이 이어졌다. 이들에게 새로 주입된 유교의 지식과 마르크스가 전해준 공산주의 지식 그리고 러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서로 대립하였다.
“왕의 눈을 어지럽히는 간신배들이 넘쳐난다 하지 않았나. 이건 옳은 말이야.”
“귀족 놈들은 죄다 간신배를 넘어서서 개새끼들이지. 개새끼들도 그런 개새끼들이 없어.”
“그러고 보니 귀족에 대한 증오는 러시아에서 혁명을 논하는 동지들도 품고 있겠지?”
러시아 본토에 남은 저항군과 시베리아를 건너온 사람들의 공통점은 귀족에 대한 증오심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착취하던 지방 지주들과 중앙 귀족을 증오하였다.
차이점은 차르에 대한 증오심이었다. 험악한 시베리아를 건너오며 온갖 끔찍한 경험을 한 다음에야 조금씩 피어난 결과물이리라.
“생각해 보니 그렇긴 하군. 본토에 남아 있는 사람에게 차르의 목을 자르자고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데.”
“이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차르의 편을 들어 우리를 죽이려고 할 것 같아.”
“그놈의 새끼를 꼭 죽여서 효수하고 싶은데 왜 못 하게 하냐고!”
“고작 몇 개월 전까지는 차르의 은혜를 노래하며 시베리아를 통과하던 주제에 뭔 소리야.”
러시아 백성들에게 있어 차르는 살아 있는 신이며 영원히 군림해야 할 황제이다. 이는 2대 뒤의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시대에도 동등하게 적용되었다.
수많은 이들이 고통을 겪었음에도 이 신앙은 깨어지지 않았다. 이오시프 스탈린마저 어머니에게 ‘네가 차르를 죽이지 않았음을 맹세해라.’라는 질문을 받고 성호를 그어 맹세할 정도였다.
“하여튼 사람은 죽을 정도로 고생해 봐야 생각이 바뀐다니까!”
그토록 칭송받으며 영원히 권좌에 있어야 할 사람이 차르였다. 대대손손 이어진 믿음과 신뢰는 그토록 끔찍한 경험을 한 뒤에야 벗을 수 있는 멍에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쉽게 벗을 수 있는 멍에도 있었다. 바로 자신들을 착취하던 지방 귀족들에 대한 멍에였다.
“가만, 생각해 보면 귀족의 학살에는 대부분 동의할 것 맞지? 그럼 모든 귀족을 다 죽이고 차르만 살려두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기는. 시종 몇 명과 함께 궁전을 지키며…….”
이론상 가능한 일이기는 했다. 귀족을 모두 죽이고 공산주의 사상에 의거하여 민회를 개최해 권력을 대신한다. 그 과정에서 차르가 뭐라 말을 하건 민회로 나라를 경영하면 되리라.
차르가 할 수 있는 일은 러시아가 아닌 로마노프 황가의 대표로 살아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 이상 무언가를 하려면 무조건 민회의 동의를 거쳐야 하리라.
외국에서 군대를 들여오려 해도 귀족의 도움이 필요하다, 재산을 축적하려 해도 지방 지주들을 통해 수익을 거둬들여야 가능한 일이다.
“그럼 차르를 제외하고 모든 귀족을 죽이자고. 간신을 몰아내고 올바른 덕치(德治)를 이룩하자는 명분 정도면 다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유교의 명분으로도 옳은 일이며 생산 수단을 거머쥔 부르주아를 혁파하자는 공산주의의 논리로도 옳다. 심지어 러시아 민중에게도 어느 정도 먹힐 내용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백성의 저항이 없을 뿐 귀족의 저항이 생겨나리라. 한 남자는 코로 연기를 뿜다 재채기를 세차게 한 다음에 코웃음을 섞어가며 말하였다.
“그 작업이 어디 쉬운 일이야? 죄다 외국으로 도망가고, 친인척에게 몸을 의탁해서 아예 독립국을 만들 놈들도 사방에 넘쳐나는데?”
“그런 문제는 우리가 줄여나가면 충분하지. 중요한 것은 차르에 대한 복수요, 차르의 후손들이 대대로 궁전을 덥히는 인간 난로 신세가 되는 꼴이 보고 싶지 않나?”
고요히 열기를 뿜어내는 석유난로를 바라본 이주민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피어나왔다. 혁명은 반드시 완수되어야 하며 공산주의의 논리로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획득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차르의 목을 베지 않을 뿐, 그의 모든 권력을 빼앗고 오로지 상징물로서 남겨두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모든 이들의 위에서 군림하던 차르가 백성의 눈치를 보고, 백성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재롱을 부리는 모습이라.”
“죽일 수 없으면 모든 것을 빼앗아 버려야겠지. 그 정도는 본토에서 저항하는 사람들도 받아들일 거야. 오히려 우리가 그들을 속일 수 있겠지.”
“하긴, 귀족들을 몇이나 죽이건 괜찮을 거야. 농노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귀족 죽이기에는 기꺼이 동조하지 않겠나.”
온건 혁명가와 급진 혁명 사이의 중재점이 유학으로 인하여 완성되었다. 서로 손을 맞댄 이주민들은 다음으로 할 일을 스스로 깨우치기 시작하였다.
“모든 귀족의 목을 베거나 망명시키려면 압도적인 힘이 필요해. 특히나 귀족의 군대와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고.”
“그 힘을 어디서 찾을지 이미 생각해 두었어. 전에 선생님을 모시다가 대한제국이 조만간 청나라와 전쟁을 또 벌일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그러니 이런 군사시설을 마련해 두었겠지. 대한제국에 입대하여 용병으로 활약하고, 신병기와 새로운 전술을 모조리 익혀 혁명에 활용하면 더 좋을 것 같군.”
복수심에 불타는 참전 용사와 젊은 남성들이 손을 합치고 환호성을 질렀다. 차르를 제외한 모든 러시아 귀족을 몰아내기 위한 대혁명에 필요한 모든 것이 이 장소에 있었다.
“먼저 동티단이라는 단체에 가입하자고. 대한제국의 태상황께서 사병으로 부리는 단체인데 여기서 신뢰를 얻고 군대에 입대하면 될 거야.”
“그거 좋은 생각이군. 그렇지 않아도 이 회관과 마을을 지어준 사람들 아닌가!”
날이 풀릴 무렵, 쌍성자에서 수많은 물자를 준비하던 동티단에 오천여 명의 남성들이 가입을 요청하였다. 이들은 동티단에서 경력을 쌓고 문화를 배워 대한제국군에 입대할 준비를 갖춰 나갔다.